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2월 24, 2004

On a dishonored time - 시간이해의 정당성 시비에 대하여서..



On a dishonored time - 시간이해의 정당성 시비에 대하여서..

모든 신학은 칸트에게로.. 그러한 구호가 철학적으로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주장할 수 있는 여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치고 '칼 바르트'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러한 말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식의 요소로써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시간관에서 출발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떤 시간관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저의 입장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주관적인 시간관이라고 함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신학이 시간의 보편성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현대신학 자체적 정당함이 상실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물론 현대신학이 부정되었음에 전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부정되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실재를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또 하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부정한 현대신학에서 공통적으로 또는 심도있는 증거적인 지혜가 있다고 함을 형태적으로 가질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또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믿음안에서 구별하여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말해둡니다.

그것이 현대신학을 하신 분들의 선한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중심을 말씀드리는 것이며 또한 대화가 역시 가능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현대신학을 연구하시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성도들이 있음과 있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신학의 부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영향력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서 옳지 못한 자리로 인도하게 되어지는 자리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분별있게 생활함이 옳다는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섬김에서 말입니다.



1. 구체적인 신학에 있어서 시간론에 대하여서...

신학적 종말론과 철학적 종말론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철학적 종말론이라고 함은 임의의 시간이해라고 함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그 시간의 정당함을 잃었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그 이유:

성경에서는 시간이라고 함을 해와 달에 따른 주기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연한을 이루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에서 그 시간의 창조와 함께 그 시간의 정체성과 그 정당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신학적인 입장의 정기철 박사님(독일 보쿰대학.. 호남신학교교수)은 꼭 시간이라고 함을 말함에서 영원과 상관, 상반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당위가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그의 시간철학과 시간신학에 대한 서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정기철, 시간문제와 종말론 한들출판사)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언급이면서도.. 현대신학적 입장의 기본임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되어지는 현대신학자들의 입장을 볼 때에 그렇게 말할수 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일상적인 시간을 말씀하시고 있는 성경의 시간관을 상대적이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의 자체적 정당함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자존적 실존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의 주권적 자기 정당함을 가진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 리츨신학에 따라서 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을 이루었고 이것은 종교개혁당시의 여론이었음에 대한 것도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임을 말할 수 있습니니다.

그렇기에 신론이라고 함의 염증적 개념으로 윤리적 개념에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종교개혁적 실재를 잊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관을 철학적으로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정당함을 상실한 시간관이었던 것입니다.



2. 현대신학에서의 시간관과 개혁신학에서의 시간관 이해의 비교..

게할더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이승구, 오광만역, 엠마오출판)에서 역시 시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서문에서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트만이 신약신학을 바울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을 말함과 달리 두가지를 말할 수 있고 그 두가지는 하나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메시아직(Messiahship)과 종말론(Eschatology)..

메시아직(Messiahship)에 대하여서는 게할더스 보스의 '예수의 자기계시'(이승구역, 엠마오)라고 함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도록 하고 종말론(Eschatology)라고 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역시 그의 종말론이라고 함을 어원적으로 살피면서 시간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칸티안적인 그러한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하는 현대적개념의 시간관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적 개념의 시간관으로 역사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그 종말론이라고 하는 말을 구약성경의 70인역에서 찾게 되어짐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와 상관관계에서 종말이라고 함의 시간에 대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이라는 말은 헬라어 '에스카타이 헤메라이'라는 말로써 창세기 49장에 나타나는 말을 처음 언급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로 '아하르'라는 말이 됩니다.



종말 '아하르' 라는 시간언어 해설

1) 일상적인 연대기적인 시간

2) 결과를 말하는 시간

3) 과정으로서의 시간과 들어감의 시간

4)어떤 바람에 따른 것, hope로서의 시간

등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신학적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종말 시간관의 언어 선택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과정신학이나 진화론적 신학을 말할 때에는 3)의 시간을 말하게 되어지며, 베자와 같이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고자 할 때에도 3)번의 시간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이 시간해석을 한다고 하면 4)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할 수 있는 것들로서 특히 생태학적인 창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가운데서는 그의 선택은 그리고 현대신학자들 중에서 범재신론적 입장을 말하려고 하면 최소한도 3)번이나 4)번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안에 있는 5가지 유개념 중에 정지라는 개념 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수와 운동의 특별한 형태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표상으로 말할수 있다는 점에서 신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으로 영원과 상관되어진 시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말할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플라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다시 교회 초기에 있게 되어지는 알랙산드리아 학파에서의 플라톤철학이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신의 유출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와 다른 점은 신의 영원과 반대되어진다는 그 중세적 개념이 신의 영원이라고 함을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신을 말할 수 없다는 수긍에서 계시라고 함을 그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시간해석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종말이라는 개념이 앞서 언급한 3)과 4)번으로 해석되어질 때에, 그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포이엘바하의 인간론적인 개념에 쫓겨서 원역사를 말하게 된 칼바르트의 잘못된 시간관에 따른 해석이 어거스틴을 따라서 잘못된 시간관을 열여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로도 표현하고 있는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시간의 주관적 실재와 현실적인 일반 시간의 정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인 시간으로써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현실적인 그러한 정황적 정당함을 일반적으로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시는 특별하심의 구별하심의 성별된 시간으로서의 계시를 말씀하셨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칼바르트의 개입하는 '시간'으로 말하지 않고, 일상적인 전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로서 (consummator of God's world-purpose) 오셨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결론적으로..

태양과 달을 만드시고 그들의 주관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하는 것의 기본이 되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에 원역사와 일반역사를 구분하고 그 변증법적인 접근을 하거나 절충적 개념의 임마누엘을 말하고자 하는 그러한 합리성만 따르는 자들의 모습은 그 시간의 부도와, 시간의 인식에 따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잃었음에 대한 것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일상적인 시간으로써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을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통해 말씀하심이 성경의 증거일 때에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함의 모델적 합리성도 이미 부정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고민하여야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능력도 이미 상실되었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구별하게 되어지는 권세로 인해서 공통적인 측면이나 아니면 그 지혜의 깊이의 산물을 구별하여 말하게 되어지지만 이제 본질적으로 어거스틴의 분명하지 못함과 칼바르트의 도망치는 자로서의 변명으로 열려진 잘못된 시간과 그 부산물을 이제 성도들은 닫아야 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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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er Gott und Die Weltanschauung



Der Gott und Die Weltanschauung

foreword.

이 글을 쓰게 되는 것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기독교 유신론'과 '세계관'(Die Weltanschauung)과의 혼동이라고 함의 잘못됨에 대한 고찰과 분석을 통하여서 '기독교 유신론'의 의미와 그것이 결코 '기독교 세계관'이라고 함으로 대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님에 대한 분명한 증거와 입장을 위해서입니다.

그 방법에 있어서 게할더스 보스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신론과 그 실재론에 대한 것과 세계관이라고 함의 실재의식에 대한 것을 비교고찰하도록 하겠습니다.

Der Gott..(기독교 실재론에 대하여서..)

1. 게할더스보스의 성경신학적 신론(Geehardus Vos's the Biblical doctrine of God)

그의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밝힌 것을 차례대로 인용하면서 설명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용)

'둘째 예언은 셈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명칭의 사용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서 벌써 셈에게 축복의 부여가 되는 것이다. 구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능력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이 특정한 족속의 종교적인 소유와 기쁨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깔려있다. 이는 셈족이 여호와를 경배하리라는 것 이상의 언약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어느 특정한 그룹의 하나님으로 불리운 최초의 것이다. 이는 그 족장이(이는 노아를 말함 역자주) 다음과 같은 송영을 말하게 될 정도의 경이적인 일이다. -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그분이 셈의 하나님이 (기꺼이) 되셨도다'이다.

