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일, 3월 30, 2008

On Yahweh's nameability (Exo 3:14) -no Barth's construction on it-

On Yahweh's nameability (Exo 3:14)
-no Barth's construction on it-


서론

본 글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조직신학적 이해를 구하는 분'(각주1)의 입장에 동의하면서도 그가 취한 해석적 사실에 대하여서는 반대하는 답변으로서의 글임을 먼저 언급해둔다. 그리고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사실규정에 대한 나의 입장을 이미 밝힌바가 있다.

여기서 'nameability'를 나는 소위 이단인 '여호와증인'의 한 사람이 아니면서도, 합당하게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규정'이라고 언어를 사용하고 있음과 또한 앞으로 일반적 사용함에 있어서 그 합당함을 말하고 있다.(각주2) 이것은 저자가 여러 신학자와 철학자들의 인용적 당위성을 따라서 '신명의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ility)'이란 말로 언급함(각주3)에 대하여서 언어에 대한 실재적인 바른 규정을 밝히는 것이 논의의 주제로 나타나게된다.

내용 전개에 있어서는, 신학함에 대하여서 재고할 것이며 그 아래 일반 구성주의에 대하여, 신학적 재구성에 대하여, 그 아래 신학적 사실과 그노력들로서의 보편추구, 합리성자체의 자기 정당화의 한계 등을 다루겠다.

결론적으로는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 따른 시간인식과 역사인식에 대한 양심의 바른 중심을 가지고 성경을 해석해야 할 것과 그 사실과 진리에 따른 것이 하나님의 이름을 영화롭게 하는 것임을 재확인하게 될 것이다.






본론




신학함에 대하여

신학함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합목적적 개념으로만 접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주님의 명령을 따르기 위해 필요에 한정시키는 것은 그리 바람직하지 않다. 신학이란 용어로서는 하나님과 학문의 합성어로 하나님에 대한 학문 하나님에 관한 학문이라고 할 수 있다. 그래서 하나님이 행하시는 것을 받들기 위한 봉사신학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것 앞서 하나님의 속성 그 존재를 바라볼 때에 하나님께서 자의식을 스스로 가지신 것과 같이 우리 인생의 정체성을 바르게 스스로 알아감에 있어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깨닫고 배우는 신앙이라는 동연적 생활의 모습이 신학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을 말함이 바로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출3:14)의 의미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하나님 안에서 인식의 사실을 실제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 하나님께 하나님을 배우는 신학함의 기본적 사실임을 기억하기 때문이다.


1. 일반 구성주의에 대하여..

앞서 신학함이라고 할 때에, 하나님을 배우고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삶의 있어서의 정체성을 언급했다. 이러한 것이 인문적 개념으로 표현되어질 때에 그 상관성을 의식하게 되는 것이 구성주의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구성주의자들은 이런 말을 하고 있다. '학습자의 지식 구성 과정을 효과적으로 설명할 수 있는 이론 체계 중의 하나일 것(각주4)'이라는 자부심을 가지고 있는데 사실 그것은 이미 신학적 입장에서도 도입되어지는 경우를 재고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의 비평이라고 하는 것의 기준도 사람의 '심리적 현상으로서의 기억이라고 하는 것과 변형이 문화접변에 따라 이루어지는 가운데서'(각주5) '성경의 전승'을 언급해야 한다는 것과 또한 가설을 지적하고 있다는 점도 기억할 수 있기 때문이다.


2. 신학적 재구성에 대하여

신학적 방법론에 대하여서 특히 재구성적 신학을 논하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자는 카우프만 박사이다(각주 6). 재구성이라는 것이 실재를 도울 수 있는 것으로서 취할 수 있는 것이라면 그렇게 크게 문제가 되지 않을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러나 그 재구성적 진실이 진리인가에 대한 자체적 언급들 특히 성경전승의 역사에서의 문제는 생각하기에 따라서는 크게 문제가 될 수도 있는 것처럼 현실적인 비판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이다.

우리가 볼 때,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 필요에 따른 것들, '중세에 하나님에 대한 변호의 필요성에서 신학적 접근을 하는 가운데 하나님에 대한 합당한 증거라고 하는 것을 마음에 두지 못한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을 그 합리성 자체에 두게되는 실수를 범하게 되었다.(각주7)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의 부제와 그 앞서 실재론이 철학적 개념으로 한정되어지는 가운데서, 필요라는 재구성이 신지식 그것이라는 재구성적 진술을 진리로서 강요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신은 죽었다는 언급을 하는 것이 그 또한 이유있는 현대 이성들의 현명하지 못한 지혜이다.

이러한 재구성적 출발과 함께, 성경전승이라는 것, 기록된 성경의 구성적 작업이라고 하는 것 선별적 작업이라는 것의 고통을 가지게 되고 재해석적 작업도 있었던 것이다. 물론 그것에 대한 그것의 집행자의 믿음이라는 주관적 입장에서 이루어지기도 하지만 하나님의 섭리가운데서 선하게 이끌어오게 되었다는 점은 주관적인 측면에서도 재가적 차원에서 실제적 사실로 받으며 증거하는 것이다.

앞서 해석적 작업에서의 재구성을 언급했는데, 본 현대 '조직신학의 이해'에서도 신명의 기원에 대한 여러 가설들(각주8)이 문화접변이라고 하는 것에서 해석되어질 수 있는 중심의 선별적 언어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3. 신학적 사실을 위한 노력들들로서의 보편추구

개체적 사태인식에 따른 실제와 실존의 관계성이라고 하는 것을 의식하며 그것의 정당화 즉 사실의 정당성을 말하기 위해서 사람들은 보편을 추구해왔다. 인생이 일반 현상적으로 주목할 때의 자연의 보편성(물론 이것은 신학적으로 합당하게 하나님의 형상이 전적타락후에도 남아있어서 하나님의 절대보편에 대한 의식이, 죄로 인해 타락한 후에,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도 무의식적으로 표현되어진 것)에서 자기 실존을 이해하는 개체와 보편의식을 가졌음을 지적할 수 있다.(각주9)

개체와 보편의 상호 관계성이 있으면서도 인식의 주체의 주제에 따라서 상대적인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는 특징적 인식의 행보를 말할 수 있음을 기억함이 요구되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에 어떤 사상의 편린들을 표현할 때에 그것의 최소한 타당성의 개념의 설정을 위해 보장되어질 수 있는 범위나 범주로서의 보편을 추구한다는 것이다.(각주10)

이러한 보편추구에서 신학자들은 각기의 신론적 또는 실재적 개념을 가지고 계시의 현장인 시간을 재구성하여서 자신의 사상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다.(각주11)

그런데 중요한 것은 앞서 말한 철학자나 신학자들의 신론적 또는 실재적 중심이 과연 그 정당함을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 질문에 답변하는 자가 없다는 것이다. 허용되어질 수 있는 즉 재가되어질 수 있는 상식적 개념에서 단지 가능성의 개연적 당위성에서 언급될 뿐이다.

형식적으로 구교 가톨릭의 입장에서는 신의 보편을 말하는 것과 그것을 설명하고자 하는 가운데서 아리스토텔레스의 부동의 원동자를 스스로 존재하는 자로 해석하고 표현을 그 철학으로 나타내고 있다고 함은 인정될 수 있으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하나님 자존자는 아니라는 것이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 그 철학적 자존자에 대한 것에 대한 개조를 원하는 자들은 칼 바르트(Karl Barth)의 신학적 입장에서 소위 통전적 비판을 전개하는 것에 열심을 낼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본인은 둘다 틀렸다는 것이다. 그것은 구교의 입장에서의 자존자의 개념은 성경적인 측면에서 자존자가 아니라 철학적 자존자로서의 해석으로 자리매김되기 때문에 잘못되었고(각주12), 바르트의 입장은 그 철학적 신론에 대한 개조를 위한 변증법적 사실을 말함에 있어서 그 사실의 정당성 추구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각주13)

구교 가톨릭이나 현대신학에서 합리성에 따른 재구성으로서의 '객관적 근거지움'을 통한 신학적 진술이 있어왔지만 그것의 합리적 당위성을 타당성의 모습을 통해 세워오면서도 그 타당성이 정당성으로서의 본래성을 비로소 말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

'신명의 언표가능성'이란 표현이 적절하지 못한 것은 그 해석적 중심이라고 하는 것이 최대한 가능태적인 실존의 의미부여와 규정을 재구성할 수 있다는 측면을 나타내는 것이라고 할 때 이해되지만 그리고 그 특이성을 나름대로 바르트의 정신에 따라 규정할 수도 있다고 본다.(각주14)

그러나 신명의 실재론적 능력에 따른 규정에 있어서는 그러한 것들을 기각 판단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게 되는 것은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에서 비롯됨을 인함인데, 그것은 임의적 상대적 합리적인 것에 따라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것과는 달리, 규정적 정당성을 스스로 취하는 가운데서 그 정당성의 절대 본래성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자존자만이 그 본래성을 스스로 절대성과 함께 영원성으로 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신명의 해석적 여러방법들 중(각주15)에서 '자존의 하나님'으로서 해석될 때(각주16)에 그것은 해석의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는 방법적 당위성을 가지고 있다는 특성이 있다 더 나아가서 스스로 정당성까지도 취할 수 있는 방법론의 형태적 해석 실존체이기 때문에 납득의 당위성까지도 그 해석이 포함하고 있다는 것이다. 더 나아가서 그것은 그 자체를 정당화한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자기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과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여서 사태인식에서 사실과 진리를 규정하신다는 것이다.






