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8월 18, 2005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성도라면 주님의 눈물과 고통을 마음에 세겨야 할 것이고, 그러한 중심이 모습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숙의 자리에 서는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어떤 말보다 앞선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과 눈물이라고 하이 기만적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러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분별없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중에서 인용하면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답변으로써 이 합일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것은 두 양성 또는 두 위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하나가 되었다는 개념으로 위격의 변화로써의 단일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시간이 되어 합쳐지거나 또는 이미 나누어진 존재라는 그러한 전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를 겪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열어놓고 있는 시간의 과정에 따른 신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론의 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니케아 칼세톤신조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칼세톤 신조에서는 양성의 이중성에 대하여서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각주1)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의 위격에서도 동일한 입장(각주2)을 취하고 있습니다.


1. 니케아 칼세톤 신조에 대한 이해

니케아 칼세톤 신조는 라틴 신조로써 나중에 연합되어진 가운데서 서로 수용되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출발은 동방신학의 유출적 개념에서 단성론에 대한 입장과 달리하는 입장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전통적으로 영원이라는 것과 시간이라는 것이 대립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방에서는 영원에서 시간의 발출을 말하는 것과 그 존재의 발출을 말하는 식으로 이해해왔고 라틴에서는 그 시간의 판단하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영지주의적 개념은 정죄하는 경우로 봅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영원에 비교하여서 해석할 당위성이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 인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고(각주3) 이미 신학적으로는 칼바르트를 비롯한 주관적 시간관을 말하고 있고 철학적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입장에서 그 정오의 사상에서 시간을 주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가운데서 니체를 비롯한 플라토닉 아포리스트들은 시간의 창조보다는 영원이라는 개념도 시간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 영원을 해석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놓았던 것입니다.(각주5)

이러한 가운데서는 이제 니케아 칼세톤의 신앙고백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시간의 종속되어진 자로서 이해하고자 하고 메시아의 인식의 발달을 말하는 현대신학적 입장이 득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위격적 양태론에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서방라틴신학적 안티로의 개념을 종교개혁의 실제로 잘못보는 가운데서 동방신학적 건전함을 말하는 경향도 이러한 길에 한몫을 했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니케아 칼세톤 신조의 변경 요청들에 대하여서

현대철학과 신을 말하는 철학적 신론을 따르는 현대신학에서는 시간을 하나님이 창조물로 봄에 대한 것에대한 당위성을 임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서의 당위성의 가능성이라고 함을 의지하여서 시간에 따른 그러한 시간에 따라 변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고 시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칸트의 인식론의계기로서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을 말할 때에 그것의 주관적 당위성을 놓은 자가 바로 니체가 되어지며 그러한 존재부정이라는 개념에서의 유출적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고 이것은 신플라톤적 해석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으로써 플라톤적 신학의 당위성까지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유출을 말함에 있어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존재의 이동이라는 개념에서 물질의 이동이라는 것에서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유출설과 회귀사상은 시간론을 배제할 수 없고 그러한시간론은 존재로의 회귀와 존재의 도달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라고 함이 흐름을 전제로 하여야만 하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합일이라는 개념을 성도에게는 성화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존재의 합쳐짐이라는 개념으로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고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니케아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을 부인하고 시간의 종속물로서이 인조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신이 없다 신이 죽었다는 사신신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사회구원적 개념으로 기독교의 당위성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사회에 비로소 두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사고의 변화라는 개념은 그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시간창조를 믿던지 아니면 시간으로써 묘사되어지고 변형되어진 거짓된 신 또는 죽은 신으로 인한 인위적 발상의 인간들의 모임으로 전락하든지 그러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니케아 칼세톤 신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가톨릭이라는 것과 그들의 가르침의 연관성을 따른다는 또는 그러한 잘못된스콜라적 신학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정당함을 입은 우리 성도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받았을 때에 믿음 안에서 사실을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고백을 그 전통의 연속성이해의 강요에서 자유한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바르게 고백을 하게 하였던 것을 기억함은 니케아 칼세톤 신앙에서의 참으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시간의종속적 해석적 실존을 말하는 인조하나님 죽은 신론적 입장의 비웃음과 해석적 당위성의 세상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 답변하게 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전통이기 때문에 또는 그 전통이 가톨릭의 신론적 부재에 대한 임의적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에서 떠났다는 점에서 배척한다는 그러한 극단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때에 고백되었던 삼위일체 하나님 니케아 칼세톤에서의 신조적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동일한 고백으로써의 니케아 칼세톤 신조를 고백하며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정신학이라는 개념에서 시간이 주관적 인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성화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존재에로의 흡수적 개념이나 병합적 개념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위격적 하나 병합적 양태론적인 입장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을 말하며 그러한 주님을 말함에 있어서 그 주님의 눈물이라는 것은 이미 정적인 호소력을 말할 수 있는 시효는 발효부터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각주1) 정통교리는 유티커스주의와 대항하여 성육신 이후에도 성의 구분을 인정하되 양성은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신적 의지는 여전히 신적 의지대로 남아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여전히 인간적 의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 두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생활을 하면서 삼위의 각 위들처럼 상호 교통을 하고 있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2)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전환되거나 변형된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으로 전환되어진 것도 아니며, 둘이 하나 속에 흡수되거나 혼돈되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 속에 단순히 내주(內住)하거나 둘이 외견상으로만 일시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다. 성육신은 둘이 한 인격체 안에 실제적이고도 영속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3)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의 창조(과거)와 지속(현재) 그리고 종말(미래)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전제되고 수반되어야 할 사항은 시간을 영원과 관계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어려워만 하지 말고 시가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넘어서는 시간이 주는 풍요를 맛보기 바란다.

