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11월 17, 2006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 - The Life in Bible

앞서 언급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보다도 앞서는 진리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각주1)이시라는 것과 그러한 진리와 사실로 인해서 우리 인생의 행보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또한 그 행보를 위한 실제적 사실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것은 성경말씀이다.

물론 형식적 순환론적 모순이라는 판단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것이 기각되어지는 것은 또한 앞서 합당하게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신의식과 신지식이라는 것의 실존으로부터의 타당성을 힘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에 즈음해서

성경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앞서는 진리와 사실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출 3:14)이시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반론적 입장의 고전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니체의 입장인데, 그것은 인식론적 존재론에 입각한 임의적 신해석과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양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재고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자존의 하나님이 참되다고 함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식적 한계내에서 또는 한계밖이라는 이성적 규정의 탈실존을 말한다고 하여도 이성의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이성의 재가를 받고 이성의 재구성에 따른 구성체로서의 타당성을 입는다는, 소위 속된 표현으로, 등떠밀리어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은 진정한 신이 아님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했다고 하는 철학의 입장(각주2)에서 본다면 결국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에서는 인위적인 신이라는 개념에서 참된 신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정직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각이 정당성을 이미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석적 정당성을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의지적으로 부여하고 싶어하는 정신으로의, 내어준 임의적 의지의,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은 그와 같이 인식론적 존재론에서는 비로소 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또한 인식론적 존재론에서 객관적 신존재적 규정과 그에 따른 신에 대한 비판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최소한 자기를 기만하기 위한 비이성적 삶의 고통을 완화하기위한 진정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존재론, 쉽게 이야기해서 인위적으로 존재규정과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신을 이성의 한계에서 규정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사실적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할 때에 참된 신의 말씀에 의거한 그 말씀하심과 규정하심이 진정 사실로서의 실제가 되어지는 절대의 재가가 되어진 실존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인간이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시간의 판단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속성적 진실함과 영원함에 신실하게 스스로 취하신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 대한 자의식적 인식의 충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의식적 영향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 피조물은 그러한 시간이라고 하는 계기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알고있는 상태에서도 알아간다는 그 중심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시간이 허락되어진다는 개념보다도 시간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적 우리의 실존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존적 의미와 그 윤리적 행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총체적인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과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적 영광 즉 그의 왕되심과 그의 제사장적 권세와 그의 선지적 권세라고 하는 그 사역적 측면이 우리의 신앙의 삶의 고백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표현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의적 생각과 사유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존적영감을 나타내는 '성경의 자증(Autopistia)(각주3)의 영광'을 따라서, 그 계시의 영광을 따라서 섭리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유의 총체적 기본적 이유의 실재와 실제인 것이다.








각주1) 이슬람에서는 지나친 종교적 패러디를 행하고 있고 그것은 기만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절제하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에도 합당할 것으로 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알라외에 다른 신이 없다'(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는 말을 함부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의 언어까지도 모방하며 진리까지도 모방하는 가운데서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에서의 진화적 개념의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 또는 격상된 신이라는 개념진정한 고유의 신(God)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진화라는 개념에서 고유하지 않던 신의 개념이 고유라고 하는 개념으로써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답변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패러디라고 함은

그러나 나는 일부러 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폭력과 유혈사태가 (이슬람과 서양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주로 무슬림 사이의 내적 투쟁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이 모든 종교가 근대화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겪게되는 그런 종교의 갈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개혁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지만, 간과되어서는 안될 유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종교 전통에 존재하는 보편적 갈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누가 신앙을 정의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 개인인가 기관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8.)

알라가 고유의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고유의 신이 된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창조자는 ‘알라Allah’라고 불렀는데, 알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순히 신을 의미하는 ‘알 알라 al-ilah’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알라 역시 비와 하늘의 신이었으나, 이슬람 이전 시대에 최고신으로 격상되었다. 아랍신들 가운데 알라의 두드러진 위상은 평민들이 탄원하기 어려운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오직 위기에 처했을 때나 감히 탄원할 nt 있는 존재였다. 알라의 세 딸 알라트 Allat(여신), 알 웃자 al-Uzza(전능자), 마나트 Manat (운명의 여신)과 같은 중재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2.)

패러디라고 함에 있어서는

아랍인들이 알라를 유대인의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었다. 6세기 아라비아에서 유대의 유일신교 monotheism는 우상숭배의 아랍인에게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랍인의 우상숭배는 전혀 다른 종교적 이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적 아랍인들은 유대교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적 개념을 단지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6.)

