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4월 28, 2005

신명(神名)에 대하여 - 자존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성경해석



하나님의 이름(神名)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을 어떤 분님이 언급하셔서 한번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말씀중에 '흠...그러니깐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분이 존재하심이 확실,100%확실하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함에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함을 나눔이 필요할 것같다는 중심에서 재고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에서 일관하며 합리성 자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견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합리성으로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계시와 그에 따른 합리적 사상적 입장이 절묘하게 합당하게 나타나는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적 판단의 선별되어진 좀더 정확히 특별영감되어진 이성적 산물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합리성에서도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합리성이 있음과 그것의 합당함과 선함도 같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중세적 개념에서의 병행적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또는 야웨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정당함을 읽어내고 있는 학자는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다.(각주1) 그는 성경신학에서 출 3:14절을 읽는 방법의 여러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히브리어 문구는 히브리어 '독도'법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시시하며 여러 해석방법이 있는 가운데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라고 함 즉 독도법에 따른 해석이 있다고 하여도 그중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다른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만약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해석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상대적 해석으로 동의적 차원을 말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말이다(각주2).

이것이 과연 성경해석에서 마땅하게 취할 해석적 당위성을 의식하며 합당하게 선택한다고 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체적 해석과 용납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의 불확실성을 넘어 용납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도 어느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생각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해석적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해석을 취함에 있어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급한 것과 같이 출 3:14절에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말하는 것은 개연적인 사실을 말할뿐이라는 식의 언급은 기각되어진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명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비평학의 기본이며 또한 현대신학에서의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명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계시의 정당한 사실을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핑계치 못한다는 주의 말씀하심의 증거적인 것임을 밝히 말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불가지론 속에서 개연적 당위성만 따르고 있는가운데서의 책망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해석과 그 취사선택에 있어서도 그차제적 정당함을 취하는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건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변론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임의 문제이고 그것이 너무나 합당함에 대한 변론일뿐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이신 자존의 하나님 야웨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합당히 영광을 받으실 믿음의 주이심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믿게 하심을 증거한다.






성경의 자증과 보편성(출 3:14 해석과 성경의 보편성이해글)

그리고 참고로 속칭 '여호와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기 때문이단이다








각주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356p.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357p.



각주2)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당위성이 자증에 따른 것임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어떤 특정 견해가 합리적인 측면의 백과사전적 동의적 당위성을 아무리 갖춘다고 하여도, 자증에 따른 해석 이것이 그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인하여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면, 그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해석' 그 해석의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는 실존적 그 성격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비판적 입장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견해들도 전자의 해석과는 달리, 스스로 그 정당함을 주장할 수 없는 해석과 납득 당위성에 따라서 전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인식이 상대적 고립적 배타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메타적 성도의 인식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원적 분석에서 히브리어 자음과 모음이 같이 쓰여지지 않던 시대와 맛소라 학파의 노력에 따라 '야훼'라는 성경전승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임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만을 가질 뿐 진정한 비판으로서의 정당함과 그것을 납득해야 할 당위성을 그 해석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적 동의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비로소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의 재가를 받은 상대적인 측면을 상대적인 어원분석 주관적 어원분석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그 성격의 특성과 그에 따른 범주에 대하여서 전혀 재고가 없는 것으로 그 비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히 나타내신다고 함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임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 합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함이 정당한 인식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 스스로 자기 계시형식으로서 선택하신 것임을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대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판단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성이 합리성 그 자체에서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출애굽기 3:14절 해석이라는 합리성 자체도 모순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미 그 모순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판단까지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함은 합리성 그 자체적 실존에 본래적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비합리성을 구별하여서 합리성의 실존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메타인식이라고 하는 합리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도움말

도움말1 믿음이라고 함을 좀 제한애서 용납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명에서 파생되는 용납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14:39]

도움말2 믿음은 본질적으로 증명의 사실과의 파생적 관계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변증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에 대한 증거자체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고 함에 대한 부질없는 것에 대한 변명의 형태를 띤 증거로서의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14:44]

도움말3 자존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기 본문의 신명(神名)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해석적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도록 하심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15:04]

도움말4 성경에서 셈의 장막에 야벳족속이 거한다는 말씀은 이처럼 이름을 기반으로 한 실제론적 입장의 사상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신앙과 신학방향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4:51]

