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1월 27, 2005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개념이 있기 마련이라고 함은 인지상정적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인정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개념들이 서로 상관성을 맺고 그 차이성에서 또한 인식의 발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또한 할 수 있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는 개념(각주1)에서 사실 이해가 차이가 나는데 그러한 경우를 모두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재고할 필요가 우선적이라는 생각으로 기술한다.



1.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선 상관성을 생각할 때에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지만 항상 인식적인 차원에서 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같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우를 먼저 보면 상당히 이상(理想)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는 가운데서 동질성을 가질 수 있는 개념의 확보와 인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동질성에서 그 인식의 흐름의 한 동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나타날 경우에는 두 가지로 주목되어질 수 있다.

먼저 이해는 하는데 존경하지 않는 경우, 이것은 합리성의 차이라고 함을 확인할 수 있고 때를 따라서는 방법론적인 입장에서라는 한정적인 입장의 동일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며 그 표현적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론에 따른 차이에서 그 인식의 방향성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경을 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 인식의 동질성을 같이 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임의성이 있는 가운데서 맹목적인 인식의 동질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는 추종적 인식의 흐름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은 사변과 신비가 만나는 곳이나 신비에 대한 맹목적 입장이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2)

그리고 그 다르게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두 가지의 정도면에서 차이가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첫 번째의 말의 부언적인 언급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두 가지의 정도면에 따른 것은 어느 쪽의 인식의 강조가 되어지는가 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진 인식을 향하여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해와 존경에 대한 신학적 사조(思潮)적 관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적 개념이나 교리적인 개념보다도 다른 것을 경건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사조가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을 같이 하지 않는 것으로써의 학문과 인식 더 나아가서 믿음의 실체를 주목하게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은 구체적으로 신학적 사조의 철학적 경향이라고 함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역할에 대한 안티적 인식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있게 되어지는 교회에서의 신지식에 대한 것과 철학에 대한 이분적 생각의 입장과 실제의 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동일성의 인식과 이해의 개념이 그 대립되어진 가운데서 혼돈이 있어왔던 것이다.

한 가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다고 할 때에는 포이엘바하의 역사에 대한 비평을 의식하여서 칼바르트는 '원역사'를 말한 것으로 코넬리우스 반틸을 언급하고 있는데(각주3) 이러한 것이 바르트의 신학의 실재로써의 '무성'(nothingness)신학을 말하게 되며 그에 안티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내제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폴틸리히의 비존재(non-being)의 신학을 주목할 수 있다.(각주4)

사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의 부재로 인하여서 상대적인 측면에서 임의적 사상적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비평학의 합리적 일관성을 피하고자 하는 도피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5)

상대적 인식의 불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이해의 연속성을 막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의 인식이 이해와 같이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하고 이것은 맹목적인 것으로 열려지게 만들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바르트의 부룬너와의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와 반박(Nein!)(각주6)에서 그는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 카롤링 시대에 있었던 철학자 에리게나의 철학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그 유사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약의 철학을 말하는 에리게나의 입장의 모습이 바르트의 입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함의 유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7)

한편 이성적 입장에서의 이성주의자들은 이해라는 개념의 실존적 입장을 취하여서 신비라는 개념의 납득 당위성을 말할 수 없고 그 신비에서 나타나는 그 계시적 존경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것은 비평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치우친 신학적 입장의 모습들..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한 실존적 동일한 범주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아픔들이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가운데서 교회는 많은 똑똑한 사람들을 잃었다. 물론 그러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종들의 고백에 있어서는 참으로 재고함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아름답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사실들이 같이 나타남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합당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말함은 다니엘서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것도 있는데 사실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구별되어진 복음의 사실의 실존성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참으로 아픈 기억을 볼 수 있는데, 우리 한국사에 있어서 한국 신학사조의 흐름을 볼 때에 교계의 지도자들의 앞선 세대 메이천, 존 머리, 워필드, 코넬리우스 반틸과 같은 자들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게할더스 보스(Geehardus Vos)가 하나님의 실재론에 입각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고 가르쳤는데, 코넬리우스 반틸을 제외한 앞서 언급한 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만 하였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각주8)