중략

그리고 야벳이 셈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것을 셈과 야벳의 영적인 동거를 말하는 듯이 풍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제적인 정치적 정복이 의도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리적 정복이 야벳에게 종교적인 축복을 결과로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셈의 장막을 취함으로 거기서 구속과 계시의 하나님 되시는 셈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 일차적인 정치적인 정복에 있어서도, 그 결과적인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이 셈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정복은 참 종교가 세상에 편만케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델리취는 인상깊게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족속이다'라고 하였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84-85)

인용 끝)

해설)

여기서는 셈이라는 단어의 뜻이 '이름'이라는 것과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취하게 되어지는 자들에게 기꺼이 하나님이 함께하시며 그들의 하나님이 된다는 것을 성경적으로 찾게 되어지는 중요한 부분이 됩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말하는 입장의 성경적인 근거를 말하게 됩니다.

인용)

'또 성경에서는 종교적 관계에 있어서 '이름'의 삼중적 중요성이 생각되어야만 한다. 첫째로 신의 이름은 신의 성격을 표현한다. 우리가 속성이라고 부르는 것을 구약 성경은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말한다. 그러나 형용적 지칭이 이름 가운데 쉽게 드러난다. 하나님은 거룩하시다. 그것이 그의 이름이다. 그러나 선지자가 그를 '이스라엘의 거룩한 자'라고 말할 때, 그것은 특정한 이름(nomen proprium)이 된다. 다음으로 하나님의 이름은 추상적이고 종합적으로 하나님께서 당신 자신에 대해 개시하신 모든 것을 대표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이름(표호)'(the name of God)이다. 이런 점에서 이름은 그 행위에서의 계시라기보다는 결과로서의 계시와 동일한 것이다. 이는 일반계시와 특별계시 모두에 적용될 수 있다. 하나님의 이름은 온 세상에서 영화로우시다. 경건한 자는 하나님의 이름을 의지하며 그것을 견고한 망대로 삼는 것이다. 셋째로, 하나님의 이름은 실제적으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낸다. 그 이름은 신현에 있어서의 하나님과 동등한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후술하겠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90-91)

인용 끝)

해설)

여기서 하나님의 이름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또한 하나님의 계시와 이름의 동일성을 말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인용)

'..재귀형을 말하면서도 좀 덜 자연주의적인 설명은 쿠엔넨의 것으로 그는 '존재의 원인이 되는 자', 즉 창조주 또는 좀더 역사적으로 말한다면 '자신의 약속들을 성취하는 자'로 해석한다.

이 모든 파생 설명은 완전히 추측들일뿐이다. 구약 성경의 용법 배후에 어떤 원인인가 숨어 있다고 할지라도 이스라엘 종교에서 권위적인 것은 출애굽기 3장의 계시를 통해 고정된 의미이고 우리는 이것만을 다루려 한다. 하나님께서는 모세에게 '에흐예 아쉐르 에흐예'라고 말씀하셨다. 그리고 이 일인칭이 삼인칭으로 바뀌어 Yehweh가 된 것이다. 이 신비의 해답은 그 문장 전체에서 찾아야 한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48)

해설)

게할더스 보스가 앞서 언급한 것들에 대하여서 파생적 설명이 완전히 추측들일뿐이라고 일축하고 있는 것은 그 합리성에 대한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말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이미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에서는 유명론적 입장을 취하는 자들과는 달리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기 때문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인용)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인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 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고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이것은 출애굽기 33:19절의 유비구에서 상당한 지지를 받는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러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입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란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해설)

출애굽기 3장 14절의 말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해석함에 있어서 그 이름을 말하는 것의 의도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병행구에 대한 해석을 하고 있는데 그것은 출 33장 19절이라는 점과 그의 행함에 있어서 주권적인 뜻하심에 대한 증거를 찾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그러한 주권적인 것을 말함이라고 하는 것이 이후에 말하고 있는 말씀들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씀하심에 있어서 본문의 지지를 얻게 된다는 것입니다.

인용)

'하나님께서 자신을 이스라엘에게 주시는 일에 있는 그 주권은 다음과 같은 말로 자주 언급한다.'너희로 내 백성을 삼고 나는 너희 하나님이 되리니 나는 애굽 사람의 무거운 짐 밑에서 너희를 빼어낸 너희 하나님 여호와인 줄 너희가 알지라'(출 6:7)

그러나 다른 한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처음부터 똑같이 강조되어 있다. '하나님이 또 모세에게 이르시되 너는 이스라엘 자손에게 이같이 이르기를 나를 너희에게 보내신 이는 너희 조상의 하나님 곧 아브라함의 하나님, 이삭의 하나님, 야곱의 하나님 여호와라 하라 이는 나의 영원한 이름이요 대대로 기억할 나의 표호니라'(출 3:15), '나의 언약을 기억하노라 그러므로 이스라엘 자손에게 말하기를 나는 여호와라'(출6:5-6,8). 모세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이신 출애굽기 33:19도 여호와라는이름과 연관되어있다. 그러나 후기 성경가운데는 특히 둘째 요소, 즉 신실성의 요소가 여호와라는 이름과 연관되어있다.(신 7:9; 사 26:4; 호 2:20; 말 3:6)'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50-151)

해설)

앞서 인용한 것을 해설하면서 언급한 것과 간이 여호와 하나님이름에서 신실성을 말할 수 있음에 대한 증거들을 본문에서 보스가 찾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G. 보스의 언급에 대한 전체적인 해설과 결론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과 그러한 것이 히브리 본문의 독법의 차이임을 그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있어서 다른 독법들에서는 그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가운데서 그 성별적 개념으로 나타날 수 없은 반면에, 본문에 지지를 받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이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게 되어진다는 것입니다.

특히 보스의 언급 첫번째 인용한 부분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셈족을 통하여서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은 그 히브리어로서의 '셈'이라는 말이 또한 '이름'이라는 뜻입니다.

더 나아가서 '셈의 장막'에 야벳이 머문다고 하였던 것과 같고 하나님이 기꺼이 그들의 하나님이 되신다는 점에서 보스는 아주 심상히 보게 되어지며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이름이 계시의 실존 자체와 동일시함에 대한 것과 그러한 하나님의 이름에 입각한 그러한 입장에 하나님의 언약적 기름부으심이 있다는 것을 말하고자 한다는 점도 밝혀두고자 합니다.



2. 코넬리우스 반틸의 실재론에 대하여서..

'VAN TIL 생애와 사상'(윌렴 화이트 JR/ 강승주역 새순출판사)에서 반틸의 생애에 대하여서 잘 설명하고 있고 그의 조부가 또한 '아프 샤이딩'의 지도자적 역활을 하였던 것과 이후에 게할더스 보스와의 사적인 관계도 말을 하고 있고 장로교회 목사로의 소명을 보스가 예언했던 것도 읽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본 책에서는 반틸의 사진들이 실려있고 간략한 글이 기록되어있는데 본 책의 첫부분에서는 반틸이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은퇴후에도 계속해서 연구했다는 것과 그의 사무실에는 게할더스보스의 사진이 걸려있음과 그를 항상 흠모했음에 대한 것도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렇게 말함에 있어서는 보스의 실재론에 대한 사상적 입장을 반틸이 가장 잘 승계하였다고 하는 것과 그 사상적 실재적 동일한 전제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반틸의 실재론에 대한 것은 두가지 자료를 제시하겠습니다.

첫번째로

'1. 실재
그리스도인이나 비 그리스도인이나 모두 그들 나름의 실재의 본성에 대한 전제를 가진다.
① 그리스도인들은 모든 것의 원인으로서 '자아충족적이신 하나님'과 '우주에 대한 그의 계획'을 전제한다. 여기서 창조주와 피조물의 절대적인 차이가 생기는 것이다.
②이에 반해 비그리스도인들은 혼돈과 태고의 흑암(Chaos and Old Night),또는 어떤 의미에서 '자존적인 물질'을 전제한다.'
(코넬리우스 반틸 개혁주의 신앙과 현대사상(the Reformed Pastor & Modern thought) 이승구역 엠마오출판 46p)

자충족적인 하나님을 말하고 있고 이것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자 여호와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을 반틸이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둘째로

변증학(신국원역 CLC)에서 기독교 실재론에 대한 것을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에서 특히 두번째에서는 계층설에 대한 언급을 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이 계층설(Tow-layrs theory)에서 곡해하는 경향이 많이 있음을 지적해둡니다.

