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12월 28, 2005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은 틀렸다..- 전 토미즘의 사상비판

에띠엔느 질송의 사상적 입장은 가톨릭에서 실재사상을 다루고자 했다는 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입장과 접근방식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일반적으로 토미즘에 있어서는 실재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띠엔느 질송이 토미즘에서 실재를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철학의 실존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출애굽기 3:1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각주1) 그것은 인용가능성만 생각하고 있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으로써 여전히 그 실재론을 실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질송의 그러한 기독교철학의 성립과 실재를 말함에 있어서 잘못되게 되어지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함을 철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저와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틸이 '하나님의 사유를 따라서 사유해야만 함을 함의 한다'(각주2)

그것은 게할더스 보스(G. Vos)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메시야적 사유'(각주3)라는 것의 의미를 말하며 또한 그것은 가능성의 여러 언어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실재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어적 인용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써 그 언급하고자 하는 것의 실재와 또한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질송의 기독교철학의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토미즘의 특히 신 토미즘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지만 토미즘은 이미 신론적 정당함에서 실재를 찾는 중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학대전 4권에서 읽을 수 있는 이방에 대한 변증에서는 '알미니안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질송의 사상으로 나타난다고 함과 일치'(각주4)되기 때문입니다.






각주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0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필자의 해설 : 반틸이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존재의 유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철학을 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임의적 존재자체로만 생각하고 철학적으로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의 유출을 말하는 것은 철학적 입장으로 비로소 삼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임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질송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임의적으로 한정함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신학에 필요에 따라서 말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던 것을 필로(philo)는 말하고 있는데 그 필요에 따른 차용적 입장을 위해 성경의 증거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존재로 임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어진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경에서 인용할 수 있다는 개념만으로 그 가능성에서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 철학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실재적 정의가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면 그것은 인용가능성이라는 개연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주2)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2


각주3)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역, 도서출판 엠마오 pp. 117~119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질 곳에서는 이 두 가지의 성취 자체(ipso facto)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잚소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부활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부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lbid p.117.)

"그리고 그 전체의 색조와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 현현 사상으로 부터 메시아적 사유로 급격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대개 기다리는 큰 "오심"(the great and uniformly expected "Coming"이 메시아의 오심이다. 아마도 신약의 사상 구조에서 다시 나타난 구약의 개념 중에서 이보다도 더 급격하고 중요한 변화를 겪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예수께서 '쿠리오스(주)'-칭호를 돌려드린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쿠리오스'칭호의 전용(轉用)은 주 여호와(Jehovah-Kurios)의 오심을 메시야의 강림과 거이ㅡ피할 수 없게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lbid pp.118~119.)

필자의 해설 : 게할더스 보스는 신구약의 불연속성적인 현상적 입장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그 연속성의 사실과 그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서 구약적 용어와 그에 담겨진 사상들에 대한 메시아 안에서의 정당함의 시비를 거쳐서 사용되어지고 또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사상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모습들 중에 취한 바가 있고 버린바가 있다고 하는 말이 가능한 현상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완성적 의미로써 재 새롭게 하시는 가운데서의 구별적 언어와 그 담긴 사상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유이며 동시에 전형적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 신약을 말하게 된다. 물론 메시아의 강림과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과의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 앞선 신구약의 연속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역 생명의말씀사(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by Alan P. F. Sell, Published in English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U.S.A.) p. 27

"신자가 이생에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비록 어거스틴의 지지를 빌어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알미니우스는 아우토데오스(auto Theos)를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였다. (1)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 그리고 (2)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 알미니우스는 전자를 받아들이고 후자는 거부하였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필자 해설 :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그 증거는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알미니우스는 그러한 합리성의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지 않다는 것과 에뜨엔느 질송도 그러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의 실재를 존재론으로 보겠다는 합목적성만 생각하고 또 인용적 가능성을 위한 합리성만 취하고 있지 자존의 절대자에서 비로소 합리성의 정당함을 얻고자 하는 중심은 이미 없다.. 그리고 토미즘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질송은 토미즘에 정통하면 할 수록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실재는 '가톨릭에서 말하고 있는 중세시대의 합리성을 이해할 머리가 없는 가운데서 무질서와 혼돈을 말하는 것'(요셉 피페, '중세 스콜라신학' 이재룡, 서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 에서 파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답변하지 못하는 중세의 가톨릭의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적 증거를 위한 것으로 그 실존적 증거를 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비록 그것에 대한 인식이 흐려져서 현대신학적 개념이 다시 스콜라신학적 연속성을 말하는 미련함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는 중세의 연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을 말하고 증거하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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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니체의 일기장에 대해

일기라는 것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있고 그의 철학과 같은 학문의 깊이를 나타낸 택스트를 말할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의 의미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와 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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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18, 2005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성도라면 주님의 눈물과 고통을 마음에 세겨야 할 것이고, 그러한 중심이 모습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숙의 자리에 서는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어떤 말보다 앞선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과 눈물이라고 하이 기만적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러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분별없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중에서 인용하면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답변으로써 이 합일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것은 두 양성 또는 두 위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하나가 되었다는 개념으로 위격의 변화로써의 단일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시간이 되어 합쳐지거나 또는 이미 나누어진 존재라는 그러한 전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를 겪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열어놓고 있는 시간의 과정에 따른 신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론의 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니케아 칼세톤신조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칼세톤 신조에서는 양성의 이중성에 대하여서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각주1)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의 위격에서도 동일한 입장(각주2)을 취하고 있습니다.


1. 니케아 칼세톤 신조에 대한 이해

니케아 칼세톤 신조는 라틴 신조로써 나중에 연합되어진 가운데서 서로 수용되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출발은 동방신학의 유출적 개념에서 단성론에 대한 입장과 달리하는 입장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전통적으로 영원이라는 것과 시간이라는 것이 대립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방에서는 영원에서 시간의 발출을 말하는 것과 그 존재의 발출을 말하는 식으로 이해해왔고 라틴에서는 그 시간의 판단하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영지주의적 개념은 정죄하는 경우로 봅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영원에 비교하여서 해석할 당위성이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 인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고(각주3) 이미 신학적으로는 칼바르트를 비롯한 주관적 시간관을 말하고 있고 철학적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입장에서 그 정오의 사상에서 시간을 주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가운데서 니체를 비롯한 플라토닉 아포리스트들은 시간의 창조보다는 영원이라는 개념도 시간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 영원을 해석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놓았던 것입니다.(각주5)

이러한 가운데서는 이제 니케아 칼세톤의 신앙고백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시간의 종속되어진 자로서 이해하고자 하고 메시아의 인식의 발달을 말하는 현대신학적 입장이 득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위격적 양태론에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서방라틴신학적 안티로의 개념을 종교개혁의 실제로 잘못보는 가운데서 동방신학적 건전함을 말하는 경향도 이러한 길에 한몫을 했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니케아 칼세톤 신조의 변경 요청들에 대하여서

현대철학과 신을 말하는 철학적 신론을 따르는 현대신학에서는 시간을 하나님이 창조물로 봄에 대한 것에대한 당위성을 임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서의 당위성의 가능성이라고 함을 의지하여서 시간에 따른 그러한 시간에 따라 변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고 시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칸트의 인식론의계기로서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을 말할 때에 그것의 주관적 당위성을 놓은 자가 바로 니체가 되어지며 그러한 존재부정이라는 개념에서의 유출적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고 이것은 신플라톤적 해석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으로써 플라톤적 신학의 당위성까지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유출을 말함에 있어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존재의 이동이라는 개념에서 물질의 이동이라는 것에서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유출설과 회귀사상은 시간론을 배제할 수 없고 그러한시간론은 존재로의 회귀와 존재의 도달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라고 함이 흐름을 전제로 하여야만 하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합일이라는 개념을 성도에게는 성화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존재의 합쳐짐이라는 개념으로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고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니케아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을 부인하고 시간의 종속물로서이 인조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신이 없다 신이 죽었다는 사신신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사회구원적 개념으로 기독교의 당위성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사회에 비로소 두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사고의 변화라는 개념은 그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시간창조를 믿던지 아니면 시간으로써 묘사되어지고 변형되어진 거짓된 신 또는 죽은 신으로 인한 인위적 발상의 인간들의 모임으로 전락하든지 그러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니케아 칼세톤 신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가톨릭이라는 것과 그들의 가르침의 연관성을 따른다는 또는 그러한 잘못된스콜라적 신학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정당함을 입은 우리 성도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받았을 때에 믿음 안에서 사실을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고백을 그 전통의 연속성이해의 강요에서 자유한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바르게 고백을 하게 하였던 것을 기억함은 니케아 칼세톤 신앙에서의 참으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시간의종속적 해석적 실존을 말하는 인조하나님 죽은 신론적 입장의 비웃음과 해석적 당위성의 세상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 답변하게 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전통이기 때문에 또는 그 전통이 가톨릭의 신론적 부재에 대한 임의적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에서 떠났다는 점에서 배척한다는 그러한 극단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때에 고백되었던 삼위일체 하나님 니케아 칼세톤에서의 신조적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동일한 고백으로써의 니케아 칼세톤 신조를 고백하며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정신학이라는 개념에서 시간이 주관적 인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성화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존재에로의 흡수적 개념이나 병합적 개념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위격적 하나 병합적 양태론적인 입장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을 말하며 그러한 주님을 말함에 있어서 그 주님의 눈물이라는 것은 이미 정적인 호소력을 말할 수 있는 시효는 발효부터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각주1) 정통교리는 유티커스주의와 대항하여 성육신 이후에도 성의 구분을 인정하되 양성은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신적 의지는 여전히 신적 의지대로 남아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여전히 인간적 의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 두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생활을 하면서 삼위의 각 위들처럼 상호 교통을 하고 있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2)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전환되거나 변형된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으로 전환되어진 것도 아니며, 둘이 하나 속에 흡수되거나 혼돈되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 속에 단순히 내주(內住)하거나 둘이 외견상으로만 일시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다. 성육신은 둘이 한 인격체 안에 실제적이고도 영속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3)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의 창조(과거)와 지속(현재) 그리고 종말(미래)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전제되고 수반되어야 할 사항은 시간을 영원과 관계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어려워만 하지 말고 시가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넘어서는 시간이 주는 풍요를 맛보기 바란다.