도움말5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따른 것은,니체의 메타인식의 증식과는 달리, 성도들의 메타인식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다. 즉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합당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비판의 영역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신앙의 사실을 말함과 그것의 정당함과 절대의 보편성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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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5, 2005

반기독교 선언에 대한 답변

comment : 읽기전 참고글 '반 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의 간략한 해설

서론

개인적으로 작성한 분들과 대화를 거의 해본 가운데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답변하지 못하신 분들중에서 기독교에 대하여서 반대 선언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유감스럽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선언문이라고하면 공감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것에 있어서 반론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답변하지 못한다면 상식적으로도 피해의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다고 함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이미 작성한 자들과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이미 답변되어지고 또한 그들이 답변하지 못한 내용을 언급함에 있어서 몇가지 분명하게 답변을 해두는 것이 참된 정신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되어질 것으로 여겨서 반론되어진 것들을 몇가지 지적하면서 전반적인 성립되어질 수 없는 글이라고 함에 대한 당위성을 보이도록 한다.


본론


선언문 인용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답변

먼저 사용하는 용어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임의성을 띠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나가 의심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임의적 동의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그 보편성이 있음에 대한 동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절대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상식적인 보편이라는 것이 절대의 보편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신의 속성으로써 절대자라고 하는 자의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상식적인 보편으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이 글쓴 자들의 보편관이 편협하다고 하는 것과 성립의 당위성이 임의적으로 세워있으며 절대의 판단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이미 기각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이하의 비판에서도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보편으로써 임의적인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을 상정하여서 특수하다는 형태적 개념만의 정의로써의 기독교의 사상적인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하게 편협한 또한 보편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써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편협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


답변

한마디로 문제제기라고 함이 성립되어질 수 없는 편협하고 당위성이 없는 전제라고 함에서 기각되어질 수 있는 이해의 차원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언급인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라는 언급은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특수성을 다룬다고 할 때에는 상식적으로도 그 특수성이라고 함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상적 비교를 바로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러한 개체적인 특성을 파악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보편적 인식적용이라고 하는 것은 일그러진 보편의식으로 상식적으로도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성과 뒤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적 보편성이해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라는 한 단체적 종교적 개체로서 특수성을 말할 수 있고 여러가지 특수성 중에 하나라는 개념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상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체적 특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편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보편성이다 즉 상대적인 측면에서 있게 되어지는 보편성의 시비가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범주에서 상정되어진 것이고 결코 절대의 범주와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상대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보편성은 자존의 절대라는 개념으로써 상대적인 동정적 당위성에 재가를 부여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그러한 절대 보편성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에서 실존의 실재의 실제적인 자기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현상적 개념으로써 자신의 절대적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내심에 절대적 보편성과 자기 정당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 상대적 보편에서 절대를 판단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분별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당위성 모두를 모을 수 있다고 하여더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적인 범주를 판단할 당위성을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가운데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편을 말하면서도 보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 입장에서는 이미 그 합리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사고는 결여되었다.


이상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되었다는 것과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인식의 기본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인식체의 인식으로써의 이상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판단적 오류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강요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러한 것도 믿지 않아지는 자들의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개연적인 당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러한 상식보편에서의 판단 당위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함이 상식적인 당위성에 그나마 인정되어질 수 있는 당위성이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 상식보편에서는 그 존재의 있고 없음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과 상식적인 존재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적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식보편의 상대적인 판단의 합리성의 판단 또한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상황적 다원적 개념을 고려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개체적 특수성이라고 함과 그 자체적 정당함을 바르게 이해하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을 하고 있다면 상식적으로도 제대로 된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인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핑계치 못함에 대한 의미가 바로 상식적으로도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는 강요가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관념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고 함의 자존적 특수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임의적으로 받지 못함의 고통과 지혜롭지 못한 표현을 할수 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함을 지적해둔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답변

