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4월 28, 2005

신명(神名)에 대하여 - 자존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성경해석



하나님의 이름(神名)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을 어떤 분님이 언급하셔서 한번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말씀중에 '흠...그러니깐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분이 존재하심이 확실,100%확실하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함에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함을 나눔이 필요할 것같다는 중심에서 재고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에서 일관하며 합리성 자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견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합리성으로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계시와 그에 따른 합리적 사상적 입장이 절묘하게 합당하게 나타나는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적 판단의 선별되어진 좀더 정확히 특별영감되어진 이성적 산물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합리성에서도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합리성이 있음과 그것의 합당함과 선함도 같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중세적 개념에서의 병행적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또는 야웨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정당함을 읽어내고 있는 학자는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다.(각주1) 그는 성경신학에서 출 3:14절을 읽는 방법의 여러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히브리어 문구는 히브리어 '독도'법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시시하며 여러 해석방법이 있는 가운데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라고 함 즉 독도법에 따른 해석이 있다고 하여도 그중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다른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만약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해석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상대적 해석으로 동의적 차원을 말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말이다(각주2).

이것이 과연 성경해석에서 마땅하게 취할 해석적 당위성을 의식하며 합당하게 선택한다고 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체적 해석과 용납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의 불확실성을 넘어 용납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도 어느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생각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해석적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해석을 취함에 있어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급한 것과 같이 출 3:14절에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말하는 것은 개연적인 사실을 말할뿐이라는 식의 언급은 기각되어진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명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비평학의 기본이며 또한 현대신학에서의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명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계시의 정당한 사실을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핑계치 못한다는 주의 말씀하심의 증거적인 것임을 밝히 말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불가지론 속에서 개연적 당위성만 따르고 있는가운데서의 책망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해석과 그 취사선택에 있어서도 그차제적 정당함을 취하는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건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변론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임의 문제이고 그것이 너무나 합당함에 대한 변론일뿐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이신 자존의 하나님 야웨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합당히 영광을 받으실 믿음의 주이심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믿게 하심을 증거한다.






성경의 자증과 보편성(출 3:14 해석과 성경의 보편성이해글)

그리고 참고로 속칭 '여호와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기 때문이단이다








각주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356p.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357p.



각주2)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당위성이 자증에 따른 것임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어떤 특정 견해가 합리적인 측면의 백과사전적 동의적 당위성을 아무리 갖춘다고 하여도, 자증에 따른 해석 이것이 그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인하여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면, 그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해석' 그 해석의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는 실존적 그 성격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비판적 입장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견해들도 전자의 해석과는 달리, 스스로 그 정당함을 주장할 수 없는 해석과 납득 당위성에 따라서 전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인식이 상대적 고립적 배타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메타적 성도의 인식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원적 분석에서 히브리어 자음과 모음이 같이 쓰여지지 않던 시대와 맛소라 학파의 노력에 따라 '야훼'라는 성경전승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임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만을 가질 뿐 진정한 비판으로서의 정당함과 그것을 납득해야 할 당위성을 그 해석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적 동의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비로소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의 재가를 받은 상대적인 측면을 상대적인 어원분석 주관적 어원분석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그 성격의 특성과 그에 따른 범주에 대하여서 전혀 재고가 없는 것으로 그 비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히 나타내신다고 함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임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 합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함이 정당한 인식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 스스로 자기 계시형식으로서 선택하신 것임을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대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판단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성이 합리성 그 자체에서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출애굽기 3:14절 해석이라는 합리성 자체도 모순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미 그 모순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판단까지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함은 합리성 그 자체적 실존에 본래적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비합리성을 구별하여서 합리성의 실존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메타인식이라고 하는 합리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도움말

도움말1 믿음이라고 함을 좀 제한애서 용납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명에서 파생되는 용납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14:39]

도움말2 믿음은 본질적으로 증명의 사실과의 파생적 관계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변증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에 대한 증거자체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고 함에 대한 부질없는 것에 대한 변명의 형태를 띤 증거로서의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14:44]

도움말3 자존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기 본문의 신명(神名)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해석적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도록 하심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15:04]

도움말4 성경에서 셈의 장막에 야벳족속이 거한다는 말씀은 이처럼 이름을 기반으로 한 실제론적 입장의 사상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신앙과 신학방향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4:51]

도움말5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따른 것은,니체의 메타인식의 증식과는 달리, 성도들의 메타인식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다. 즉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합당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비판의 영역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신앙의 사실을 말함과 그것의 정당함과 절대의 보편성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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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4월 25, 2005

반기독교 선언에 대한 답변

comment : 읽기전 참고글 '반 기독교 선언문에 대한 답변'의 간략한 해설

서론

개인적으로 작성한 분들과 대화를 거의 해본 가운데 제대로 답변하지 못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렇게 답변하지 못하신 분들중에서 기독교에 대하여서 반대 선언을 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유감스럽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같다.

선언문이라고하면 공감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인데 그러한 것에 있어서 반론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는 사람에게 답변하지 못한다면 상식적으로도 피해의식으로 보아야 한다는 당위성을 가진다고 함을 먼저 말하고자 한다.

이미 작성한 자들과의 대화를 하는 가운데서 이미 답변되어지고 또한 그들이 답변하지 못한 내용을 언급함에 있어서 몇가지 분명하게 답변을 해두는 것이 참된 정신을 소유한 자의 모습이 되어질 것으로 여겨서 반론되어진 것들을 몇가지 지적하면서 전반적인 성립되어질 수 없는 글이라고 함에 대한 당위성을 보이도록 한다.


본론


선언문 인용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답변

먼저 사용하는 용어의 성립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너무 임의성을 띠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다. 즉 보편이라고 하는 것을 누구나가 의심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라고 말하고 있는데, 과연 이러한 임의적 동의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이다.