(정기철,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시간철학과 시간의 신학, 한들출판사 p.6)

부언) 여기서 시간의 부정이라는 개념이 점진성을 말하기 보다는 영원을 기준으로 말한다는 것으로써의 유출적 개념으로서 시간의 일상적 흐름이라는 것에서 주관적 해석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단순한 영원을 위한 시간을 부정하거나 영원에서 시간이 비로소 말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 변증법적인 개념에서의 상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각주4)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pp. 41-68. 에서는 원환적 시간 표상: 영겁회귀사상을 다루고 있는데 플라톤의 니체의 입장 즉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에서 발생한 것으로써의 시간관을 의미하는 회귀사상을 말하면서 니체의 '차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오사상에서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음에 대한 지적이 나타나고 있는데(p. 59.) 이는 주관적 순환적 시간관에 따른 해석으로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을 의미하는 것을 니체 그에게서 찾고 있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 즉 소광희 교수는 시간이 일반론에서 니체의 사상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수학을 잘 못했지만 그의 포스타 학교에서 그의 심적인 입장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입장에서 시간관을 존재 부정의 개념에서의 정오사상에서의 출발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며 부정형의 철학을 말하게 되며 신플라톤적 개념의 회귀사상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회귀적 존재이해를 한 것으로 그것은 시간에 따른 존재이해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위의 정기철 교수님이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는지 알수 없지만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을 때에 신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의 부정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각주5) 플라톤만 이야기 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그러한 것에서 자유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글쓴이 : 인권의 왕도
조회 : 27 스크랩 : 0 날짜 : 2005.07.12 09:28

주님의 대한 묵상 입니다.


-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야웨)이시다면 왜 그분은 아버지에게 기도했으며 어떻게 시험을 받고 자라나시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경험할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 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주위 반응에 따라서 주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성도의 본으로서 육신을 입고 인간들이 밟아갈 과정을 모두 밟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도해야 하는가? 순종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것으로서 주님이 행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그 인성은 기원과 본질이 여호와로서 동일하지만 유한계로 발출된 것을 말 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나온 인성이라면 완전할 것이라 생각을 하겠지만 처음으로 나온 것이고 질서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진전해 갈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성취를 하였습니다.(부활체) 불완전한 상태이다라는 것은 곧 여호와와 분리된 상태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주님은 재세시에 분리와 합일이라는 곧 겸비와 영광화라는 두 상태를 오가셨습니다. 분리 곧 겸비 상태일때 주님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영광화 상태일때 주님은 권능을 행하시며 부활하시고 승리를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인성의 영광화는 성도의 신화(Deification) 곧 중생의 본이자 성도의 이상이요 목표 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영화되어 성부와 합일에 이르셨듯이 성도도 주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두상태를 오가며 주님 곧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 합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인성(human)은 유한하지만 부활하신 이후의 인성(Human)은 영화된 인성으로서(the glorified Human) 신성으로 충만하고 권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암시하기를 그분이 비통해 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심과 같은 사실은 그분 속의 신성이 일하는데 대해 유한한 인성의 자연적인 반작용이었다고 말한다.(사랑이요 의분이나 절대적 사랑은 아니라는 것) 이는 마치 우리가 신성한 사랑과 지혜에 관해 아는 것을 삶에 이행해 보려 할때 그 노력은 우리의 보다 낮고 이기적인 바람의 차원을 더 비통해하거나 몸부림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이 구해주려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방자함, 불성실함, 눈먼 행동(배신들)들 때문에 인간적으로 슬퍼하셨고 이 슬픔은 그분에게 있는 가장 심한 시험의 하나이기도 했다.

주님도 그분의 지혜가 인간에 이식해 놓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방자해질 충동을 거절하시면서 그에 따른 모든 시험을 극복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때로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강제로 주입시키려 할때 위의 주님이 받으신 시험의 종류를 겪기도 한다. 주님은 그분의 투쟁을 보여 주시며 동시에 즉각 승리하셨음도 보여 주시고 아버지에게 감사 드림으로써 투쟁과 승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토론글

이명신 현대신학의 인식에 앞서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인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성의 나열들이 아주 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당위성을 맹목적으로 말할 수 있어보이지만 그 인식의 계기인 주관적 시간이해라는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신학이라고 하는 것 과정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묘사함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적 실재인식을 하도록 함에 당연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잘못임을 볼때 니케아 신앙과 신학적 고백이 얼마나 주의하였던 중심으로 그러한 위격과 양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했는가 하는 것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시간을 창조하신 세월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또는 시간에 따라 재해석된 존재부정의 신의 죽음을 거짓되게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니케아 칼세톤 신앙고백을 바르게 읽는가에 대한 관건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토론은 사양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에는 주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주님의 대한 믿음과 회개와 성화와 신화라는 중생의 전 과정은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있는 곳에 주님도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정당한 토론은 이루어질수가 없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불평등하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분위기 탓으로 말씀하심은 옳지 않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누가 자유를 억압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지요 님의 자유의식이 판단되었음에 대한 불안감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뿐입니다. 님이 인용하는 과정철학의 기본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표현은 너무 생뚱맞은 소리라는 것쯤은 아실 수 있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신화라는 개념이 어떤 개념인지 과정철학에서 어떤 개념인지 알고 말씀하시는지요 그것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일반시간론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하심이 지혜로울 수 있을 것같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이미 실재적인 기준없이 합리성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정당한 토론이라는 개념은 너무 임의적인 것으로만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과정철학자이자 신비가라고 할 대에 주의 종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가 시간의 인식의 판단에서 이미 주관적 개념의 사벨리우스적 개념을 단성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겠다 다수의 의지하지 않겠다. 권력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과정철학이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느이 보리의 신학을 말한다느니 하면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만 왜곡되고 있으므로 말하게 된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님도 딱두하시구려.. 다수의 폭력이 아니라니깐 이렇게 나르시즘에 잡혀서 자기 연민으로 더 이상 말못하겠다고 하니 저의 본문을 제대로 읽고 말씀하시는가요.. 답답하군요.. 진짜루.. 2005/07/12


이명신 왜곡은 무슨 왜곡.. 기본적인 인식도 없으면서 불리하면 왜곡이레.. 그럼 왜곡되어진 부분을 보이시고 그런 말씀하세요.. 용어나 말을 함부로 적용하심은 여전하시군요 2005/07/12


동행자 ㅉㅉㅉ 인권님이 불평등한 토론이라 하신것은 인권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증거!! 하나님이 함께 하는자는 루터와 같은 담대함속에서 불리함을 마다 않음 2005/07/12


인권의 왕도 성부와 성자의 합일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처음부터 완전한 합일 가운데 곧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이를 저는 불상리 불상잡이라고 줄여서 말 합니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혼합된 것도 아니다라는 의미 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닌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서 2005/07/12

이명신 그러게 점진적인 발달이라는 개념이 시간관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과정철학에서는 일반시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도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하시는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셨습니다. 무엇의 합일인가? 주님의 아들됨 곧 인성의 기원과 본질은 신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고, 위격의 합일을 말 합니다. 인성이라는 위격이 신성이라는 위격에 합일되는 것을 말 합니다. 성부위격은 신성 그 자체이나 성자위격은 사복음서에 보듯이 유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유한성을 초 2005/07/12

이명신 여보세요.. 누구는 사복음서 안보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말씀하시지 마시구요..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실재적 근거를 님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월하는 방편으로서 십자가 도 즉 자기부인과 죽음으로 인성을 신령화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부위격의 신성과의 합일을 의미 합니다. 여기서 합일은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불상리 불상잡으로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혼합된 것도 아닌 상태로 두 본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하나된 것을 말 합니다. 영혼과 2005/07/12

인권의 왕도 육체와의 하나됨과 비교할수 있습니다만 엄밀히는 부족 합니다. 부부가 한몸이 된다 주님과 인간이 한영이 된다고 해도 각각의 성은 상실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되는 것을 말하지만 부부는 타자로서이고 주님과 인간은 조물주와 피조물로서이나 주님은 신성과 신령인성의 하나됨이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월등히 2005/07/12

인권의 왕도 점진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성령은 왜 부활후에 교회에 발출이 되었는지요?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인자라는 세가지로 묘사를 했는지요? 부활후 주님은 계시록의 주님은 부활 이전의 주님과 어는 정도 다릅니까? 인성은 유아적이고 지성도 유아적인가요? 2005/07/12

