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7월 24, 2007

사유의 행방

다원주의를 논하기 앞서 정초되어야 될 사유(思惟)

다원이라는 것은 여러 기원적 실체 또는 실재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러한 실재의 객관적 근거지움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적 측면에서의 실재의식과 기독교의 실재의식의 상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현상적 측면에서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른 다원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실재를 상관하는 동일범주적인 입장에서 논할 것이 비로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임의적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라 비롯되어진 파생적 언어 '다원', 상대적인 확실성에 따른 개연적 실재일뿐 비로소의 의미적인 실재가 없는 허상적 개념의 실존 언어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태라는 가능성에 있어서의 인식실제인 가운데서 그 존재적 정당함이 상대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실재없는 개념이 바로 알곡이 아닌 가라지일진대, 그러한 임의적 허상적 개념의 실존을 자존의 절대자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실존으로서의 기독교 실재와 동일비교적 개념과 그 상관성에서 다룬다는 것은 범주설정에 모순적 개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상적 실존의 언어로서의 '다원','다원주의'의 객관적 근거지움의 수행적 모순이나 전 사유의 행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설정되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 범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것이 이해되어진다면, 흔히들 말하는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은 의미를 상실한다. 실재 비교가, 정당성 시비에 따라, 불가능한 것을 놓고 동일 범주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비판적 언어로서의 '배타성'을 말한다는 것은 수행되어질 수 없는 모순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각주1).


객관적 근거지움을 앞서는 사유의 실존

이미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의 종언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나 그 앞서 회의주의자들이나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유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없거나 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칸트 이후에는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에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도 상정되어질 수 있는 보편에 따른 당위성에 따라 그 확실성을 다소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시되는 것은 그런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 확실성을 상대적으로 얻을뿐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 자체와 신학의 시녀역활을 했던 철학의 입장들도 개연적 당위성의 충돌일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상의 실존와 해석과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마음에 둘 때(각주2)에 그것으로 인해서 사상의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사상이 비로소 기술되어질 수 있고 그 객관성의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표현됨에 불구하고 절대자의 정당함이 부여됨에 따라서 그 실존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

철학적 당위성도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것이 신학의 본연적인 것과 철학적신학이 아닌 신학적 철학이면서도 철학 그 자체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형에 따른 철학의 요청을 상대적인 측면에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의 인식과 그 사유라고 함의 본래성을 자존의 하나님께 둠에 있어서 새롭게 검증되어지고 실존적 당위성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스콜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신학을 비롯한, 일반 철학적 반성을 비롯한 모든 사유가 본래성으로서의 실존적 재구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각주3)




결론에 즈음해서

사유의 행방을 재구성하며 바르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했다. 그것은 옛부터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상고했던 것이 사유라고 하는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회의주의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확신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보편을 따른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을 취하게 되지만 그런 것이 현대에서는 '여럿'이라는 개념의 존중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말함은 임의적으로 상정했던 '일자'라는 존재적 입장과 그러한 전통에 반대하여 존재의 여럿과 그 기원성을 이야기 하려는 다원적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 언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여전히 '철학의 영원한(?) 현재'로서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라는 시각(視覺)을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유의 행방을 위한 개념의 정당성에 따른 바른 구성적 입장을 말함에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시점으로서의 철학은 확실성을 위한 보편을 지향하게 되었고 그러한 보편으로 인한 사유의 굴절과 관절을 만들어 사상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유의 굴절과 규정이라는 사유의 행방을 규정한 보편인식추구라고 하는 것이, 중세의 보편으로서 공회(Catholic)까지도, 그 전체성이라는 개념이 임의적이어서 임의적 객관적 근거에 따른 개념들로 인해 사유의 행방은 사변으로서의 실재를 대신하고 말았고 그러한 사태는 사유의 행방을 헛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메시아적 사유(각주4)라고 함에 따른 사유의 행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유의 행방의 실존이 사실화되어지며 그 가운데서 일반 사유라고 하는 것도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도 모두 그 존재적 당위성을 비로소 얻게됨을 언급하는 바이다.

모든 사유와 그 기초로서의 개념들이라고 하는 것도 임의적 보편의식에서 법적 당위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얻는 가운데서 사유가 거듭나 바른 본래의 행보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메시아적 사유라고 함은 예수님 안에서 지식의 구별적 사실이라는 것으로 사유까지도 경건의 자리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지성적 독트린에서 임의적 초월이라는 개념까지 잘못되게 사용하고 있는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의 초월이라는 개념이 그런 것과 다르면서도 본래적 개념임을 알 때에 초월을 위한 합리성의 굴절은, 반성된 가운데서, 비로소 다시 경건의 사유의 궁전으로서의 방주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사유의 행방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적 신학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일반 철학적 반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메시아적 사유에서 그 본래적 행방이 비로소 시작되어지며, 철학과 신학의 사유의 행방으로서 마땅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1) 배타성이라는 언어는 동일한 범주또는 범위에서 반대되어질 수 있고 또한 양립되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경향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 기독교의 특수성은 상대적인 범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인 범주로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범주적 특수성이 있다. 이것은 인식의 조건과 방향으로 인해 설정되는 범주에 따른 것이다