'Tow-layrs theory'는 창조주와 피조물의 구분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창조물과 피조물의 구분이라는 개념은 그 상태만 생각한다면 불가지론적 입장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런데 자존의 하나님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의 정체성을 말하게 될 때에 즉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실 때에 상대적인 것을 가지고도 절대재가 가운데 절대적으로 절대를 나타내실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재가라는 가운데서 즉 기름부으심 즉 그리스도 즉 메시아적인 입장을 말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바로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종교적 성별이라는 개념으로서의 실재를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러한 실재론이라고 함 즉 메시아 안에서 우리 성도들이 믿음으로 의롭다 칭함을 받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믿음으로 행하는 것의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실재의 분리가 아닌 실재의 구별로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재가라는 개념을 말할 수 없으며 또한 그리스도 예수님과의 상관성을 말하지 못하게 됩니다. 형식적인 표현은 있지만 구별할 수 있는 근거라는 것은 성별이 있지 않고 분리(saparate)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보스와 반틸의 실재론적인 입장에 대한 정리

기독교 실재론은 여호와 하나님 이름에 있으며 또한 이것은 실재의 분리라는 상대적 개념에 비로서 출발하는 것이 아니라 예수그리스도 안에서 메시아 안에서 기름부음이라는 성별을 통한 실재의 구별이라는 점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의 실재를 말하는 것을 말함을 의미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칸트이후에 윤리신학이 성립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특히 버틀란트 러셀의 지식론이라고 함에 따른 개념에서 실천이성에 따른 요청적신과 기술적 개념의 신관이 있을 뿐이라는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진리의 본성을 알 수 없다는 것과 같이 불가지론적 입장이면서 사물의 '직접지'라는 그러한 것의 확실성으로 인식의 한계를 설정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과 달리 기독교 실재론은 기독교 유신론적 정당함 속에서 이루어지며 또한 여호와 하나님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그 정체성의 실존의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Die Weltanschauung



1. 세계관이라고 함의 정의를 분석함에 있어서..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의 원어를 전광식 교수님은 독일어에서 'Die Weltanschauung'로 찾고 있습니다.(전광식 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 CUP
12p)

그런데 전교수님은 그 원어분석은 시도하지 않으시고 시대별 인식에 따른 개념의 변천사 개념사에 대한 것으로 시작하시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 대하여서 저는 이 세계관이라고 함의 원어라고 함을 분석하면서 구체적인 언급을 하도록 하겠습니다.

'Die Weltanschauung'이란 말은 합성어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우주라는 말로써 'Die Welt'말과 본다는 동사도 되면서 '직관'이라는 말로써 'Das anschauen'이란 말로 쓰입니다.

이러한 것은 '우주를 직관함에 따른 것으로서의 지혜'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는 점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이라고 하는 곳에서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재론을 찾게 되어지는데 자연이라고 하는 개념이 보편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스스로의 원리'라는 것을 지닌 것으로서의 우주라는 개념을 상정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자연인식이 그의 실재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세계관이라고 함은 아리스토텔레스의 자연학에 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것에서 철학과 그 상관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언어가 바로 세계관이라고 하는 언어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플라톤에 있어서도 마찬가지로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플라톤의 '티마이오스'에서 시간의 담론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변하지 않는 그러한 것에 대한 상념이라고 함이 '이데아'를 상정하게 되었음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세계관이라고 함이 플라톤 철학적 개념과 그 상관성을 말하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더욱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것은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공통적인 개념에서의 언급이 가능한 것은 인간론으로써 두 영혼설을 말함에 있어서 공통적임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사실은 이후에 세계관에 대한 것을 말하는 철학자 '딜타이'가 심리학으로서의 세계관을 말하는 중심을 이해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세계관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으로 상대적 보편이라고함에 따른 상대적 현상학적 실존에 따른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지는 언어라는 개념을 잊어서는 안되는 것입니다.

그리고 한가지 더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인 인식의 기본적인 지식론을 따르고 있다는 점을 지적할 때에 이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것으로서 구별되어질 수 있는 체계로서의 정체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오히려 현대신학에서는 우주론적인 또는 종교철학적 개념에서 또 상황화 신학에서 불가지론적 철학에서 언급되어질 수 있는 상대적 보편실재론에서 기반하고 있다고 할 때에 결코 기독교 실재론으로써 기독교 유신론으로써 대체할 수도 없고 또한 정당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분명히 말하고자 합니다.

2. 역사적인 측면에서..

앞서 아리스토텔레스와 플라톤의 입장이라고 함이 세계관이라고 함으로 말하게 되어질 수 있고 그 실재론이라고 함을 결국 절대자와 상관이 없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칼바르트와 부룬너의 논쟁에서도 보게 되어지는데 사실 칼바르트의 실재론은 역시 비존재영역으로 도망치는 가운데서 역사적 사실에 대한 실존에 대한 증거를 말못하는 가운데서 부룬너적인 입장이 실재론적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같이 받아들여졌던 것입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범신론적인 입장은 세계관이라고 함의 철학적 정체성을 말하게 되어지며 철학적으로 동일시 하는 자들도 있고 칸트처럼 분리시킴에 대한 입장과 그것이 또한 받아들여지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분리라는 개념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이 또한 실제적인가 하는 개념에서 혼동적 개념으로 나타난다고도 할 수 있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는 가운데 개혁신학자들 중에서도 나타나고 있는데..

이러한 것은 아브라함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와 도이벨트와 같은 '도레안티'의 신학적 사조라고 함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기독교 철학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카이퍼의 실재론에 대한 것도 사실은 상식보편적 입장을 취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지적할 수 있고(전광식 학문의 숲길을 걷는 기쁨 CUP p. 29.)
헤르만바빙크는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 입각한 정당성 시비에 대한 분명한 말을 입장을 취하지 않고 하나님의 독립성만을 말하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인용)

'비록 그가 하나님의 이름으로 계시하셨으나 그 어떤 이름도 그를 적절히 표현하지는 못한다 사실 그는 이름이 없으시다. 그의 이름은 기묘이다.(헤르만바빙트 신론 이승구역 크리스찬다이제스트 18p)

역자 이승구씨의 주석 '하나님은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영역 밖에 계신다. 그래서 때로는 구름과 어두움이 그의 임재의 상징으로 쓰여지기도 하였다.

인용끝)

이렇기 때문에 칼빈신학교 교수인 '코넬리우스 야스마'는 헤르만 바빙크의 철학을 세계관으로 표현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코넬이우스 야스마 헤르만바빙크의 기독교 교육철학 정정숙 역 총신대출판부 49p)

현대신학에서도 마찬가지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세계관적인 철학적 입장으로 나갈 수밖에 없고 셀링과 같이 주관적인 개념으로서 동의적 객관을 말해야만 했던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예로써는 어빙 킹과 존 베일리를 지적할 수 있습니다.

어빙 킹(Iving king)은 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신과 상관성이 없는 가운데서의 과학적 입장의 실재를 말할 수 있다는 주장을 했습니다. 존 베일리(John Baillie)도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음을 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기독교문서선교회 19p)




결론에 즈음해서..



기독교 세계관이라는 말이 많이 사용되어지고 기독교 철학과 동일시 하는 가운데서 특히 도예벨트 사상적 입장을 가리치는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러나 카이퍼와 헤르만 바빙크의 실재론적인 입장이라고 함의 일관성이 다소 없는 가운데서의 그러한 실재론이 때로는 세계관으로 해석되어지고 있음을 보는데..