이명신 발출을 위한 발출의 당위성 설명이라.. 쯧 발출적개념이 이미 인식의 계기로서 주관적 시간의 발상으로 부정되었다는데 그것에서 무슨 또 선한 것이 있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나요.. 먼지밖에 더 있겠습니까 답답하군요.. 2005/07/12

이명신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니케아 칼세톤신조에서는 시간이 판단으로 점진적인 개념의 도입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데도 합일의 경지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자꾸 말하고 있네요.. 과정철학이라는 개념이 시간의 연속성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전혀 답변이 없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니 절대적인 합일을 의미 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두위격이 하나되므로서 성령이라는 제3위격이 발출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게 된 것인데. 주님이 아버지의 유일한 형상이자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외의 기도나 예배의 대상은 없다는 것, 또 성령도 주님의 이름으로 2005/07/12

이명신 니케아신조와 칼케톤신조라는 것이 동방신학적 안티의 개념에서 생각되었다면 발출설적인 개념으로써의 비교되어질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합일은 이 두신조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인 정황파악이되는데 전혀 생각없이 말씀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내말은 그러한 시간에 따른 존재의 유출적 개념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이미 배제되어야 한다는 경건의 중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런데 님은 시간에 따라 속성의 합일을 말하는 가운데서 일체를 말하는 것은 이것은 위격의 혼합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체라는 개념을 잘못 이야기하고 있고 니케아칼세톤신조를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라는 것이 신화이고 아타나시우스와 그 당시 속사도들의 믿음이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믿음 곧 주님과 같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피조물적인 영광에 이르려 하였던 것, 이것은 주님이 시험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열 2005/07/12

인권의 왕도 매로서 얻으신 부활체에 대한 소망이 강렬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님이 부활하였듯이 성도도 단순히 입술만의 고백에서 삶전체로 주님을 닮아서 주님과같은 열매를 얻고자 하였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본질은 신성으로서 불변이나 위격적으로는 과정을 거쳐서 신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핵심사항 2005/07/12

인권의 왕도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적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시군요.. 그는 오리겐적인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정도면에서 목회적 개념에서 말했을 뿐임은 곤잘레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하기 위한 것으로써의 오리겐적 입장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오리겐적인 개념과 다른 것이 니케아칼세톤적 개념이라고 말하는데도 우째 이렇게 생뚱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허이 말할줄 알았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니 참 답답하이~~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이 신성이 그렇게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기예수께부터 신성적 입장의 사역을 하셨음에 대한 것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교회에 내린다는 것, 본질과 위격의 구분됨은 실재적이나 현재 주님은 아버지의 몸과 같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식으로 충만 합니다. 아버지는 볼수 없으나 아들은 볼수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하에서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 지금의 신앙 입니다. 그분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 입니 2005/07/12

인권의 왕도 다. 2005/07/12

이명신 전혀 개념이 없군요.. 과정신학의 인식의 개념이 시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유출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고 합일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말할 때에는 합쳐놓은 혼합적 단일성을 말하는 시간의 종속물로서의 거짓신을 말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시군요..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차이점과 니케아칼세톤 신조의 고백적 전통에서 무엇을 조심하였는지 그것이 경건이며 님과 같이 시간의 판단받는 자들이 입장을 이미 배제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고찰이거늘 전혀 딴 소리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그가 주의 종인지에 대한 여부를 남겨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철학적 장난에서 거짓된 존재인식의 정황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임의적으로 주의종이라고 말하니 답답합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구약의 여호와 신앙과 신약의 주님에 대한 신앙의 차이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격은 인성으로서 여느 인간들과 성육신 초기와 중기와 말기에는 같았으나 그 과정에서 신체가 성장하고 지혜가 성장하였듯이 그분의 위격도 성장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성의 본질과 기원은 여호와이기 때문에 다른 인 2005/07/12

이명신 전혀 채널이 맞지 않군요.. 딴데 틀어서 말하고 있는 것봐요.. 앞에 글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고 의견을 말하고 있는지 보세요.. 동문서답하고 있군요.. 답답해요.. 자기 말하는 것은 죽어도 말해야 한다는 오기..거참 해병대출신이신 것같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간들은 그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초월할수 없었지만 주님은 33/34년만에 십자가 도를 충실히 이행하므로서 달성했다는 것 입니다. 여호와의 신성은 절대성안에서만 충만하였는데 주님의 신령하게 된 인성으로 말미암아 2위격에 신성이 충만히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보이 2005/07/12

이명신 그렇치 예수님이 모자라니깐 성숙을 필요로 신성이 혼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주입되는 신성이라.. 이런 것이 바로 니케아칼세톤의 신조와 전혀 상관없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에 대한 신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으로 중세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고 시간이라는 것의 흐름에 따라 그러힌 일이 일어나며 예수님이 시간에 따라 신성이 채워지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어찌 이단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것은 신성에서도 마찬가지이거든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예수님은 성육신 전에 인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 인성이 부활이전과 다릅니까? 같습니까? 기독교 교리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신성은 불변이나 인성은 가변적 입니다. 상식 아닙니까? 예수님의 인성은 처음부터 완전했습니까? 거룩했습니까? 성인이였습니까? 지혜가 완전했습니까? 부활하시므로 주님은 아버지 우편 곧 권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성이 신령화되어 신성이신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고 인간형으로 있는 신성화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약과는 달리 아버지와 연결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중보자, 중개자, 그만큼 인간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 어렵고 멀어져 있어서 주님이 인성을 취하여 신령화해야 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인성으로 계신 신성에 대한 시인을 통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 2005/07/12

인권의 왕도 도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하는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이라는 개념에서 위격적 개념이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니케아칼세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시간인식에 종속되어진 과정으로 신성을 논한다는 것이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과 거짓이라는 것을 말함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그만 피곤하게 꼬리말로 님이 대의를 꼬리말로 흐리게 하시지 마시고 답변글로 정식으로 글을 써주시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쓸데없는 말 돌리지 마시고 답변글로 답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님의 부질없으에 대한것으로 변명뿐 진정한 사실을 말씀하시지 못한 것으로 받겠습니다. 괜히 말만 만드지 마세요 님의 과정철학적 입장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답변글로 쓰세요 그것이 저의글의 답변이 될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이명신 이번에 님의 위격의 과정과 신성의 시간적 변화라는 개념과 합일이라는 적어도 제가 오해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님의 존재의 혼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님의 탁월한 답글을 기대하겠습니다. 조금뒤에 뵙겠습니다. 2005/07/12

김응남 (왕도님에게)이명신님과 토론(?)은 유익이 없습니다....유익을 위해서는 성경을 표준으로 성경본문에 대한 토론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성경 본문에 대한 대화라면 저도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렇지요.. 성경구절인용대회에 수상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를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익이 없는지 어떻게 임의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없음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납득하게 말하고 난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거늘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막된 인격들로서 자처하시나요 2005/07/12

김응남 (이명신님에게)는 할말이 없음. 2005/07/13

이명신 미안하다는 한마디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말을 아끼시는 것인지 회피하시는 것인지.. 애매한 분이시군요.. 애매한 인격으로 판단받지 않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좀 시원시원하세요.. 뭐 그렇게 긴장을 하시는지.. 사람이 틀릴수도 있고 한번 그렇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 것에는 말입니다. 2005/07/13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신학의 입장이라면 저의 글에 답변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겠습니다. 답변해보세요.. 그 답변에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2005/07/13

김응남 (이명신님)왕도님에게 님과의 토론은 유익이 없다는 꼬리글이...님에게는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님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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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서..(분리와 분파에 대한 개념 정립을 위해..)

글을 씀에 있어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안에서 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는 이단들과의 모양세적인 측면의 화평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을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의 교회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는 그 실재론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실에 이르기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면상 모두 언급한다는 것은 무리고 간단하게 인식되어질 필요성으로서의 기본적인 교회의 통일성을 기술하고자 합니다.

