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7월 15, 2005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책들은 전집으로 도서에 필수적으로 진열되어있고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긍정을 위한 부정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도 서점에 새로나온 책으로서 비치되어있고 그런 가운데서 니체의 중심이해라는 것이 너무 결여되어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니체가 기독교로 회심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신을 부정하게 되어지는 계기에 대하여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것은 오늘날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남에 대하여서도 한번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을 씁니다.

니체는 '그의 알지 못하는 영적 소리'를 들었던 것을 그의 일기에 적고 있음을 잔프란스키가 그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에게 언급하는 어떤 귀신과 같은 존재의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얽매인 바보들아..'

마치 시간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악령의(?)소리로 보아야 함이 객관적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각주2)이며 이러한 주관적 시간관에 대하여서는 철학계에서도 니체의 입장을 고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서울대 인문학장인 소광희씨의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주관적 시간관에 있어서 니체의 정오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현대의 철학과 신학에서 시간을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인 영원과 그것으로부터의 파생을 말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것입니다.(호남대 신학교수인 정기철씨는 '시간과 종말론' 한들출판사,에서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영향력의 그늘을 분별없는 가운데서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답변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관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적 구별점을 말할 수 있는 실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실재관에서 니체가 그 자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규정적인 것을 혐오하였던 것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규정적인 실재규정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그 사실을 말하려는 것을 가둔다는 측면에서 자유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의 안티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인식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역사를 말한다면 주관적 역사를 말하며 어차피 주관적 역사관을 말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는 갇혀진 자로서 인식되어지고 있고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또한 시간에 따른 메시아 인식의 변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열려진 주관적 시간관에 대한 성찰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님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구별되어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그렇게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기만하게 되는게 하는 것에 대한 재고적 인식활동은 보다 넓은 연구의 합목적성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목적성에 대한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미학적 개념에 이끌리어서 그러한 것에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기만적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개체를 모두 경험함 보다는 그 보편으로서의 합리성의 정체성과 범주가 정당한 것인가 시비를 가리는 것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인식에서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도덕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비평학의 노선에 의미와 실재를 임의적으로 두게되는 것의 잘못된 모습이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의 자유를 위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사실을 두려워하며 사실규정의 말하지 못함에 따른 하나님의 증거의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신학적 자리매김에 합리적 정당함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현대신학의 인식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고 함을 쓰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유라고 하는 것이 규정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위한 자기 변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에서 그 능력을 상실했음을 직감한 가운데 니체는 '언어라는 것은 존재를 맴돌기만 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울리게 되는 음악과 예술의 보편성이 더욱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그너의 <반지>와 같은 음악이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철학과 음악의 보편성의 합리적 변증적 개념에서 보편을 니체는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주 넓은 보편을 찾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보편을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합리성전체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도의 가르침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구분한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 개념과 아폴론의 규정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의 재조합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위해서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것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한 것으로 부적절하다는 점으로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인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전쟁적 개념에서의 투쟁적 개념에서의 삶의 확인을 말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창조라는 개념이 우상적 개념의 당위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된 것이며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은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언어규정이라는 개념이 비극의 탄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는 재대로 된 판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로고스 사상에 있어서는 그러한 판단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이 니체의 관찰에서 나오는 로고스 사상의 존재의 주변에 머문다는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로고스 사상의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으로서 종교개혁을 말하고 있는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니체의 입장에서 신비주의자들과 또한 철학자들과 연합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복음의 입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으며 투쟁의 신학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가운데서 상황적 사람들의 동의적 개념에서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옳지 못한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글을 씀에 있어서는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에서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과 그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의 동일성과 상관성에서 구별을 인위적으로 말할 때에 그것은 여전히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니체가 옳았던 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의 로고스 사상은 비극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콜라철학의 로고스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은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로서 그러한 니체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니체의 분별력이 상실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체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식의 왜곡을 위한 시작점이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함을 분별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주의 말씀이 존재를 창조하셨고 주장하신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분별력의 실제가 부정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그로 인한 그의 인위적인 보편인식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그 사실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비극의탄생의 판단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각주1)니체(Nietzsche)의 생애 (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56p

(각주2)잔프란스키가 인용하고 있는 니체의 일기라고 보여지는 것에서의 인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그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개념의 현상적 사실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논란이 제기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현상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피조물로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잘못된 길을 열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동일한 판단이 사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반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꼬리말

카란의 별 저도 니체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니체는 신을 잃어버린 세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조금은 안 사람이지요. 신이 없는 신학, 신이 없는 인간론, 신이 없는 윤리론을 정립할려고 했던 불쌍한 영혼이 아닐지... 2005/06/21