(정기철,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시간철학과 시간의 신학, 한들출판사 p.6)

부언) 여기서 시간의 부정이라는 개념이 점진성을 말하기 보다는 영원을 기준으로 말한다는 것으로써의 유출적 개념으로서 시간의 일상적 흐름이라는 것에서 주관적 해석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단순한 영원을 위한 시간을 부정하거나 영원에서 시간이 비로소 말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 변증법적인 개념에서의 상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각주4)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pp. 41-68. 에서는 원환적 시간 표상: 영겁회귀사상을 다루고 있는데 플라톤의 니체의 입장 즉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에서 발생한 것으로써의 시간관을 의미하는 회귀사상을 말하면서 니체의 '차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오사상에서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음에 대한 지적이 나타나고 있는데(p. 59.) 이는 주관적 순환적 시간관에 따른 해석으로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을 의미하는 것을 니체 그에게서 찾고 있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 즉 소광희 교수는 시간이 일반론에서 니체의 사상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수학을 잘 못했지만 그의 포스타 학교에서 그의 심적인 입장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입장에서 시간관을 존재 부정의 개념에서의 정오사상에서의 출발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며 부정형의 철학을 말하게 되며 신플라톤적 개념의 회귀사상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회귀적 존재이해를 한 것으로 그것은 시간에 따른 존재이해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위의 정기철 교수님이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는지 알수 없지만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을 때에 신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의 부정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각주5) 플라톤만 이야기 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그러한 것에서 자유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글쓴이 : 인권의 왕도
조회 : 27 스크랩 : 0 날짜 : 2005.07.12 09:28

주님의 대한 묵상 입니다.


-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야웨)이시다면 왜 그분은 아버지에게 기도했으며 어떻게 시험을 받고 자라나시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경험할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 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주위 반응에 따라서 주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성도의 본으로서 육신을 입고 인간들이 밟아갈 과정을 모두 밟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도해야 하는가? 순종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것으로서 주님이 행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그 인성은 기원과 본질이 여호와로서 동일하지만 유한계로 발출된 것을 말 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나온 인성이라면 완전할 것이라 생각을 하겠지만 처음으로 나온 것이고 질서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진전해 갈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성취를 하였습니다.(부활체) 불완전한 상태이다라는 것은 곧 여호와와 분리된 상태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주님은 재세시에 분리와 합일이라는 곧 겸비와 영광화라는 두 상태를 오가셨습니다. 분리 곧 겸비 상태일때 주님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영광화 상태일때 주님은 권능을 행하시며 부활하시고 승리를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인성의 영광화는 성도의 신화(Deification) 곧 중생의 본이자 성도의 이상이요 목표 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영화되어 성부와 합일에 이르셨듯이 성도도 주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두상태를 오가며 주님 곧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 합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인성(human)은 유한하지만 부활하신 이후의 인성(Human)은 영화된 인성으로서(the glorified Human) 신성으로 충만하고 권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암시하기를 그분이 비통해 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심과 같은 사실은 그분 속의 신성이 일하는데 대해 유한한 인성의 자연적인 반작용이었다고 말한다.(사랑이요 의분이나 절대적 사랑은 아니라는 것) 이는 마치 우리가 신성한 사랑과 지혜에 관해 아는 것을 삶에 이행해 보려 할때 그 노력은 우리의 보다 낮고 이기적인 바람의 차원을 더 비통해하거나 몸부림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이 구해주려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방자함, 불성실함, 눈먼 행동(배신들)들 때문에 인간적으로 슬퍼하셨고 이 슬픔은 그분에게 있는 가장 심한 시험의 하나이기도 했다.