교회 분리주의자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서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도나투스 논쟁에 대한 것으로 회개와 그것의 상대적 완전성의 외부적 개념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등이 오늘날에 있어서 비유적으로 이루어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아직 삼위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 따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 그때의 신학적 사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개념의 부정의 신학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회개의 사실확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인위적 분파가 있게 되어지는 것은 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자들을 분리주의자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는 것에 봉착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가톨릭과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가

가톨릭에서는 신론적 입장에서 유출적개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존재라는 개념들 어떤 실체라는 개념의 연속성을 생각하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체성도 임의적으로 가톨릭에 있다고 말하는 당위성을 기만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러한 것이 그들의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며 그 전초적인 개념으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전체 지역적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다르게 다르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옳게 ..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는 자들은 그 믿음의 분량적 개념이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동일한 기독교임을 믿고 그 연합적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가 있고 형태적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하심의 사실 분별에서 믿음의 분량차이로 서로 선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파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이며 성경의 사실을 진정으로믿으며 예수님이 중보자이심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 자들은 그 교파적 모습의 차이과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믿음의 분량으로 인정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앞에서 실재적인 실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통일성에 대한 비교적 개념과 작금의 논의를 생각하며

동산마술사님의 화해론이라는 것은 천주교의 외형적 고백이 진실하지 못함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형적 개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하게 기독교로 인정하자는 것은 그 통일성의 기준적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필로(Philo)의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사실들이 철학적 신론을 따르고 있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그러한 신론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산마술사님은 사람들 불교도 기독교도 화해하고 이러한 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의 화해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 통일을 말하는 사회복음적 개념의 현대사상까지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는 화평과 화해의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산마술사님이 예수님의 중보자이심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급기야 부인하는 가운데서의 신론적 입장이니 어떻게 그의 상대적인 포괄성이 정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산마술사님의 말씀하시는 화해와 화평과 그입장에서의 분리라는 개념은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노선과 달리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눈을 감고 불교와도 연합을 말하고 있고 사회적인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개념에서 무슨 회개가 나옵니까.. 회개가 그럼 이단들과 거짓종교들과의 화평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지극히 기만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니만 옳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식의 입장에서 반론밖에 못하는 가운데서 화해를 말하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타협을 화평으로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온대간대없이 이방종교와의 화해적 개념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의 기본적인 입장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의 불의한 청지기로서 인기성의 지역적 통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지역적 통일성과 단일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메이지 않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지역적 통일성이 비로소 판단 기준으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교파가 있을 수 있고 자신들의 서로의 믿음의 분량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믿음 안에서 판단이 있을 수 있으나 최종적인 판단은 주의 말씀하심과 하나님 안에 있음에 인정하게 되며 오래 참는 가운데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통일성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하심 성경으로 돌아가며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 안에서 거짓 쓴뿌리가 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재가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교회의 통일성에 속한 자들이 아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별의 은사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노력함의 방향성을 열어 놓으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야지 외형적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서의 지역적 통일성 단체적 통일성을 말하고 있는 상식은 판단받아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의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으며 가톨릭의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가 없는 것이기에 그 기만의 사실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토론글

글쓴이 교회에서의 분파 분리라는 개념에 앞서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글입니다. 물론 여기서 더 깊이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그 가톨릭의 신관과 기독교의 신관이라고 함이 종교개혁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것과 현대신학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는 앞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 2005/06/30

글쓴이 먼저 언급해야 하지만 임시적으로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가톨릭계 사람이라면 한번 해볼 용의가 있습니다만 임의적 감정적인 논의를 하시는 분위기에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포함되는 말이지만 기술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적절함은 그 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2005/06/30

이한이 솔직히.. 교회의 분파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고.. 하나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고.. 등대는 하나님 보좌앞의 일곱영을 뜻하는뎅..쩝..이 밖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더라구요..ㅠㅠ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구별(거룩)되게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요...이 세상에 평화가 있다고,화평이 있다고,화해가 있다고 부르짖는 것을 저는 믿지를 않습니다...있다면 예수안에서,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이죠...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것이 가능 하다고 오늘도 참소하고 있습니다..오늘날 카톨릭과 불교가 화해하고 손잡는것이 2005/07/01

정야베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가증스런 일인지 저들은 모릅니다..그야말로 저들은 우주적인 역사라고, 그야말로 하나님도 초월한, 종교를 초월한 아주 위대한 역사라고 안위 할것입니다...지금도 저들은 우리 개신교가 우물속에 빠져,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얼마나 비웃는지요..저들은 참으로 성서안에 있는 2005/07/01

정야베스 그 글들이,그 사건들이,그 역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남들과 화해하고 화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우리가 보아도 안타까운데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 하겠습니까?..지금은 유혹과 미혹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이명신님의 글이 그야말로 <말씀>되게 2005/07/01

정야베스 하여 주실것을 믿습니다...스데반의 기도처럼 저들은 저들의 하는일을 알지못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께로 난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밖에 없음을 고백 합니다... 2005/07/01

니노 이명신님의 생각에 공감하며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감이 있다면 보다 이해를 용이하게 설명해 주시려는 노력보다 문체나 사용하시는 어휘가 지나치게 학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생명이며 그깊이를 말로 다 할 수 없겠으나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우선은 상대를 위한 바가 되어야 한다면 2005/07/01

니노 상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부분도 필요하지 않을런지요? 사실 정독을 하여도 문장의 독해가 그다지 용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의 논지를 어느정도 아는 입장이기에 전하시고자 하는 바의 늬앙스로 일부만을 읽었습니다만 님의 생각과 다른 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듯 여겨지기에.. 복음이 어려운 것으로 2005/07/01

니노 오해되어진다면 사실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을 듯 여겨집니다. 더구나 님의 글의 주 대상이 신학자들이 아닌 복음을 잘 못 알고 있는 가톨릭 옹호자분들임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저도 노력하려는 바이기도 하지만 오랜동안 전형적인 신학적 사고와 글을 통해 이미 익숙해지신 것 같기에 쉽게 설명하는 것이 더 2005/07/01

니노 어려울 수도 있슴을 알지만 님의 소중한 생각들을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마음에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이라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복음의 사역에 더욱 귀하게 쓰임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2005/07/01

에벤에셀1 지성방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다양하신 분들이 많더군요..그건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덕이 되지 못한 분도 계시고 또한 말씀이 풍부함속에 예수를 바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더군요 비록 말씀이 부족할찌라도 2005/07/01

에벤에셀1 그 뜻을 파악하며 주님의 뜻을 바라보는 분들도 많으시구요. 어찌 되었든 이명신님,정야베스님,니노님 뜻이 저에게는 합당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진지한 말씀들 참으로 가슴깊게 다가옵니다..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늘 수고 하시는 님들위에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저도 이명신님의 글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를 않더군요...보통 성도라기 보다는 신학생 아니면 사역자가 아닌가 싶습니다..신학과 신앙은 하나인데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생각 하기를 조금은 어렵더라도 그의 글을 자꾸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구요.. 2005/07/01

정야베스 어쩌면 그것이 그분의 독특함 내지는 정체성이 아닐까 합니다..니노님의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더욱 좋았습니다..저도 이번 가을학기에 공부좀 하려고 등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기존의 신앙관을 몽땅 버리지 않으면 새롭게 신학을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고 하더이다..그만큼 고정된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얘기겠죠..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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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7월 15, 2005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책들은 전집으로 도서에 필수적으로 진열되어있고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긍정을 위한 부정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도 서점에 새로나온 책으로서 비치되어있고 그런 가운데서 니체의 중심이해라는 것이 너무 결여되어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니체가 기독교로 회심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신을 부정하게 되어지는 계기에 대하여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것은 오늘날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남에 대하여서도 한번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을 씁니다.

니체는 '그의 알지 못하는 영적 소리'를 들었던 것을 그의 일기에 적고 있음을 잔프란스키가 그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에게 언급하는 어떤 귀신과 같은 존재의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얽매인 바보들아..'

마치 시간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악령의(?)소리로 보아야 함이 객관적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각주2)이며 이러한 주관적 시간관에 대하여서는 철학계에서도 니체의 입장을 고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서울대 인문학장인 소광희씨의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주관적 시간관에 있어서 니체의 정오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현대의 철학과 신학에서 시간을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인 영원과 그것으로부터의 파생을 말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것입니다.(호남대 신학교수인 정기철씨는 '시간과 종말론' 한들출판사,에서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영향력의 그늘을 분별없는 가운데서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답변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관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적 구별점을 말할 수 있는 실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실재관에서 니체가 그 자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규정적인 것을 혐오하였던 것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규정적인 실재규정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그 사실을 말하려는 것을 가둔다는 측면에서 자유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의 안티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인식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역사를 말한다면 주관적 역사를 말하며 어차피 주관적 역사관을 말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는 갇혀진 자로서 인식되어지고 있고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또한 시간에 따른 메시아 인식의 변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열려진 주관적 시간관에 대한 성찰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님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구별되어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그렇게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기만하게 되는게 하는 것에 대한 재고적 인식활동은 보다 넓은 연구의 합목적성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목적성에 대한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미학적 개념에 이끌리어서 그러한 것에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기만적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개체를 모두 경험함 보다는 그 보편으로서의 합리성의 정체성과 범주가 정당한 것인가 시비를 가리는 것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인식에서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도덕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비평학의 노선에 의미와 실재를 임의적으로 두게되는 것의 잘못된 모습이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의 자유를 위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사실을 두려워하며 사실규정의 말하지 못함에 따른 하나님의 증거의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신학적 자리매김에 합리적 정당함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현대신학의 인식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고 함을 쓰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유라고 하는 것이 규정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위한 자기 변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에서 그 능력을 상실했음을 직감한 가운데 니체는 '언어라는 것은 존재를 맴돌기만 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울리게 되는 음악과 예술의 보편성이 더욱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그너의 <반지>와 같은 음악이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철학과 음악의 보편성의 합리적 변증적 개념에서 보편을 니체는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주 넓은 보편을 찾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보편을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합리성전체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도의 가르침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구분한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 개념과 아폴론의 규정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의 재조합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위해서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것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한 것으로 부적절하다는 점으로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인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전쟁적 개념에서의 투쟁적 개념에서의 삶의 확인을 말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창조라는 개념이 우상적 개념의 당위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된 것이며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은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언어규정이라는 개념이 비극의 탄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는 재대로 된 판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로고스 사상에 있어서는 그러한 판단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이 니체의 관찰에서 나오는 로고스 사상의 존재의 주변에 머문다는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로고스 사상의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으로서 종교개혁을 말하고 있는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니체의 입장에서 신비주의자들과 또한 철학자들과 연합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복음의 입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으며 투쟁의 신학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가운데서 상황적 사람들의 동의적 개념에서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옳지 못한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글을 씀에 있어서는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에서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과 그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의 동일성과 상관성에서 구별을 인위적으로 말할 때에 그것은 여전히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니체가 옳았던 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의 로고스 사상은 비극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콜라철학의 로고스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은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로서 그러한 니체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니체의 분별력이 상실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체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식의 왜곡을 위한 시작점이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함을 분별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주의 말씀이 존재를 창조하셨고 주장하신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분별력의 실제가 부정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그로 인한 그의 인위적인 보편인식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그 사실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비극의탄생의 판단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각주1)니체(Nietzsche)의 생애 (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56p