물론 그러한 것을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그 보편성이 있음에 대한 동의가 있을 수 있다. 그러나 그러한 것에 절대적인 판단은 아니라고 하는 것도 또한 그렇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상식적인 보편이라는 것이 절대의 보편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답변을 해야 할 것이다. 신의 속성으로써 절대자라고 하는 자의 절대 보편을 상대적인 보편으로 상식적인 보편으로 판단을 하고 있다는 점이 글쓴 자들의 보편관이 편협하다고 하는 것과 성립의 당위성이 임의적으로 세워있으며 절대의 판단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이미 기각되어질 것이라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이하의 비판에서도 이러한 상대적인 상식보편으로써 임의적인 양심의 자유라고 하는 것을 상정하여서 특수하다는 형태적 개념만의 정의로써의 기독교의 사상적인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상당하게 편협한 또한 보편적인 것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써 이미 부정되어진 것이라고 함을 편협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


답변

한마디로 문제제기라고 함이 성립되어질 수 없는 편협하고 당위성이 없는 전제라고 함에서 기각되어질 수 있는 이해의 차원이다.

그들이 말하고 있는 언급인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라는 언급은 기독교의 믿음에 대한 특수성을 다룬다고 할 때에는 상식적으로도 그 특수성이라고 함을 고려해야 하는 것이 마땅한데 그러한 것을 고려하지 않고 현상적 비교를 바로하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러한 개체적인 특성을 파악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보편적 인식적용이라고 하는 것은 일그러진 보편의식으로 상식적으로도 비난받아야 할 것이다.

기독교의 보편성과 뒤에서 언급하고 있는 종교다원주의적 보편성이해는 차이를 가지고 있다 현상적인 측면에서 본다면 기독교라는 한 단체적 종교적 개체로서 특수성을 말할 수 있고 여러가지 특수성 중에 하나라는 개념으로 편협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 현상적 사실이다.

그러나 기독교의 개체적 특성에서 나타나고 있는 보편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보편성이다 즉 상대적인 측면에서 있게 되어지는 보편성의 시비가 가능하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이라는 범주에서 상정되어진 것이고 결코 절대의 범주와의 상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상대적 표현으로 나타나는 보편성은 자존의 절대라는 개념으로써 상대적인 동정적 당위성에 재가를 부여하여야 하는 당위성이 전혀 없는 가운데서도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그러한 절대 보편성이다.

더 나아가서 예수님의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에서 실존의 실재의 실제적인 자기의 계시가 사실로 나타나고 있다고 함을 기억할 때에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인 현상적 개념으로써 자신의 절대적 자기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 나타내심에 절대적 보편성과 자기 정당함이 있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받지 못하기 때문에 임의적 상대적 보편에서 절대를 판단하고자 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는 분별없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이다. 상대적인 당위성 모두를 모을 수 있다고 하여더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적인 범주를 판단할 당위성을 말할 수 없다.

이처럼 기독교의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가운데서 상대적인 자기 계시로서의 실존을 말씀하시고 있다는 것이다.

앞서 보편을 말하면서도 보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 입장에서는 이미 그 합리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보편적 사고는 결여되었다.


이상한 관념이라고 하는 것은 결코 잘못되었다는 것과 항상 동일하게 나타나지 않는다 즉 인식의 기본이 잘못되었을 때에는 그 인식체의 인식으로써의 이상함이라고 하는 것은 이미 그 판단적 오류의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기 때문이다.

예수님의 부활을 믿기를 강요한다고 하는데, 사실 이러한 것도 믿지 않아지는 자들의 피해의식의 발로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적인 측면에서는 개연적인 당위성을 가진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앞서 말한 것과 같이 그러한 상식보편에서의 판단 당위성이 성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도 기억함이 상식적인 당위성에 그나마 인정되어질 수 있는 당위성이 있다고 하겠다.

예수께서 부활하신 것은 죽음이라고 하는 것 상식보편에서는 그 존재의 있고 없음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당위성에 메여 있을 수 없는 분임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즉 자존의 하나님 자신이심과 상식적인 존재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심을 나타내시는 것이다.

예수님의 부활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기 계시이며 그리스도의 거룩하게 하심에서 진정한 사실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특수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적 절대자의 재가가 있는 가운데서의 상식보편의 상대적인 판단의 합리성의 판단 또한 받지 않는 것이다.

따라서 오히려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고 하면 상황적 다원적 개념을 고려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의 개체적 특수성이라고 함과 그 자체적 정당함을 바르게 이해하고 비판하여야 한다는 당위성을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그러한 것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가운데서의 비판을 하고 있다면 상식적으로도 제대로 된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처럼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실제적인 것이 실존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음을 이해하여야 할 것이며 핑계치 못함에 대한 의미가 바로 상식적으로도 바르게 이해하는 자에게는 강요가 아니라 당연한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기독교의 관념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이 사실이라고 함의 자존적 특수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임의적으로 받지 못함의 고통과 지혜롭지 못한 표현을 할수 밖에 없는 고통이라고 함을 지적해둔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답변

양심의 자유라고 함을 말하기 전에 양심의 자유의 실존과 실재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전제를 간과하고 있음에 이미 잘못된 판단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고 하는데, 그러한 기독교 현상이해라고 하는 것은 현실적으로 극단주의자들의 일부의 모습이며 이러한 것을 전반적인 실체로 임의적으로 인식설정하고 총체적인 비판으로 일관하고 있음은 잘못이다.

오히려 상식적으로도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상식적으로 부인할 수 없다고 하면 오히려 잘못되었다고 말하는 입장이 배타적인 것을 조장하는 것으로써 자리매김되어진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공포감이나 주입 쇠뇌교육이니 하는 그러한 판단도 역시 보편의식의 결여에 따른 오만과 편견의 합리적 기술로써 자리매김되어질 때에 좀 상식에서도 벗어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겠다. 더구나 고집이라고 하는 것은 한쪽만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한다고 하는 측면을 역으로 말하고 있을 뿐인데 자존적 절대의 재가는 쌍방의 당위성이 있어야만 한다는 개념에서 자유하다고 할 때에 오히려 분별없는 당위성을 요구하는 피해의식으로 볼 수 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다고 하겠다.


반선언문 인용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답변

먼저 근본주의적이라는 개념도 상당히 판단되어야 할 것으로 본다. 영국과 미국에서의 근본주의적인 말을 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에 대한 5대교리를 우선적으로 주장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독일이나 일부 유럽에서 특히 현상학적 철학의 본산지에서는 어떤 사실을 전제한다는 것에 대하여서 근본주의적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그러나 5대교리를 주장하던 자들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그것만을 주장하는 것으로 일관하지 않은 역사를 이해한다면 답변되어질 것이라 본다. 그리고 현상적 개념에서의 근본주의로 이해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면 그러한 '전혀 전제하지 않는다는 것을 의도함'이라는 것 자체가 전제되어진다는 것에 대하여서 변명의 사실을 말해야 할 것이다.