결론

비근한 예이지만, 프랑스 혁명의 예를 들 수 있을 것같다. 프랑스혁명의 의의는 근대와 현대의 국가관이 형성할 수 있는 모형을 제시할 수 있었다는 측면에서 의미부여가 가능하다. 그런데 그러한 가운데서도 실패의 모습들에서도 몇가지 마음에 두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이성'에 근거한 사회의 새로운 틀을 마련하려는 문화혁명이었기에 가톨릭의 영향이 강한 그레고리역에 대신한 프랑스 공화력을 1793년에 공포했다. 그러나 그것이 십진법적 배열에 따른 공화력이 익숙하지 않아 실패하였다. 즉 시간 역사에 대한 지배권을 내어준 것이다. 즉 프랑스혁명의 실제관이 역사적 정당함을 국민들에게 인식시키지 못했던 것이다. 더욱 다른 카드놀이도 종전의 것을 폐지하고 '혁명카드가 만들어졌는데, 원래의 카드로 돌아갔다.

이처럼 하나님나라를 위한 노력들은 좋지만 시간의 해석적 유희와 상대적인 측면에서의 허용될 수 있는 유희는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시간의 인식의 정당성을 무시한 가운데서 역사적 개념을 주장하는 신학자들의 합리적인 대안 카드는 '기만을 위한 카드'요 '조커'가 될 것이다.

그러한 시간의 인식의 정당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바로 출애굽기 3장 14절 해석(각주17)으로서의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의 특이성에서 실제의 본래적 정당성을 바르게 찾는 가운데서 성경을 오해하는 일이 없이 주님을 따르게 되는 귀한 은혜가 있기를 바라며 필을 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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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1)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5-6, 15-41.

책 전체에 대한 비판이 있어야 하겠지만, 실제적으로 합리성의 실제론에 대한 당위성을 놓게되는 신론적 정당함의 여부와 실존에 대한 언급을 판단하게 된다면 그 나머지의 합리성이라는 것은 납득과 판단 수행의 당위성에 의미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는 점이다.

즉 신론적 입장의 보다 바른 중심의 실재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이 전반적인 해석적 수행을 요청하기도 하고 또는 기각의 당위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의 '신명의 계시는 신론의 출발점임에도 불구하고 그 동안 조직신학자들은 이 문제를 소홀히 취급하였음을 지적하고 싶다.'(상게서 p.19) 라고 언급한 것에 나는 동의할 수 있다.

물론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는 성경신학적 입장에서 해석되어지고 논의되어지며 또한 그러한 것이 조직신학이나 소위 교의학에서도 다뤄질 수도 있고 또한 그것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음을 인정함이 옳다고 본다. 즉 조직신학과 성경신학의 상호 상관성과 관련성에서와 실재론에 대한 입장에서는 당위성이 이미 설정된 것이라고까지 할 수도 있겠다.

일반적으로 저자는 바르트적 입장에서의 그리고 개혁주의와 복음주의적 인사들의 표현적 동등성을 임의적으로 비교하면서 기술하고 있다. 여기서 임의적이라는 것은 실재론적 개념의 형성을 일관적으로 결여하고 있기 때문이다.

특히 바르트의 입장으로 결론을 내리고 있는데, 결론에서는 결국 상식적인 개념으로 인지상정적 개념이라는 개념으로 임의적 역설로 글을 맺고 있다.

그러나 학문의 깊이와 연구의 범위에 있어서는 상당히 깊이와 넓이를 말할 수 있고 잘 요약되어 있기 때문에 일독을 권할 수도 있겠다. 다만 바르트의 해석의 당위성이 실재론이 결여된 합리성에 그치고 만다는 것에 실망할 수밖에 없음에 아쉬움이 있다.


각주2) 객관적 근거지움이라는 차원에서, 언어의 기득권을 인정하는 것이 기본이지만, 그 기득권이라는 것이 또는 부여된 인식 자체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면 그 기득권과 그 합리성은 새롭게 근거지움을 받아야 한다는 것은 열려진 사실이다. 즉 신조어라는 개념도 주의 뜻하심의 당연성에서 객관화되어질 때는 수정되어질 수 있는 것이 그것이다. 본 논의는 그것을 위한 것으로 전제되어진 인식의 행보이다.

'신명의 언표가능성, 불가능성(Yahweh's nameability)'을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으로 바꾸어야 한다는 것이다.

바르트의 무성(nothingness)신학은 인간과 관계되는 실재(reality)라는 면에서 언급되어질 수있는 존재론을 견지하고 있다(장성민, -김균진교수감수,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바울 p. 16.) 이와 같이 그의 당위성을 합리성에서 요청할 뿐 본래성을 말하는 중심이 없는 신론적 존재에 대한 입장에서 변증신학을 열기 위한 신론해석을 위해 단절이라는 해석적 필요성이 있었던 것이다.

그것이 바로 본 저자가 본서에서 언급한 바르트의 내용들이 되는 것이다. 이것은 신론적 당위성을 위해 신론을 임의적으로 재구성했다는 측면에서의 합리성이지 결국 합리성의 본래성을 말할 수 없게 된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언표 가능성 또는 언표 불가능성의 공존으로서의 변증신학적 해석은 그 합리적 당위성이 실제를 비로소 말하지 못하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언급한 '신명의 언표가능성(Yahweh's nameability)'는 실재론에 따라서 의미규정이 바뀌어 규정되어야 한다.


각주3)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29, p. 31.

저자는 베버의 말을 인용하고 있다. 그리고 그의 입장에서는 바르트를 따라서 오히려 가능성보다는 불가능성을 따르고 있다. 물론 단절이라는 그런 개념에서 임의적으로 불가능성 자체가 알려진 것이라는 점에 그의 중심을 두고 있다.(상게서 p.41)


각주4) N. N. Spivey. 구성주의와 읽기 쓰기 : 읽기 쓰기 의미구성의 이론, 신현재외 박이정 2002, 2004 (옮긴이의 말中)


각주5) N. N. Spivey. 구성주의와 읽기 쓰기 : 읽기 쓰기 의미구성의 이론, 신현재외 박이정 2002, 2004 pp.69-72. 74-81.

본서의 저자 N. N. Spivey는 제2장 바틀렛의 회고 부분에서, 『기억』연구에서 다루어진 “유령들의 전쟁(The War of the Ghosts)이야기”를 언급하고 있는데 기억의 번형에 대한 실험관찰을 가지고 있고 그 피실험자들의 의식의 변형을 가져옴에 대한 연구가 언급되어 있다.

주요 내용은 그가 들은 이야기를 전체적인 내용에 맞추어서 변형시키는 것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없는 것도 더 만들어내거나 또는 그가 접한 문화에 따라서 그 인식의 변형이나 적용도 달리 나타남에 대한 것도 한 부족을 통해서 언급한 내용이 따로 있다.

이러한 측면에서 성경의 전승을 말할 때 과연 그러한 내용을 구성하는 사도들과 및 전승자들의 인식도 유사비교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비평학도 그것을 배제하기 위한 비평적 기준을 가지고 있다.

에른스트 트뢸취(Ernst Troeltsch)는 칸트가 죽고 거의 1세기 후의 한 논문에서 계몽주의에 의해 태어난 역사적 비평을 지도하는 세 가지 근본 원리에 대해 결정적인 요약을 제공하였다. 1. 방법론적 회의의 원리, 2. 유추의 원리, 3. 상관성의 원리.
(로버트 스트림플, 현대 복음서 비평에 관한 개혁신학적 조명, 예수 그는 누구인가? 여운세, 생명의 말씀사 p. 23.)

1번은 개연성을 말하는 것으로써 인식과 의식의 변형이 있다는 점을 전제로 말하는 것이며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은 문화접변과 같은 상황적 영향력의 판단이라고 하는 것을 고려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개몽주의적 개념에서의 구성성은 전승에서 있게 되어지는데 그것은 성경의 진실성을 어떻게 말하느냐는 비판이 있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오늘 논의되고 있는 신명의 실재적 규정에서 답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6) 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중략) 이제 카우프만은 자신이 신학을 신학적 상상력에 기초한 구성신학(constructive theology)또는 재구성신학(reconstructive theology)라고 명명하고 있다. 최근에는 카우프만이외에도 신학, 특별히 지금까지의 조직신학을 구성신학, 재구성신학으로 부르는 많은 신학자들 및 그들의 책(대표적인 것으로 Reconstructing christian theology (R. chopp eds.)와 Winds of the spirit : A constructive christian theology (P. Hodgson)]들이 있기는 하지만 이런 용어를 가장 앞서 사용한 사람은 카우프만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재구성적 개념으로서의 신학이 진정한 사실인가 하는 것과 그것을 사실화할 것으로서의 실재론은 언급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 이러한 임의적인 합리성의 사변적 존재의 슬픔이며 기만이 되는 것이다.