(각주2)잔프란스키가 인용하고 있는 니체의 일기라고 보여지는 것에서의 인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그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개념의 현상적 사실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논란이 제기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현상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피조물로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잘못된 길을 열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동일한 판단이 사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반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꼬리말

카란의 별 저도 니체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니체는 신을 잃어버린 세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조금은 안 사람이지요. 신이 없는 신학, 신이 없는 인간론, 신이 없는 윤리론을 정립할려고 했던 불쌍한 영혼이 아닐지... 2005/06/21

글쓴이 니체를 언급하게 되는 것은 그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철학과 신학의 인식의 기초로서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이해의 정초를 놓았던 것이며 이러한 주관적 해석으로 주님을 판단하며 가두는 듯한 모습이 현대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아래의 현대신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이 시간의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되어진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시간에 가두어진 시간적 인식과 그에 따른 규정이라는 것에 매이는 듯한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시간의 주관성을 말한 니체의 입장에서의 현대신학적 인식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이 악의 영적인 개념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분별이 요구되어지는데 현대철학과 신학에서는 임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을 시간의 판단에서 가두어지는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인식에 대한 발전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으로 개연적 당위성에서 그러한 노력들의 당위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에서는 로고스 즉 언어라는 개념은 존재에 감동이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는 아폴론식의 언어의 출현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규정되어지는 사실들자체가 삶의 상승이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하나님의 절대의 속성도 헤겔의 잘못된 절대관이라는 개념으로 부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의 부정을 말함과 그것으로 인한 초월적 자신의 삶의 상승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중심과 삶을 얽어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은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언어의 정체성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아폴론을 비롯한 스토아학파의 로고스사상의 유물론적 개념과 신플라톤적 개념에서의 유출적 개념을 말하는 스콜라신학에서는 니체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그러나 종교개혁때에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함으로서의 기독교의 본성의 실제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그 말씀의 능력이라고 함이 자증적 권세를 가진다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비극의 탄생이라는 니체의 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즉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은 니체가 판단한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서의 실재가 부정되어지는 그런 로고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의 자증적 성격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 주어지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과 <비극의 탄생>은 그 인식에서 현대철학과 신학에서 신앙의 실제를 부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을 가두는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인식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함의 자의적 합리성으로 부인되어야 할 인식들인 것입니다. 200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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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7월 14, 2005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Nietzsche)에 관한 책(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을 읽었습니다. 별로 신경이 가지 않아서, 신은 죽었다는 그러한 말을 남긴 것에 대하여서 별로 신통치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어보니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보편에 대한 생각을 임의적으로 생각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 안에 독자들을 가두는 정도의 똑똑함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있어서 유명론의 충격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 기독교 특히 구교의 큰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후스토L 곤잘레스는 그러한 것을 기독교사상사 II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곤잘레스의 견해를 따르면 유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러면서도 보편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동일저서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사상사에서 필로의 경우를 따라서 플라토닉 삼위일체라는 개념의 철학적 신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어지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런 플라토닉 삼위일체로서의 해석되어지는 '갑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합리성'을 상대화시켜서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명론적인 입장을 따르는 가운데서 플라토닉적 개념을 말한다고 할 때에 이 니체의 경우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도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기독교의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성육신의 메세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던데..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것과 자존의 스스로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개념과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독교 비판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신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니체의 내재적초월이라고 함의 보편성에서는 아주 비겁한 것이라는 임의적 합리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와 그 계시의 정당성을 말하는 칼빈의 입장에서는 니체의 성육신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개념을 자신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의지로서의 자유라는 개념의 스스로의 개념과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에 기준적 실제를 기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중세에서 답변하지 못하였던 유명론적인 입장에서의 비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보나벤투라를 기반으로 한 곤잘레스의 플라토닉 삼위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중세의 사상의 연속성을 현대에서 전혀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스콜라신학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여전히 임의적 실재론과 삼위론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니체의 유명론적인 개념에서 이어지고 있는 성육신 기독론에 대한 유비적 개념에서의 해체적인 반론에는 답변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함이 루터의 개념에서 비롯되어서 칼빈에게서 완성되어지고 비로소 개혁의 사실과 말하게 되어지는 사실의 실재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말하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니체의 반문 성육신에 비교되어지는 인간의 스스로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모습의 유비적 개념의 상정이라고 하는 것의 주장과 그에 따른 기독론적인 비판이 성립되어진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어려서부터 현실적인 실제라는 개념의 사실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고민하였던 것인데 그에게는 그 실재론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을 양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이라는 소우주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범주의 상대적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적 초월을 말하며 그러한 보편성으로 모든 개체들 즉 신의 존재까지도 상대적으로 개채화시키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임의적 당위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충실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고통이 있어 그의 학문은 실험에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누어진말들

글쓴이 니체의 신이 죽었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은 내적 초월이라고 하는 자기를 위한 상승의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만 결국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한정적 무한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니체 자신의 보편성이라는 개인적 보편성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니체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그 충격에서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러한 것이 그의 올무가 되었던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모든 니체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무한 특히 자기를 알기 위한 자기를 타자화 하여서 들여다 보게 되는 가운데서 자기를 상승시키는 의지 그것의 자유라고 하는 그러한 언어는 상대적 보편에서 형성되어지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2005/05/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그의 모든 합리성의 전체성은 이미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으로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을 그는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리고 그러한 자신만의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의 한 개체적 보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보편은 그 개체로서의 보편은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것이 그의 사상의 부인되어짐의 실재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사상가의 지위는 그가 끼친 영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저도 니체는 너무 암울해서 가까이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철학수업에서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었고 저도 그를 간략하게 조사해서 발표했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지금도 저는 니체를 잘모릅니다.그의 사상은 정신병력과 관계가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고 병명은 뇌매독 일것입니다.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더라도 떳떳한 결과는 아니죠. 2005/05/23

코코시카 지난번 미가서 문제의 핵심은 주어의 해석입니다.님의 글을 자세하게 독해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결국 '7절은 8절을 위한 예비적 서술에 불과하며 이스라엘 전통에 인신제사는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2005/05/23

코코시카 님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문의 글을 인용했습니다.잘 생각해 보면 미가가 결론을 말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인신제사를 언급했더라도 문제있습니다.많은 고상한 비유와 실례를 들 수 있었을턴데 가장 비인륜적인 경우를 열거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신실한 선지자가 최악을 상상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제3의 해석을 지향하더군요.님에게 묻고 싶습니다.이스라엘에 인신제사는 본래부터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대답한다면 님도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한 사람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합리성의 사실을 규정하는 실제로서의 기준의 실재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합리성의 충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2005/05/26

글쓴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별루 마음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그에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의지적 발상이 니체의 창조적 입장과 동일시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별로인데... 그들을 이해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옳은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의 고뇌를.. 2005/05/26

글쓴이 전 니체가 상당히 똑똑하였다는 것과 그 당시에서는 그에게 답변할 독일 신학의 부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와 같은 그의 고뇌와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의 걱정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저의 행보의 한 방향이 되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2005/05/26

글쓴이 물론 독일 신학의 실재에 대한 부재와 관념론의 사실규명이 유명론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말하지만 결국 니체의 고민과 같이 믿는다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분별하지 못한 불운에서 비록됩니다. 제가 읽은 위 본문에서 소개한 책 63p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5/05/26

목요일, 4월 28, 2005

신명(神名)에 대하여 - 자존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성경해석



하나님의 이름(神名)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을 어떤 분님이 언급하셔서 한번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말씀중에 '흠...그러니깐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분이 존재하심이 확실,100%확실하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함에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함을 나눔이 필요할 것같다는 중심에서 재고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에서 일관하며 합리성 자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견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합리성으로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계시와 그에 따른 합리적 사상적 입장이 절묘하게 합당하게 나타나는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적 판단의 선별되어진 좀더 정확히 특별영감되어진 이성적 산물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합리성에서도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합리성이 있음과 그것의 합당함과 선함도 같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중세적 개념에서의 병행적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또는 야웨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정당함을 읽어내고 있는 학자는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다.(각주1) 그는 성경신학에서 출 3:14절을 읽는 방법의 여러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히브리어 문구는 히브리어 '독도'법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시시하며 여러 해석방법이 있는 가운데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라고 함 즉 독도법에 따른 해석이 있다고 하여도 그중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다른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만약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해석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상대적 해석으로 동의적 차원을 말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말이다(각주2).

