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8월 15, 2006

신존재증명과 확신에 대하여

신존재증명에 대하여서

신은 존재증명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되어진 상황에서 납득되어져온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납득되어짐을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반 또는 학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사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확고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 항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적 답변에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항상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절대적이어야 신 존재증명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과 사실성이 확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때에, 그 충족성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재고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 개연적으로 증명이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맹신적인 개념으로 잘못된 개념으로 통념화되어져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반론적인 필요성에 따른 증명을 말할 수 있는 여지적 강조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범주 설정이라고 하는 개념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답변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 절대라는 비로소의 개념을 자체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를 논할 수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위해 합리성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적인 개념의 요소를 상대적인 범주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즉 신존재증명과 신을 부정하는 증명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신존재증명을 말하게 되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재고..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인식의 확신을 위한 최선으로써의 한 필요성에 대한 수단적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전 중세이전 고대의 변증가들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납득 당위성이 있는 분이심에 대한 변호적 개념을 위해서 철학적인 개념을 사실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받아들여서 말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문은 열렸던 것(각주1)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평학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병렬적 나열적 상호관계적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의 대한 실제적 기반을 말하지 못하고 조작적 개념으로써의 문서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합목적성이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깊이를 재고하는 가운데 이성의 익사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경험적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더욱 그러한 합리성의 부정의 시비를 간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정교함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믿음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그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께 두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이성적인 확실성을 말한다는 병열적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합목적성에서 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하려고하는 것에서 고통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증명을 말하게 되는 것은 확신을 위한 것으로써의 합목적성에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합당하게 주목한다고 할 때에,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확신을 주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합당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에 대하여서

증명에 따른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증거의 확실성이 증명의 확실성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비롯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오는 확신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만이 진정한 자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신앙의 확신의 실존과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성도의 메타인식이라고 함이 가능한 하나님의 지식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 존재증명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범주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고 실존되어질 수 있는 존재증명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것과 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을 위한 증명적인 형식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유의 권세를 의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실존적 하나님의 지혜의 사실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사료적 관점에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의 부활과 탄생적 표현과 실존 그리고 그 자체의 정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에 근거하기 위한 것인 것과 같이 확신의 그 정도가 부인할 수 없을 때에는 증명적인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확실성을 위한 비로소의 존재증명적 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확신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찾게 되어지고 그 주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측면의 한 택스트라는 제한적인 양식에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이라고 하는 한 책의 표현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다른 책들과의 형평성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에서 성도의 매타인식적 신지식은 그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명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 19 ; p. 57

'유태인 필로(Philo)는 희랍어권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렇게도 풍부하고 뜻깊은 사상을 잉태시켜 주었다. 필로는 구약성경을 플라톤적인 의미의 우의(allegorically)로 해석함으로써 유태주의와 헬라주의를 조화시켜 놓았다. '(p. 19)

“필로는 이방 세계에서 모든 지식은 따지고 보면 유태주의가 그 뿌리라고 주장했다. 왕국의 이론도 유태적이라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 피타고라스의 수, 희랍 과학의 우주론, 헬라화 세계의 신비주의, 윤리, 심리학 등등 모든 것들을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이방 세계에서 배웠으나, 이것들은 희랍인들이 모세에게서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Erwin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2nd ed. (New York : Barnes & Noble, 1963), p.75. (p. 57 각주 34번인용함)



이러한 것은 카돌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에뜨엔느 질송의 표현이 이렇게 언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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