양심의 자유라고 함을 말하기 전에 양심의 자유의 실존과 실재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간과하고 있음에 이미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기독교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의 일부의 모습이며 이러한 것을 전반적인 실체로 임의적으로 인식설정하고 총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잘못이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도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상식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입장이 배타적인 것을 조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포감이나 주입 쇠뇌교육이니 하는 그러한 판단도 역시 보편의식의 결여에 따른 오만과 편견의 합리적 기술로써 자리매김되어질 때에 좀 상식에서도 벗어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더구나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만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한다고 하는 측면을 역으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자존적 절대의 재가는 쌍방의 당위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개념에서 자유하다고 할 때에 오히려 분별없는 당위성을 요구하는 피해의식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답변

먼저 근본주의적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적인 말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 대한 5대교리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독일이나 일부 유럽에서 특히 현상학적 철학의 본산지에서는 어떤 사실을 전제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근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5대교리를 주장하던 자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답변되어질 것이라 본다. 그리고 현상적 개념에서의 근본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함'이라는 것 자체가 전제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변명의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할 때에 그것의 당위성이 절대 타당한 것인가 상대적으로 기각의 여지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별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근본주의라는 말을 쓴다면 미움에 정신이 일그러진 것이라고 할 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은 상대적 보편적 사실 안에서의 가장 큰 보편적인 것은 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상식보편적 개념을 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절대의 자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개념의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의 상당한 교만이며 무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보다도 타종교의 정체성의 당위성이 상대적일뿐이라는 점에서 그 종교적 확실성과 그 실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절대의 자존의 하나님의 실존에 의문과 상대적인 부정과 개연성에서 실존의 당위성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자를 배척하는 것으로써 절대자의 판단이 있음은 당연하다고 함을 말함에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피흘려 싸우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피흘려 싸울만한 사실로써의 종교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실재와 실체가 현상적으로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사실과 정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임의성을 지니고 있고 절대에 비교하거나 사칭한다는 점에서 자존자로서의 하나님의 판단 받음은 기정사실이라고 함도 너무나 합당하다고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선언문 중에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너무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상대방의 동의라는 차원에서 종교의 실존의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임의적 종교에서나 임의적으로 말할뿐이고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종교 즉 기독교는 상대적 현상의 실존을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실존으로써의 현상적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적 표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성립되어질 사실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의 관용을 인정하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미 잘못된 보편의식에서 답변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즉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에서의 범주에서는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위안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를 판단할 때에는 전혀 그러한 인위적 안위는 허무함에 실망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말해두는 것은 그러한 타종교의 관용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상대적 당위성을 얻어야 한다는 그러한 종교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기독교가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은 없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와 절대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반선언문 인용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답변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춘다'고 말하면서 인간성에 사악함을 돌리며 정당화 한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곡해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또한 보편인식이라고 함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자기를 쇠뇌한 결과라는 것을 말할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훼와 예수의 잘못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그 기준의 사실과 기준의 실제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물어두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잘못된 실재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중세에 있어서 안티적개념을 도미니크파에 비롯되어지는 토미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프랜시스파의 입장의 신학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신플라톤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고 오리겐의 입장에서 이미 예비되었던 신학적 관점이다. 즉 그 오리겐의 입장에서는 그 물질적 개념이 사악하다는 개념을 말하는 가운데서 기독론에 임의적인 개념과 영지주의를 낳았고 물질관이 악하다는 개념으로 기독교의 선함을 말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죄악사'를 말하는 경향의 당위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기독교의 잘못된 역사의 실체가 진정한 실제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현대주의적 개념에서 볼 때에 야훼에 대한 실존이해와 그에 따른 불안한 신앙의 해프닝을 기독교의 실체적 잘못으로 곡해해왔고 그러한 가운데서 야훼와 예수의 잘못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

야훼의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이름의 증거와 같이 자존적 존재와 실존의 절대 정당함을 이미 판단가능하다는 점에서 말하는 임의적인 것을 사실화하여서 받는 당위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에 임의적으로 받아 확고함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쇠뇌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쇠뇌한 자의 입장에서 야훼와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정상적인 이성에서 받아야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야훼와 예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서 엉성한 실재로부터의 당위성을 말하는 합리성에 노예적 입장을 취한 가운데서 언급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해받은 영혼이 맹목적 충성이니 변명이니 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피해의식의 반로밖에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야 하며 불쌍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답변

먼저 생각할 것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요한다는 관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 실존과 본성에 대한 불신이 자체적으로 실존과 선함의 당위성을 먼저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당위성을 가진 가운데서 언급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대적 존재라면 존재의 성립당위성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현상적 인식이라고 함에 있어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불신을 강요받는다는 것의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직 존재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아이들처럼 보호와 양육이라고 함을 굴레로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자라지 못한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강요인지 당연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에서 인위적으로 강요의 주장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일뿐이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의 행하심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임의적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핑계할 수 없는 것을 강요라고 핑계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임의적 당위성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걸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구걸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문을 보면서 결론적으로..