이것이 과연 성경해석에서 마땅하게 취할 해석적 당위성을 의식하며 합당하게 선택한다고 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체적 해석과 용납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의 불확실성을 넘어 용납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도 어느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생각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해석적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해석을 취함에 있어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급한 것과 같이 출 3:14절에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말하는 것은 개연적인 사실을 말할뿐이라는 식의 언급은 기각되어진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명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비평학의 기본이며 또한 현대신학에서의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명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계시의 정당한 사실을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핑계치 못한다는 주의 말씀하심의 증거적인 것임을 밝히 말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불가지론 속에서 개연적 당위성만 따르고 있는가운데서의 책망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해석과 그 취사선택에 있어서도 그차제적 정당함을 취하는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건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변론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임의 문제이고 그것이 너무나 합당함에 대한 변론일뿐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이신 자존의 하나님 야웨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합당히 영광을 받으실 믿음의 주이심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믿게 하심을 증거한다.






성경의 자증과 보편성(출 3:14 해석과 성경의 보편성이해글)

그리고 참고로 속칭 '여호와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기 때문이단이다








각주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356p.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357p.



각주2)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당위성이 자증에 따른 것임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어떤 특정 견해가 합리적인 측면의 백과사전적 동의적 당위성을 아무리 갖춘다고 하여도, 자증에 따른 해석 이것이 그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인하여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면, 그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해석' 그 해석의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는 실존적 그 성격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비판적 입장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견해들도 전자의 해석과는 달리, 스스로 그 정당함을 주장할 수 없는 해석과 납득 당위성에 따라서 전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인식이 상대적 고립적 배타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메타적 성도의 인식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원적 분석에서 히브리어 자음과 모음이 같이 쓰여지지 않던 시대와 맛소라 학파의 노력에 따라 '야훼'라는 성경전승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임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만을 가질 뿐 진정한 비판으로서의 정당함과 그것을 납득해야 할 당위성을 그 해석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적 동의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비로소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의 재가를 받은 상대적인 측면을 상대적인 어원분석 주관적 어원분석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그 성격의 특성과 그에 따른 범주에 대하여서 전혀 재고가 없는 것으로 그 비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히 나타내신다고 함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임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 합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함이 정당한 인식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 스스로 자기 계시형식으로서 선택하신 것임을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대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판단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성이 합리성 그 자체에서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출애굽기 3:14절 해석이라는 합리성 자체도 모순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미 그 모순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판단까지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함은 합리성 그 자체적 실존에 본래적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비합리성을 구별하여서 합리성의 실존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메타인식이라고 하는 합리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도움말

도움말1 믿음이라고 함을 좀 제한애서 용납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명에서 파생되는 용납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14:39]

도움말2 믿음은 본질적으로 증명의 사실과의 파생적 관계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변증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에 대한 증거자체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고 함에 대한 부질없는 것에 대한 변명의 형태를 띤 증거로서의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14:44]

도움말3 자존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기 본문의 신명(神名)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해석적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도록 하심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15:04]

도움말4 성경에서 셈의 장막에 야벳족속이 거한다는 말씀은 이처럼 이름을 기반으로 한 실제론적 입장의 사상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신앙과 신학방향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4:51]

도움말5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따른 것은,니체의 메타인식의 증식과는 달리, 성도들의 메타인식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다. 즉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합당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비판의 영역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신앙의 사실을 말함과 그것의 정당함과 절대의 보편성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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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5, 2005

반기독교 선언에 대한 답변

comment : 읽기전 참고글 '반 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의 간략한 해설

서론

개인적으로 작성한 분들과 대화를 거의 해본 가운데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답변하지 못하신 분들중에서 기독교에 대하여서 반대 선언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유감스럽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선언문이라고하면 공감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것에 있어서 반론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답변하지 못한다면 상식적으로도 피해의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다고 함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이미 작성한 자들과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이미 답변되어지고 또한 그들이 답변하지 못한 내용을 언급함에 있어서 몇가지 분명하게 답변을 해두는 것이 참된 정신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되어질 것으로 여겨서 반론되어진 것들을 몇가지 지적하면서 전반적인 성립되어질 수 없는 글이라고 함에 대한 당위성을 보이도록 한다.


본론


선언문 인용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답변

먼저 사용하는 용어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임의성을 띠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나가 의심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임의적 동의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그 보편성이 있음에 대한 동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절대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상식적인 보편이라는 것이 절대의 보편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신의 속성으로써 절대자라고 하는 자의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상식적인 보편으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이 글쓴 자들의 보편관이 편협하다고 하는 것과 성립의 당위성이 임의적으로 세워있으며 절대의 판단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이미 기각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이하의 비판에서도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보편으로써 임의적인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을 상정하여서 특수하다는 형태적 개념만의 정의로써의 기독교의 사상적인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하게 편협한 또한 보편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써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편협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


답변

한마디로 문제제기라고 함이 성립되어질 수 없는 편협하고 당위성이 없는 전제라고 함에서 기각되어질 수 있는 이해의 차원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언급인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라는 언급은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특수성을 다룬다고 할 때에는 상식적으로도 그 특수성이라고 함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상적 비교를 바로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러한 개체적인 특성을 파악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보편적 인식적용이라고 하는 것은 일그러진 보편의식으로 상식적으로도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성과 뒤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적 보편성이해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라는 한 단체적 종교적 개체로서 특수성을 말할 수 있고 여러가지 특수성 중에 하나라는 개념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상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체적 특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편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보편성이다 즉 상대적인 측면에서 있게 되어지는 보편성의 시비가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범주에서 상정되어진 것이고 결코 절대의 범주와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상대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보편성은 자존의 절대라는 개념으로써 상대적인 동정적 당위성에 재가를 부여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그러한 절대 보편성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에서 실존의 실재의 실제적인 자기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현상적 개념으로써 자신의 절대적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내심에 절대적 보편성과 자기 정당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 상대적 보편에서 절대를 판단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분별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당위성 모두를 모을 수 있다고 하여더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적인 범주를 판단할 당위성을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가운데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편을 말하면서도 보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 입장에서는 이미 그 합리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사고는 결여되었다.


이상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되었다는 것과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인식의 기본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인식체의 인식으로써의 이상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판단적 오류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강요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러한 것도 믿지 않아지는 자들의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개연적인 당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러한 상식보편에서의 판단 당위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함이 상식적인 당위성에 그나마 인정되어질 수 있는 당위성이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 상식보편에서는 그 존재의 있고 없음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과 상식적인 존재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적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식보편의 상대적인 판단의 합리성의 판단 또한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상황적 다원적 개념을 고려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개체적 특수성이라고 함과 그 자체적 정당함을 바르게 이해하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을 하고 있다면 상식적으로도 제대로 된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인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핑계치 못함에 대한 의미가 바로 상식적으로도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는 강요가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관념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고 함의 자존적 특수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임의적으로 받지 못함의 고통과 지혜롭지 못한 표현을 할수 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함을 지적해둔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답변

양심의 자유라고 함을 말하기 전에 양심의 자유의 실존과 실재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간과하고 있음에 이미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기독교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의 일부의 모습이며 이러한 것을 전반적인 실체로 임의적으로 인식설정하고 총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잘못이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도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상식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입장이 배타적인 것을 조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포감이나 주입 쇠뇌교육이니 하는 그러한 판단도 역시 보편의식의 결여에 따른 오만과 편견의 합리적 기술로써 자리매김되어질 때에 좀 상식에서도 벗어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더구나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만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한다고 하는 측면을 역으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자존적 절대의 재가는 쌍방의 당위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개념에서 자유하다고 할 때에 오히려 분별없는 당위성을 요구하는 피해의식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답변

먼저 근본주의적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적인 말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 대한 5대교리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독일이나 일부 유럽에서 특히 현상학적 철학의 본산지에서는 어떤 사실을 전제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근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5대교리를 주장하던 자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답변되어질 것이라 본다. 그리고 현상적 개념에서의 근본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함'이라는 것 자체가 전제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변명의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할 때에 그것의 당위성이 절대 타당한 것인가 상대적으로 기각의 여지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별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근본주의라는 말을 쓴다면 미움에 정신이 일그러진 것이라고 할 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은 상대적 보편적 사실 안에서의 가장 큰 보편적인 것은 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상식보편적 개념을 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절대의 자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개념의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의 상당한 교만이며 무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보다도 타종교의 정체성의 당위성이 상대적일뿐이라는 점에서 그 종교적 확실성과 그 실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절대의 자존의 하나님의 실존에 의문과 상대적인 부정과 개연성에서 실존의 당위성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자를 배척하는 것으로써 절대자의 판단이 있음은 당연하다고 함을 말함에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피흘려 싸우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피흘려 싸울만한 사실로써의 종교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실재와 실체가 현상적으로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사실과 정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임의성을 지니고 있고 절대에 비교하거나 사칭한다는 점에서 자존자로서의 하나님의 판단 받음은 기정사실이라고 함도 너무나 합당하다고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선언문 중에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너무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상대방의 동의라는 차원에서 종교의 실존의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임의적 종교에서나 임의적으로 말할뿐이고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종교 즉 기독교는 상대적 현상의 실존을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실존으로써의 현상적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적 표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성립되어질 사실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의 관용을 인정하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미 잘못된 보편의식에서 답변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즉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에서의 범주에서는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위안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를 판단할 때에는 전혀 그러한 인위적 안위는 허무함에 실망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말해두는 것은 그러한 타종교의 관용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상대적 당위성을 얻어야 한다는 그러한 종교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기독교가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은 없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와 절대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반선언문 인용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답변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춘다'고 말하면서 인간성에 사악함을 돌리며 정당화 한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곡해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또한 보편인식이라고 함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자기를 쇠뇌한 결과라는 것을 말할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훼와 예수의 잘못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그 기준의 사실과 기준의 실제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물어두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잘못된 실재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중세에 있어서 안티적개념을 도미니크파에 비롯되어지는 토미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프랜시스파의 입장의 신학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신플라톤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고 오리겐의 입장에서 이미 예비되었던 신학적 관점이다. 즉 그 오리겐의 입장에서는 그 물질적 개념이 사악하다는 개념을 말하는 가운데서 기독론에 임의적인 개념과 영지주의를 낳았고 물질관이 악하다는 개념으로 기독교의 선함을 말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죄악사'를 말하는 경향의 당위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기독교의 잘못된 역사의 실체가 진정한 실제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현대주의적 개념에서 볼 때에 야훼에 대한 실존이해와 그에 따른 불안한 신앙의 해프닝을 기독교의 실체적 잘못으로 곡해해왔고 그러한 가운데서 야훼와 예수의 잘못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