구별적 개념에서의 실재를 말하는 것으로서의 사상적 입장을 말해야 한다는 점을 생각하게 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재가가 없는 가운데서의 보편은 범신론적인 개념을 벗어나지 못하며 상식보편실재론을 따르는 가운데서 진정한 하나님 앞에서의 실재론을 따르지 못하게 되어지며 이것은 언약과 상관관계되어지며 하나님이 그들과 함께하심에 대한 판단까지도 할 수 있다는 점을 말해둡니다.

기독교 유신론에 입각한 실재론은 재가에 따른 정당성에 따른 것으로써 일반 세계관이라고 함의 개념으로 바꾸어지거나 또는 기독교 유신론이라고 함을 그러한 상식보편에서 말하는 실재론으로 개체화 시키는 것과 같은 그러한 자리에 서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 유신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는 세계관(Die Weltanschauung)의 판단의 실재와 다름을 말해둡니다. 더 나아가서 세계관의 실제는 기독교 유신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증거의 정당함에서 그 진정한 실제로써의 사상적 실존을 말할 수 있음을 또한 말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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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23, 2004

기독교에 대한 논쟁점은 무엇인가.


기독교에 대한 논쟁점은 무엇인가..-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견해 소개-


.. 많은 사람들은 기독교의 논쟁점이라고 하는 것을 합리성 그 자체에서 찾게 됩니다. 그것은 합리성에 따른 설득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납득 정당함에 대한 비판을 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이성적 합리성이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상식보편이라고 하는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의 지지위에서 자기 정당함을 추구하는 것인데 이것은 현대의 철학의 방향성이라고까지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20세기의 볼테르라고 불리우는 불가지론자 버트란트 러셀도 그의 서양철학후반에서 합리성의 보편추구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음도 하나의 근거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상대적 보편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보편을 판단하는 그러한 실재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을 반틸 박사는 지적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에 대하여서는 많은 사람들이 알고 있음은 피상적인 경우가 많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그의 스승 게할더스보스의 사상을 현대의 지도자라고 하는 자들이 이해하지 못하고 있음과 그의 사상을 그대로 받은 반틸의 입장도 피상적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반틸의 주장은 하나님과 피조물의 구별이라고 하는 것만 말하고 있는 것처럼 말하며 이것은 현대의 불가지론의 한 표현인 것같이 오해되어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께서 상대적으로 표현할 때에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그 실재를 규정하시는 것과 그러한 실재에 따라 규정되어진 실제 즉 객관적 존재로써 사실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짐을 말하고 있는 불가해성의 입장인 것입니다.

그러한 오해의 이유는 불가해성과 불가지론의 유사적인 개념과 불가지론에서 파생되어지는 가지론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 불가해성에 대한 것과 동일시 되어지는 것과 같이 철학자들의 정직하지 못한 인식과 발상과 표현에 따른 것임을 또한 말할 수 있게 됩니다.



기독교의 논쟁점은 그 하나님에 대한 증거의 실제적인 사실인가.. 아니면 허구인가 하는 것인데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거가 그 하나님 자존의 절대의 정당함 속에서 그 실재를 분별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사실로써 진리로써 증거되어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의 증거와 받지 못하는 자들의 반증시도에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 박사의 '종교심리학' 중 본문 인용..

우리의 주장은 심리학과 형이상학 사이에 있는 가공적인 분리가 만들어지지 않는 경우에만, 경험이 공정하게 다루어지고 또 올바르게 해석될 수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우리는 우리만이 전체로서의 실재에 대한 올바른 견해를 갖기 때문에 올바르게 경험을 해석하고 있다고 주장한다. 더 나아가서 우리는 우리의 적대자와 더불어, 우리가 최선의 실재해석을 갖고 있는지의 문제를 기꺼이 논의하고 있으며 또 심지어 논의하기를 열망하고 있다. 그러나 우리는 종교 심리학자들이 우리를 처리하려고 하는 방식대로 우리를 처리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그들은 단순히 그들과 똑같은 결론에 이르지 않는 모든 사람이, 심지어 경험에 충실하려고 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달리 말해서 그들은 우선 경험이란 말의 의미를 제한시켰으며, 따라서 그것은 우리가 그 곳에 내포되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것을 정의상 배제시킨다. 즉 그들은 우리가 자연인으로서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해석과 결합시킬 수 없는 것은 모두 배제한다. 그들은 자연인을 진정한 종교 경험의 인정 기준으로 삼는다.

정확히 여기서 논쟁점이 있게 된다. 우리는 자연인이 참된 종교경험과 거짓된 종교 경험에 대한 좋은 재판관이 아니라고 주장한다. 우리의 주장은 자연인 자신이 재판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더욱이 만약 자연인을 재판관으로 세운다면 곧 막다른 골목에 이른다는 사실에서, 우리는 이 문제에 관한 우리의 견해를 위해 아주 좋은 변명이 있다는 사실을 믿는다. 만약 자연인을 재판하는 것이 적절하다고 여겨진다면, 가장 극단적이고 이상 야릇한 것으로 주어질 수 있는 증거로부터 배제된 좋은 근거란 하나도 없다. 그러면 종교의 본질이 무엇인지 말할 의미가 완전히 없게 된다. 한 사람은 신을 숭배하고 다른 사람은 악마를 숭배하고 또 다른 사람은 일월성신을 숭배하고 그 밖에의 사람은 자신을 숭배하게 된다. 따라서 숭배행위 자체는 기껏해야 조사할 가치가 없는 완전히 특색이 없는 것이 된다.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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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6, 2004

시간과 영원에 대한 언급



시간과 영원에 대한 언급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의 관계성을 논함에 있어서 시간이라고 하는 것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의 존재에 대한 의미를 먼저 생각하고 난 다음에 그 관계성을 말하도록 하여야 할 것이라고 함을 먼저 언급합니다.

시간이라는 존재를 말할 때에 성경 골로새서 1장 16절에서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하나님께서 '보이는 것과 보이지 않는 것도 모두 하나님께서 창조하신 것이라고 하심을 말씀하심에 따라 시간이라고 함은 하나님의 피조하신 만드신 바라고 하는 것임을 유념하게 됩니다.

이에 비하여서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은 피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속성중에 하나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말씀드립니다. 스스로 존재하시는 참된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을 말할 수 있고 그 영원은 하나님을 떠나서 그 기원을 말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물론 어떤 이들은 이러한 시간과 영원에 대한 것에 대하여서 이의를 제기하실 것이고 특히 시간이라고 하는 것이 피조되었다고 하는 사실을 받지 않으려고 하시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그러나 그 시간이라고 하는 개념이 추상적이면서도 실제적인 개념으로서 그 존재의 기원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 그 이의는 의미를 갖지 않는다고 하겠습니다. 임의로 말하기를 자연스럽게 생겼다고 하는 말은 우리의 일반적인 상식에서 보아도 그 개연성마저 의미를 상실할 수 있다는 것은 종교철학에서도 많이들 언급하고 있는 문제입니다.