주님도 그분의 지혜가 인간에 이식해 놓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방자해질 충동을 거절하시면서 그에 따른 모든 시험을 극복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때로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강제로 주입시키려 할때 위의 주님이 받으신 시험의 종류를 겪기도 한다. 주님은 그분의 투쟁을 보여 주시며 동시에 즉각 승리하셨음도 보여 주시고 아버지에게 감사 드림으로써 투쟁과 승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토론글

이명신 현대신학의 인식에 앞서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인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성의 나열들이 아주 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당위성을 맹목적으로 말할 수 있어보이지만 그 인식의 계기인 주관적 시간이해라는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신학이라고 하는 것 과정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묘사함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적 실재인식을 하도록 함에 당연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잘못임을 볼때 니케아 신앙과 신학적 고백이 얼마나 주의하였던 중심으로 그러한 위격과 양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했는가 하는 것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시간을 창조하신 세월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또는 시간에 따라 재해석된 존재부정의 신의 죽음을 거짓되게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니케아 칼세톤 신앙고백을 바르게 읽는가에 대한 관건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토론은 사양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에는 주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주님의 대한 믿음과 회개와 성화와 신화라는 중생의 전 과정은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있는 곳에 주님도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정당한 토론은 이루어질수가 없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불평등하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분위기 탓으로 말씀하심은 옳지 않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누가 자유를 억압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지요 님의 자유의식이 판단되었음에 대한 불안감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뿐입니다. 님이 인용하는 과정철학의 기본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표현은 너무 생뚱맞은 소리라는 것쯤은 아실 수 있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신화라는 개념이 어떤 개념인지 과정철학에서 어떤 개념인지 알고 말씀하시는지요 그것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일반시간론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하심이 지혜로울 수 있을 것같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이미 실재적인 기준없이 합리성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정당한 토론이라는 개념은 너무 임의적인 것으로만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과정철학자이자 신비가라고 할 대에 주의 종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가 시간의 인식의 판단에서 이미 주관적 개념의 사벨리우스적 개념을 단성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겠다 다수의 의지하지 않겠다. 권력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과정철학이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느이 보리의 신학을 말한다느니 하면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만 왜곡되고 있으므로 말하게 된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님도 딱두하시구려.. 다수의 폭력이 아니라니깐 이렇게 나르시즘에 잡혀서 자기 연민으로 더 이상 말못하겠다고 하니 저의 본문을 제대로 읽고 말씀하시는가요.. 답답하군요.. 진짜루.. 2005/07/12


이명신 왜곡은 무슨 왜곡.. 기본적인 인식도 없으면서 불리하면 왜곡이레.. 그럼 왜곡되어진 부분을 보이시고 그런 말씀하세요.. 용어나 말을 함부로 적용하심은 여전하시군요 2005/07/12


동행자 ㅉㅉㅉ 인권님이 불평등한 토론이라 하신것은 인권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증거!! 하나님이 함께 하는자는 루터와 같은 담대함속에서 불리함을 마다 않음 2005/07/12


인권의 왕도 성부와 성자의 합일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처음부터 완전한 합일 가운데 곧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이를 저는 불상리 불상잡이라고 줄여서 말 합니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혼합된 것도 아니다라는 의미 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닌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서 2005/07/12