앞서간 많은 예언자처럼 무함마드 역시자신이 새종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한 적은 결코 없다.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관습을 개혁하여 유대인과 기독교의 신을 아랍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종교를 너희들의 종교로 정하셨느니라. ··· 그것은 신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에게 명한 것과 같은 종교이니라.(42:13)”

젊은 무함마드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슬람의 독특하고 신성한 기운은 다인종 다종교적 사회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젊은 무함마드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믿음없는 아랍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메시지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를 가리켜 ‘무지의 시대(자힐리아)’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56.)


글쓰는이의 부언 : 꾸란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권위라고 할 때에 그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고유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는 알라의 신격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임의성의 합리성에서 파생된 당위성이고 본래성의 정당함과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니체적인 삶을 위한 이슬람의 삶을 위한 해석과 기술일뿐 참된 자존의 하나님의 본래성과 동일시할 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진화나 격상에서 본래를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파생적 정당함이 본래적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기만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그 자체이다.

본래적 정당함을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자는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Jehovah) 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Jehovah is God. 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사 45:5).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NIV), there is no God beside me.(KJV), Besides Me there is no God.(NASB)

패러디를 하더라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을 성립되어지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요 거짓의 사실로써 그리고 거짓존재로서 실존적 자리매김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의 정직일 것이다.

각주2)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5-107.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중략)

해석은 해석자의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 인식의지에 의해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인식의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가 해석작용의 규제원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 목적이거나 부수적 현상일 뿐이다. 철학은 해석인 한에서 철학 또는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다.
(중략)

여기서 니체는 해석적 철학의 특징에 대해 ‘비자발적 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규제적 원리에 따른 배제이고 망각이며, 그런 한에서 철학적 해석은 가치중립적 인식일 수 없다. 철학적 해석작용의 결과는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의미 인식일 뿐이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개념 ‘진리를 발견하는entdecken 기술’이라는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를 재검토하게 한다. 이 정의가 불충분한 것은 그것이 진리를 삶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고, 진리가 해석자의 삶과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창조schaffen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글쓰는이의 언급 : 니체의 생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삶의 의지적 표현으로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은 가운데서 구성적 실제규정과 그것의 정당함을 그는 세우려고 글을 썼다. 1881년에 “생성의 무죄에 대한 입증 Die Unschuld des werdens zu beweisen”(각주참고 KGW VII 1 7[7], 245쪽이하; VII 3 36[10],277쪽)(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8-109.)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적 타당성을 말했을 뿐 진실로 그 자체적 정당함의 실존으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파생적 정당함과 본래적 정당함은 아이소모픽(isomorphic)한 개념 유사개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본래적이라고 하는 말을 철학자들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상식적 보편적 동의가 가능하다고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말할 뿐이지 비로소 자존적 정당함의 정당성에서 파생되어진 사실로서의 실존을 의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니체역시 삶에 대한 의지적 정당함을 말하는 합리성에서 파생하는 타당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절대의 자존의 실존과 그의 행보의 타당성을 비로소 입은 자들을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사실과 실존적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3) Autopistia 성경의 자증 :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닫혀진 진리관을 말하면서도 그 보편성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지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그 실존적 영광의 합당한 속성적 성격인 것이다. 즉 이것은 닫혀있다는 개념의 편협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성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비록 판단 가능하다고 해도 절대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실제적 정당함은 닫혀있다는 상식적 판단의 보편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의 계시적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그 성경은 자기 실존적 증거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사람들의 인식의 감화와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성경이 기록되도록하는 섭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계시이다. 그 계시의 기록과정의 모순형식이 가능한 것까지도 구별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그러한 방법을,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성의 재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로서의 성격을 임의적으로 축소 또는 배제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의식에 있어서 합리적 필요성과 가치성에 있어서 만들었다고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니체의 생의 가치철학적 입장에서는 더할나위없이 그러한 개념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필요라는 정황적 개념때문에 비로소 성경을 맞추어 꾸며내는 신화적 작업을 했다는 거짓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다빈치코드와 그 아류와 같은 문학적 이성의 절제없음에 대한 판단이 유명세를 꿈꾸는 것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닫혀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그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가운데서의 보편성의 현실적 상대적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철학의 보편과 닫힘의 안티적 개념의 열림으로써의 보편을 말하는 것으로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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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15, 2006