현대신학에서 실재론이 부재한 가운데서 재구성된다면 그것은 사태의 실제나 사실로서의 진리를 비로소 말할 수 있는 정당함은 없게 된다는 판단하에 있게 된다는 것이다.


각주7)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대한예수교장로회출판국 이형기 차종순 I p. 191.

반면에 이단들이 제기한 도전은 또 다른 형태의 응전을 가져왔는데 다름이 아닌 신학 활동이라고 할 수 있다. 많은 기독교인들의 사상과 붓대는 전통적인 기독교보다는 좀더 합리적인 기독교를 보이겠다고 하면서 기독교를 새롭게 해석하는 데 자극을 받았으며, 이들이 곧바로 신학적 활동을 전개함으로써 직접적으로 이단을 부인하는 선을 넘어서서 더 많은 영향력을 끼치게 했다.

필자 : 이러한 신학활동이 하나님을 바라보는 가운데서 신학함에 대한 인식으로서의 신명적 실재론을 마음에 둔 것이 아니라 진실로 믿는 하나님에 대한 재구성적 입장의 필요성에 입각해서 시작함에 그것이 전도되어지는 즉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비로소 하나님의 지혜라고 하는 것이라는 임의적 강조가 확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서 고민하게 되었던 것이다.

물론 처음에는 하나님을 진실로 믿는 중심이 있었지만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필요조건이었고 그래서 하나님의 삼위일체과 같은 또는 사도신경과 같은 그러한 신명의 실재론에서 구별할 수 있는 여러 재구성적 활동을 한 것에 대하여서 그 사역은 귀한 것이다. 그러나 실재론이 준비되지 않은 상태에서 출발한 가운데서 그 재구성 산물의 정당함을 구별할 수 있는 길이 없어진 것과 그것은 인위적 재구성의 범주로 전락하는 당위성에서 실제로 자유할 수 없었고 없다.

예를 들어 성 아우구스티누스는 신플라톤주의자이다. 신플라톤의 신은 성경이 말하는 하나님은 아니라는 점에서 아우구스티누스의 신앙은 점검을 받아야 한다. 그러나 초기의 정황과 인식의 상황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을 진실로 믿었음과 그것을 증거하기위한 한정적 차원에서의 철학적 기술이었음에서는 그의 신앙만큼은 신실함으로 받을 수 있다. 그러나 그의 학문적 재구성은 새롭게 구별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각주 8)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19-20.

예를 들면, 신명에 대한 미디안 가설이 그것이다.

모세에게 여호와/야웨 신명이 처음으로 알려졌다는 전제에서 이 신명의 기원과 유래에 대한 여러 가설이 제시되었다. 모세가 미디안에 피신하여 미디안 제사장의 딸과 결혼하였고(출 2:21f.), 그 곳에서 처음으로 여호와/야웨를 만났으며(출 3:1-15), 출애굽 후 다시 그 곳에 들렀을 때 그의 장인 미디인 제사장이 여호와/야웨의 위업을 찬양했으며 함께 희생제사를 드린 것(출 18:11-12)에 근거하여 여호와/야웨는 본래 미디안 족속의 신으로서 그들의 성소인 시내 산에 거처하던 신이었는데 모세가 그 성소의 제사장인 그의 장인을 통해 이 신을 알게 되었다는 미디안 가설이 제시되었다.

인접 문화 '삶의 정황'이라는 것이 그 상관성에 있어서 영향력이 있어진 가운데서 구성되었음에 대한 해석적 구성성을 지적할 수 있는 것이다. 앞서 말한 트뢸취의 비평학적 입장이 그대로 반영되어진 것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비평적 신학의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이 가설이면서도 대안이 없을 때에는 사고의 발판과 기저로서 요청되어진 사실로서 형성되어지는 것과 같은 인식의 변형을 통해 사실과 진리를 판단하는 근거가 되는 것을 볼 수도 있다.

그러나 그것은 진리일 수가 없다. 그것에 대한 입장이 바로 실재론의 인식과 정당성의 시비에 관련된 것이다. 그리고 그 기저에는 본 논의의 중심인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에 관한 이해와 증거이다.

이것에 대하여서 답변으로서 로버트 스트림플게할더스보스예수의 자기계시(THE SELF-DISCLOSURE Of JESUS(The Modern Debate About The Messianic Consciousness))로 나타난 그의 사상적 지원에서 답을 찾고 있는데 그의 실재론에 입각해서 주목할 때에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에 대한 사상적 기조를 볼 수 있다.
(로버트 스트림플, 현대 복음서 비평에 관한 개혁신학적 조명, 예수 그는 누구인가? 여운세, 생명의 말씀사 p. 29.)


각주9) 개체와 보편의 의식의 기원이라고 함을 말하는 여러 가설은 여기서 다 다루는 것은 의미가 없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기술적 수행의 모순이라고 함을 인정하면서도, 그것의 판단을 받지 않는 신명의 실재론적 기반의 정당성에서 전제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신학적 사실을 바로 언급하는 것으로 논의의 서술을 이어가도록 한다.


각주10)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사칙연산'이란 것도 '덧셈','뺄셈', '곱셈', '나눗셈'이라는 계산방식의 범주내에서 개체조작은 무한히 할 수 있다. 그러나 이러한 수학에서 조건을 달리 주어서 다른 연산을 얼마든지 만들어 낼 수 있다. 즉 다른 연산의 세계, 다른 경우의 세계를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이다.

이런 비근한 예 외에도, 조건이나 상황이 달라지면 어떤 그 상황하에 있던 사실들도 달리 생각해야 함이 요구되어지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처럼 철학과 그것에서 파생되어진 학문의 영역들도 모두 각자의 보편적 세계를 구축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이처럼 신학적 사실에 대한 것도 하나님을 어떤 분으로 생각하는가에 대하여서도 그 타당성이라고 하는 것이 신학적 진술이라고 하는 것 그 인식의 사태에서의 인식되는 실제는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그 가운데서 본 논의의 핵심인 이러한 신학적 재구성에 진술이 사실임에 대한 정당성 시비의 기준으로서의 '신명의 실재론적 규정(Yahweh's nameability)' 비로소 하나님의 절대보편을 그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본래적으로 가지고 있다는 것을 통해 신명의 가능성이나 불가능성 또는 불가능성의 계시라는 변증적 개념이 의미를 상실한다는 것을 분명히 하고자 하는 것이다.


각주11)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최대희 뿌리와 이파리 2003(UMGANG MIT GESCHICHTE by Hans-Jurgen Goetz 1995) p. 35.


"역사를 자기 것으로 만드는 자가 동시에 권력도 자기 것으로 만든다."..., “어떤 국가가 역사를 보유하고 있지 않다면, 이 국가에서는 기억을 채워주고 개념을 손질하여 과거를 해석하는 자가 바로 미래를 획득한다.” (Michael sturmer, zit. nach Hans-Ulrich Wehler: Aus Geschichte lernen?. S. 32.)

이러한 언급이 있듯이 신학자들도 자신들의 실재(reality)개념으로 독특한 시간을 가지고 역사철학을 전계하고 또한 신학적 재구성을 시도하였다. 신학자들의 개별적 시간관에 대하여서는 정기철 교수가 개괄적으로 논의한 적이 있다.(정기철, 시간문제와 종말론 -시간의 철학과 시간의 신학- 한들출판사)

정기철 교수는 그의 서문격인 '감사의 말'에서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의 창조(과거)와 지속(현재) 그리고 종말(미래)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수반되어야 할 사항은시간을 영원과 관계에서 규정하려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가 없다.'는 언급을 했다.
(상게서 p. 6)

시간의 다양성을 인정하고 여러 측면을 주목하고 사유할 수 있음에 대한 것은 열어놓아야 하고 그것에 동의하지만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정당한 시간인식이라고 함의 사실적 시간과 그에 따른 역사를 마음에 두지 못한다면 역사가로서의 양심은 이미 기만이라는 점을 우려할 수 있는 것은 또 한 사람의 역사가의 지론이다.

"..양심에 관련된 진술은 결국 역사가가 동시대를 사는 사람에 대하서 또는 역사연구의 결과를 섭취하는 사회에 대해서 져야 마땅한 책임을 의미하기도 한다. 니체는 동시대의 역사서술이 삶을 강화시키기는커녕 약화시킨다고 비판하면서 역사서술이 지닌 위험성에 대해서 지적한 바 있다. 역사를 다루는 방법은 위험을 내포하고 있다. 말하자면 잘못된 역사방법은 사람을 현혹시킬 수도 있고, 거짓말을 할 수도 있고, 적당히 얼버무릴 수도 있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양심을 갖고 있지 않는 역사가는 위험하다고 할 수 있다."
(한스 위르겐 괴르츠, 역사학이란 무엇인가, 최대희 뿌리와 이파리 2003 p. 30.)

