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요일, 5월 19, 2006

'니체'와 '상품화된 니체'

니체는 그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후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초인적인 그러한 점에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고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요즘에 해석되어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적 평가는 너무 인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거로는 아래에 출처를 밝힙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참고로 니체에 대한 글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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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해석에서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에 대하여서..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그 첫번째가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택스트를 읽을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보다는 잘 되었다는 해석을 취함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마련한 아주 중요하게 보일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도 잘 정립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의 의미는 니체를 온전히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니체를 비판하는 것까지도 니체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한마디로 니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없다는 말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용되는 인식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말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는 그 말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측면에서 아무리 비판하여도 그것은 니체의 판단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용어의 뜻을 말한다면 '택스트를 해석하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표현적 인식을 위한 그보다 상위의 인식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상위의 인식들을 존재하게 하는 상대적 무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어떠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고 니체를 반박하는 것으로 보이는 해석이라고 하여도 그것도 상대적인 가운데서의 한 표현일뿐 그것을 말할 옳은 해석은 아니라고 함이 더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관점도 역시 거짓이라고 함을 주장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옳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개체적인 한 표현과 관점밖에 안된다면 그것이 잘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니체와 그 해석의 자체적 인식추구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해석한다면 컴퓨터의 예를 들겠습니다. 악성코드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파일을 아예 지울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파일은 보호장치가 되어 있어서 지우면 지울 수 있는데 다시 복구되는 그러한 파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그것과 같이 레지스터리까지 지웠는데 다 지우지 못하면 다시 파일이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모든 관점이 거짓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럼 니체의 관점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말에 그들은 수긍을 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인 것이고 니체의 추구하는 전체적인 관점의 보편성을 말하기는 편협한 독단적인 것이라고 상대적인 보편적 정당함이 결여되었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에 즈음해서..

한마디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상대적 무한과 절대의 무한이라는 개념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당성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함을 말해두는 것입니다.

니체의 합리성의 정당함은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적 개념으로써의 상대적 무한이라는 보편성을 읽게 되어지며 그것은 종의 개념에서의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해석적 인식의 무한을 말하고 그것에 정당함을 찾게 되는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시간론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상대적 무한의 인식의 범주의 비교에서 현재에서 인식의 주체적 기준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에서 현재 표현되어지는 것은 실재를 반납한 실재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기호론으로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임의적으로 그러한 실재를 부여한다는 것에서 특히 그 임의적이라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정당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성의 불연속성을 넘는 정당성을 임의적으로 합리성에 부여함으로 취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바로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 임의적이지 그것이 절대적 자존의 정당함을 얻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인식의 메비우스 띠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에 분별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의 권력에의 의지적 표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 그것을 말하려면 그들의 언어로서의 메타적 해석 인식의 기초의 처음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의 생성과 정의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은 상대적으로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절대적인 평가에서 좌초되어진다고 하면 상대적인 합리성의 마련한 니체의 메타해석 인식의증식이라는 그 자체의 존재와 해석과 거짓관점의 실존을 말할 수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두가지 예를 든다고 하면 첫번째 메비우스 띠위의 직선들은 무한하며 그것의 직선의 방향은 무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비우스 띠라는 존재는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공중에 메비우스 띠를 하나 띠워놓고 본다면 그 공중 안에 한정되어진 띠하나를 그냥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개념의 조합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무한의 특성인 그 경계선의 규정적 설정이 어렵다는 개념을 인문학적 문학적 개념으로 읽어내는 니체와 그 추종자들은 지혜롭기는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 초등학문의 범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에서 절대의 무한을 찾을 수 있다는 망상은 아이들이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개념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실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

또 한가지를 말한다면 컴퓨터인데.. 악성코드나 보호장치가 있는 파일은 자체로 지워지지 않거나 지울 수 있다고 하여도 다시 수록되는 특성이 있는데 사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처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료 파일들을 백업한 후에 전체 포맷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컴퓨터의 지식이 있다면 레지스터리를 통해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메타인식의 증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절대의 속성과 개념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말한 것을 다 상대적이다 라는 개념으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 상대적 판단의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함에 대하여서(기독교의 관점)는 소득없는 구걸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기만하기를 바래야하는 초라함에 머물고 말것입니다.

그러한 겨우 상대적 무한의 정당함의 인식에서 무리하게 표현한 말인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 당시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것을 믿으면서도 그 실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어 보이는 정황에서 상대적 정당함을 위해서 변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정당함을 따라서 비로소 합리성의 실존을 말한다는 그 표현은 옳지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해석에서의 메타적 인식의 증식을 말하는 지혜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에서 삶을 위한 상대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인식 자체에서 절대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인식의 기만이 교만으로 사실화 되는 것처럼 거짓되게 정교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의 반대가 절대라는 개념)이 아닌 것과 같이 상반적 개념설정의 범주에 절대가 포함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재고하지 못한 정직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은 상대적인 어떤 합리성에서는 그의 사상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교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판의 여지라는 것이 절대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때에는 절대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보편성의 재가를 받은 합당한 정당성을 가진 상대적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으로써 그 니체의 사상을 실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메시아적 사유에 따른 철학의 실존에서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신학의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되어질 것입니다.(각주1)



각주1) 엘렌슈프리드, 니체와 니체해석의 문제, 박규현 옮김, 푸른숲..

제가 한 여름동안 읽은 니체의 세권중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모두 긍정한다는 것과 모든 내용을 추천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이해와 인식의 도움을 위한 것으로 상당히 괜찮는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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