이처럼 전제할 수 밖에 없다고 할 때에 그것의 당위성이 절대 타당한 것인가 상대적으로 기각의 여지를 담고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별하는 것이 관건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못하고 근본주의라는 말을 쓴다면 미움에 정신이 일그러진 것이라고 할 뿐이라고 하겠다.

그리고 종교 다원주의라는 개념은 상대적 보편적 사실 안에서의 가장 큰 보편적인 것은 될 수 있으면서도 결코 상식보편적 개념을 넘지 못하는 것이며 또한 그것은 절대의 자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개념의 사실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이성의 상당한 교만이며 무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된다.

타종교에 대한 관용이라고 하는 것도, 그것보다도 타종교의 정체성의 당위성이 상대적일뿐이라는 점에서 그 종교적 확실성과 그 실재를 말할 수 없다는 것이며 상대적으로 절대의 자존의 하나님의 실존에 의문과 상대적인 부정과 개연성에서 실존의 당위성을 가진다고 하면 그것은 절대자를 배척하는 것으로써 절대자의 판단이 있음은 당연하다고 함을 말함에 상식적으로도 인정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물론 기독교에서는 피흘려 싸우지 않을 것을 말씀하시고 있는데 이것은 이미 피흘려 싸울만한 사실로써의 종교적 실체가 아니기 때문에 그렇게 말씀하신 것이다.

그러한 종교적 실재와 실체가 현상적으로 있다고 하여도 그것의 사실과 정당성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임의성을 지니고 있고 절대에 비교하거나 사칭한다는 점에서 자존자로서의 하나님의 판단 받음은 기정사실이라고 함도 너무나 합당하다고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한다는 당위성이 있는 것이다.

선언문 중에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너무 정신없는 소리를 하고 있다.

상대방의 동의라는 차원에서 종교의 실존의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임의적 종교에서나 임의적으로 말할뿐이고 자존의 절대자의 상대적 표현으로써의 종교 즉 기독교는 상대적 현상의 실존을 가지면서도 본질적으로 자존적 절대의 재가가 있는 실존으로써의 현상적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비난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한 현상적 표현 가능성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로 성립되어질 사실이 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의 관용을 인정하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의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라고 말하고 있는데.. 이미 잘못된 보편의식에서 답변을 찾지 못한다는 것은 기정사실이 된다. 즉 종교다원주의적 해석에서의 범주에서는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에 대하여서 그들의 위안을 찾을 수 있지만 그러나 종교다원주의를 판단할 때에는 전혀 그러한 인위적 안위는 허무함에 실망해야 할 것이다.

한가지 더 말해두는 것은 그러한 타종교의 관용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상대적 당위성을 얻어야 한다는 그러한 종교관이라고 하는 것의 판단을 기독교가 받아야만 하는 당위성은 없는 것이다. 즉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보편적 재가와 절대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진 가운데서의 실존이기 때문이다.


반선언문 인용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답변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춘다'고 말하면서 인간성에 사악함을 돌리며 정당화 한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곡해를 하고 있는데 이것도 또한 보편인식이라고 함이 임의적으로 만들어 낸 것에 자기를 쇠뇌한 결과라는 것을 말할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야훼와 예수의 잘못이라고 함을 판단하는 그 기준의 사실과 기준의 실제가 있는가 그리고 그것이 절대적인 것인가 하는 것을 물어두겠습니다. 상대적으로 잘못된 실재관에서 비롯되어진 것이다.

중세에 있어서 안티적개념을 도미니크파에 비롯되어지는 토미즘에 반대하는 입장에서 프랜시스파의 입장의 신학을 볼 수 있는데 여기서는 신플라톤적 개념을 수용하고 있고 오리겐의 입장에서 이미 예비되었던 신학적 관점이다. 즉 그 오리겐의 입장에서는 그 물질적 개념이 사악하다는 개념을 말하는 가운데서 기독론에 임의적인 개념과 영지주의를 낳았고 물질관이 악하다는 개념으로 기독교의 선함을 말하기 보다는 '기독교의 죄악사'를 말하는 경향의 당위성을 세우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가운데서 기독교의 잘못된 역사의 실체가 진정한 실제인 것과 같이 생각하는 현대주의적 개념에서 볼 때에 야훼에 대한 실존이해와 그에 따른 불안한 신앙의 해프닝을 기독교의 실체적 잘못으로 곡해해왔고 그러한 가운데서 야훼와 예수의 잘못을 당위성이 있는 것과 같이 임의적으로 말하고 있다.

야훼의 스스로 존재한다는 그 이름의 증거와 같이 자존적 존재와 실존의 절대 정당함을 이미 판단가능하다는 점에서 말하는 임의적인 것을 사실화하여서 받는 당위성에 의문을 가지는 것에 임의적으로 받아 확고함으로 나가는 것이 바로 자신들을 쇠뇌했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다.

이러한 쇠뇌한 자의 입장에서 야훼와 예수님의 잘못을 지적한다면 정상적인 이성에서 받아야할 당위성이 없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것이다. 야훼와 예수님에 대하여서 분명한 인식이 결여되어서 엉성한 실재로부터의 당위성을 말하는 합리성에 노예적 입장을 취한 가운데서 언급하는 것은 자기 영혼을 해롭게 하는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한 해받은 영혼이 맹목적 충성이니 변명이니 하면서 비판하는 것은 너무나 피해의식의 반로밖에는 생각되어지지 않는 것이 또한 상식적으로도 인정되어야 하며 불쌍하게 보아야 할 것이다.


반선언문 인용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답변

먼저 생각할 것에 대한 인식이 결여된 것이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요한다는 관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기 전에 인간 실존과 본성에 대한 불신이 자체적으로 실존과 선함의 당위성을 먼저 말하고 난 다음에 그것이 당위성을 가진 가운데서 언급해야 할 문제인 것이다.