과연 역사를 말하는 그 실재(reality)개념의 인식 정당성을 본래적으로 말하지 못하면서 말하는 것이 정당한 것인가에 대하여 신학자들은 임의성을 인정해야 하며 그들의 재구성이라고 하는 것을 사실이라고 함의 주장적 입장이 기각됨에 동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총체적 기각속에서 재가되어질 수 있는 부분 또한 기술가능성이 허용되어질 수 있는 부분등이 본래성을 말할 수 있는 신론적 보편성에서 재가되어서 한정적으로 규정하여 받을 수 있음은 또한 열려진 사실임을 말할 수 있다.


각주12) 천주교를 알려드립니다. 한국천주교 가두선교단 2005, 2. p.33.

"유대인과 종교개혁이후 개신교에서는 Yehovah(여호와)로 부르나, 더 정확한 발음은 Yahweh(야훼)임이 입증되었다. 이 이름의 뜻은 "나는 있는 나다."(출애 3,14)라는 의미로사람들을이하여 활동적으롱 존재하시는 하느님을 드러낸다."

이 내용은 아주 기초적으로 사람들에게 전할 때에 가톨릭의 공식적인 증거내용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 선교책자는 우리나라 외에도 5개국으로 번역되어진 것으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상게서 p. 96 마지막 속페이지)

여기서 "스스로"라는 말은 없이 그냥 존재(Being)을 말하고 있다. 그냥 있음 이라는 개념으로서의 말이기에 '자존자'라는 표현이 어울리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에큐메니칼과 같은 보편교회를 지향하는 입장에서 수행적 모순적 입장에서도 이야기 할 수 있음은 열려 있다.

더욱 에티엔느 질송도 이와 같은 입장에서 존재론에 대한 이야기를 했는데 여기에 대하여서 코넬리우스 반틸이 반론을 제기한 것이 있다.(링크되어진 글 각주 1번 중에서 참고)


각주13)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40, p. 31.


바르트 역시 “나는 나다.”(출 3:13f.)라는 신명 계시는 사실상 그 내용에서 “나는 그 누구도 언표할 수 없는 진실한 이름을 가진 자”라는 뜻이라고 한다. 하나님의 이름이 우리에게 알려졌다 하여도, 우리가 우리 자신이나 다른 사람을 그 이름을 통해 아는 방식으로 하나님의 이름을 통해서 그분을 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의미에서 “계시된 이름은 참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은폐됨(the hiddenness even of the revealed God)이라는 사실을 환기시킨다.고 하였다.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은 피조물이 이름이 아니므로 영원하고 거룩하고 영광된 이름이며, 모든 이름 위에 뛰어난 이름인 것이다.


필자의 평 : 앞서 '각주 2)'에서 이미 언급한 것과 같이, 바르트의 무성(nothingness)신학에서는 본문 해석은 변증법적인 개념을 위해서 신론적 입장에서 계시적 단절과 존재론에 대한 배제를 위해 계시라는 행위적 의미에 한정시키고 있다. 여기서 이미 바르트의 신학의 실재로서 신론을 말하려는 것이 아니라 무성의 실재로서의 신론을 말할 수 있도록, 자신의 실재개념을 위한 합리적 당위성을 위한 해석으로 재해석을 한 것뿐이다.

비평적 입장에서 바르트의 인식을 본다고 할 때에, 19세기 당시에 있게 되어지는 가톨릭의 존재에 대한 인식을 개조하고자 하는 그러한 당위성에 따른 철학을 선택했음에 인식적 정황을 재해석할 수 있다는 것이다.

헤겔은 그의 철학의 합목적성을 철학의 개조라는 것을 밝힌 바 있다.
'그런데 나의 이 저술은, 그러한 경우가 아니라, 내가 바라는 듯이 내용과 일치하는 유일하고 진실하다고 승인될 방법에 의하여 철학을 새로 개조하는 데 목적이 있다.'
(헤겔, 철학강요, 서동익 을유문화사 1998, p.33. 제1판 서문 中)

이러한 언급은 구교의 입장의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비판으로 해석되어질 수 있다 그것은 2판과 3판의 서문에서 종교 특히 예수의 뜻하심에서 언급되는 것에 대한 적개심이 있음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다. 예를 들면, (만일 그 어떤 사람이 자기의 신조를 고백하여 '나는 하느님 아버지, 즉 하늘과 땅의 창조자를 믿는다 하자'...사실 위에 예는 누구나 터무니 없고 변변치 못한 것으로 알 것이다.)(상게서 p. 39) (그들은 신앙의 본질에 아무 관계없는 여러 가지 외형적 사물에 관해서 광범위한 연구에 몰두하면서, 그와 반대로, 아니 그만큼 노골적으로, 신앙의 본질과 내용을 대하여서는, 주 예수의 이름을 빙자하여 고의로 무시하고, 또 기독교회의 신앙의 토대인 설교의 발전, 전개를 무시한다..)(상게서 p. 49)

두 예들 중에 후자는 헤겔 그의 정신현상학적인 개념으로서 정신이 세상에 적용되어지는 것에 대한 것을 철학적으로 표현함이 옳은 것임을 강변하고 있는 것인데, 이것은 그가 배운 신학에서의 주기도문의 한 부분 즉 하늘의 이룬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지이다는 정신의 발현을 마음에 두고 있는 것이다. 즉 이것은 헤겔의 철학이 신학적 형태의 개념을 마음에 두면서 철학을 하고 있고 이것의 의식은 바로 구교에서 말하고 있는 존재에 대한 철학적 개념에 대한 개조라는 것을 읽을 수 있다고 하겠다.

이러한 헤겔의 변증법에 대하여서 바르트의 입장에서는 그의 실재론을 그 존재에 대한 부정으로서 무성(Nothingness)의 신학적 입장을 취하는 것으로서의 구교의 철학적 존재론에 대한 개조를 의식했을 수 있다는 중심에서 헤겔적인 변증법적 신학방법론으로서의 재구성을 선택했다는 정황적 인식의 재해석이 가능해진다고 하겠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개조의 현상과 사태를 형성하는 합리적 개념을 축적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사실로서의 재구성(construction)이라고 말할 수 있는 실제론은 그의 실재개념(reality)로서의 'Nothingness'에서 재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에서 임의적으로 재해석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도 역시 사실성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시간해석과 역사해석 그리고 그 가운데서의 그 시간의 보편성을 따라 나타나는 계시의 실존과 그 자체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은 역시 비로소의 진리로서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실패를 말하는 것이다.


각주14)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 39.

'야웨 신명이 신명으로 특이한 것은 그 신명 자체 속에 신명의 연표불가능이 함축되어 있기 때문이다. 인간에게 알려 주신 하나님의 이름 야웨는 그 형태에서 한정적인 명사형의 이름이 아니라 서술적인 동사형의 이름이라는 점에서 독특하다. 그러나 앞에서 살펴본 것처럼 야웨라는 신명에는 일의적이고 명사적인 의미가 없다. 동사적이고 서술적인 이름이다. 따라서 시제에 따라 현재형 미래형, 사역형, 동행형 등 여러 의미로 함축하게 되는 것이다.'

계시한다는 것은 계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계시한다는 특이한 계시법을 포함하는 것이 계시한다는 것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이해된다는 것이다. 상게서 본서에서는 신명의 능력을 표기한대로 '신명의 언표 가능성을 주장한 사람들이 있음을 언급한 후에' 또한 바르트의 계시의 단절적 개념을 생각한 가운데서의 계시로서의 변증법적 성격에 맞게 재구성할 수 있다는 점을 감안해서 언급한 것으로 합리적 표현임을 인정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변증법적 개념에서의 계시라고 함을 규정하고 출애굽기 3장 14절을 해석해야 함의 당위성은 그 해석 자체에 있지 않는다는 것이라 할 때에 과연 사변적인 해석이요 또한 의도적인 해석으로서 무성의 신학을 위한 당위성이 결여된 신학을 위한 변명에 치우칠 뿐이라는 것이다.

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같이 나타나는 것으로 임의적 규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이 합리성의 인식사태에서 실제를 말하는 것에 한계인 것이다.


각주15) 허호익, 현대 조직식학의 이해, 대한기독교서회, 2003, pp. 25-28.


각주16)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특히 출33:19절의 말씀에서 주목하는 것과 같이 이름을 반포하심에 있어서 신실하심과 주권적 개념의 자기 이름의 해석임을 말씀하심으로 받을 수 있을 때에 그냥 존재(Being)이 아니라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심을 기억하게 된다.


각주17) 출애굽기 3장 14절 해석의 중요성과 우선성에 대하여서는 당시 사두개인들의 인식적 측면을 고려할 때 즉 1차 독자로서의 예수님과 대면할 때에 그들의 판단적 오류는 사람의 다시 살아나는 것에 대한 것 즉 부활에 대한 것인데 그것에 대한 예수님의 답변이 이 출애굽기 3장에 내용을전제로 말씀하셨음을 의식하기 때문이다.(막 12:26) 즉 이 본문을 해석 잘 못할 경우에는 성경에 대하여 하나님에 대하여 오해의 실존이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본 논의에서는 그것을 전제로 하고 논의 되어진 것이기 때문에 마지막 부분에 그 취지를 밝혀둔다.