신적인 존재의 증명을 말하고 싶어하는 자들의 말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신의 존재를 증명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자체가 의미를 상실한다고 할 때에 그것은 어디까지 의미를 잃고 있고 다만 개연성 속에서 또는 우리 성도들이 증명이 아니라 증거의 차원에서 말할 수는 있는데 신을 증명할 수 있다고 하는 것과 하고자 하는 그 중심은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그러한 방식의 하나로 시간이 존재의 우연성을 말한다는 것도 같은 범주에 속하는 것으로서 취급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나 어떤 존재에 대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범주에서 오류를 범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다시 본론을 이어나간다고 할 때에 지난날 서방신학이라고 하는 것과 오늘날 토미즘을 기반으로 하고 있는 카톨릭신학에서의 시간과 영원의 개념은 오늘날 자유주의자들의 신학사상과 또한 현대주의자들도 함께 잘못된 상관적 의미로 받아들인다고 함을 지적하겠습니다. 그 잘못된 개념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함은 창조된 피조물로서의 시간의 개념을 하나님의 속성의 개념 속에 투입하여서 내재적 성찰을 하려고 하는 그러한 잘못을 범하고 있는 것이 그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신학적, 철학적 용어를 빌린다고 할 때에 불가지론자들. 하나님을 알 수 없다고 하는 자들이 신인식을 하고자 할 때에 극한의 개념으로서 영원이라고 하는 그 개념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투입하여서 신의 속성을 내재적 성찰을 하려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철학적 단성론자들은 피할 수 없는 것들인데, 신학적인 신지식에 대하여서 불가해성을 말하고 있는 자가 아니면, 영원이라고 하는 하나님의 속성에 피조된 것으로서의 시간을 투여해서 해석할 수 밖에 없는 것임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서방신학과 중세철학을 거쳐 카톨릭에서는 이러한 개념을 가지고 신을 인식을 하려고 했는데 그 대표적인 것을 언급한다고 하면 삼위일체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의 위격의 구분이라고 하는 것이 유출설로 말하는 것이라고 할 때에 이것은 단성론자들은 이미 영원에 있어서 시간적인 흐름이 존재하고 그러한 가운데서 신도 분화되어지는 존재처럼 해석하게 되며 그것은 종속론이나 질적차이를 나타내고 있는 삼신정도로 생각하는 경향이 있다고 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하나님, 하나님안에 또는 하나님의 전속성으로서의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에 시간이 창조되기도 전에 이미 그 시간을 말하는 모순과 함께 피조물과 하나님이 영원전에 있었다고 하는 식의 발상은 하나님의 정하신 섭리를 무시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하나님 창조주를 피조물과 동일시하는 것으로서 있을 수 없는, 하나님을 모독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입니다.

이러한 이성들의 장난은 그 심판을 받아 마땅한 것입니다. 그리고 복음주의 또는 개혁주의로까지 언급되어지는 자 중에 영향력이 있는 한 사람을 언급한다고 하면 칼 바르트를 언급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의 기독교를 옹호하고 목회에 있어서 설교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위해 선하게 행하려고 했지만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을 벗어나는 가운데서 오히려 본질을 왜곡하고 말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물론 그는 역시 새로운 현대주의 자로서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은 사실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또한 그러한 자들로서 같은 범주에 속하는 자들이 앞에서 말한 현대주의자들을 말할수 있는데 이들도 카톨릭에 대하여서 비난과 그에 따른 그들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지만 이미 그들과 같은 신학적인 잘못을 범하고 있는데 바로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동일 범주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칼 바르트의 역사적인 상대주의적 비평을 하는 포이엘바의 비판과 비난 속에서 기독교를 옹호하려고 하는 차원에서 현실적인 실제의 역사를 넘어서고자 원역사rgeschichte)라고 하는 개념을 도입하는데 그것은 플라톤의 이원론과 플라톤의 'Phaidros'에 나타나고 있는 광기라고 하는 개념에서 보는 플라톤사상의 회귀적인 것을 착안해서 아주 불가지론자들이 취하고 있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원역사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의 이데아와 같은 영원의 세계에서의 역사라고 하는 즉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현실적인 실제의 우리의 일상적인 삶속에 나타나는 시간과 그에 따른 분화되어지는 역사의 상대성에 의미를 두지 않는 것으로서 기독교를 옹호하려고 했던 것입니다.

따라서 이러한 원역사라고 하는 개념은 하나님의 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시간이라고 하는 것을 같은 범주에서 말하고 있다는 것으로서 그것은 진정 하나님을 피조물과 같이 두는 것으로서 하나님을 욕되게 만들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그들은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다른 곳에서의 개념들로 말하고자 할 것입니다만 그러나 그러한 것은 하나님의 속성을 다른 곳에서 찾겠다는 것으로서 진정한 절대자로서의 하나님을 말할 수 없는 상대주의적인 절대주의 개념의 범부에서 인식하는 다원주의적인 경향과 함께 다른 신을 찾고 있는 우상숭배를 하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음도 생각하여야 할 것입니다.

기독교가 아닌 다른 종교들도 여러 가지 신을 인식할 수 없기 때문에 사람들이 신을 인식해나가는 것에서 신의 성품에 참여할 수 있는 것과 같이 말하면서 그들의 사상을 펼치고 있는데 이는 의미가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인식한다고 하는 것은 본질적으로 내재적 성찰을 통하여서는 가능하지 않다고 함을 분명히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은 저의 글 중에 하나님의 자기 인식과 믿음을 요구하시는 하나님의 신실성에 대한 것을 보시면 참고가 될 것입니다.)

시간과 영원이라고 하는 개념을 볼 때에 칼바르트를 비롯한 현대주의자들과 서방신학과 카톨릭 신학은 사실 이러한 점에서 다른 길을 통한 같은 길과 방향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경향, 신학적인 경향을 통하여서 신교중에서 카톨릭과 이방종교들과의 화해를 말할 수 있는 분위기적인 발언들이 나타나고 있는데 이는 이러한 배경을 의도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자나 모르는 자들이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쓸데없는 분별없는 화해분위기를 언급하는 잘 정의된 정리된 거짓말쟁이들의 지식의 잠고대소리를 내놓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함을 유념하도록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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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의 자기인식과 성경무오(infallible)에 관하여서



하나님의 자기인식과 성경무오(infallible)에 관하여서 일반적인 다른 종교에서나 철학에서는 신에 대한 불가지론을 근거로 해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또는 자신들의 신적인 존재에 대한 정체성을 말하고 싶어합니다. 그러나 그렇게 말하는 것은 모두 다 극한의 개념을 또는 어떤 최대치를 말하는 것과 같은 접근치의 개념을 사용하고 있습니다.

일반적으로 말한다고 할 때에 열심히 도를 닦으면 신의 경지에 이를 수 있다는 현명하지 못한 관념들이라고 하는 것이 그 전형적인 예가 된다고 하겠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의 정적인 동정표로서 사람들의 동의를 받아내는 수준밖에는 타당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필수적인 전제로 함에 있어서 분명한 것은 신을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말에 대한 정당성은 상실된다고 하겠습니다

한마디로 그냥 해보는 소리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지지를 얻는다고 하는 것도 의미 없는 소리가 되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 우리 신앙인의 입장에서, 신학적인 입장에서 신에 대한 인식을 말할 때에 불가지론이 아니라 불가해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즉 하나님을 온전히 이해할 수 없고 알 수 없지만 하나님의 자기 계시에 따른 신지식을 가지게 되는 가운데서 우리 신앙인은 하나님을 부분적으로나마 알 수 있다고 하는 것과 인식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상대적이라고 하여도 그것의 정당성은 하나님이 주신(엡2:8)것이라는 사실에서 기원이 우리의 창조주에게 있다는 것에서 얻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견해임에도 불구하고 절대진리를 말할 수 있는 근거를 찾게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래서 성도들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아주 보잘것없는 말이라고 하여도 진실성을 갖추고 있다는 것을 유념함도 중요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불가지론이 아닌 불가해성의 입장에서 볼 때에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에 대하여서도 하나님의 자기 인식에 대한 유비로서 우리 인생이 하나님을 인식하게 되어진다는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인생의 마땅한 것이며 또한 그것은 강요가 아니라 너무나 순리라고 하는 합당하다고 하는 것을 고백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의 자신에 대한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는 하나님의 '영원한 직관'에 따라 자신을 인식하셨음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우리 인생,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사람들은 유비적인 지식이 형성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을 인식함은 하나님의 영원한 직관의 유비적 형태로서의 믿음, 그 믿음을 통하여서 하나님을 알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내재적 성찰이 본질적인 하나님을 인식할 수 있는 방법이 아닌 것을 언급해두는 것입니다. 이에 대하여서는 논리적 범신론이라고 언급되어지는 헤겔의 신관은 내재적 성격을 통하여서 자신을 확정해나가는 것을 의미하고 그것에서 자기 인식을 하는 것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은 지식으로 하나님을 알 수 있다고 하는 영지주의적 발상이 가능하여지고 사실 이러한 것은 깨달음을 말하는 동방의 이교 즉 불교에서도 접목시키고 있는 것이며 기독교 내에서도 하나님을 믿어 구원에 이르는 것보다는 하나님을 지식적으로 아는 것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자격이 있는 것같이 말하고 있는데 이는 잘못이라고 함을 지적하겠습니다.