글쓴이 니체를 언급하게 되는 것은 그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철학과 신학의 인식의 기초로서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이해의 정초를 놓았던 것이며 이러한 주관적 해석으로 주님을 판단하며 가두는 듯한 모습이 현대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아래의 현대신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이 시간의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되어진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시간에 가두어진 시간적 인식과 그에 따른 규정이라는 것에 매이는 듯한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시간의 주관성을 말한 니체의 입장에서의 현대신학적 인식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이 악의 영적인 개념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분별이 요구되어지는데 현대철학과 신학에서는 임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을 시간의 판단에서 가두어지는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인식에 대한 발전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으로 개연적 당위성에서 그러한 노력들의 당위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에서는 로고스 즉 언어라는 개념은 존재에 감동이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는 아폴론식의 언어의 출현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규정되어지는 사실들자체가 삶의 상승이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하나님의 절대의 속성도 헤겔의 잘못된 절대관이라는 개념으로 부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의 부정을 말함과 그것으로 인한 초월적 자신의 삶의 상승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중심과 삶을 얽어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은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언어의 정체성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아폴론을 비롯한 스토아학파의 로고스사상의 유물론적 개념과 신플라톤적 개념에서의 유출적 개념을 말하는 스콜라신학에서는 니체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그러나 종교개혁때에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함으로서의 기독교의 본성의 실제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그 말씀의 능력이라고 함이 자증적 권세를 가진다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비극의 탄생이라는 니체의 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즉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은 니체가 판단한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서의 실재가 부정되어지는 그런 로고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의 자증적 성격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 주어지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과 <비극의 탄생>은 그 인식에서 현대철학과 신학에서 신앙의 실제를 부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을 가두는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인식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함의 자의적 합리성으로 부인되어야 할 인식들인 것입니다. 200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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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7월 14, 2005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Nietzsche)에 관한 책(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을 읽었습니다. 별로 신경이 가지 않아서, 신은 죽었다는 그러한 말을 남긴 것에 대하여서 별로 신통치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어보니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보편에 대한 생각을 임의적으로 생각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 안에 독자들을 가두는 정도의 똑똑함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있어서 유명론의 충격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 기독교 특히 구교의 큰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후스토L 곤잘레스는 그러한 것을 기독교사상사 II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곤잘레스의 견해를 따르면 유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러면서도 보편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동일저서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사상사에서 필로의 경우를 따라서 플라토닉 삼위일체라는 개념의 철학적 신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어지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런 플라토닉 삼위일체로서의 해석되어지는 '갑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합리성'을 상대화시켜서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명론적인 입장을 따르는 가운데서 플라토닉적 개념을 말한다고 할 때에 이 니체의 경우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도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기독교의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성육신의 메세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던데..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것과 자존의 스스로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개념과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독교 비판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신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니체의 내재적초월이라고 함의 보편성에서는 아주 비겁한 것이라는 임의적 합리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와 그 계시의 정당성을 말하는 칼빈의 입장에서는 니체의 성육신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개념을 자신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의지로서의 자유라는 개념의 스스로의 개념과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에 기준적 실제를 기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중세에서 답변하지 못하였던 유명론적인 입장에서의 비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보나벤투라를 기반으로 한 곤잘레스의 플라토닉 삼위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중세의 사상의 연속성을 현대에서 전혀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스콜라신학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여전히 임의적 실재론과 삼위론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니체의 유명론적인 개념에서 이어지고 있는 성육신 기독론에 대한 유비적 개념에서의 해체적인 반론에는 답변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함이 루터의 개념에서 비롯되어서 칼빈에게서 완성되어지고 비로소 개혁의 사실과 말하게 되어지는 사실의 실재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말하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니체의 반문 성육신에 비교되어지는 인간의 스스로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모습의 유비적 개념의 상정이라고 하는 것의 주장과 그에 따른 기독론적인 비판이 성립되어진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어려서부터 현실적인 실제라는 개념의 사실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고민하였던 것인데 그에게는 그 실재론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을 양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이라는 소우주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범주의 상대적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적 초월을 말하며 그러한 보편성으로 모든 개체들 즉 신의 존재까지도 상대적으로 개채화시키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임의적 당위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충실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고통이 있어 그의 학문은 실험에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누어진말들

글쓴이 니체의 신이 죽었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은 내적 초월이라고 하는 자기를 위한 상승의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만 결국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한정적 무한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니체 자신의 보편성이라는 개인적 보편성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니체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그 충격에서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러한 것이 그의 올무가 되었던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모든 니체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무한 특히 자기를 알기 위한 자기를 타자화 하여서 들여다 보게 되는 가운데서 자기를 상승시키는 의지 그것의 자유라고 하는 그러한 언어는 상대적 보편에서 형성되어지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2005/05/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그의 모든 합리성의 전체성은 이미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으로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을 그는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리고 그러한 자신만의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의 한 개체적 보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보편은 그 개체로서의 보편은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것이 그의 사상의 부인되어짐의 실재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사상가의 지위는 그가 끼친 영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저도 니체는 너무 암울해서 가까이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철학수업에서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었고 저도 그를 간략하게 조사해서 발표했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지금도 저는 니체를 잘모릅니다.그의 사상은 정신병력과 관계가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고 병명은 뇌매독 일것입니다.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더라도 떳떳한 결과는 아니죠. 2005/05/23

코코시카 지난번 미가서 문제의 핵심은 주어의 해석입니다.님의 글을 자세하게 독해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결국 '7절은 8절을 위한 예비적 서술에 불과하며 이스라엘 전통에 인신제사는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2005/05/23

코코시카 님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문의 글을 인용했습니다.잘 생각해 보면 미가가 결론을 말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인신제사를 언급했더라도 문제있습니다.많은 고상한 비유와 실례를 들 수 있었을턴데 가장 비인륜적인 경우를 열거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신실한 선지자가 최악을 상상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제3의 해석을 지향하더군요.님에게 묻고 싶습니다.이스라엘에 인신제사는 본래부터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대답한다면 님도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한 사람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합리성의 사실을 규정하는 실제로서의 기준의 실재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합리성의 충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2005/05/26

글쓴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별루 마음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그에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의지적 발상이 니체의 창조적 입장과 동일시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별로인데... 그들을 이해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옳은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의 고뇌를.. 2005/05/26

글쓴이 전 니체가 상당히 똑똑하였다는 것과 그 당시에서는 그에게 답변할 독일 신학의 부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와 같은 그의 고뇌와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의 걱정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저의 행보의 한 방향이 되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2005/05/26

글쓴이 물론 독일 신학의 실재에 대한 부재와 관념론의 사실규명이 유명론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말하지만 결국 니체의 고민과 같이 믿는다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분별하지 못한 불운에서 비록됩니다. 제가 읽은 위 본문에서 소개한 책 63p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5/05/2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