화요일, 7월 24, 2007

사유의 행방

다원주의를 논하기 앞서 정초되어야 될 사유(思惟)

다원이라는 것은 여러 기원적 실체 또는 실재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러한 실재의 객관적 근거지움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적 측면에서의 실재의식과 기독교의 실재의식의 상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현상적 측면에서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른 다원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실재를 상관하는 동일범주적인 입장에서 논할 것이 비로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임의적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라 비롯되어진 파생적 언어 '다원', 상대적인 확실성에 따른 개연적 실재일뿐 비로소의 의미적인 실재가 없는 허상적 개념의 실존 언어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태라는 가능성에 있어서의 인식실제인 가운데서 그 존재적 정당함이 상대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실재없는 개념이 바로 알곡이 아닌 가라지일진대, 그러한 임의적 허상적 개념의 실존을 자존의 절대자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실존으로서의 기독교 실재와 동일비교적 개념과 그 상관성에서 다룬다는 것은 범주설정에 모순적 개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상적 실존의 언어로서의 '다원','다원주의'의 객관적 근거지움의 수행적 모순이나 전 사유의 행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설정되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 범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것이 이해되어진다면, 흔히들 말하는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은 의미를 상실한다. 실재 비교가, 정당성 시비에 따라, 불가능한 것을 놓고 동일 범주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비판적 언어로서의 '배타성'을 말한다는 것은 수행되어질 수 없는 모순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각주1).


객관적 근거지움을 앞서는 사유의 실존

이미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의 종언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나 그 앞서 회의주의자들이나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유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없거나 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칸트 이후에는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에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도 상정되어질 수 있는 보편에 따른 당위성에 따라 그 확실성을 다소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시되는 것은 그런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 확실성을 상대적으로 얻을뿐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 자체와 신학의 시녀역활을 했던 철학의 입장들도 개연적 당위성의 충돌일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상의 실존와 해석과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마음에 둘 때(각주2)에 그것으로 인해서 사상의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사상이 비로소 기술되어질 수 있고 그 객관성의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표현됨에 불구하고 절대자의 정당함이 부여됨에 따라서 그 실존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

철학적 당위성도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것이 신학의 본연적인 것과 철학적신학이 아닌 신학적 철학이면서도 철학 그 자체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형에 따른 철학의 요청을 상대적인 측면에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의 인식과 그 사유라고 함의 본래성을 자존의 하나님께 둠에 있어서 새롭게 검증되어지고 실존적 당위성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스콜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신학을 비롯한, 일반 철학적 반성을 비롯한 모든 사유가 본래성으로서의 실존적 재구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각주3)




결론에 즈음해서

사유의 행방을 재구성하며 바르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했다. 그것은 옛부터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상고했던 것이 사유라고 하는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회의주의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확신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보편을 따른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을 취하게 되지만 그런 것이 현대에서는 '여럿'이라는 개념의 존중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말함은 임의적으로 상정했던 '일자'라는 존재적 입장과 그러한 전통에 반대하여 존재의 여럿과 그 기원성을 이야기 하려는 다원적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 언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여전히 '철학의 영원한(?) 현재'로서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라는 시각(視覺)을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유의 행방을 위한 개념의 정당성에 따른 바른 구성적 입장을 말함에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시점으로서의 철학은 확실성을 위한 보편을 지향하게 되었고 그러한 보편으로 인한 사유의 굴절과 관절을 만들어 사상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유의 굴절과 규정이라는 사유의 행방을 규정한 보편인식추구라고 하는 것이, 중세의 보편으로서 공회(Catholic)까지도, 그 전체성이라는 개념이 임의적이어서 임의적 객관적 근거에 따른 개념들로 인해 사유의 행방은 사변으로서의 실재를 대신하고 말았고 그러한 사태는 사유의 행방을 헛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메시아적 사유(각주4)라고 함에 따른 사유의 행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유의 행방의 실존이 사실화되어지며 그 가운데서 일반 사유라고 하는 것도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도 모두 그 존재적 당위성을 비로소 얻게됨을 언급하는 바이다.

모든 사유와 그 기초로서의 개념들이라고 하는 것도 임의적 보편의식에서 법적 당위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얻는 가운데서 사유가 거듭나 바른 본래의 행보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메시아적 사유라고 함은 예수님 안에서 지식의 구별적 사실이라는 것으로 사유까지도 경건의 자리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지성적 독트린에서 임의적 초월이라는 개념까지 잘못되게 사용하고 있는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의 초월이라는 개념이 그런 것과 다르면서도 본래적 개념임을 알 때에 초월을 위한 합리성의 굴절은, 반성된 가운데서, 비로소 다시 경건의 사유의 궁전으로서의 방주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사유의 행방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적 신학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일반 철학적 반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메시아적 사유에서 그 본래적 행방이 비로소 시작되어지며, 철학과 신학의 사유의 행방으로서 마땅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1) 배타성이라는 언어는 동일한 범주또는 범위에서 반대되어질 수 있고 또한 양립되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경향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 기독교의 특수성은 상대적인 범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인 범주로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범주적 특수성이 있다. 이것은 인식의 조건과 방향으로 인해 설정되는 범주에 따른 것이다

http://toagainstism.blogspot.com/2007/06/blog-post.html(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 참고) 그리고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로서 '비로소'는 이런 범주적 개념의 시원성(始原性)과 방향성과 합리성의 굴절적 당위성을 의식해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는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존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상대적 자기 계시이시면서도 절대자기 계시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예수의 뜻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도 왕적 제사장적 직분적 입장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에 따라 사실의 상대적이면서도 비로소 절대적 실존을 말하도록 하심의 정당성을 말씀하심으로 재창조의 본래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 예수님의 죽으심 '대속의 범위에 대한 견해'(**)는 여러가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마저도 앞서 언급한 내용을 부인하는 당위성을 비로소 가지지 않는다.

(**)(코넬리우스 반틸, 변증학, 신국원 기독교문서선교회. pp. 248-250.) 여기에서는 반틸의 일반은총적 입장을 옹호하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인식의 상대적인 개념이면서도 구별되어진 주의 주신 은사로서 해석되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기독교 철학의 실재와 일반 철학적 실재의 실존을 말학에 된다. 그러한 이성적 사유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전인격적인 속성의 하나로서 구별되어지는 대속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존적 자리매김이 이루어진다. 즉 대속은 우리의 사유의 경건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언급되어질 메시아적 사유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반상식이 구별되어지는 실존적 현상에서 세상의 일반 이성들이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위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반틸의 상게서 p270.이하에서 신학에서의 이성의 실존적 위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 이성의 상식적 입장에서 언급되어질 것과 비교되어지는 것도 주목해볼 수 있다.

반틸이 말하는 '자충족적 하나님'이란 상대적인 상식보편에서 실재론에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규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오늘날 반틸의 '계층이론'을 상대적 분리라는 개념의 일방적인 해석으로 바르트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초월개념으로 인한 실재론에서 있게되어지는 하나의 인식 오류이다. 전제는 맹목적 전제가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읽을 때에 합리적 요청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전제적 당위성이 당연히 전제되어진다는 것이다.

각주3)폴 코블리, 기호학, 리차잔츠 그림/ 조성택 변진경 옮김 김성도 감수 김영사 p. 70.

1967년 프랑스의 문예잡지《Quinzaine Littéaire》에 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들이 그려진 만화가 개제되었다. 푸코가 강의하고 라캉은 팔짱을 끼고 듣고 있고 레비스트로스와 롤랑바르트가 듣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이 만화는 기호학적 사고라는 새로운 흐름이 텍스트의 범위를 뛰어넘는 보다 큰 영력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예연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 그림의 공시적 개념적 예측은 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사상들의 관계로 확장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사르트르 이후에 있게되어지는 구조주의적 입장은 성경텍스트 이해의 상위보편적 입장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구조주의적 입장의 기호학적 보편을 읽게 되어진다는 인식의 확장이 예상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신적 속성적 범주라고 하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은 텍스트는 임의적 생기존재론에 입각한 의지적 텍스트와 다른 범주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입장과 사상은 성경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해석의 보편으로서의 구조주의적 보편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재구성적인(reconstructive)(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참고) 상상적 보편에 따른 재구성과는 정당성 시비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즉 인식론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인식론의 차이가 있어왔지만 그러한 것과 달리 본문에서 본인이 언급한 재구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지는 비로소 본래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4)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의식적 비판이 있어왔는데 그것에 대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가 아니라는 입장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조들이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서 게할더스 보스는 메시아 의식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고 그러한 경향들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기독론을 성경신학적으로 전개하여 합당한 기독론적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엠마오, pp. 8-115, p. 116-.)