야훼의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이름의 증거와 같이 자존적 존재와 실존의 절대 정당함을 이미 판단가능하다는 점에서 말하는 임의적인 것을 사실화하여서 받는 당위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에 임의적으로 받아 확고함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쇠뇌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쇠뇌한 자의 입장에서 야훼와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정상적인 이성에서 받아야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야훼와 예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서 엉성한 실재로부터의 당위성을 말하는 합리성에 노예적 입장을 취한 가운데서 언급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해받은 영혼이 맹목적 충성이니 변명이니 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피해의식의 반로밖에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야 하며 불쌍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답변

먼저 생각할 것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요한다는 관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 실존과 본성에 대한 불신이 자체적으로 실존과 선함의 당위성을 먼저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당위성을 가진 가운데서 언급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대적 존재라면 존재의 성립당위성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현상적 인식이라고 함에 있어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불신을 강요받는다는 것의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직 존재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아이들처럼 보호와 양육이라고 함을 굴레로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자라지 못한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강요인지 당연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에서 인위적으로 강요의 주장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일뿐이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의 행하심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임의적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핑계할 수 없는 것을 강요라고 핑계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임의적 당위성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걸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구걸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문을 보면서 결론적으로..

임의적 보편의식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상대적 자기 계시의 실존을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왜곡되어진 이성을 본다고 하겠다

오히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없이 상대적인 임의적 기준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고 그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당위성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상식보편에서도 인정되어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제임스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이 있다 물론 그 책 내용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입장을 여기서도 본다. 무엇이 실재이며 실제상황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아주 보편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은 다행이나 그러한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의 한정되어진 것으로 편협을 불러오며 오만의 합리성의 근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이성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가지지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여러가지 합리성과 보편성을 말하여 구색을 갖출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보편성과 합리성이 판단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체적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실제를 말씀하시고 있고 진리의 실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상식적인 보편 판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 상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핑계치 못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받는 자의 정신있는 참된 소리가 되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

번호: 43 글쓴이: 夜客
조회: 515 스크랩: 1 날짜: 2005/03/10 21:38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온통 믿어야 할 것들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도 하나의 꿈일 수 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컴퓨터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엄격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각으로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이 글이 당신 앞에 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실은 모두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것은 자신의 존재성일 뿐, 그것으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보통 '아는 것' 또는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믿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이러한 보편적 믿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이나 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른 주장(믿음)들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현상에 관한 한, 자연과학은 보편적 믿음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보편적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믿음들을 개척해 나아가는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질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이므로, 도덕 관념에 대한 보편적 믿음이 점차 감소되어 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라고 본다. 종국에는 '이기적 욕망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쁜 행위이다'라는 포괄적 윤리관만 남을 것 같다는 예상도 해 본다.

오늘날 도덕관념에 대한 논쟁들을 살펴 보면, 비보편적 믿음은 폭증하는데 반해, 보편적 믿음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의학,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해 여러 가지 윤리적이면서 의학적인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죽음에 대한 정의라든가 장기이식, 인간복제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이것 또는 저것이 옳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 중의 하나는 도덕적 가치관들 중에서 보편과 비보편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안락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의 고통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중시해서 그의 죽음을 돕거나 방치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그가 아무리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생명은 존엄하므로 그의 죽음을 최대한 막는 것이 옳을 지에 대해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보편적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도덕적 가치관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것 또는 옳지 않다고 믿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요 정당한 권리라는 점이다. 이것을 ‘양심의 자유’라고 해두자. 나는‘양심의 자유’의 존재 여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양심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평화 공존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가 모두의 보편적 믿음이 되었으면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믿음이 사악하다고 여기는 관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나 레닌의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소위 “빨갱이”로 몰려서 처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고 매도의 대상이 되곤 한다.(물론 국가의 안정과 공공의 안전을 위한다는 것이 표면적 명분이다.) 북한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사상범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식의 관념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얼마든지 살펴 볼 수 있다.

내 의견으로는,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관념이야말로 불행을 야기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A를 믿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A가 보편적 믿음에 정면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대화와 토론으로 인한 해결보다 처벌이나 공권력의 남용은 단기간 동안의 효과가 나타날 수는 있어도 결국 극단적 대립과 반목을 야기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만성화된다.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진보 기독교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부정하고 예수를 미화함으로써 이를 다시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의 죄(불완전성)를 강조하면서 신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은, 원죄설과 대속 사상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는 말이다.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역사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기독교 자체와 무관한 일이라면 유럽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더 사악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가 사라지면,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믿음은 터무니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기독교가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기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다른 종교나 그 밖의 것들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반면, 기독교가 주는 유별난 해악들은 기독교가 없어지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http://cafe.daum.net/chiwoo




(작성 : 분석가님, 구경군님, 적그리스도님, 몰러님, 엑스님, 오딧세이님 외 다수의 회원 여러분 그리고 모든 반기독교인)





옮긴이 : 夜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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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3월 19, 2005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며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면서도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함에 대하여' 명제적 논리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언급에 대한 사실이 동의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여지를 둘 뿐으로 보여진다.

1. 게할더스 보스의 '이미'와 '아직'에 대하여서

먼저, 게할더스 보스가 주장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1) 좀더 부언적으로 설명한다면, 먼저 'G.보스의 시간관'(각주2)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한 다음에 언급됨이 옳다고 하겠다 이는 분명 시간관에 대한 보편성 이해에 차이에서 합리성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은 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 아니다 '보스'는 그러한 논쟁적인 것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단적으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차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고 함의 말을 같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종말과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그 상관성에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종말을 이루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미래적으로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가운데서는 시간의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는 모순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보편성을 말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함의 피조물적 한정적 의미와 그 규정적 한계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역사라고 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앞과 뒤를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거나 또는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구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바르게 찾아 적용되어진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판단은 시간에 대한 인식적 관점이 먼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2.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견해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

먼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표현은 옳지만 그 판단함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했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고 그가 가르친 내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역사적이라는 개념에서 그냥 예수님을 전제하고 그의 활동적 시기라고 함만 고려할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그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상적 정당함을 의지하는 주관적 시간관의 실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역사라는 개념에서 말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르고 있을뿐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의 시간관에 따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되어질 수 있다.

'지연된 종말론'이라는 것은 일반 역사적 시간관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진 종말론이라는 전제를 말하고 있다 즉 우주적 시간이라고함이 구속적 시간의 당위성에서부터 일반적 시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 시간에서 구속적 시간의 형태에 대한 현상적 개연적 시간관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인식의 불연속성이라는 판단밖에 세울 수 없으며 그 모순이라고 함의 문제라고 함의 인식의 사실을 말하기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자체에서 주목한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지연된 종말론적 입장에서 'already but not yet'문제제기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데, 이는 신학관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다.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았다는 측면이 '이미'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죄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고(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지 않았음), 택함받은 모든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의 관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명제 안에 두 관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미의 관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성경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아직의 의미는 역사적 성취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와 '아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 돛?역사적 성취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택한 자의 구원의 출발점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만 말해야 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다면 '아직'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의 만유적 인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안에서 만물이 함께 죽고 만물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개념이 들어올 개연성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와 아직의 두 개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완성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 求?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4장 종말론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의 요소인 '성전', '제사장', '육적 이스라엘'이 남아 있다. 이것이 지연된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한 이레의 기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해 70이레의 언약을 정하신다. 그중 69 이레동안 성전이 중건되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한 이레 후에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파괴된다.

왜 하나님은 한 이레 동안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 가운데 기독인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이스라엘과 성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심판을 미룰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중에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이미의 관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의 시기, 한 이레 동안 옛 시대(율법)을 묵과하시며 심판을 미루시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한 이래가 끝나자, AD 70년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구약 시대 소돔이 멸망하듯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에서 '아직'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취된다는 관점보다 AD 70년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와 아직" 측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구약 율법과의 관계(특히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의 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옳다.

요한계시록 마저 '아직'이라는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노래한다면, 요한계시록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반증한다.
!