인간의 본성이 스스로 존재하지 않았다면 상대적 존재라면 존재의 성립당위성이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과 그것에 대한 현상적 인식이라고 함에 있어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그 확실성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불신을 강요받는다는 것의 사실을 어떻게 분별하겠는가 분별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아직 존재의식이 분명하지 못한 아이들처럼 보호와 양육이라고 함을 굴레로 생각하는 것은 이성의 자라지 못한 어리석음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강요인지 당연한 것인지 분별하지 못하는 것에서 인위적으로 강요의 주장은 미숙함을 드러내는 것일뿐이다.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의 행하심의 절대 정당함을 상대적인 것으로 알고 임의적 보편적인 것으로 생각하면서 핑계할 수 없는 것을 강요라고 핑계가 성립된다고 말하고 있으니 그 임의적 당위성을 위해 많은 사람들의 동의를 구걸하는 길밖에는 없다는 것을 말해두겠습니다. 분명한 사실은 그러한 구걸적 당위성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에 이르지 못한다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문을 보면서 결론적으로..

임의적 보편의식으로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절대 정당함에 따른 상대적 자기 계시의 실존을 판단하려고 하는 모습에서는 상식적으로도 도저히 왜곡되어진 이성을 본다고 하겠다

오히려 무엇인 진정한 사실인가에 대한 분명한 기준없이 상대적인 임의적 기준을 가지고 비난하고 있고 그 비난이라고 하는 것이 성립되어지는가 하는 것에 당위성은 자기들이 의지하고 있는 상식보편에서도 인정되어지 않는 말을 하고 있는 것을 본다.

제임스 오스틴의 '오만과 편견'이라는 책이 있다 물론 그 책 내용에서도 기독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가지고 있는데, 그러한 입장을 여기서도 본다. 무엇이 실재이며 실제상황인가 그것에 대하여서 아주 보편에 대한 개념이 있는 것은 다행이나 그러한 그러한 보편이라고 함의 한정되어진 것으로 편협을 불러오며 오만의 합리성의 근원을 피할 수 없다는 점에서 참으로 이성이 제대로 된 모습을 가지지 못한 것을 지적할 수 있다.

한마디로 여러가지 합리성과 보편성을 말하여 구색을 갖출 수 있다고 하여도 그 보편성과 합리성이 판단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는 진정한 사실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기독교는 자존의 하나님의 자존의 절대자로서의 자체적 절대 정당함으로 상대적인 실제를 말씀하시고 있고 진리의 실제를 말하고 있다는 것이다. 이것은 상식적으로도 상식적인 보편 판단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아는 것이 진정 상식이 있는 사람의 모습이며 핑계치 못한 복음의 사실을 받을 수 있는 받는 자의 정신있는 참된 소리가 되는 것이다.




반기독교 선언

번호: 43 글쓴이: 夜客
조회: 515 스크랩: 1 날짜: 2005/03/10 21:38


사람들은 대부분 믿음을 가지고 살고 있으며 자신이 가진 믿음이 옳다고 생각하면서 살아간다. 사실 이 세상에 확실한 것은 거의 없기 때문에 온통 믿어야 할 것들 뿐이라고 할 수 있다. 우리가 꿈 속에서 꿈을 꾸고 있다는 것을 모르듯이, 우리가 사는 현실 자체도 하나의 꿈일 수 있다. 내 눈 앞에 보이는 컴퓨터의 존재를 절대적으로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지금 당신이 읽고 있는 이 글이 존재하고 있다는 것을 엄격하게 증명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왜냐하면 감각으로 느꼈다고 해서 그것이 곧 존재를 증명하는 것은 아니기 때문이다. 당신은 단지 이 글이 당신 앞에 있다고 믿을 뿐이다.

우리가 안다고 생각하는 것들의 대부분이 실은 모두 믿음에 불과한 것이다. 데카르트에게도 확실한 것은 자신의 존재성일 뿐, 그것으로부터 연역해낼 수 있는 것은 별로 없었다. 사람들이 보통 '아는 것' 또는 '확실한 것'이라고 믿어왔던 것들의 대부분이 사실상 '믿음'이었던 것이다.

여기에서 누구나 의심 없이 '진실'이라고 믿는 것들을 가리켜 '보편적 믿음'이라고 해두자. 보편적 믿음의 예는 너무나 많다. 우리는 나무나 컴퓨터, 연필, 물, 종이 등이 존재한다는 확신을 가지고 있으며 오늘 해가 떴듯이 내일도 해가 뜰 것이라고 믿는다. 정상적인 한국 사람이라면 이순신 장군이나 세종대왕을 직접 본 적이 없지만 그들이 실존했던 인물이라고 믿을 것이다. 보편적 믿음은 현상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윤리관에 대해서도 작용한다. 예를 들어, 우리는 누구든지 자기방어를 위한 것이 아니라면, 살인을 옳지 못한 행위라고 믿는다.

이러한 보편적 믿음들은 특별한 경우가 아니면 사실이나 진실로서 받아들여지고 있으며 다른 주장(믿음)들을 뒷받침해 주기도 한다. 현상에 관한 한, 자연과학은 보편적 믿음을 확장시키고 그 확장된 보편적 믿음을 바탕으로 새로운 믿음들을 개척해 나아가는 활동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에 반해, 도덕 관념은 시대에 따라 변질된다. 이것은 역사적으로 볼 때 명백한 사실이므로, 도덕 관념에 대한 보편적 믿음이 점차 감소되어 왔고 앞으로도 한동안은 그럴 것이라고 본다. 종국에는 '이기적 욕망 때문에 남에게 피해를 주는 것은 나쁜 행위이다'라는 포괄적 윤리관만 남을 것 같다는 예상도 해 본다.

오늘날 도덕관념에 대한 논쟁들을 살펴 보면, 비보편적 믿음은 폭증하는데 반해, 보편적 믿음은 설자리를 잃어가고 있음을 알게 된다. 가령 의학, 유전공학의 발달로 인해 여러 가지 윤리적이면서 의학적인 문제들이 많이 발생한다. 죽음에 대한 정의라든가 장기이식, 인간복제 등, 결과를 예측할 수 없는 많은 문제들에 대해 이것 또는 저것이 옳다고 단호하게 말할 수 있는 경우는 거의 없기 때문에, 여러 가지 주장들이 난무하고 있다.