이명신 그러게 점진적인 발달이라는 개념이 시간관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과정철학에서는 일반시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도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하시는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셨습니다. 무엇의 합일인가? 주님의 아들됨 곧 인성의 기원과 본질은 신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고, 위격의 합일을 말 합니다. 인성이라는 위격이 신성이라는 위격에 합일되는 것을 말 합니다. 성부위격은 신성 그 자체이나 성자위격은 사복음서에 보듯이 유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유한성을 초 2005/07/12

이명신 여보세요.. 누구는 사복음서 안보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말씀하시지 마시구요..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실재적 근거를 님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월하는 방편으로서 십자가 도 즉 자기부인과 죽음으로 인성을 신령화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부위격의 신성과의 합일을 의미 합니다. 여기서 합일은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불상리 불상잡으로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혼합된 것도 아닌 상태로 두 본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하나된 것을 말 합니다. 영혼과 2005/07/12

인권의 왕도 육체와의 하나됨과 비교할수 있습니다만 엄밀히는 부족 합니다. 부부가 한몸이 된다 주님과 인간이 한영이 된다고 해도 각각의 성은 상실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되는 것을 말하지만 부부는 타자로서이고 주님과 인간은 조물주와 피조물로서이나 주님은 신성과 신령인성의 하나됨이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월등히 2005/07/12

인권의 왕도 점진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성령은 왜 부활후에 교회에 발출이 되었는지요?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인자라는 세가지로 묘사를 했는지요? 부활후 주님은 계시록의 주님은 부활 이전의 주님과 어는 정도 다릅니까? 인성은 유아적이고 지성도 유아적인가요? 2005/07/12

이명신 발출을 위한 발출의 당위성 설명이라.. 쯧 발출적개념이 이미 인식의 계기로서 주관적 시간의 발상으로 부정되었다는데 그것에서 무슨 또 선한 것이 있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나요.. 먼지밖에 더 있겠습니까 답답하군요.. 2005/07/12

이명신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니케아 칼세톤신조에서는 시간이 판단으로 점진적인 개념의 도입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데도 합일의 경지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자꾸 말하고 있네요.. 과정철학이라는 개념이 시간의 연속성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전혀 답변이 없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니 절대적인 합일을 의미 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두위격이 하나되므로서 성령이라는 제3위격이 발출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게 된 것인데. 주님이 아버지의 유일한 형상이자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외의 기도나 예배의 대상은 없다는 것, 또 성령도 주님의 이름으로 2005/07/12

이명신 니케아신조와 칼케톤신조라는 것이 동방신학적 안티의 개념에서 생각되었다면 발출설적인 개념으로써의 비교되어질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합일은 이 두신조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인 정황파악이되는데 전혀 생각없이 말씀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내말은 그러한 시간에 따른 존재의 유출적 개념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이미 배제되어야 한다는 경건의 중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런데 님은 시간에 따라 속성의 합일을 말하는 가운데서 일체를 말하는 것은 이것은 위격의 혼합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체라는 개념을 잘못 이야기하고 있고 니케아칼세톤신조를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라는 것이 신화이고 아타나시우스와 그 당시 속사도들의 믿음이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믿음 곧 주님과 같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피조물적인 영광에 이르려 하였던 것, 이것은 주님이 시험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열 2005/07/12

인권의 왕도 매로서 얻으신 부활체에 대한 소망이 강렬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님이 부활하였듯이 성도도 단순히 입술만의 고백에서 삶전체로 주님을 닮아서 주님과같은 열매를 얻고자 하였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본질은 신성으로서 불변이나 위격적으로는 과정을 거쳐서 신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핵심사항 2005/07/12

인권의 왕도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적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시군요.. 그는 오리겐적인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정도면에서 목회적 개념에서 말했을 뿐임은 곤잘레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하기 위한 것으로써의 오리겐적 입장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오리겐적인 개념과 다른 것이 니케아칼세톤적 개념이라고 말하는데도 우째 이렇게 생뚱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허이 말할줄 알았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니 참 답답하이~~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이 신성이 그렇게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기예수께부터 신성적 입장의 사역을 하셨음에 대한 것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교회에 내린다는 것, 본질과 위격의 구분됨은 실재적이나 현재 주님은 아버지의 몸과 같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식으로 충만 합니다. 아버지는 볼수 없으나 아들은 볼수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하에서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 지금의 신앙 입니다. 그분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 입니 2005/07/12

