니체는 그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후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초인적인 그러한 점에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고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요즘에 해석되어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적 평가는 너무 인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거로는 아래에 출처를 밝힙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참고로 니체에 대한 글을 연결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