신존재증명과 확신에 대하여

신존재증명에 대하여서

신은 존재증명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되어진 상황에서 납득되어져온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납득되어짐을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반 또는 학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사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확고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 항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적 답변에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항상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절대적이어야 신 존재증명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과 사실성이 확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때에, 그 충족성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재고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 개연적으로 증명이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맹신적인 개념으로 잘못된 개념으로 통념화되어져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반론적인 필요성에 따른 증명을 말할 수 있는 여지적 강조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범주 설정이라고 하는 개념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답변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 절대라는 비로소의 개념을 자체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를 논할 수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위해 합리성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적인 개념의 요소를 상대적인 범주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즉 신존재증명과 신을 부정하는 증명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신존재증명을 말하게 되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재고..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인식의 확신을 위한 최선으로써의 한 필요성에 대한 수단적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전 중세이전 고대의 변증가들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납득 당위성이 있는 분이심에 대한 변호적 개념을 위해서 철학적인 개념을 사실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받아들여서 말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문은 열렸던 것(각주1)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평학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병렬적 나열적 상호관계적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의 대한 실제적 기반을 말하지 못하고 조작적 개념으로써의 문서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합목적성이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깊이를 재고하는 가운데 이성의 익사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경험적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더욱 그러한 합리성의 부정의 시비를 간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정교함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믿음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그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께 두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이성적인 확실성을 말한다는 병열적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합목적성에서 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하려고하는 것에서 고통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증명을 말하게 되는 것은 확신을 위한 것으로써의 합목적성에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합당하게 주목한다고 할 때에,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확신을 주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합당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에 대하여서

증명에 따른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증거의 확실성이 증명의 확실성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비롯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오는 확신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만이 진정한 자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신앙의 확신의 실존과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성도의 메타인식이라고 함이 가능한 하나님의 지식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 존재증명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범주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고 실존되어질 수 있는 존재증명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것과 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을 위한 증명적인 형식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유의 권세를 의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실존적 하나님의 지혜의 사실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사료적 관점에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의 부활과 탄생적 표현과 실존 그리고 그 자체의 정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에 근거하기 위한 것인 것과 같이 확신의 그 정도가 부인할 수 없을 때에는 증명적인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확실성을 위한 비로소의 존재증명적 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확신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찾게 되어지고 그 주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측면의 한 택스트라는 제한적인 양식에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이라고 하는 한 책의 표현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다른 책들과의 형평성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에서 성도의 매타인식적 신지식은 그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명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 19 ; p. 57

'유태인 필로(Philo)는 희랍어권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렇게도 풍부하고 뜻깊은 사상을 잉태시켜 주었다. 필로는 구약성경을 플라톤적인 의미의 우의(allegorically)로 해석함으로써 유태주의와 헬라주의를 조화시켜 놓았다. '(p. 19)

“필로는 이방 세계에서 모든 지식은 따지고 보면 유태주의가 그 뿌리라고 주장했다. 왕국의 이론도 유태적이라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 피타고라스의 수, 희랍 과학의 우주론, 헬라화 세계의 신비주의, 윤리, 심리학 등등 모든 것들을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이방 세계에서 배웠으나, 이것들은 희랍인들이 모세에게서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Erwin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2nd ed. (New York : Barnes & Noble, 1963), p.75. (p. 57 각주 34번인용함)



이러한 것은 카돌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에뜨엔느 질송의 표현이 이렇게 언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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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7월 05, 2006

지식의 숙성

지식의 숙성

음식에 있어서 간편하게 즉석에서 또는 일정한 요리연구가에 의해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장기간 보관과 숙성이라고 함을 거쳐 만들어진 발효식품이라고 하는 것도 있게 되는데 소금과 관련되어진 음식이 그러한 것의 한 예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를 비롯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일부에서 염장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러한 다큐방송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기억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3)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거칠고 투박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게 됨에 있어서 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섬김의 전부는 하나님께 드림의 예물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소금을 빼는 것과 같은 그러한 중심이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지혜의 경험에서 있게 되어지는 축적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소금에 의해 숙성되어져서 참으로 주의 종들을 위한 주님께 드림의 음식으로 준비되어져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로마카돌릭은 마치 음식을 숙성시키듯이 전통속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을 시켜왔습니다. 즉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은 옳은 것이나 그 전통이 그 사실적 당위성을 잃어 소금이 맛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변질적 숙성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에 있어서 주께 드리는 숙성된 지식적 음료를 다시 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중세에 풍미한 연예사건이 극적이면서도 적절한 예가 되어질 것입니다.(각주 1)