인권의 왕도 다. 2005/07/12

이명신 전혀 개념이 없군요.. 과정신학의 인식의 개념이 시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유출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고 합일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말할 때에는 합쳐놓은 혼합적 단일성을 말하는 시간의 종속물로서의 거짓신을 말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시군요..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차이점과 니케아칼세톤 신조의 고백적 전통에서 무엇을 조심하였는지 그것이 경건이며 님과 같이 시간의 판단받는 자들이 입장을 이미 배제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고찰이거늘 전혀 딴 소리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그가 주의 종인지에 대한 여부를 남겨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철학적 장난에서 거짓된 존재인식의 정황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임의적으로 주의종이라고 말하니 답답합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구약의 여호와 신앙과 신약의 주님에 대한 신앙의 차이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격은 인성으로서 여느 인간들과 성육신 초기와 중기와 말기에는 같았으나 그 과정에서 신체가 성장하고 지혜가 성장하였듯이 그분의 위격도 성장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성의 본질과 기원은 여호와이기 때문에 다른 인 2005/07/12

이명신 전혀 채널이 맞지 않군요.. 딴데 틀어서 말하고 있는 것봐요.. 앞에 글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고 의견을 말하고 있는지 보세요.. 동문서답하고 있군요.. 답답해요.. 자기 말하는 것은 죽어도 말해야 한다는 오기..거참 해병대출신이신 것같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간들은 그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초월할수 없었지만 주님은 33/34년만에 십자가 도를 충실히 이행하므로서 달성했다는 것 입니다. 여호와의 신성은 절대성안에서만 충만하였는데 주님의 신령하게 된 인성으로 말미암아 2위격에 신성이 충만히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보이 2005/07/12

이명신 그렇치 예수님이 모자라니깐 성숙을 필요로 신성이 혼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주입되는 신성이라.. 이런 것이 바로 니케아칼세톤의 신조와 전혀 상관없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에 대한 신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으로 중세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고 시간이라는 것의 흐름에 따라 그러힌 일이 일어나며 예수님이 시간에 따라 신성이 채워지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어찌 이단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것은 신성에서도 마찬가지이거든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예수님은 성육신 전에 인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 인성이 부활이전과 다릅니까? 같습니까? 기독교 교리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신성은 불변이나 인성은 가변적 입니다. 상식 아닙니까? 예수님의 인성은 처음부터 완전했습니까? 거룩했습니까? 성인이였습니까? 지혜가 완전했습니까? 부활하시므로 주님은 아버지 우편 곧 권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성이 신령화되어 신성이신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고 인간형으로 있는 신성화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약과는 달리 아버지와 연결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중보자, 중개자, 그만큼 인간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 어렵고 멀어져 있어서 주님이 인성을 취하여 신령화해야 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인성으로 계신 신성에 대한 시인을 통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 2005/07/12

인권의 왕도 도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하는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이라는 개념에서 위격적 개념이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니케아칼세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시간인식에 종속되어진 과정으로 신성을 논한다는 것이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과 거짓이라는 것을 말함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그만 피곤하게 꼬리말로 님이 대의를 꼬리말로 흐리게 하시지 마시고 답변글로 정식으로 글을 써주시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쓸데없는 말 돌리지 마시고 답변글로 답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님의 부질없으에 대한것으로 변명뿐 진정한 사실을 말씀하시지 못한 것으로 받겠습니다. 괜히 말만 만드지 마세요 님의 과정철학적 입장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답변글로 쓰세요 그것이 저의글의 답변이 될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이명신 이번에 님의 위격의 과정과 신성의 시간적 변화라는 개념과 합일이라는 적어도 제가 오해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님의 존재의 혼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님의 탁월한 답글을 기대하겠습니다. 조금뒤에 뵙겠습니다. 2005/07/12

김응남 (왕도님에게)이명신님과 토론(?)은 유익이 없습니다....유익을 위해서는 성경을 표준으로 성경본문에 대한 토론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성경 본문에 대한 대화라면 저도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렇지요.. 성경구절인용대회에 수상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를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익이 없는지 어떻게 임의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없음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납득하게 말하고 난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거늘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막된 인격들로서 자처하시나요 2005/07/12