이러한 혼란의 원인 중의 하나는 도덕적 가치관들 중에서 보편과 비보편을 나누는 명확한 기준이 없기 때문이다. 안락사의 경우를 생각해보자. 환자의 고통과 신체에 대한 권리를 중시해서 그의 죽음을 돕거나 방치하는 것이 옳을지 아니면 그가 아무리 죽음을 원한다고 해도 생명은 존엄하므로 그의 죽음을 최대한 막는 것이 옳을 지에 대해서는, 둘 중 어느 하나도 마땅히 그렇게 해야 한다는 보편적 믿음이 아니다. 그런데 분명한 것은, 여러 가지 도덕적 가치관 중에 하나를 선택해서 그것이 옳다고 믿는 것 또는 옳지 않다고 믿는 것, 그리고 더 나아가 그것을 표현하는 것은 그 사람의 자유요 정당한 권리라는 점이다. 이것을 ‘양심의 자유’라고 해두자. 나는‘양심의 자유’의 존재 여부가 그 사회의 민주주의가 얼마나 발달했는가를 가늠하는 척도이며 ‘양심의 자유’야말로 민주주의와 평화 공존의 원리에 부합한다고 생각한다. 그런 의미에서, ‘양심의 자유’가 모두의 보편적 믿음이 되었으면 한다.

본론으로 들어가서, 기독교의 믿음에 대해 살펴보자. 기독교가 다른 종교와 비교해볼 때 가장 특색 있는 것은 바로 믿음에 대한 태도이다. 기독교는 그 교파를 막론하고 특정한 것들에 대해서 강한 믿음을 요구한다. 바이블을 읽어보면, 그 속에 등장하는 야훼는 물론이고 예수와 그의 사도들이 가장 강조한 것이 바로 믿음이라는 것을 누구나 알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믿음은 보편적이지도 않을 뿐더러, 기독교에서 가르치는 것에 약간이라도 어긋날 소지가 있는 다른 믿음을 사악하다고 여기고 이를 철저하게 배척해야 한다는 이상한 관념을 심어준다. 예를 들어, 기독교는 예수의 육체적 부활을 진실이라고 믿어야 할 것을 강조하고 그것을 부정하거나 불신하는 태도에 대해서는 죄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악한 행위로 규정짓고 있다. 오늘날 이러한 태도가 과거에 비해 상당히 약화되기는 했지만, 한국기독교 만큼은 아직도 이러한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자신과 다른 믿음이 사악하다고 여기는 관념은 아직도 우리 사회에 만연해 있다. 최근까지만 해도, 마르크스나 레닌의 서적을 소지하는 것만으로도 소위 “빨갱이”로 몰려서 처벌 당하는 일이 많았다. 어떤 사람이 북한의 주장에 동조한다는 이유만으로 체포되고 매도의 대상이 되곤 한다.(물론 국가의 안정과 공공의 안전을 위한다는 것이 표면적 명분이다.) 북한의 경우는 더욱 심해서 사상범에 대해서는 극형으로 다스려야 함이 마땅하다는 관념이 지배하고 있다. 이런 식의 관념은 진보주의자들이 보수주의자들을 대하는 태도나 그 반대의 경우에서도 얼마든지 살펴 볼 수 있다.

내 의견으로는, 나와 다른 주장을 하는 사람을 미워하고 배척해야 한다는 관념이야말로 불행을 야기하는 가장 큰 요소라고 생각한다. A를 믿고 주장하는 것이 아무리 터무니 없고 이해가 가지 않는다고 해도 A가 보편적 믿음에 정면으로 어긋나지 않는다면 처벌하지 않는 편이 낫다고 본다. 대화와 토론으로 인한 해결보다 처벌이나 공권력의 남용은 단기간 동안의 효과가 나타날 수는 있어도 결국 극단적 대립과 반목을 야기해서 사태가 더욱 악화되고 만성화된다.

내가 기독교를 반대하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기독교가 양심의 자유에 위배되는 관념을 심어주는 대표적인 종교이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기존의 종교와는 차원이 다른 배타성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터무니 없는 것들을 보편적 믿음으로 비약시키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일방적인 주입식 전도를 당연시하고 사후의 심판을 강조하여 공포감을 조성하기도 하며 교주에 대한 맹목적, 반복적 미화와 찬양을 요구하기도 한다. 기독교식의 교육 방법은 인간의 개성과 창의력을 말살하는 반복적 주입식 세뇌 교육에 불과하며 그것은 기독교의 교리에 위배되거나 불신하는 지성을 깎아 내리려는 시도를 멈추지 않게 만든다. 나는 기독교를 지키기 위해 이런 일들이 자행되느니, 차라리 없는 것이 낫다고 생각한다. 기독교가 가르치는 것들은 자신의 양심은 옳고 타인의 양심은 그르다는 관념을 심어주기 때문에 사람들이 쓸데없이 고집을 부리고 사소한 일로 서로 미워하게 만든다.

내가 근본주의적인 기독교 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별 문제를 일으키지 않는 천주교를 비롯해서 진보적이라는 기독교까지 비판하고 반대하는 이유는, 양심의 자유를 불허해야 한다는 관념이 교파를 초월한 기독교의 공통점이라고 보기 때문이다. 진보 기독교에서는 기독교인들이 배타성을 버리고 종교 다원주의로 나아갈 것을 주장한다. 물론 나는 종교 다원주의를 찬성한다. 그러나 종교 다원주의가 진정한 예수의 가르침이라는 주장에는 동의할 수 없다. 이 주장은 매우 진실성이 결여된 주장이기 때문이다. 예수가 타종교에 대한 관용을 허락했다는 예를 나는 들어본 적이 없다. 오히려 예수는 종교 다원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가르쳤다. 어떤 면에서는 진보 기독교인이 보수 근본주의 기독교인보다 더 독단적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타종교에 대한 배타 행위를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으로 믿고 있는 사람들에게 “예수의 진정한 가르침” 운운하는 것은, 상대방이 동의하지도 않은 것을 독단적으로 가정한 언급이기 때문이다. 그런 말을 할 수 있으려면, 먼저 예수의 가르침이 적어도 타종교 관용을 인정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한다. 그러나 그들은 그것을 입증하는 데에 실패했다.