존경하는 제가 다닌 신대원 은사님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천안 신대원시대이지만, 제가 다닐 때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치셨는데 항상 아쉬워하셨던 것은 그 피곤한 가운데서의 연구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도 그 배움에 있어서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는시간을 가지는 가운데서 준비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졸업하고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의 그 숙성적 섭리라고 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마음에 두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학문의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좀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적 작업에로의 소명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식 맛갈나는 음식이라고함의 노력과 시장기를 거둘 수 있는 참된 음료와 같은 주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제는 숙성시키시는 주의 말씀하심의 깊이를 따라 학문적 소명으로의 부르심에 귀한 종들이 함께하였으면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중세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기억하면서 그 지식의 숙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태파악과 현상적 지식의 숙성은 오히려 독이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주님의 뜻하심을 저버리고 있는 가운데서 지식의 재 숙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치나 장을 담그더라도 그 재료가 부실하면 다시 그 재료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장이나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지식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샘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서 소금으로써 그 마라의 쓴 물을 고치셨던 섭리를 기억하면서 그러한 지식의 근원을 고치심에 노력하시는 종들이 있으셔서 수가성 여인과 같은 자들이 그 샘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듯 그 숙성된 지식의 샘물에서도 만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그러한 지식의 샘을 준비하는 지식의 숙성에로의 소명을 받들 수 있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치셨던 그 섭리가 이제 필요한 시대입니다.






각주 1)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후스토 곤잘레스와 프레드릭 파제의 글을 참고로 추천하면서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I 中世編 이형기 차종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210-218.

저는 피터 아벨라드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로맨틱하다고 표현하고 있고 아벨라드의 사상과 그 시대상황에 대하여서 비교적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 파제 '유쾌한 철학자'

저자는 중세의 수도사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아주 풍자적으로 비난과 조소와 해학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행한 말에 대한 인용은 사실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할 때에 엘로이즈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글쓴이로서의 부언

"나는 당신의 창기가 될 수 있어도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로이즈가 아벨로이드를 사랑하고 학문에 정진한 사람으로서의 그 위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어느정도의 성과라고 하는 것은 '후스토곤잘레스는 아벨라드를 대단한 문필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세의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으로부터의 비로소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학문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의 숙성을 담당해온 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를 두는 것이 가정을 돌아보는 것이요, 그러한 자가 교회를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의 자격을 성경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헌신의 현실적 실제의 시간적 부족과 집중의 어려움은 있으나 결혼하여서 그러한 지식의 숙성을 찾아 전통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의 그 방법의 실제와 사실을 이룬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반론적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음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일반화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부동의원동자적 개념의 입장으로 합리성에 대한 숙성을 말할 때에는 그 반론에 정당함을 비로소 부여하여 사실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답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임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사모님들께 한말씀드리는 것은 ..

엘로이즈는 현실적 실제적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를 위해 창기를 선택하면서도 아내가 되지 않아 그를 자유하게하는 자로서 결코 김치담그는 것과 같은 숙성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숙성을 위해 창기가 아니라 당당한 아내로서 함께해주시길 주 안에서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사모된 나의 아내는 주 안에서 기꺼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해야할 일을 하는 가운데 이 말씀을 드립니다. 창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말했던 엘로이즈와는 달리 아내를 선택하는 자들로서 종들을 섬김으로 숙성된 지식의 숙성으로 인해 그 우물에서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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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9, 2006

'니체'와 '상품화된 니체'

니체는 그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후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초인적인 그러한 점에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고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요즘에 해석되어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적 평가는 너무 인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거로는 아래에 출처를 밝힙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참고로 니체에 대한 글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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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해석에서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에 대하여서..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그 첫번째가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택스트를 읽을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보다는 잘 되었다는 해석을 취함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마련한 아주 중요하게 보일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도 잘 정립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의 의미는 니체를 온전히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니체를 비판하는 것까지도 니체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한마디로 니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없다는 말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용되는 인식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말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는 그 말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측면에서 아무리 비판하여도 그것은 니체의 판단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용어의 뜻을 말한다면 '택스트를 해석하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표현적 인식을 위한 그보다 상위의 인식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상위의 인식들을 존재하게 하는 상대적 무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어떠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고 니체를 반박하는 것으로 보이는 해석이라고 하여도 그것도 상대적인 가운데서의 한 표현일뿐 그것을 말할 옳은 해석은 아니라고 함이 더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관점도 역시 거짓이라고 함을 주장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옳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개체적인 한 표현과 관점밖에 안된다면 그것이 잘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니체와 그 해석의 자체적 인식추구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해석한다면 컴퓨터의 예를 들겠습니다. 악성코드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파일을 아예 지울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파일은 보호장치가 되어 있어서 지우면 지울 수 있는데 다시 복구되는 그러한 파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그것과 같이 레지스터리까지 지웠는데 다 지우지 못하면 다시 파일이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모든 관점이 거짓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럼 니체의 관점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말에 그들은 수긍을 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인 것이고 니체의 추구하는 전체적인 관점의 보편성을 말하기는 편협한 독단적인 것이라고 상대적인 보편적 정당함이 결여되었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에 즈음해서..