물론 하나님을 믿는 사람이 제한적이라고 하여도 지식을 추구하고 그것이 주안에서 신앙고백의 내용이 되어야 한다는 것은 사실이지만 그것이 믿음을 대신하거나 의미없게 만드는 것은 아니라고 하는 점을 언급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처럼 하나님을 인식하는 방법이 믿음을 통하여 가능한 것이라고 할 때에 학문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회의를 통하여 하나님을 알겠다고 하는 것은 그렇게 현명한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이제 본격적인 차원에서 성경무오(infallible)를 말하여야 하는데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하게 된다고 할 때에 성경의 원본이라고 하는 것을 하나님께서 감추신 의미를 깨닫게 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성경원본이 완벽하다고 할 때에 그 성경으로 하나님을 지식의 범주 안에서 가두고 싶어하는 경향들 즉 믿음으로 하나님을 인식함에 있어서 방해가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그렇게 감추신 것으로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무분별한 성경숭배사상을 막으시는 것으로도 언급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옛날 놋뱀(민 21:9)을 숭상하는 가운데서 요시아가 그것을 없애버렸던 것(왕하 18:4)과 같은 맥락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성경원본에 있어서도 이러한 하나님의 뜻하심과 정하심을 생각한다고 할 때에 여자적 축자적 영감만을 말할 수 있는 성경의 무오(Inerrancy)를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도 조심스럽게 주장하고 싶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고 할 때에 그 성육신과 같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같이 성경의 주어지심이라고 하는 것도 다른 고전과 같은 운명이라고 할 수 있는 비판의 여지와 핍박의 여지가운데서도 온전히 주의 뜻하심을 나타내는 것이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성경으로서의 자신을 말할 수 있다고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이것에 대한 근거적 자료를 제시한다고 하면 헤르만 바빙크의 사상을 인용하고 있는 최갑종 교수의 입장을 고려할수 있다고 하겠습니다.(최갑종, 나사렛 예수, 기독교문서선교회 40p -바빙크에 대한 언급중 각주31 참고- ) 따라서 이러한 것을 볼 때에 우리가 말하는 성경의 무오라고 하는 것은 여자적 축자만을 고집하는 성경의 무오(Inerrancy)를 말하기 보다는 그러한 여자적인 축자가 영감을 받았다고 하는 차원을 포함하면서도 완전영감을 이야기하게 되는 성경무오(infallible)를 말하여야 할 것을 언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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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경의 자증(自證)과 권위(權威)



지금까지 영혼에 대한 해석학적인 측면에 대한 것과 성경역본에 대한 것 그리고 성경역본의 우위에 관한 것, 또한 이제 성경역본의 우위에 앞서는 성경의 권위와 성경의 해석에 관한 것으로 토론이 진행되어지고 있습니다.

대화중에 좀더 근본적인 사상들이 전개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타당성을 확보하기 위해 언급되어지고 있는 것이 지금의 선생님의 말씀하심이 준비되어진 것으로 봅니다.

선생님의 질문에 대한 것을 제가 이해하기로는 성경의 해석이 누구에게 있는가 하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즉 권위의 문제라고 하는 질문을 하신 것으로 봅니다. 그리고 그 예로서 사전적 용어로서의 '해석'을 "개인의 신념이나 판단이나 환경에 비추어 이해하다"로 말씀하셨습니다.

저는 이 사전적 의미를 부정합니다. 이러한 것은 성경을 성경의 자증에 따라 해석하지 않고 철학적 사고의 중심으로 해석하겠다고하는 전제적인 의미를 포함하고 있다고 하겠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말씀을 드리는 것은 독일에 관념주의적 사상과 실존주의적 사상의 결합이라고 할 수 있는 현상학적 접근에서 공적을 세우고 있는 하이데거의 사상에서 볼 수 있는 인식에 관한 철학적 배경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기 때문입니다. 물론 그 앞서는 칸트적 인식의 기본방향을 설정할 수 있는 사상을 전제한다고 말할수 있기 때문입니다.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을 믿지 않으신다고 하면, 이러한 철학적 배경에서 언급되어지는 것을 선택할 수밖에 없다고 함은 이해되지만 이해된다고 해서 타당성과 그에 따른 합리성과 의로움을 말할 수 없다고 함을 분명히 해두고 싶습니다.

위에서 말한 것의 한 예로서 김영한 교수는, 철학자 하이데거의 시간과 존재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는 것에 대한 평가로서, 이러한 말을 그의 저서에서 말하고 있습니다.

"직관"과 "사유"는 둘 다 이미 떨어져 나간 이해의 파생체이다. 모든 현상학적 "본질적 직관"은 실존적인 이해에 기초된다 라고 하이데거가 말한 것에 대하여서 김교수는 현상학에 있어서 훗설과 비교하여 이러한 말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하이데거는 훗설이 수행한 자연적 태도 속에서 선입견에 얽혀 있는 인간적 자아와 선험적 인 규정의 처소인 순수한 자아 사이의 구분을 거부한다. 지정한 이해의 수행은 사실적 현존재의 실존적 가능성 속에 있지, 인간적 자아를 현상학적 환원으로 제거한 순수자아의 지향적 분석속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김영한, 하이데거에서 리꾀르까지 박영사 p10)

저는 훗설과 하이데거의 사상을 받아들이지 않습니다. 그러면서 이 두 사람의 인식에 관한 것을 생각할 때에 하이데거가 현실적인 해석에서 가장 독보적인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데 그의 견해를 생각할 때에 그러한 견해로써 성경해석이라고 하는 차원을 고려할 때에 더욱 심각한 잘못을 범할수 있다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제가 이러한 자들의 사상을 들먹이고 있는 것은 선생님이 말씀하신 사전적 의미의' 해석하다'는 말의 정의가 순수한 해석의 정수를 말하기보다는 이러한 철학적 배경을 무시하지 못하고 있다는 가운데서 그 정의의 정당성이 없다는 것을 말씀드리고자 했습니다.

이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으신다고 하면 사실 선생님께서는 범신론적인 사상에 많이 열려져있을 것이고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 따른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과 성경에 영적인 감동을 동일시하실 수 있는데 저는 그것에 대하여서 저는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습니다.

개혁신학에서도 사실 두 가지 견해가 있습니다. 계시에 대하여서 그 계시가 형성되는 계시철학에 대한 유무를 말하는 것이 그것인데 저는 그 계시철학이 있었다고 할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이러한 계시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신지식으로 주어진다고 할 때에 그것은 이미 철학적 형태를 입고 있다고 하여도 신학이며 신지식이라는 사실과 분명히 해두는 것은 그것을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에 의해서 결코 오류가 없었다고 함을 믿고 고백합니다.

이 믿음의 정당성은 하나님의 자기이해에 따른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로서 그 정당성이 확보되는 것임을 간략히 말씀드리고 여기서는 구태여 언급하지 않겠습니다.