각주1)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89-94.
'그러므로 목회 실제에서는 칭의에 대한 몇몇 안 되는 언급들에서 도출되는 논의는 바울이 변개(變改,conversion) 이후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의 칭의 선언의 범주에서 제외하였을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늘(Wernle)의 견해가 옳고 칭의가 순전히 회고적인 것이라면 *** 칭의와 최후 심판 간의 실제적인 연관성이 끊어지리라는 것은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8:33,34("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의 언어는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선언보다 더 절대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만큼은 절대적이다-보역) 사실 이는 현재 과거 미래의 범주를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사실은 예지(prognosis)와 예정(predestination) 사실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만일 그 범위가 여기 열거된 다른 개념들보다 그 무제한성과 무조건성이 덜 하다면, 칭의는 29절의 '구원의 울타리'로부터 빠졌을 것이다. 칭의는 '디카이오시스 조에스'( , 생명의 칭의)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endless life)이고, 성도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롬 5:18-21)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은, 만일 신적 구원 과정의 중심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도에 의하여 강하게 확언되고 있다.*'
*** 위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칭의가 회고적(retrospective)이라 함은 칭의가 칭의 순간 이전의 죄에 대해서만 발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죄는 칭의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역주)
* 이는 구원의 중심적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절대성을 가지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함의를 가진다.(역주)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93-94. 본문 인용)


각주2)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13-70. 제 1장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참고,

보스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이라는 '바울 신학'은 제 1장 바울 종말론의 구조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시간의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현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시간적 보편성에 따른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관관계를 먼저 구원의 요소로써의 칭의라는 개념으로 그 상관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2장이 되어진다.

'구약의 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antithetical)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울의 기독교가 가진 모든 근본적 특성을 가진 그 전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는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지고 연관된 것(circle as correlated and eschatologcally-complexioned parts)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그저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이를 자세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시도의 종말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신학을 전체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계속해서 점차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념적 반전(a conceptual retroversion)을 통하여 마지막이 진리를 드러내는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26-27. 본문 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다른 저서인 성경신학에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말할 때에 초자연적인 것과 사람들의 사고적 입장을 통하는 그러한 형태로서의 성경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있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의 계시적 이해라고 함과 증거와 같은 인식적 작용을 통하여서 성경이 기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해와 달이 년한을 이루는 보편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해아래 되어지는 것들의 판단의 주권이라고 함도 실제적이며 한정적이면서도 무한한 능력이 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신학적 개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러한 것의 형태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인식의 방향을 고려할 때에 구속적인 성경적 입장에서의 자연신학을 말할 수 있어도 자연신학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성경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야 한다.

자연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보편성 논쟁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지고 그것의 논쟁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비롯하여 여러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에서의 처음 첫 장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라는 측면을 시간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스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이라고 함과 공간이라고 함 즉 세대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전부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을 그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스의 한역 '바울의 종말론'을 번역하신 이승구 박사님은 보스의 실재론을 같이하지 않는 가운데서 본문의 잘못이해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 26) 즉 각주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이분적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구속하심의 시간관이라고 함의 차이를 보스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해의 주관성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시간이해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서의 주관이 아닌 플라토닉 신관을 비롯해서 임의적 당위성에 따른 주관적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때에, 시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써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시간이라고 함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국한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임의적 주관에 따른 시간관에 반대하여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겠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에서의 계시라는 것만 인식하겠다는 측면의 안티적 극단적 보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역할적인 인물을 들 수 있다면 랑케와 같은 신학자이다 그는 시간관이라고 함을 일반 역사적 개념의 입장에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증이라고 함을 판단함에 많은 분별을 요구하게 된다고 하겠다.

보스의 언급에서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세대의 이해라고 함이 어떻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에 따른 사실 규정이라고 함이 역사적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규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로써의 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함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이미'와 '아직'을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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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14, 2005

잘못된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각주2)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각주3)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각주 2번 보스의 견해 해석 참고)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은 세 사람 사이에 있는 통일성으로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언뜻 보기에 니케아의 결정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즉 니싸의 그레고리 같은 인물은 그의 철학적 대전제에 따라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이의 공통성은 세 사람 각각 개인들이 지닌 개체성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본문 인용)

해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서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것으로 역사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비평가 하르낙의 입장이나 또는 화이트헤드 그의 저서인 이성의 기능에서 그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플라토닉이라고 할 때에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르낙의 입장에서는 삼위의 동일 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이라는 언급을 말하고자 하였고 화이트헤드의 경우에서는 플라토닉 이성과 다른 생물학적 이성이라고 함의 다른 보편적 이성을 말하기도 하며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알아간다는 헤겔적 진화론적 사관에 따른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삼위일체로 믿지 아니하고 플라토닉 삼위일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그러나 피크는 궁켈이나 그레스만이 제시한 방법론을 따르는 여러 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많은 연구들이 가지는 중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궁켈과 그레스만은 오경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보다 더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전승의 발달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으며, 가능한 한 그 전승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연구하면서, 히브리시(詩)와 예전(cultic)과의 관계를 조사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가 지그문트 모빙켈(Sigmund Mowinckel)이다. 그는 대단히 명헉한 구약 학자였으며, 시편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 저서를 통해 여러 가지 장르의 문학 양식을 분석하고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초로해서 이 양식들이 포로기 이전에 있었던 성소의 예전과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궁켈이 히브리 종교 문학의 개인적인 성격에 큰 관심을 두었던 반면에 모빙켈은 히브리 종교문학을, 사회를 움직여 가는 추진력의 전개와 더욱 끈질기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본문인용)

양식비평이라고 할 때에 문학비평이라고 함과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인식과 정황이라고 함에 기준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궁켈과 더 나아가서 그레스만은 그것의 역사적인 것으로 적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빙켈의 입장도 그러한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궁켈이라고 하는 자의 중심은 '개인적인 성격이라는 인식'으로써의 개체적인 보편을 말하고 있고 모빙켈은 그러한 개인들의 모임적 인식으로 인한 정황적 세력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양식비평에 있어서 보편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서 철학적 보편으로써의 '하나'와 '여럿'이라는 입장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추구하는 아르케 논쟁에서 그 보편적 실재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있어서 자체적 당위성은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인 당위성의 요구성이라는 선상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비평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허구적 실제로써의 인식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식의 산물로써의 본문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양식비평의 학문적방향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데 이는 성경의 상대성이라고 함의 모습을 불완전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어지면서도 온전하고 절대적인 재가에 따른 완전성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으로써의 성경연구라는 합목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절대자로써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때에 그 합리성의 완성적 개념에서 그 성경의 실체와 원본을 찾지 않고 그 자체의 '완전영감론'을 받으며 그 비합리적인 연속성에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라고 함의 바람직한 성경연구의 합목적성의 방향과 실체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비평학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 자체에서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원본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각주2)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롤록(Robert Rollock)은 1583-1599년까지 에딘버러 대학의 학장이었다. 그의 신학 강의는 1597년 [Treatise on Effectual Calling]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Shorter Catechism concerning the way in Which God from the Beginning Revealed Both Covenants to the Human Race]이다. 1603년 런던에서 영어판이 나타났다. 롤록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언약에 속하였다는 사상에서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본문인용)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사상이라고 함은 상당히 보편을 말하는 가운데서 많이 알려진 개혁 신학적 입장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는 듯한 언급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 안에서 언약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형식을 갖추면서도, 분명 하나님 중심의 형태를 말하면서도 실재에 입각한 실제로는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 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로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본문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로 읽는 법 '독도법'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이 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면서도 이 해석이 상대적으로 용인되어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에는 이 해석은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다른 독도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해석 가능성에만 머물고 있지 그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자신 스스로 취하시는 절대 정당함과 절대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으로만의 가능성이 있는 해석적 당위성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 안에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을 읽음이 더욱 합리성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따라서 여러 독도법의 해석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라는 형식적인 가능성의 한 해석뿐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해석적 하나님의 이름의 해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그 합리성은 있지만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은 빠져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 인식의 합당한 순서가 되어진다. 따라서 언약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실존적 정당함이 되어진 가운데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자존적 삼위하나님의 일체적 증거에서 시작하여서 언약의 실존을 말하여야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참고 칼빈이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요에서 언급한 내용을 소개한다.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주3)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비판- 삼인 1996
김경재 :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교(Utrecht Univ)에서 '그리스도와 동아시아 종교의 만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정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원장. 해석학과 종교신학, 폴틸리히 신학연구, 김재준 평전, 영과 진리 안에서.
폴틸리히의 신학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신론에 해당되어지는 비존재(Non-Being)라는 것에서는 그 합리성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인 플라토닉적 신관에 따른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플라토닉 삼위라는 개념이 이미 그 실재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무제약자와 같은 그러한 철학적 해석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에 동의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플라토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과 같이 전제로 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사실들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그 비판의 합리성을 그의 신관에서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도 먼저 기정된 사실임을 말해둔다.

목차 개요..
1.유일신 신앙에 대한 오해들
유일신 신앙은 하나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신들 중 최고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셈족계 종교들의 문명신 신앙이 아니다.
유일신은 성경적 신앙의 독점물이 아니다.
2.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체험
야훼라는 신이름의 유일신 신앙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유대신비주의 카발레에 나타나는 유일신신앙
3.그리스도교의 유일신신앙과 삼위일체론
신약성경에는 야훼라는 신 이름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유일신 신앙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의 고백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4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5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
6종교 다원주의와 해석학적이론들
7에필로그 종파적 유일 신앙에서 우주적생명의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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