진보 기독교는 근본주의 기독교인들의 양심을 부정하고 예수를 미화함으로써 이를 다시 기독교의 교리를 뒷받침하는 데 활용하는 것으로 보인다. 무슨 말인가 하면, 인간의 죄(불완전성)를 강조하면서 신을 찬양하고 미화하는 것은, 원죄설과 대속 사상의 입지를 강화하는 데 요긴하게 쓰인다는 말이다. 야훼와 예수의 잘못과 오류를 감추면서도 모든 문제를 인간의 사악한 본성 탓으로 돌림으로써 원죄설을 정당화하고 구원의 필요성을 상기시키는 것이 진보 기독교인에게는 어쩌면 당연한 행위일 것이다. 나는 개인적으로 인간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함으로써 신에 대한 맹목적 충성을 강요하는 기독교의 이러한 교리를 혐오한다. 역사적으로 기독교인들은 같은 잘못을 계속 되풀이하면서도, 그것이 기독교 자체의 문제가 아니라 인간의 죄성 때문에 일어난 일이라고 역설해왔다. 나는 도저히 그러한 주장을 믿을 수가 없을 뿐 아니라 그것이 매우 졸렬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라고 생각한다. 불교의 역사는 이 주장을 반박하는 가장 좋은 예가 될 것이다. 만일 기독교인들이 저지른 잘못들이 기독교 자체와 무관한 일이라면 유럽인들이 다른 민족에 비해 더 사악하다는 이상한 결론이 나올 수 밖에 없다.

인간 본성에 대한 불신을 강조하는 관념은 양심의 자유를 불허하는 관념과 함께 기독교가 가진 가장 큰 해악적 요소이며 인본주의의 적이라고 본다. 물론 기독교에서 강조하는 어떤 교리는 훌륭할 수 있다는 것은 인정한다. 그러나 예수의 말 중에 훌륭하다고 평가되는 몇몇의 교훈들은 예수를 믿고 안 믿고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다. 그러한 교훈들이 예수를 믿기 때문에 지켜지는 것도 아니고 예수를 믿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훈의 훌륭함이 퇴색되는 것도 아니다. 어떤 사람이 훌륭하다고 해서 그의 모든 말이 옳은 것은 아니며 어떤 사람이 형편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말이 틀린 것은 아니다. 기독교인들은 바로 이점을 잊고 있는 것 같다. 기독교가 사라지면, 악마가 이 세상을 지배하거나 인류에게 재앙이 닥칠 것이라는 믿음은 터무니 없는 미신에 불과하다. 나는 기독교가 있음으로써 얻을 수 있는 유익은 기독교가 없어진다고 해도 다른 종교나 그 밖의 것들을 통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는 반면, 기독교가 주는 유별난 해악들은 기독교가 없어지면 크게 줄어들 것으로 기대한다. 따라서 나는 기독교인들이 기독교를 버리기를 간절히 소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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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 : 분석가님, 구경군님, 적그리스도님, 몰러님, 엑스님, 오딧세이님 외 다수의 회원 여러분 그리고 모든 반기독교인)





옮긴이 : 夜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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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3월 19, 2005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며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면서도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함에 대하여' 명제적 논리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언급에 대한 사실이 동의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여지를 둘 뿐으로 보여진다.

1. 게할더스 보스의 '이미'와 '아직'에 대하여서

먼저, 게할더스 보스가 주장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1) 좀더 부언적으로 설명한다면, 먼저 'G.보스의 시간관'(각주2)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한 다음에 언급됨이 옳다고 하겠다 이는 분명 시간관에 대한 보편성 이해에 차이에서 합리성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은 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 아니다 '보스'는 그러한 논쟁적인 것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단적으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차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고 함의 말을 같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종말과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그 상관성에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종말을 이루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미래적으로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가운데서는 시간의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는 모순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보편성을 말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함의 피조물적 한정적 의미와 그 규정적 한계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역사라고 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앞과 뒤를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거나 또는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구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바르게 찾아 적용되어진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판단은 시간에 대한 인식적 관점이 먼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2.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견해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

먼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표현은 옳지만 그 판단함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했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고 그가 가르친 내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역사적이라는 개념에서 그냥 예수님을 전제하고 그의 활동적 시기라고 함만 고려할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그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상적 정당함을 의지하는 주관적 시간관의 실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역사라는 개념에서 말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르고 있을뿐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의 시간관에 따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되어질 수 있다.

'지연된 종말론'이라는 것은 일반 역사적 시간관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진 종말론이라는 전제를 말하고 있다 즉 우주적 시간이라고함이 구속적 시간의 당위성에서부터 일반적 시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 시간에서 구속적 시간의 형태에 대한 현상적 개연적 시간관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인식의 불연속성이라는 판단밖에 세울 수 없으며 그 모순이라고 함의 문제라고 함의 인식의 사실을 말하기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자체에서 주목한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지연된 종말론적 입장에서 'already but not yet'문제제기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데, 이는 신학관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다.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았다는 측면이 '이미'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죄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고(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지 않았음), 택함받은 모든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의 관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명제 안에 두 관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미의 관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성경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아직의 의미는 역사적 성취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와 '아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 돛?역사적 성취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택한 자의 구원의 출발점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만 말해야 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다면 '아직'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의 만유적 인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안에서 만물이 함께 죽고 만물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개념이 들어올 개연성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와 아직의 두 개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완성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 求?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4장 종말론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의 요소인 '성전', '제사장', '육적 이스라엘'이 남아 있다. 이것이 지연된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한 이레의 기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해 70이레의 언약을 정하신다. 그중 69 이레동안 성전이 중건되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한 이레 후에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파괴된다.

왜 하나님은 한 이레 동안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 가운데 기독인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이스라엘과 성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심판을 미룰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중에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이미의 관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의 시기, 한 이레 동안 옛 시대(율법)을 묵과하시며 심판을 미루시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한 이래가 끝나자, AD 70년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구약 시대 소돔이 멸망하듯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에서 '아직'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취된다는 관점보다 AD 70년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와 아직" 측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구약 율법과의 관계(특히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의 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옳다.

요한계시록 마저 '아직'이라는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노래한다면, 요한계시록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반증한다.
!