메시아의 의식적 상대성은 구별되어진 자존적 하나님 자신의 의식으로서의 상대적 표현이기 때문에 인식의 전환이라는 개념과 진화적 발전적 개념의 형태가 비로소 예수님의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인식의 분명해지심의 경험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장에 앞서 이미 그 성장으로서의 성숙을 다 취하신 분으로서 진실되게 성숙이라는 경험을 취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측면의 발전적 개념의 인식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자의식은 비로소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신의 대리인들은 이미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성은 상대적인 개념에서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자만이 그것을 나타내신 예수님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적 권세를 왕적으로 취하시고 그 왕적 권세로 성도들의 제사장적 직분을 행할 수 있도록하심에 따라 메시아 안에서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고의 실존을 사유의 실존과 행방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메시아적 사유라고 할 수 있게 된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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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1월 17, 2006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 - The Life in Bible

앞서 언급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보다도 앞서는 진리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각주1)이시라는 것과 그러한 진리와 사실로 인해서 우리 인생의 행보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또한 그 행보를 위한 실제적 사실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것은 성경말씀이다.

물론 형식적 순환론적 모순이라는 판단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것이 기각되어지는 것은 또한 앞서 합당하게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신의식과 신지식이라는 것의 실존으로부터의 타당성을 힘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에 즈음해서

성경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앞서는 진리와 사실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출 3:14)이시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반론적 입장의 고전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니체의 입장인데, 그것은 인식론적 존재론에 입각한 임의적 신해석과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양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재고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자존의 하나님이 참되다고 함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식적 한계내에서 또는 한계밖이라는 이성적 규정의 탈실존을 말한다고 하여도 이성의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이성의 재가를 받고 이성의 재구성에 따른 구성체로서의 타당성을 입는다는, 소위 속된 표현으로, 등떠밀리어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은 진정한 신이 아님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했다고 하는 철학의 입장(각주2)에서 본다면 결국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에서는 인위적인 신이라는 개념에서 참된 신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정직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각이 정당성을 이미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석적 정당성을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의지적으로 부여하고 싶어하는 정신으로의, 내어준 임의적 의지의,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은 그와 같이 인식론적 존재론에서는 비로소 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또한 인식론적 존재론에서 객관적 신존재적 규정과 그에 따른 신에 대한 비판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최소한 자기를 기만하기 위한 비이성적 삶의 고통을 완화하기위한 진정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존재론, 쉽게 이야기해서 인위적으로 존재규정과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신을 이성의 한계에서 규정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사실적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할 때에 참된 신의 말씀에 의거한 그 말씀하심과 규정하심이 진정 사실로서의 실제가 되어지는 절대의 재가가 되어진 실존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인간이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시간의 판단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속성적 진실함과 영원함에 신실하게 스스로 취하신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 대한 자의식적 인식의 충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의식적 영향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 피조물은 그러한 시간이라고 하는 계기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알고있는 상태에서도 알아간다는 그 중심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시간이 허락되어진다는 개념보다도 시간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적 우리의 실존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존적 의미와 그 윤리적 행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총체적인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과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적 영광 즉 그의 왕되심과 그의 제사장적 권세와 그의 선지적 권세라고 하는 그 사역적 측면이 우리의 신앙의 삶의 고백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표현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의적 생각과 사유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존적영감을 나타내는 '성경의 자증(Autopistia)(각주3)의 영광'을 따라서, 그 계시의 영광을 따라서 섭리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유의 총체적 기본적 이유의 실재와 실제인 것이다.








각주1) 이슬람에서는 지나친 종교적 패러디를 행하고 있고 그것은 기만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절제하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에도 합당할 것으로 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알라외에 다른 신이 없다'(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는 말을 함부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의 언어까지도 모방하며 진리까지도 모방하는 가운데서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에서의 진화적 개념의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 또는 격상된 신이라는 개념진정한 고유의 신(God)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진화라는 개념에서 고유하지 않던 신의 개념이 고유라고 하는 개념으로써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답변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패러디라고 함은

그러나 나는 일부러 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폭력과 유혈사태가 (이슬람과 서양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주로 무슬림 사이의 내적 투쟁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이 모든 종교가 근대화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겪게되는 그런 종교의 갈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개혁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지만, 간과되어서는 안될 유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종교 전통에 존재하는 보편적 갈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누가 신앙을 정의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 개인인가 기관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8.)

알라가 고유의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고유의 신이 된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창조자는 ‘알라Allah’라고 불렀는데, 알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순히 신을 의미하는 ‘알 알라 al-ilah’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알라 역시 비와 하늘의 신이었으나, 이슬람 이전 시대에 최고신으로 격상되었다. 아랍신들 가운데 알라의 두드러진 위상은 평민들이 탄원하기 어려운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오직 위기에 처했을 때나 감히 탄원할 nt 있는 존재였다. 알라의 세 딸 알라트 Allat(여신), 알 웃자 al-Uzza(전능자), 마나트 Manat (운명의 여신)과 같은 중재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2.)

패러디라고 함에 있어서는

아랍인들이 알라를 유대인의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었다. 6세기 아라비아에서 유대의 유일신교 monotheism는 우상숭배의 아랍인에게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랍인의 우상숭배는 전혀 다른 종교적 이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적 아랍인들은 유대교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적 개념을 단지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6.)

앞서간 많은 예언자처럼 무함마드 역시자신이 새종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한 적은 결코 없다.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관습을 개혁하여 유대인과 기독교의 신을 아랍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종교를 너희들의 종교로 정하셨느니라. ··· 그것은 신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에게 명한 것과 같은 종교이니라.(42:13)”

젊은 무함마드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슬람의 독특하고 신성한 기운은 다인종 다종교적 사회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젊은 무함마드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믿음없는 아랍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메시지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를 가리켜 ‘무지의 시대(자힐리아)’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56.)


글쓰는이의 부언 : 꾸란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권위라고 할 때에 그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고유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는 알라의 신격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임의성의 합리성에서 파생된 당위성이고 본래성의 정당함과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니체적인 삶을 위한 이슬람의 삶을 위한 해석과 기술일뿐 참된 자존의 하나님의 본래성과 동일시할 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진화나 격상에서 본래를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파생적 정당함이 본래적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기만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그 자체이다.

본래적 정당함을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자는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Jehovah) 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Jehovah is God. 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사 45:5).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NIV), there is no God beside me.(KJV), Besides Me there is no God.(NASB)

패러디를 하더라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을 성립되어지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요 거짓의 사실로써 그리고 거짓존재로서 실존적 자리매김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의 정직일 것이다.

각주2)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5-107.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중략)

해석은 해석자의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 인식의지에 의해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인식의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가 해석작용의 규제원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 목적이거나 부수적 현상일 뿐이다. 철학은 해석인 한에서 철학 또는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다.
(중략)

여기서 니체는 해석적 철학의 특징에 대해 ‘비자발적 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규제적 원리에 따른 배제이고 망각이며, 그런 한에서 철학적 해석은 가치중립적 인식일 수 없다. 철학적 해석작용의 결과는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의미 인식일 뿐이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개념 ‘진리를 발견하는entdecken 기술’이라는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를 재검토하게 한다. 이 정의가 불충분한 것은 그것이 진리를 삶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고, 진리가 해석자의 삶과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창조schaffen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글쓰는이의 언급 : 니체의 생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삶의 의지적 표현으로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은 가운데서 구성적 실제규정과 그것의 정당함을 그는 세우려고 글을 썼다. 1881년에 “생성의 무죄에 대한 입증 Die Unschuld des werdens zu beweisen”(각주참고 KGW VII 1 7[7], 245쪽이하; VII 3 36[10],277쪽)(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8-109.)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적 타당성을 말했을 뿐 진실로 그 자체적 정당함의 실존으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파생적 정당함과 본래적 정당함은 아이소모픽(isomorphic)한 개념 유사개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본래적이라고 하는 말을 철학자들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상식적 보편적 동의가 가능하다고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말할 뿐이지 비로소 자존적 정당함의 정당성에서 파생되어진 사실로서의 실존을 의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니체역시 삶에 대한 의지적 정당함을 말하는 합리성에서 파생하는 타당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절대의 자존의 실존과 그의 행보의 타당성을 비로소 입은 자들을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사실과 실존적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3) Autopistia 성경의 자증 :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닫혀진 진리관을 말하면서도 그 보편성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지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그 실존적 영광의 합당한 속성적 성격인 것이다. 즉 이것은 닫혀있다는 개념의 편협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성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비록 판단 가능하다고 해도 절대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실제적 정당함은 닫혀있다는 상식적 판단의 보편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의 계시적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그 성경은 자기 실존적 증거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사람들의 인식의 감화와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성경이 기록되도록하는 섭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계시이다. 그 계시의 기록과정의 모순형식이 가능한 것까지도 구별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그러한 방법을,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성의 재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로서의 성격을 임의적으로 축소 또는 배제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의식에 있어서 합리적 필요성과 가치성에 있어서 만들었다고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니체의 생의 가치철학적 입장에서는 더할나위없이 그러한 개념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필요라는 정황적 개념때문에 비로소 성경을 맞추어 꾸며내는 신화적 작업을 했다는 거짓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다빈치코드와 그 아류와 같은 문학적 이성의 절제없음에 대한 판단이 유명세를 꿈꾸는 것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닫혀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그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가운데서의 보편성의 현실적 상대적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철학의 보편과 닫힘의 안티적 개념의 열림으로써의 보편을 말하는 것으로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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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15, 2006