김응남 (이명신님에게)는 할말이 없음. 2005/07/13

이명신 미안하다는 한마디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말을 아끼시는 것인지 회피하시는 것인지.. 애매한 분이시군요.. 애매한 인격으로 판단받지 않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좀 시원시원하세요.. 뭐 그렇게 긴장을 하시는지.. 사람이 틀릴수도 있고 한번 그렇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 것에는 말입니다. 2005/07/13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신학의 입장이라면 저의 글에 답변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겠습니다. 답변해보세요.. 그 답변에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2005/07/13

김응남 (이명신님)왕도님에게 님과의 토론은 유익이 없다는 꼬리글이...님에게는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님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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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서..(분리와 분파에 대한 개념 정립을 위해..)

글을 씀에 있어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안에서 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는 이단들과의 모양세적인 측면의 화평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을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의 교회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는 그 실재론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실에 이르기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면상 모두 언급한다는 것은 무리고 간단하게 인식되어질 필요성으로서의 기본적인 교회의 통일성을 기술하고자 합니다.

교회 분리주의자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서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도나투스 논쟁에 대한 것으로 회개와 그것의 상대적 완전성의 외부적 개념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등이 오늘날에 있어서 비유적으로 이루어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아직 삼위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 따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 그때의 신학적 사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개념의 부정의 신학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회개의 사실확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인위적 분파가 있게 되어지는 것은 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자들을 분리주의자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는 것에 봉착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가톨릭과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가

가톨릭에서는 신론적 입장에서 유출적개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존재라는 개념들 어떤 실체라는 개념의 연속성을 생각하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체성도 임의적으로 가톨릭에 있다고 말하는 당위성을 기만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러한 것이 그들의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며 그 전초적인 개념으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전체 지역적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다르게 다르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옳게 ..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는 자들은 그 믿음의 분량적 개념이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동일한 기독교임을 믿고 그 연합적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가 있고 형태적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하심의 사실 분별에서 믿음의 분량차이로 서로 선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파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이며 성경의 사실을 진정으로믿으며 예수님이 중보자이심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 자들은 그 교파적 모습의 차이과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믿음의 분량으로 인정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앞에서 실재적인 실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통일성에 대한 비교적 개념과 작금의 논의를 생각하며

동산마술사님의 화해론이라는 것은 천주교의 외형적 고백이 진실하지 못함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형적 개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하게 기독교로 인정하자는 것은 그 통일성의 기준적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필로(Philo)의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사실들이 철학적 신론을 따르고 있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그러한 신론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산마술사님은 사람들 불교도 기독교도 화해하고 이러한 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의 화해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 통일을 말하는 사회복음적 개념의 현대사상까지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는 화평과 화해의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산마술사님이 예수님의 중보자이심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급기야 부인하는 가운데서의 신론적 입장이니 어떻게 그의 상대적인 포괄성이 정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산마술사님의 말씀하시는 화해와 화평과 그입장에서의 분리라는 개념은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노선과 달리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눈을 감고 불교와도 연합을 말하고 있고 사회적인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개념에서 무슨 회개가 나옵니까.. 회개가 그럼 이단들과 거짓종교들과의 화평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지극히 기만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니만 옳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식의 입장에서 반론밖에 못하는 가운데서 화해를 말하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타협을 화평으로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온대간대없이 이방종교와의 화해적 개념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의 기본적인 입장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의 불의한 청지기로서 인기성의 지역적 통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지역적 통일성과 단일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메이지 않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지역적 통일성이 비로소 판단 기준으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교파가 있을 수 있고 자신들의 서로의 믿음의 분량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믿음 안에서 판단이 있을 수 있으나 최종적인 판단은 주의 말씀하심과 하나님 안에 있음에 인정하게 되며 오래 참는 가운데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통일성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하심 성경으로 돌아가며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 안에서 거짓 쓴뿌리가 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재가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교회의 통일성에 속한 자들이 아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별의 은사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노력함의 방향성을 열어 놓으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야지 외형적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서의 지역적 통일성 단체적 통일성을 말하고 있는 상식은 판단받아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의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으며 가톨릭의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가 없는 것이기에 그 기만의 사실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토론글