각주1)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89-94.
'그러므로 목회 실제에서는 칭의에 대한 몇몇 안 되는 언급들에서 도출되는 논의는 바울이 변개(變改,conversion) 이후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의 칭의 선언의 범주에서 제외하였을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늘(Wernle)의 견해가 옳고 칭의가 순전히 회고적인 것이라면 *** 칭의와 최후 심판 간의 실제적인 연관성이 끊어지리라는 것은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8:33,34("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의 언어는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선언보다 더 절대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만큼은 절대적이다-보역) 사실 이는 현재 과거 미래의 범주를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사실은 예지(prognosis)와 예정(predestination) 사실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만일 그 범위가 여기 열거된 다른 개념들보다 그 무제한성과 무조건성이 덜 하다면, 칭의는 29절의 '구원의 울타리'로부터 빠졌을 것이다. 칭의는 '디카이오시스 조에스'( , 생명의 칭의)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endless life)이고, 성도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롬 5:18-21)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은, 만일 신적 구원 과정의 중심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도에 의하여 강하게 확언되고 있다.*'
*** 위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칭의가 회고적(retrospective)이라 함은 칭의가 칭의 순간 이전의 죄에 대해서만 발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죄는 칭의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역주)
* 이는 구원의 중심적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절대성을 가지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함의를 가진다.(역주)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93-94. 본문 인용)


각주2)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13-70. 제 1장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참고,

보스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이라는 '바울 신학'은 제 1장 바울 종말론의 구조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시간의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현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시간적 보편성에 따른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관관계를 먼저 구원의 요소로써의 칭의라는 개념으로 그 상관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2장이 되어진다.

'구약의 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antithetical)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울의 기독교가 가진 모든 근본적 특성을 가진 그 전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는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지고 연관된 것(circle as correlated and eschatologcally-complexioned parts)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그저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이를 자세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시도의 종말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신학을 전체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계속해서 점차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념적 반전(a conceptual retroversion)을 통하여 마지막이 진리를 드러내는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26-27. 본문 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다른 저서인 성경신학에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말할 때에 초자연적인 것과 사람들의 사고적 입장을 통하는 그러한 형태로서의 성경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있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의 계시적 이해라고 함과 증거와 같은 인식적 작용을 통하여서 성경이 기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해와 달이 년한을 이루는 보편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해아래 되어지는 것들의 판단의 주권이라고 함도 실제적이며 한정적이면서도 무한한 능력이 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신학적 개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러한 것의 형태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인식의 방향을 고려할 때에 구속적인 성경적 입장에서의 자연신학을 말할 수 있어도 자연신학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성경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야 한다.

자연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보편성 논쟁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지고 그것의 논쟁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비롯하여 여러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에서의 처음 첫 장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라는 측면을 시간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스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이라고 함과 공간이라고 함 즉 세대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전부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을 그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스의 한역 '바울의 종말론'을 번역하신 이승구 박사님은 보스의 실재론을 같이하지 않는 가운데서 본문의 잘못이해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 26) 즉 각주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이분적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구속하심의 시간관이라고 함의 차이를 보스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해의 주관성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시간이해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서의 주관이 아닌 플라토닉 신관을 비롯해서 임의적 당위성에 따른 주관적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때에, 시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써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시간이라고 함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국한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임의적 주관에 따른 시간관에 반대하여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겠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에서의 계시라는 것만 인식하겠다는 측면의 안티적 극단적 보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역할적인 인물을 들 수 있다면 랑케와 같은 신학자이다 그는 시간관이라고 함을 일반 역사적 개념의 입장에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증이라고 함을 판단함에 많은 분별을 요구하게 된다고 하겠다.

보스의 언급에서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세대의 이해라고 함이 어떻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에 따른 사실 규정이라고 함이 역사적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규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로써의 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함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이미'와 '아직'을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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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14, 2005

잘못된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각주2)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각주3)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각주 2번 보스의 견해 해석 참고)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은 세 사람 사이에 있는 통일성으로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언뜻 보기에 니케아의 결정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즉 니싸의 그레고리 같은 인물은 그의 철학적 대전제에 따라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이의 공통성은 세 사람 각각 개인들이 지닌 개체성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본문 인용)

해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서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것으로 역사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비평가 하르낙의 입장이나 또는 화이트헤드 그의 저서인 이성의 기능에서 그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플라토닉이라고 할 때에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르낙의 입장에서는 삼위의 동일 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이라는 언급을 말하고자 하였고 화이트헤드의 경우에서는 플라토닉 이성과 다른 생물학적 이성이라고 함의 다른 보편적 이성을 말하기도 하며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알아간다는 헤겔적 진화론적 사관에 따른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삼위일체로 믿지 아니하고 플라토닉 삼위일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그러나 피크는 궁켈이나 그레스만이 제시한 방법론을 따르는 여러 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많은 연구들이 가지는 중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궁켈과 그레스만은 오경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보다 더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전승의 발달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으며, 가능한 한 그 전승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연구하면서, 히브리시(詩)와 예전(cultic)과의 관계를 조사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가 지그문트 모빙켈(Sigmund Mowinckel)이다. 그는 대단히 명헉한 구약 학자였으며, 시편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 저서를 통해 여러 가지 장르의 문학 양식을 분석하고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초로해서 이 양식들이 포로기 이전에 있었던 성소의 예전과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궁켈이 히브리 종교 문학의 개인적인 성격에 큰 관심을 두었던 반면에 모빙켈은 히브리 종교문학을, 사회를 움직여 가는 추진력의 전개와 더욱 끈질기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본문인용)