이어서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계시철학, 신지식으로서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완전한 영감속에 기록되었다고 하는 것과 오늘날의 하나님의 말씀을 증거하는 자들이 받게 되는 하나님의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같은 하나님의 영감이지만 그 질적인 차원에서 다르다고 하는 것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오늘날 설교를 하는 목회자가 받는 영감은 그 사도의 성경기록당시의 받는 영감과 다르다고 말씀드리겠습니다. 계시로서의 성경을 기록한 사도들이 받은 영감은 결코 흠이 없는 완전한 영감이고 오늘날 설교자들이 받게 되는 영감이라고 하는 것은 죄로서 오염되어질 수 있고 완전하지 못함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 엡4:11에 따라서 순종하는 마음에서 설교를 하고 그 부족한 자들 실수 할 수 있는 자들의 말이지만 하나님께서 말씀하시고 온전히 우리를 가르치실 수 있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기 때문에 설교를 하나님의 말씀으로 받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가르침이 완전 영감에 따라 이루어진 성경에 검증을 받는 것이 합당하기 때문에 설교를 듣는 성도들은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설교를 듣고 성경말씀에 합당하다고 믿어질 때에 아멘으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입니다. 만약 성경을 정도의 차이가 아니라 본질적인 차이에서 잘못 가르치고 설교할 때에는 거절할 수 있는 받아들이지 않는 신앙양심을 가지고 설교자가 아니라 하나님 앞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성경의 기록과 그 기록한 자들의 계시철학적 계시신학으로서의 신지식을 현실적인 실제의 사람들 오늘날 사람들의 해석과 동일하게 본다는 것은 잘못된 생각이라고 할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그리고 질문하신 것에서 몇가지 언급을 한다고 하면 이미 의미를 상실한 것으로 말씀드리면서 저의 견해를 말한다고 할 때에 요한복음 1장 1절에 나타나고 있는 말씀은 무신론자들이나 스피노자를 중심으로 하는 스토아 학파에 언급하는 범신론적인 사상이 하나님의 '무소부재'(無所不在)라는 사상과 함께 해석되어질 수 있는 것처럼 잘못된 사상으로 성경에 들어온다는 것을 이미 아실 것으로 생각됩니다.

그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성경의 자증적 차원에서 해석하지 않고 철학적 사상의 배경을 가진 사전적 의미를 따른다고 하면 성경을 하나님의 영적인 감동에 의해서 해석한다는 것은 거짓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게할더스보스의 증거.. 셈의 하나님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 읽게 되어지는 것은 셈의 장막에 야벳이 거하게 되어지는데 이것은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그분이 셈의 하나님이 기꺼이 되셨도다 라는 말씀을 의지해서 언급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이룬다고 함을 마음에 두게 된다. 셈의 하나님 셈이라는 것은 이름이라는 뜻으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과 그 실제론적 기반이 기독교 실재론의 모체임을 말씀하시고 있음을 증거하고 있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자존의 하나님과 그로부터의 정당함을 찾는 그러한 자의 모습으로서의 정체성과 실재를 찾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다.


이것은 이단단체인 '여호와의 증인'들과는 전혀 다른 것이다 그들은 삼위일체를 부인하고 있다 진정 여호와를 의지하는 자였다고 한다면 그 상대적 비합리성이라고 하는 개념에서의 실제를 찾는 가운데 삼위일체를 부인하는 죄악을 범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참되게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정당함을 찾는 자들에게 여호와 하나님께서 그들의 하나님으로 기꺼이 되어주심이라고 하는 것을 말씀하시고 있다 이것은 예수님을 믿는 자가 바로 그러한 중심으로 믿는 가운데서 진정한 신앙의 모습으로 설 수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과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라는 것이 온전히 증거되어지는 가운데서의 모든 개혁교회와 복음주의적인 교회의 진정한 연합이 있게 되어질 것과 보편교회의 교제와 연합의 실제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게할더스 보스의 본문을 통한 증거는 상당히 중요한 의미와 실재를 나타내고 있다.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

“둘째 예언은 셈과 관계되어 있다. 여기서 여호와라는 명칭의 사용은 의미심장하다. 사실 이 이름은 그 자체로서 벌써 셈에게 축복의 부여가 되는 것이다. 구속의 하나님이신 여호와의 능력으로써 하나님 자신이 이 특정한 족속의 종교적인 소유와 기쁨이 되어주신다는 뜻이 깔려있다. 이는 셈족이 여호와를 경배하리라는 것 이상의 언약 형식이다. 그리고 이는 성경에서 하나님께서 인류의 어느 특정한 그룹의 하나님으로 불리운 최초의 것이다. 이는 그 족장이(이는 노아를 말함 역자주) 다음과 같은 송영을 말하게 될 정도의 경이적인 일이다. -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문자적으로 옮기면 이것은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이는 그분이 셈의 하나님이 (기꺼이) 되셨도다”이다.

중략

그리고 야벳이 셈의 영토를 침범한다는 것을 셈과 야벳의 영적인 동거를 말하는 듯이 풍유적으로 이해할 필요가 없다. 실제적인 정치적 정복이 의도된 것이다. 그러나 궁극적으로 그러한 물리적 정복이 야벳에게 종교적인 축복을 결과로 가져다 주게 될 것이다. 셈의 장막을 취함으로 거기서 구속과 계시의 하나님 되시는 셈의 하나님을 찾게 될 것이다. 이 예언은 그 일차적인 정치적인 정복에 있어서도, 그 결과적인 영적인 의미에 있어서도 그리이스와 로마인들이 셈의 영토를 정복함으로써 이루어졌다. 그리고 이런 정복은 참 종교가 세상에 편만케되는 일에 가장 중요한 요소들 중의 하나가 되었다. 델리취는 인상깊게 말하기를, “우리 모두는 셈의 장막에 거하는 야벳족속이다”라고 하였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84-85)

금요일, 2월 13, 2004

벨라 바이스마르(Bela Weissmahr)의 변명에 대하여



벨라 바이스마르 교수는 말하기를 '모든 상대주의자는 암묵리에 절대적으로 타당한 언명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 아래서만, 그는 상대주의를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제 아래서만 절대적으로 타당한 인간인식이 있다는 견해를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전재 아래서만 그는 논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이러한 것은 상대적 보편이라는 개념은 상대적 판단과 그것의 여지라는 측면에서라도 개연의 실재성으로써 자존의 절대라는 개념에 대하여서 열어놓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의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기독교적인 측면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주의 복음은 핑계할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말씀하심의 의미가 되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면서 벨라 바이스마르는 이러한 언급을 하고 있다

'그러나 상대주의자가 자신의 입장을 철저히 지킬 때 그는 이 모든 것을 체념할 수가 없다. 나아가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인식이 사실상 상대적일뿐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상대성을 결코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체념할 수없다는 개념에서 그러한 판단의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너무나 자의적인 당위성 주관적 당위성이라고 함을 인정해야 한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 따라서 그러한 합리성의 전환이라고 함의 정체성에 실제의식을 말 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것이다.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에서 읽게 되어지는 사실과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성을 확보해야 하는데 주관에서 객관이라는 정적인 동의성을 말하는 것일뿐 자체적 정당함을 부여하는 자존의 절대자의 정당함에 비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비트겐슈타인의 명제에서도 인정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즉 벨라 바이스마르의 변명이라고 함은 합리성은 있지만 그 합리성 자체의 정당함이 실제가 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 존재의 기각을 의미한다 특히 자존의 절대자가 부여하는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는 증거에 상대적인 다른 발상을 실제의식을 가지지 못한체 말한다는 것은 성립되어지지 않음을 스스로 인정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 벨라 바이스마르의 글 인용

“그러나 동시에 적어도 극단적인 형태의 상대주의는 중대한 오류라는 것을 확정해 두어야겠다. 그에 대한 가장 명백한 증명은, 상대주의는 사람들이 그의 원리를 그것 자신에게 적용시킬 때 스스로를 지양한다는 것이다.

모든 상대주의자는 암묵리에 절대적으로 타당한 언명의 가능성을 전제하고 있다. 이 전제 아래서만, 그는 상대주의를 참이라고 주장할 수 있으며, 이러한 전제 아래서만 절대적으로 타당한 인간인식이 있다는 견해를 환상이라고 부를 수 있으며, 또한 이러한 전재 아래서만 그는 논증할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나 상대주의자가 자신의 입장을 철저히 지킬 때 그는 이 모든 것을 체념할 수가 없다. 나아가서 우리에게 주어져 있는 인식이 사실상 상대적일뿐이라면, 우리는 우리의 인식의 상대성을 결코 인식할 수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인 것으로 인식하는 것은 더 이상 상대적일 수 없는 한 입장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경우 이 절대적 관점이 명백히, 즉 그러한 것으로써 또한 의식되어야 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않는다.)”(B. 바이스 마르(Bela Weissmahr), 철학적 신론(Philosophische Gotteslehre) 허재윤 옮김 서광사 27p)

진화론과 창조론의 합리성에 대한 소고..