한마디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상대적 무한과 절대의 무한이라는 개념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당성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함을 말해두는 것입니다.

니체의 합리성의 정당함은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적 개념으로써의 상대적 무한이라는 보편성을 읽게 되어지며 그것은 종의 개념에서의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해석적 인식의 무한을 말하고 그것에 정당함을 찾게 되는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시간론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상대적 무한의 인식의 범주의 비교에서 현재에서 인식의 주체적 기준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에서 현재 표현되어지는 것은 실재를 반납한 실재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기호론으로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임의적으로 그러한 실재를 부여한다는 것에서 특히 그 임의적이라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정당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성의 불연속성을 넘는 정당성을 임의적으로 합리성에 부여함으로 취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바로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 임의적이지 그것이 절대적 자존의 정당함을 얻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인식의 메비우스 띠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에 분별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의 권력에의 의지적 표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 그것을 말하려면 그들의 언어로서의 메타적 해석 인식의 기초의 처음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의 생성과 정의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은 상대적으로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절대적인 평가에서 좌초되어진다고 하면 상대적인 합리성의 마련한 니체의 메타해석 인식의증식이라는 그 자체의 존재와 해석과 거짓관점의 실존을 말할 수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두가지 예를 든다고 하면 첫번째 메비우스 띠위의 직선들은 무한하며 그것의 직선의 방향은 무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비우스 띠라는 존재는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공중에 메비우스 띠를 하나 띠워놓고 본다면 그 공중 안에 한정되어진 띠하나를 그냥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개념의 조합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무한의 특성인 그 경계선의 규정적 설정이 어렵다는 개념을 인문학적 문학적 개념으로 읽어내는 니체와 그 추종자들은 지혜롭기는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 초등학문의 범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에서 절대의 무한을 찾을 수 있다는 망상은 아이들이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개념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실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

또 한가지를 말한다면 컴퓨터인데.. 악성코드나 보호장치가 있는 파일은 자체로 지워지지 않거나 지울 수 있다고 하여도 다시 수록되는 특성이 있는데 사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처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료 파일들을 백업한 후에 전체 포맷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컴퓨터의 지식이 있다면 레지스터리를 통해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메타인식의 증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절대의 속성과 개념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말한 것을 다 상대적이다 라는 개념으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 상대적 판단의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함에 대하여서(기독교의 관점)는 소득없는 구걸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기만하기를 바래야하는 초라함에 머물고 말것입니다.

그러한 겨우 상대적 무한의 정당함의 인식에서 무리하게 표현한 말인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 당시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것을 믿으면서도 그 실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어 보이는 정황에서 상대적 정당함을 위해서 변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정당함을 따라서 비로소 합리성의 실존을 말한다는 그 표현은 옳지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해석에서의 메타적 인식의 증식을 말하는 지혜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에서 삶을 위한 상대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인식 자체에서 절대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인식의 기만이 교만으로 사실화 되는 것처럼 거짓되게 정교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의 반대가 절대라는 개념)이 아닌 것과 같이 상반적 개념설정의 범주에 절대가 포함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재고하지 못한 정직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은 상대적인 어떤 합리성에서는 그의 사상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교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판의 여지라는 것이 절대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때에는 절대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보편성의 재가를 받은 합당한 정당성을 가진 상대적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으로써 그 니체의 사상을 실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메시아적 사유에 따른 철학의 실존에서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신학의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되어질 것입니다.(각주1)



각주1) 엘렌슈프리드, 니체와 니체해석의 문제, 박규현 옮김, 푸른숲..

제가 한 여름동안 읽은 니체의 세권중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모두 긍정한다는 것과 모든 내용을 추천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이해와 인식의 도움을 위한 것으로 상당히 괜찮는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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