신존재증명과 확신에 대하여

신존재증명에 대하여서

신은 존재증명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되어진 상황에서 납득되어져온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납득되어짐을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반 또는 학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사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확고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 항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적 답변에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항상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절대적이어야 신 존재증명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과 사실성이 확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때에, 그 충족성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재고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 개연적으로 증명이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맹신적인 개념으로 잘못된 개념으로 통념화되어져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반론적인 필요성에 따른 증명을 말할 수 있는 여지적 강조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범주 설정이라고 하는 개념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답변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 절대라는 비로소의 개념을 자체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를 논할 수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위해 합리성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적인 개념의 요소를 상대적인 범주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즉 신존재증명과 신을 부정하는 증명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신존재증명을 말하게 되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재고..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인식의 확신을 위한 최선으로써의 한 필요성에 대한 수단적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전 중세이전 고대의 변증가들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납득 당위성이 있는 분이심에 대한 변호적 개념을 위해서 철학적인 개념을 사실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받아들여서 말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문은 열렸던 것(각주1)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평학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병렬적 나열적 상호관계적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의 대한 실제적 기반을 말하지 못하고 조작적 개념으로써의 문서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합목적성이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깊이를 재고하는 가운데 이성의 익사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경험적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더욱 그러한 합리성의 부정의 시비를 간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정교함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믿음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그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께 두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이성적인 확실성을 말한다는 병열적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합목적성에서 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하려고하는 것에서 고통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증명을 말하게 되는 것은 확신을 위한 것으로써의 합목적성에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합당하게 주목한다고 할 때에,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확신을 주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합당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에 대하여서

증명에 따른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증거의 확실성이 증명의 확실성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비롯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오는 확신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만이 진정한 자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신앙의 확신의 실존과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성도의 메타인식이라고 함이 가능한 하나님의 지식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 존재증명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범주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고 실존되어질 수 있는 존재증명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것과 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을 위한 증명적인 형식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유의 권세를 의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실존적 하나님의 지혜의 사실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사료적 관점에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의 부활과 탄생적 표현과 실존 그리고 그 자체의 정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에 근거하기 위한 것인 것과 같이 확신의 그 정도가 부인할 수 없을 때에는 증명적인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확실성을 위한 비로소의 존재증명적 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확신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찾게 되어지고 그 주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측면의 한 택스트라는 제한적인 양식에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이라고 하는 한 책의 표현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다른 책들과의 형평성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에서 성도의 매타인식적 신지식은 그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명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 19 ; p. 57

'유태인 필로(Philo)는 희랍어권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렇게도 풍부하고 뜻깊은 사상을 잉태시켜 주었다. 필로는 구약성경을 플라톤적인 의미의 우의(allegorically)로 해석함으로써 유태주의와 헬라주의를 조화시켜 놓았다. '(p. 19)

“필로는 이방 세계에서 모든 지식은 따지고 보면 유태주의가 그 뿌리라고 주장했다. 왕국의 이론도 유태적이라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 피타고라스의 수, 희랍 과학의 우주론, 헬라화 세계의 신비주의, 윤리, 심리학 등등 모든 것들을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이방 세계에서 배웠으나, 이것들은 희랍인들이 모세에게서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Erwin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2nd ed. (New York : Barnes & Noble, 1963), p.75. (p. 57 각주 34번인용함)



이러한 것은 카돌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에뜨엔느 질송의 표현이 이렇게 언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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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7월 05, 2006

지식의 숙성

지식의 숙성

음식에 있어서 간편하게 즉석에서 또는 일정한 요리연구가에 의해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장기간 보관과 숙성이라고 함을 거쳐 만들어진 발효식품이라고 하는 것도 있게 되는데 소금과 관련되어진 음식이 그러한 것의 한 예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를 비롯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일부에서 염장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러한 다큐방송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기억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3)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거칠고 투박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게 됨에 있어서 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섬김의 전부는 하나님께 드림의 예물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소금을 빼는 것과 같은 그러한 중심이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지혜의 경험에서 있게 되어지는 축적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소금에 의해 숙성되어져서 참으로 주의 종들을 위한 주님께 드림의 음식으로 준비되어져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로마카돌릭은 마치 음식을 숙성시키듯이 전통속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을 시켜왔습니다. 즉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은 옳은 것이나 그 전통이 그 사실적 당위성을 잃어 소금이 맛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변질적 숙성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에 있어서 주께 드리는 숙성된 지식적 음료를 다시 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중세에 풍미한 연예사건이 극적이면서도 적절한 예가 되어질 것입니다.(각주 1)

존경하는 제가 다닌 신대원 은사님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천안 신대원시대이지만, 제가 다닐 때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치셨는데 항상 아쉬워하셨던 것은 그 피곤한 가운데서의 연구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도 그 배움에 있어서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는시간을 가지는 가운데서 준비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졸업하고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의 그 숙성적 섭리라고 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마음에 두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학문의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좀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적 작업에로의 소명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식 맛갈나는 음식이라고함의 노력과 시장기를 거둘 수 있는 참된 음료와 같은 주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제는 숙성시키시는 주의 말씀하심의 깊이를 따라 학문적 소명으로의 부르심에 귀한 종들이 함께하였으면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중세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기억하면서 그 지식의 숙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태파악과 현상적 지식의 숙성은 오히려 독이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주님의 뜻하심을 저버리고 있는 가운데서 지식의 재 숙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치나 장을 담그더라도 그 재료가 부실하면 다시 그 재료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장이나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지식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샘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서 소금으로써 그 마라의 쓴 물을 고치셨던 섭리를 기억하면서 그러한 지식의 근원을 고치심에 노력하시는 종들이 있으셔서 수가성 여인과 같은 자들이 그 샘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듯 그 숙성된 지식의 샘물에서도 만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그러한 지식의 샘을 준비하는 지식의 숙성에로의 소명을 받들 수 있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치셨던 그 섭리가 이제 필요한 시대입니다.






각주 1)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후스토 곤잘레스와 프레드릭 파제의 글을 참고로 추천하면서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I 中世編 이형기 차종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210-218.

저는 피터 아벨라드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로맨틱하다고 표현하고 있고 아벨라드의 사상과 그 시대상황에 대하여서 비교적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 파제 '유쾌한 철학자'

저자는 중세의 수도사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아주 풍자적으로 비난과 조소와 해학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행한 말에 대한 인용은 사실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할 때에 엘로이즈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글쓴이로서의 부언

"나는 당신의 창기가 될 수 있어도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로이즈가 아벨로이드를 사랑하고 학문에 정진한 사람으로서의 그 위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어느정도의 성과라고 하는 것은 '후스토곤잘레스는 아벨라드를 대단한 문필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세의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으로부터의 비로소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학문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의 숙성을 담당해온 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를 두는 것이 가정을 돌아보는 것이요, 그러한 자가 교회를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의 자격을 성경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헌신의 현실적 실제의 시간적 부족과 집중의 어려움은 있으나 결혼하여서 그러한 지식의 숙성을 찾아 전통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의 그 방법의 실제와 사실을 이룬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반론적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음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일반화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부동의원동자적 개념의 입장으로 합리성에 대한 숙성을 말할 때에는 그 반론에 정당함을 비로소 부여하여 사실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답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임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사모님들께 한말씀드리는 것은 ..

엘로이즈는 현실적 실제적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를 위해 창기를 선택하면서도 아내가 되지 않아 그를 자유하게하는 자로서 결코 김치담그는 것과 같은 숙성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숙성을 위해 창기가 아니라 당당한 아내로서 함께해주시길 주 안에서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사모된 나의 아내는 주 안에서 기꺼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해야할 일을 하는 가운데 이 말씀을 드립니다. 창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말했던 엘로이즈와는 달리 아내를 선택하는 자들로서 종들을 섬김으로 숙성된 지식의 숙성으로 인해 그 우물에서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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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9, 2006

'니체'와 '상품화된 니체'

니체는 그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후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초인적인 그러한 점에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고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요즘에 해석되어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적 평가는 너무 인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거로는 아래에 출처를 밝힙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참고로 니체에 대한 글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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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해석에서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에 대하여서..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그 첫번째가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택스트를 읽을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보다는 잘 되었다는 해석을 취함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마련한 아주 중요하게 보일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도 잘 정립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의 의미는 니체를 온전히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니체를 비판하는 것까지도 니체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한마디로 니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없다는 말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용되는 인식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말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는 그 말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측면에서 아무리 비판하여도 그것은 니체의 판단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용어의 뜻을 말한다면 '택스트를 해석하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표현적 인식을 위한 그보다 상위의 인식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상위의 인식들을 존재하게 하는 상대적 무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어떠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고 니체를 반박하는 것으로 보이는 해석이라고 하여도 그것도 상대적인 가운데서의 한 표현일뿐 그것을 말할 옳은 해석은 아니라고 함이 더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관점도 역시 거짓이라고 함을 주장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옳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개체적인 한 표현과 관점밖에 안된다면 그것이 잘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니체와 그 해석의 자체적 인식추구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해석한다면 컴퓨터의 예를 들겠습니다. 악성코드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파일을 아예 지울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파일은 보호장치가 되어 있어서 지우면 지울 수 있는데 다시 복구되는 그러한 파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그것과 같이 레지스터리까지 지웠는데 다 지우지 못하면 다시 파일이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모든 관점이 거짓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럼 니체의 관점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말에 그들은 수긍을 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인 것이고 니체의 추구하는 전체적인 관점의 보편성을 말하기는 편협한 독단적인 것이라고 상대적인 보편적 정당함이 결여되었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에 즈음해서..