그로 인해서 그 당시에 있게 되었던 프린스톤 신학교에 들어온 '스코틀랜드 보편철학'(각주9)이라고 함을 추종하는 가운데서의 신학적 계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액면적으로 그러한 것의 추종적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실제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치우침과 분명함을 위한 노력은 이해와 존경의 한 인식적 사실을 선택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자리에 섰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 합당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날 때에 믿음 안에서 참된 분별과 지혜의 은사가 온전해지며 참으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의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것은 순결함의 사실을 잃어버리고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뱀처럼 간교한 자리에 설 수 있는 위험에 노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 이해와 존경의 실제를 분별하고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가운데서 주님의 보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었으면 하며 그 섬김으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시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 서양철학사 최민홍역 집문당 p 102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그에게서 배운 것은 너무나 지나친 역설인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체(實體, substance)의 불멸성이었다.

실체라는 말은 그의 직접 후계자들로부터는 나오지 않지만, 그 개념은 그들의 사색중에 나타나 있다. 실체란 변하는 술어(述語)에 대하여 존속하는 주어(主語)로 생각되었다. 실체는 이러한 것들로써 2천년 이상이나 철학과 심리학, 및 신학의 기본적인 개념의 하나로 존속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많이 언급하려고 한다. 다만 지금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뚜렷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다루려고 할 경우에 이 실체의 개념이 도입된다는 것만 유의하려고 한다.’(본문인용)

파르메니데스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인식되어지는 것에서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으로 후대에 인식되어지고 평가되어지는 자이다 한마디로 인식론적인 실제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며 형식논리학에서 가정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결론적 사실이 형성되어질 수 있다는 것의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문학과 양식비평의 사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신학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되어져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적 측면에서의 사실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 그 가능성이라고 함이 있다고 하여도 그 가능성이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는가 아니면 일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가진다고 할 때에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신학적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의 실체는 그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없다

다만 허락되어질 수 있는 인식의 일반적인 정당함에 따른 인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개념의 분명함은 분별되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언어의 분명성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러셀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회의적이라고 함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말함에 항상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신학적 불가해성적인 입장에서는 분별이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주제로 존경과 이해에 대한 짧은 글을 쓰고자 한다.


각주2)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셀링, 철학적 원리로서의 자아 서광사 서문.
“..이 신비는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3가지가 있는데, 삼위일체, 세례, “생명에 이르는 두 개의 성만찬, 즉 주님의 피와 살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체 성사는 삼위일체와 세례와 비슷하게,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이다. “〔성체성사의〕신비는 지상적인 것이 아니고 하늘적인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고 찬양의 대상이다. 논란의 대상이 아니고 경외의 대상이다.… 육체의 환상이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관으로 판단할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은 가시적인 성물(elements:떡과 즙) 안에 참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과 같다. 만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의 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육체에 참으로 동참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naturaliter)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본문인용)

후스토 곤잘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이 내용은 중세기간중 카롤링 왕조가 와해되어지는 가운데 12세기를 잇게 되어지는 11세기의 신학을 언급하는 중에 당시 삭소니가(the House of Saxony)의 영향력에 있는 사르트르 지방의 풀베르트(Fulbert of Chartres)신학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 중 한 부분이다.

언급되어지는 인용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풀베르트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에서, 신비라는 개념이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비존재영역이라고 함의 의미를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상대적 보편성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이것의 단적인 사상의 흐름은 이러한 풀베르트의 사상이 12세기에 안셀름을 비롯한 보편논쟁이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는 곤잘레스의 판단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체성이기에 그 신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재론이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신의 절대 속성이기에 신비를 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은 상대적 보편으로써 오늘날 많은 현대주의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르트와 폴틸리히의 무성의 신학과 비존재 신학이라고 하는 것으로 재생되어진 것이다.(참고,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보편이라고 함에서의 신학연구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초월성을 상대적 초월로 바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비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신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그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변이라고 함이 임의적 신비에 추종적 형태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르고 있다.