http://toagainstism.blogspot.com/2007/06/blog-post.html(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 참고) 그리고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로서 '비로소'는 이런 범주적 개념의 시원성(始原性)과 방향성과 합리성의 굴절적 당위성을 의식해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는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존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상대적 자기 계시이시면서도 절대자기 계시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예수의 뜻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도 왕적 제사장적 직분적 입장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에 따라 사실의 상대적이면서도 비로소 절대적 실존을 말하도록 하심의 정당성을 말씀하심으로 재창조의 본래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 예수님의 죽으심 '대속의 범위에 대한 견해'(**)는 여러가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마저도 앞서 언급한 내용을 부인하는 당위성을 비로소 가지지 않는다.

(**)(코넬리우스 반틸, 변증학, 신국원 기독교문서선교회. pp. 248-250.) 여기에서는 반틸의 일반은총적 입장을 옹호하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인식의 상대적인 개념이면서도 구별되어진 주의 주신 은사로서 해석되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기독교 철학의 실재와 일반 철학적 실재의 실존을 말학에 된다. 그러한 이성적 사유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전인격적인 속성의 하나로서 구별되어지는 대속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존적 자리매김이 이루어진다. 즉 대속은 우리의 사유의 경건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언급되어질 메시아적 사유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반상식이 구별되어지는 실존적 현상에서 세상의 일반 이성들이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위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반틸의 상게서 p270.이하에서 신학에서의 이성의 실존적 위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 이성의 상식적 입장에서 언급되어질 것과 비교되어지는 것도 주목해볼 수 있다.

반틸이 말하는 '자충족적 하나님'이란 상대적인 상식보편에서 실재론에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규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오늘날 반틸의 '계층이론'을 상대적 분리라는 개념의 일방적인 해석으로 바르트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초월개념으로 인한 실재론에서 있게되어지는 하나의 인식 오류이다. 전제는 맹목적 전제가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읽을 때에 합리적 요청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전제적 당위성이 당연히 전제되어진다는 것이다.

각주3)폴 코블리, 기호학, 리차잔츠 그림/ 조성택 변진경 옮김 김성도 감수 김영사 p. 70.

1967년 프랑스의 문예잡지《Quinzaine Littéaire》에 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들이 그려진 만화가 개제되었다. 푸코가 강의하고 라캉은 팔짱을 끼고 듣고 있고 레비스트로스와 롤랑바르트가 듣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이 만화는 기호학적 사고라는 새로운 흐름이 텍스트의 범위를 뛰어넘는 보다 큰 영력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예연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 그림의 공시적 개념적 예측은 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사상들의 관계로 확장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사르트르 이후에 있게되어지는 구조주의적 입장은 성경텍스트 이해의 상위보편적 입장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구조주의적 입장의 기호학적 보편을 읽게 되어진다는 인식의 확장이 예상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신적 속성적 범주라고 하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은 텍스트는 임의적 생기존재론에 입각한 의지적 텍스트와 다른 범주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입장과 사상은 성경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해석의 보편으로서의 구조주의적 보편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재구성적인(reconstructive)(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참고) 상상적 보편에 따른 재구성과는 정당성 시비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즉 인식론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인식론의 차이가 있어왔지만 그러한 것과 달리 본문에서 본인이 언급한 재구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지는 비로소 본래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4)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의식적 비판이 있어왔는데 그것에 대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가 아니라는 입장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조들이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서 게할더스 보스는 메시아 의식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고 그러한 경향들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기독론을 성경신학적으로 전개하여 합당한 기독론적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엠마오, pp. 8-115, p. 116-.)

메시아의 의식적 상대성은 구별되어진 자존적 하나님 자신의 의식으로서의 상대적 표현이기 때문에 인식의 전환이라는 개념과 진화적 발전적 개념의 형태가 비로소 예수님의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인식의 분명해지심의 경험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장에 앞서 이미 그 성장으로서의 성숙을 다 취하신 분으로서 진실되게 성숙이라는 경험을 취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측면의 발전적 개념의 인식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자의식은 비로소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신의 대리인들은 이미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성은 상대적인 개념에서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자만이 그것을 나타내신 예수님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적 권세를 왕적으로 취하시고 그 왕적 권세로 성도들의 제사장적 직분을 행할 수 있도록하심에 따라 메시아 안에서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고의 실존을 사유의 실존과 행방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메시아적 사유라고 할 수 있게 된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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