글쓴이 교회에서의 분파 분리라는 개념에 앞서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글입니다. 물론 여기서 더 깊이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그 가톨릭의 신관과 기독교의 신관이라고 함이 종교개혁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것과 현대신학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는 앞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 2005/06/30

글쓴이 먼저 언급해야 하지만 임시적으로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가톨릭계 사람이라면 한번 해볼 용의가 있습니다만 임의적 감정적인 논의를 하시는 분위기에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포함되는 말이지만 기술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적절함은 그 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2005/06/30

이한이 솔직히.. 교회의 분파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고.. 하나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고.. 등대는 하나님 보좌앞의 일곱영을 뜻하는뎅..쩝..이 밖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더라구요..ㅠㅠ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구별(거룩)되게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요...이 세상에 평화가 있다고,화평이 있다고,화해가 있다고 부르짖는 것을 저는 믿지를 않습니다...있다면 예수안에서,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이죠...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것이 가능 하다고 오늘도 참소하고 있습니다..오늘날 카톨릭과 불교가 화해하고 손잡는것이 2005/07/01

정야베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가증스런 일인지 저들은 모릅니다..그야말로 저들은 우주적인 역사라고, 그야말로 하나님도 초월한, 종교를 초월한 아주 위대한 역사라고 안위 할것입니다...지금도 저들은 우리 개신교가 우물속에 빠져,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얼마나 비웃는지요..저들은 참으로 성서안에 있는 2005/07/01

정야베스 그 글들이,그 사건들이,그 역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남들과 화해하고 화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우리가 보아도 안타까운데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 하겠습니까?..지금은 유혹과 미혹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이명신님의 글이 그야말로 <말씀>되게 2005/07/01

정야베스 하여 주실것을 믿습니다...스데반의 기도처럼 저들은 저들의 하는일을 알지못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께로 난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밖에 없음을 고백 합니다... 2005/07/01

니노 이명신님의 생각에 공감하며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감이 있다면 보다 이해를 용이하게 설명해 주시려는 노력보다 문체나 사용하시는 어휘가 지나치게 학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생명이며 그깊이를 말로 다 할 수 없겠으나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우선은 상대를 위한 바가 되어야 한다면 2005/07/01

니노 상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부분도 필요하지 않을런지요? 사실 정독을 하여도 문장의 독해가 그다지 용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의 논지를 어느정도 아는 입장이기에 전하시고자 하는 바의 늬앙스로 일부만을 읽었습니다만 님의 생각과 다른 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듯 여겨지기에.. 복음이 어려운 것으로 2005/07/01

니노 오해되어진다면 사실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을 듯 여겨집니다. 더구나 님의 글의 주 대상이 신학자들이 아닌 복음을 잘 못 알고 있는 가톨릭 옹호자분들임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저도 노력하려는 바이기도 하지만 오랜동안 전형적인 신학적 사고와 글을 통해 이미 익숙해지신 것 같기에 쉽게 설명하는 것이 더 2005/07/01

니노 어려울 수도 있슴을 알지만 님의 소중한 생각들을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마음에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이라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복음의 사역에 더욱 귀하게 쓰임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2005/07/01

에벤에셀1 지성방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다양하신 분들이 많더군요..그건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덕이 되지 못한 분도 계시고 또한 말씀이 풍부함속에 예수를 바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더군요 비록 말씀이 부족할찌라도 2005/07/01

에벤에셀1 그 뜻을 파악하며 주님의 뜻을 바라보는 분들도 많으시구요. 어찌 되었든 이명신님,정야베스님,니노님 뜻이 저에게는 합당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진지한 말씀들 참으로 가슴깊게 다가옵니다..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늘 수고 하시는 님들위에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저도 이명신님의 글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를 않더군요...보통 성도라기 보다는 신학생 아니면 사역자가 아닌가 싶습니다..신학과 신앙은 하나인데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생각 하기를 조금은 어렵더라도 그의 글을 자꾸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구요.. 2005/07/01

정야베스 어쩌면 그것이 그분의 독특함 내지는 정체성이 아닐까 합니다..니노님의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더욱 좋았습니다..저도 이번 가을학기에 공부좀 하려고 등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기존의 신앙관을 몽땅 버리지 않으면 새롭게 신학을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고 하더이다..그만큼 고정된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얘기겠죠..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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