임의적 보편의식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상대적 자기 계시의 실존을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왜곡되어진 이성을 본다고 하겠다

오히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없이 상대적인 임의적 기준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고 그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당위성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상식보편에서도 인정되어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제임스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이 있다 물론 그 책 내용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입장을 여기서도 본다. 무엇이 실재이며 실제상황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아주 보편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은 다행이나 그러한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의 한정되어진 것으로 편협을 불러오며 오만의 합리성의 근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이성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가지지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여러가지 합리성과 보편성을 말하여 구색을 갖출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보편성과 합리성이 판단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체적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실제를 말씀하시고 있고 진리의 실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상식적인 보편 판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 상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핑계치 못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받는 자의 정신있는 참된 소리가 되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

번호: 43 글쓴이: 夜客
조회: 515 스크랩: 1 날짜: 2005/03/10 21:38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온통 믿어야 할 것들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도 하나의 꿈일 수 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컴퓨터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엄격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각으로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이 글이 당신 앞에 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실은 모두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것은 자신의 존재성일 뿐, 그것으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보통 '아는 것' 또는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믿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이러한 보편적 믿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이나 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른 주장(믿음)들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현상에 관한 한, 자연과학은 보편적 믿음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보편적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믿음들을 개척해 나아가는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질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이므로, 도덕 관념에 대한 보편적 믿음이 점차 감소되어 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라고 본다. 종국에는 '이기적 욕망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쁜 행위이다'라는 포괄적 윤리관만 남을 것 같다는 예상도 해 본다.

오늘날 도덕관념에 대한 논쟁들을 살펴 보면, 비보편적 믿음은 폭증하는데 반해, 보편적 믿음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의학,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해 여러 가지 윤리적이면서 의학적인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죽음에 대한 정의라든가 장기이식, 인간복제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이것 또는 저것이 옳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 중의 하나는 도덕적 가치관들 중에서 보편과 비보편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안락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의 고통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중시해서 그의 죽음을 돕거나 방치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그가 아무리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생명은 존엄하므로 그의 죽음을 최대한 막는 것이 옳을 지에 대해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보편적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도덕적 가치관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것 또는 옳지 않다고 믿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요 정당한 권리라는 점이다. 이것을 ‘양심의 자유’라고 해두자. 나는‘양심의 자유’의 존재 여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양심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평화 공존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가 모두의 보편적 믿음이 되었으면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믿음이 사악하다고 여기는 관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나 레닌의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소위 “빨갱이”로 몰려서 처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고 매도의 대상이 되곤 한다.(물론 국가의 안정과 공공의 안전을 위한다는 것이 표면적 명분이다.) 북한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사상범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식의 관념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얼마든지 살펴 볼 수 있다.

내 의견으로는,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관념이야말로 불행을 야기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A를 믿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A가 보편적 믿음에 정면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대화와 토론으로 인한 해결보다 처벌이나 공권력의 남용은 단기간 동안의 효과가 나타날 수는 있어도 결국 극단적 대립과 반목을 야기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만성화된다.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진보 기독교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부정하고 예수를 미화함으로써 이를 다시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의 죄(불완전성)를 강조하면서 신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은, 원죄설과 대속 사상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는 말이다.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역사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기독교 자체와 무관한 일이라면 유럽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더 사악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가 사라지면,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믿음은 터무니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기독교가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기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다른 종교나 그 밖의 것들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반면, 기독교가 주는 유별난 해악들은 기독교가 없어지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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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분석가님, 구경군님, 적그리스도님, 몰러님, 엑스님, 오딧세이님 외 다수의 회원 여러분 그리고 모든 반기독교인)





옮긴이 : 夜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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