셀링은 ‘철학적 원리로써의 자아’(한자경 역 서광사)라는 자신의 저서의 서문에서 객관적인 것이 또 다른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철학의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임의적 인식의 전환을 시도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독일 관념론의 실체적인 원리들의 기본적인 이해의 시초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한자경 교수님의 사상은 바로 이와 같이 자아라는 개념으로 그 주관적 원리라는 개념을 통해 소크라테스적인 너 자신을 알라는 입장을 그의 역자로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이 아닌 주관적 이해의 철학의 원리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객관적인 것의 판단여부를 벗어난다는 주관적인 입장의 합리성이 자체적으로 정체성의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가 할 때에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셀링을 비롯한 한교수님의 입장은 한교수님의 저서에서 ‘누군가는 어김없이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사실 잘 모르겠다.’(한자경, 자아의 연구 서광사 5p)라고 함과 같이 그러한 행위적 당위성을 말하면서도 자아를 말함에 있어서는 그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하여 부정적임을 볼 수 있다.

인식의 확실성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사실로써의 인(印)쳐진 것에 대하여 불가지적인 입장에서 러셀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직접지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셀링은 그의 서문에서 부분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서 자제해줄 것과 그것의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한교수님도 그것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판단이라고 함에 당위성을 부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독일의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 즉 전체가 있는 가운데서 개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입장의 실제론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합리성의 실제관이 과연 참된 실제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를 비판함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지는 경우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인 반론이 성립 강요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관적 사실이라고 함의 원리를 말하자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가지론적 입장 즉 철학적 불가해성은 칸트 이후로 이렇게 피히테와 셀링을 비롯하여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 인위성의 제가라는 당위성을 벗어난다고 할 때에 상대적 신비와 관념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신의 신비를 해석하는 것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임의적 존경이라고 함에는 사실이해라고 하는 것이 전무한 이해의 실존의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이해사멸’이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은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 철학에서는 존경은 있으면서도 이해가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의 판단의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함과, 신비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방법론적인 신비라는 개념들의 합리성의 진행을 주목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신비주의로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와 사변이 만남을 말할 수 있다.


각주3) 코넬리우스 반틸 신현대주의 김해연옮김 성광문화사 1992, 133p이하, 137p이하 참고


각주4)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를 주목함에서도 전반적인 합리성의 재고를 분별할 수 있다.


각주5)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참고할 것


각주6) 에밀 부르너 칼 바르트 지음,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pp. 75-141.


각주7)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69p,
‘하나님은 원초적 원인까지 포함해서 만물을 무에서 만드셨다. 이 “무”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 부정, 즉 전체적인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좀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이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된다’(본문인용)

곤잘레스의 견해에 보는 바와 같이 에리게나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언급이 적절한데, 창조와 피조라는 개념의 경우의 수 개념으로써 네 가지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은 스피노자적인 개념의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론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자(一者)라는 개념의 초월적 의미로 무를 하나님의 존재로 규정하는,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8)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03-107.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보스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프린스톤의 학생들은 그를 그다지 추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판단이 확실히 옳다 하겠다: “많은 학생들은, 어쩌면 학생들 대부분이, 그를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를 존경하는 쪽이었다. 그의 강의들은 그의 저작과 같아서 이해하기 정말로 어려웠다. 풍성한 통찰이 문장마다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Richard B. Gaffin Jr., ed.,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Phillipsburg, New Jersey, 1980, p. xiii.)

그러나 그를 이해했고 그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그레샴 메첸은 “랍오니여”라는 제목의 보스의 설교를 듣고서 그의 모친께 열정적인편지를 써 보냈다:’(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04p.인용)

보스의 설교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싱클레어 퍼거슨은 리처드 개핀의 판단의 여지를 그레샴 메첸에서 찾아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퍼커슨이 소개글 마지막 부분에서 보스의 설교에 대한 형태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실제론적인 입장을 그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형태적인 설교의 잘 정리되어짐의 판단에서의 실제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메이첸과 코넬리우스 반틸은 그 변증적인 개념이 다른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같이 사역하게 되어진다. 즉 상식보편철학적인 입장에서의 변증과 반틸의 전제주의적인 변증은 그 차이가 실재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메이첸의 그 흥분은 이해가 동반되어지지 않은 존경의 한 표현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보스가 반틸의 입장적인 것을 이해하고 또한 그가 합당하게 사역할 것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보스와 반틸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윌리엄 화이트 Jr 반틸의 생애와 사상 강승주 역 새순출판사pp. 53~57. 56p 참고)


각주9) 데이빗 F. 웰스 프린스톤신학, 박용규 옮김 도서출판 엠마오, 후기형식으로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져 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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