진화론에서 창조론이라고 하는 입장을 비판하고 있다고 할 때에 그러한 비판의 실제적 의미는 상실한다고 말할 수 있다.

비판할 수 있다는 것과 비판의 정당한 성립이라고 하는 것은 다르게 나타 날 수 있다는 것은 전혀 객관적인 입장이다.


1. 진화론의 창조론 비판에 대하여서..

진화론에서의 창조론을 비판함에 있어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것 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러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그 객관성을 전혀 보장하고 있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할 수 없을 때에는 그 비판의 실제도 의문시 되어질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러한 진화론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객관성을 취한 합리성이면서도 그것은 상대적보편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주관적 객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밖에 없다. 이러한 것은 주관적 객관이라는 개념을 보완할 수 있는 객관적이라는 동의적 정당함을 의지하기 마련이다.


주관적 객관이라고 함으로 진화론을 평가하는 것은 이미 하나의 진화론의 합리성에 비판적 실제를 말할 수 있는 또 하나의 공인되어질 수 있는 객관적인 실제의 판단이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은 메를로 퐁티의 눈과 마음이라고 함에서 밝히고 있는 과학비판이 되어지기 때문이다.(각주1)




2. 창조론의 실제이해..

창조론도 과학적 범주로서 제한되어질 수 있고 형태적 상관성을 생각할 때에 메를로 퐁티의 판단이라고 함에 있어서 창조론적인 입장을 실제적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평가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창조론을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과학의 형태를 취하고 표현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창조론이라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행함이라고 하는 특수성을 가지며 그 특수성이 상대적 보편을 판단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즉 절대보편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즉 합리적 비합리성이 있다는 그러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재가적인 차원에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진 증거로서 나타나는 상대적인 입장이라고 할 때에 그 앞선 판단 합리적 비합리성이라는 상대적 보편의 판단이라고 함의 종속적 의미를 가지지 않는다. 자존의 절대자의 실제적 정당함을 부여받은 것으로써의 상대적 비합리성은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게 된다.


즉 창조론은 과학적으로 비합리적인 표현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자체적 정당함을 표현하는 가운데서 상대적 보편이라고 함의 기본적 정체성으로부터 동의를 받는 정당함을 의지하는 진화론적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다.



3.more..

과학의 이러한 상대적 보편의 판단을 받게 되어지는 그 실재의식은 시간의 보편성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지는데 시간은 아리스토텔레스를 비롯하여 시간의 실재성에 확신을 가지지 못하였고 이러한 시간은 운동과 인식의 상관성 속에서 진화론의 합리성의 실제를 규정하는 인식의 주체적 정당함을 부여하게 되어지고 있습니다.

인식의 주체.. 인식의 객체.. 모두 상대적인 판단의 실제에 따른 것으로 상대적 판단과 상관없이 자존하는 절대자의 주체적 인식과 객체적 증거라
고 하는 것을 판단하는 것은 이미 그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가질 수 없는 실재의식의 결여에 따른 것임을 말할 수 있다.





4. 결론에 즈음해서..

진화론이라고 하는 것보다도 더 깊이 이야기 되어질 것은 진화론의 합리성과 그것을 지지할 수 있는 사상적 실재가 되어지는 역사와 시간의 비판이 이미 되어지고 있고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지 못한다는 것 그것을 마음에 두는 것이 진화론과 창조론의 과학적 증거들에 대한 시비를 앞선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일반적으로 칸트이후에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함의 보편적 판단하에 있어야 한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이미 이러한 것은 인식론적 규정 즉 인식론적 존재론의 자체적 정당성이 없는 합리성이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됩니다.

한편 창로론도 그러한 인식론적인 측면에서의 상관성이라고 하는 특성적 비판을 받아야 함에는 당연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그러한 비판에서 비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을 규정하는 상대적 보편인식으로서의 시간의 실재인식은 자존의 절대자의 상관성에서 규정되어지는 창조론의 파생적 정당함을 입어 상대적 비합리성이 정당함을 입어 절대적인 합리성으로 자체적 정당함을 입음을 비판할 수 없는 것입니다. 그 비판의 실제를 상대적 보편에서는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게 되어지는 비합리성의 표현을 정당하게 사용하시는 절대자의 자존의 절대정당함은 부인되어질 수 없는 것입니다.

창조론이라고 함이 비합리성이 있으면서도 정당하게 받아야 되어지는 것은 과학의 판단하에서 비로서 그 실존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하나님의 실존에서 비로소 실존을 말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각주1) 메를로 퐁티는 『눈과 마음』에서 다음과 같이 관찰한다. “과학은 사물들을 조작하고 그들에게서 그 생명성을 사상시켜버린다” 현상학은 과학의 양심(conscience)으로 작용하면서, (과학적으로 규정된) 이른바 객관적 범주로부터 눈을 돌리도록 해주어 그것이 원래 파생되어 나온 우리의 체험을 상기할수 있도록 해준다. 메를로 퐁티는 『지각의 현상학』서문에서 다음과 같은 설득력 있는 말로서 자신의 비판을 표현한다.

‘나는 내 자신을 단순히 세계, 즉 심리학적, 과학적, 그리고 사회학적 탐구의 대상으로서만 이해할 수는 없다. 나는 내 자신을 과학의 영역 안에
가두어둘 수는 없다. 모든 세계에 대한 나의 지식, 심지어 나의 과학적 지식 역시 과학적 기호들을 사용하는 나의경험으로부터 얻어진다. 과학의 모든 보편성을 직접적으로 경험된 세계 위에 성립되고 그리고 만일 우리가 과학 자체에 대한 엄밀한 반성을 수행하여 그 의미와 범위를 정확하게 평가한다면, 우리는 세계에 대한 기본적인 경험으로서 과학은 이차질서(secondorder)의 표현이라는 점을 재 환기함으로써 출발할 수 있을 것이다.

과학은 그 본성상 우리가 지각하는 세계와 같은 존재의 형식으로서의 의미는 지니지 못해왔으며, 앞으로도 결코 그런 지위는 지니지 못할 것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세계에 대한 추론 내지 설명이기 때문이다.

중략

지리학이 어떤 지역에 관해서 우리에게 숲과 대초원과 또는 강이 무엇인가에 관해서 미리 가르쳐주는 것처럼, 모든 과학적 도식화 역시 사상자체에대한 추상적 파생적 기호언어이다’

현상학의 소관사는 과학을 비판적으로 음미하는 것인데, 그 이론적 구조는 선천적(a priori)인 기반, 즉 메를로 퐁티가 우리의 ‘활동적 지향
성’이라고 말한 전 이론적 체험행위에 그 기반을 두고 있다.

메를로 퐁티의 과학비판은 자연과학의 위기는 객관성이라고 하는 그 ‘자연적 태도’가 세계에 대한 인간의 지향적관계를 ‘인위적으로’ 균열시키고 있다는 것을 망각하는 데에 유래한다는 후기 후설의 논거에 크게 빚지고 있다. 현상학은 이러한 균열을 폭로하고 거기에 항변한다.(리챠드 커니, 현대유럽철학의 흐름, 임헌규외. 한울출판사 pp. 106~107)

Author



이명신
강도사
대한예수교장로회 (고신)

계명대학교 자연대학 수학과 졸업
고려신학대학원 신학과 졸업

myoung shin lee
I am a preacher in Christianity
Keimyung University
korea Theological seminary in south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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