한마디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상대적 무한과 절대의 무한이라는 개념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당성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함을 말해두는 것입니다.

니체의 합리성의 정당함은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적 개념으로써의 상대적 무한이라는 보편성을 읽게 되어지며 그것은 종의 개념에서의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해석적 인식의 무한을 말하고 그것에 정당함을 찾게 되는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시간론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상대적 무한의 인식의 범주의 비교에서 현재에서 인식의 주체적 기준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에서 현재 표현되어지는 것은 실재를 반납한 실재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기호론으로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임의적으로 그러한 실재를 부여한다는 것에서 특히 그 임의적이라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정당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성의 불연속성을 넘는 정당성을 임의적으로 합리성에 부여함으로 취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바로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 임의적이지 그것이 절대적 자존의 정당함을 얻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인식의 메비우스 띠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에 분별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의 권력에의 의지적 표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 그것을 말하려면 그들의 언어로서의 메타적 해석 인식의 기초의 처음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의 생성과 정의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은 상대적으로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절대적인 평가에서 좌초되어진다고 하면 상대적인 합리성의 마련한 니체의 메타해석 인식의증식이라는 그 자체의 존재와 해석과 거짓관점의 실존을 말할 수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두가지 예를 든다고 하면 첫번째 메비우스 띠위의 직선들은 무한하며 그것의 직선의 방향은 무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비우스 띠라는 존재는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공중에 메비우스 띠를 하나 띠워놓고 본다면 그 공중 안에 한정되어진 띠하나를 그냥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개념의 조합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무한의 특성인 그 경계선의 규정적 설정이 어렵다는 개념을 인문학적 문학적 개념으로 읽어내는 니체와 그 추종자들은 지혜롭기는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 초등학문의 범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에서 절대의 무한을 찾을 수 있다는 망상은 아이들이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개념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실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

또 한가지를 말한다면 컴퓨터인데.. 악성코드나 보호장치가 있는 파일은 자체로 지워지지 않거나 지울 수 있다고 하여도 다시 수록되는 특성이 있는데 사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처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료 파일들을 백업한 후에 전체 포맷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컴퓨터의 지식이 있다면 레지스터리를 통해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메타인식의 증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절대의 속성과 개념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말한 것을 다 상대적이다 라는 개념으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 상대적 판단의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함에 대하여서(기독교의 관점)는 소득없는 구걸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기만하기를 바래야하는 초라함에 머물고 말것입니다.

그러한 겨우 상대적 무한의 정당함의 인식에서 무리하게 표현한 말인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 당시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것을 믿으면서도 그 실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어 보이는 정황에서 상대적 정당함을 위해서 변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정당함을 따라서 비로소 합리성의 실존을 말한다는 그 표현은 옳지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해석에서의 메타적 인식의 증식을 말하는 지혜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에서 삶을 위한 상대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인식 자체에서 절대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인식의 기만이 교만으로 사실화 되는 것처럼 거짓되게 정교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의 반대가 절대라는 개념)이 아닌 것과 같이 상반적 개념설정의 범주에 절대가 포함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재고하지 못한 정직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은 상대적인 어떤 합리성에서는 그의 사상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교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판의 여지라는 것이 절대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때에는 절대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보편성의 재가를 받은 합당한 정당성을 가진 상대적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으로써 그 니체의 사상을 실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메시아적 사유에 따른 철학의 실존에서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신학의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되어질 것입니다.(각주1)



각주1) 엘렌슈프리드, 니체와 니체해석의 문제, 박규현 옮김, 푸른숲..

제가 한 여름동안 읽은 니체의 세권중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모두 긍정한다는 것과 모든 내용을 추천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이해와 인식의 도움을 위한 것으로 상당히 괜찮는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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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2월 28, 2005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은 틀렸다..- 전 토미즘의 사상비판

에띠엔느 질송의 사상적 입장은 가톨릭에서 실재사상을 다루고자 했다는 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입장과 접근방식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일반적으로 토미즘에 있어서는 실재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띠엔느 질송이 토미즘에서 실재를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철학의 실존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출애굽기 3:1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각주1) 그것은 인용가능성만 생각하고 있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으로써 여전히 그 실재론을 실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질송의 그러한 기독교철학의 성립과 실재를 말함에 있어서 잘못되게 되어지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함을 철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저와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틸이 '하나님의 사유를 따라서 사유해야만 함을 함의 한다'(각주2)

그것은 게할더스 보스(G. Vos)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메시야적 사유'(각주3)라는 것의 의미를 말하며 또한 그것은 가능성의 여러 언어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실재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어적 인용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써 그 언급하고자 하는 것의 실재와 또한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질송의 기독교철학의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토미즘의 특히 신 토미즘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지만 토미즘은 이미 신론적 정당함에서 실재를 찾는 중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학대전 4권에서 읽을 수 있는 이방에 대한 변증에서는 '알미니안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질송의 사상으로 나타난다고 함과 일치'(각주4)되기 때문입니다.






각주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0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필자의 해설 : 반틸이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존재의 유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철학을 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임의적 존재자체로만 생각하고 철학적으로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의 유출을 말하는 것은 철학적 입장으로 비로소 삼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임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질송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임의적으로 한정함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신학에 필요에 따라서 말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던 것을 필로(philo)는 말하고 있는데 그 필요에 따른 차용적 입장을 위해 성경의 증거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존재로 임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어진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경에서 인용할 수 있다는 개념만으로 그 가능성에서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 철학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실재적 정의가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면 그것은 인용가능성이라는 개연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주2)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2


각주3)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역, 도서출판 엠마오 pp. 117~119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질 곳에서는 이 두 가지의 성취 자체(ipso facto)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잚소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부활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부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lbid p.117.)

"그리고 그 전체의 색조와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 현현 사상으로 부터 메시아적 사유로 급격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대개 기다리는 큰 "오심"(the great and uniformly expected "Coming"이 메시아의 오심이다. 아마도 신약의 사상 구조에서 다시 나타난 구약의 개념 중에서 이보다도 더 급격하고 중요한 변화를 겪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예수께서 '쿠리오스(주)'-칭호를 돌려드린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쿠리오스'칭호의 전용(轉用)은 주 여호와(Jehovah-Kurios)의 오심을 메시야의 강림과 거이ㅡ피할 수 없게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lbid pp.118~119.)

필자의 해설 : 게할더스 보스는 신구약의 불연속성적인 현상적 입장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그 연속성의 사실과 그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서 구약적 용어와 그에 담겨진 사상들에 대한 메시아 안에서의 정당함의 시비를 거쳐서 사용되어지고 또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사상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모습들 중에 취한 바가 있고 버린바가 있다고 하는 말이 가능한 현상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완성적 의미로써 재 새롭게 하시는 가운데서의 구별적 언어와 그 담긴 사상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유이며 동시에 전형적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 신약을 말하게 된다. 물론 메시아의 강림과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과의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 앞선 신구약의 연속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역 생명의말씀사(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by Alan P. F. Sell, Published in English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U.S.A.) p. 27

"신자가 이생에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비록 어거스틴의 지지를 빌어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알미니우스는 아우토데오스(auto Theos)를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였다. (1)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 그리고 (2)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 알미니우스는 전자를 받아들이고 후자는 거부하였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필자 해설 :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그 증거는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알미니우스는 그러한 합리성의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지 않다는 것과 에뜨엔느 질송도 그러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의 실재를 존재론으로 보겠다는 합목적성만 생각하고 또 인용적 가능성을 위한 합리성만 취하고 있지 자존의 절대자에서 비로소 합리성의 정당함을 얻고자 하는 중심은 이미 없다.. 그리고 토미즘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질송은 토미즘에 정통하면 할 수록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실재는 '가톨릭에서 말하고 있는 중세시대의 합리성을 이해할 머리가 없는 가운데서 무질서와 혼돈을 말하는 것'(요셉 피페, '중세 스콜라신학' 이재룡, 서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 에서 파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답변하지 못하는 중세의 가톨릭의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적 증거를 위한 것으로 그 실존적 증거를 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비록 그것에 대한 인식이 흐려져서 현대신학적 개념이 다시 스콜라신학적 연속성을 말하는 미련함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는 중세의 연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을 말하고 증거하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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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니체의 일기장에 대해

일기라는 것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있고 그의 철학과 같은 학문의 깊이를 나타낸 택스트를 말할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의 의미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와 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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