양식비평이라고 할 때에 문학비평이라고 함과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인식과 정황이라고 함에 기준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궁켈과 더 나아가서 그레스만은 그것의 역사적인 것으로 적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빙켈의 입장도 그러한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궁켈이라고 하는 자의 중심은 '개인적인 성격이라는 인식'으로써의 개체적인 보편을 말하고 있고 모빙켈은 그러한 개인들의 모임적 인식으로 인한 정황적 세력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양식비평에 있어서 보편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서 철학적 보편으로써의 '하나'와 '여럿'이라는 입장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추구하는 아르케 논쟁에서 그 보편적 실재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있어서 자체적 당위성은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인 당위성의 요구성이라는 선상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비평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허구적 실제로써의 인식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식의 산물로써의 본문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양식비평의 학문적방향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데 이는 성경의 상대성이라고 함의 모습을 불완전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어지면서도 온전하고 절대적인 재가에 따른 완전성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으로써의 성경연구라는 합목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절대자로써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때에 그 합리성의 완성적 개념에서 그 성경의 실체와 원본을 찾지 않고 그 자체의 '완전영감론'을 받으며 그 비합리적인 연속성에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라고 함의 바람직한 성경연구의 합목적성의 방향과 실체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비평학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 자체에서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원본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각주2)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롤록(Robert Rollock)은 1583-1599년까지 에딘버러 대학의 학장이었다. 그의 신학 강의는 1597년 [Treatise on Effectual Calling]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Shorter Catechism concerning the way in Which God from the Beginning Revealed Both Covenants to the Human Race]이다. 1603년 런던에서 영어판이 나타났다. 롤록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언약에 속하였다는 사상에서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본문인용)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사상이라고 함은 상당히 보편을 말하는 가운데서 많이 알려진 개혁 신학적 입장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는 듯한 언급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 안에서 언약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형식을 갖추면서도, 분명 하나님 중심의 형태를 말하면서도 실재에 입각한 실제로는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 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로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본문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로 읽는 법 '독도법'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이 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면서도 이 해석이 상대적으로 용인되어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에는 이 해석은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다른 독도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해석 가능성에만 머물고 있지 그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자신 스스로 취하시는 절대 정당함과 절대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으로만의 가능성이 있는 해석적 당위성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 안에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을 읽음이 더욱 합리성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따라서 여러 독도법의 해석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라는 형식적인 가능성의 한 해석뿐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해석적 하나님의 이름의 해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그 합리성은 있지만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은 빠져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 인식의 합당한 순서가 되어진다. 따라서 언약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실존적 정당함이 되어진 가운데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자존적 삼위하나님의 일체적 증거에서 시작하여서 언약의 실존을 말하여야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참고 칼빈이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요에서 언급한 내용을 소개한다.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주3)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비판- 삼인 1996
김경재 :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교(Utrecht Univ)에서 '그리스도와 동아시아 종교의 만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정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원장. 해석학과 종교신학, 폴틸리히 신학연구, 김재준 평전, 영과 진리 안에서.
폴틸리히의 신학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신론에 해당되어지는 비존재(Non-Being)라는 것에서는 그 합리성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인 플라토닉적 신관에 따른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플라토닉 삼위라는 개념이 이미 그 실재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무제약자와 같은 그러한 철학적 해석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에 동의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플라토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과 같이 전제로 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사실들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그 비판의 합리성을 그의 신관에서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도 먼저 기정된 사실임을 말해둔다.

목차 개요..
1.유일신 신앙에 대한 오해들
유일신 신앙은 하나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신들 중 최고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셈족계 종교들의 문명신 신앙이 아니다.
유일신은 성경적 신앙의 독점물이 아니다.
2.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체험
야훼라는 신이름의 유일신 신앙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유대신비주의 카발레에 나타나는 유일신신앙
3.그리스도교의 유일신신앙과 삼위일체론
신약성경에는 야훼라는 신 이름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유일신 신앙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의 고백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4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5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
6종교 다원주의와 해석학적이론들
7에필로그 종파적 유일 신앙에서 우주적생명의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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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3월 05, 2005

플라톤적 삼위일체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



comments:
역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에서 현대의 동일철학과 신플라톤적 실재론으로 제한되어지는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참된 삼위일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옳음을 근거로 제시한 글입니다.

다음카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구원론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화를 말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신화의 창시자라는 개념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플라톤적 실재론에 입각한 삼위일체에 근거한 합리성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비판과 책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글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위적차원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많은 이단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것에 있어서 제고찰하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함과 증거함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음카페에 기록했던 글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의 '신화' 언급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비판에 있어서..

글을 씀에 앞서서..

아타나시우스는 신화의 창시자임에 대한 것을 지적함으로 논란이 있는 가운데 그 신화 언급이라고 하는 것이 신론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의 당위성을 느끼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기아 신학에 대한 고찰에서 그 신화 이해에 대한 것을 후스토 L. 곤잘레스(각주1) 견해를 따라서 보다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글을 준비했습니다.


1.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신화(Deification)(각주2)'또는 '신격화(divinization)(각주3)'라는 말이 그 상관성을 전제로 하는 말인가 하는 것과 단적으로 어느 하나만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이해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게 되었다면(각주4) 그것은 삼위를 배제한 구원론에 대한 것을 말한 것으로써의 신화를 말한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은 신론적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며 하나님의 강생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나님께 나오는 성화의 개념이 있게 되어지며 이것은 플라톤적 개념입니다. 즉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취하고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관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 오리겐의 입장이라는 사변적 입장을 아타나시우스가 경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방향적 입장과 그 노력이라고 함을 그러한 실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각주5)

이러한 노력들이 캅바도기아 교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 삼위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그들을 하르낙의 판단(각주6)과 같은 유명론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각주7)


2. 비판함에 있어서..

여기에 대하여서 저는 '삼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인 입장을 말씀하심에 비판함'과 '곤잘레스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변호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 실천적 입장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아타나시우스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곤잘레스와 같은 실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라는 에로스가 상기설에 따라서 회귀적 본능이 있음에 대한 것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상승운동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것을 영혼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 8) 이것은 플라톤의 종교적 실재를 전제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말하게 되어질 때에 역사적으로 캅바도기아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신플라톤적 실재론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심각한 잘못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9)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플라톤의 실재의 판단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이데아의 한 구석에 있게 되어지는 한정된 신을 화이트헤드는 잘못되게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본질을 말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그러한 하르낙과 같이 그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에서 비로소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실천적인 구원론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축소하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가 유일신과 그 가운데서 구원론을 말한 것이라고 함을 그러한가운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격하하여 구원론적 입장의 개념의 창시자라는 언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에서의 그 존재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의 표현의 합리성의 불연속성 속에서도 삼위하나님을 표현하실 수 있음과 그렇게 행하심의 신실하심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는 비로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의 노력이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실재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실재론에서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과 이것은 삼위하나님을 해석하는 곤잘레스를 비롯하여 신론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어 임의적 행함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합목적적 신론을 배제한 구원론을 어색하게 내놓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라는 개념도 결국은 신의 본질을 도달 할 수 없는 유사본질을 동일 본질로써 말하고자 하는 노력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그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신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함으로 글을 맺습니다.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큐바출신/감리교목사로서
예일(Yale)대학대학원 졸업(M.A.Ph.D.)
에모리(Emory)대학교 교수(8년간)
W.C.C. Faith and Order 위원
현재 International Theological Center 교수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교수

감리교 목사님이시고 또한 세계 에큐메니칼 위원으로써 그 사상적 실재는 개인적으로 달리합니다. 그러나 실재에 입각한 실제론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합리성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고 할 때에 저자 목사님의 합리성의 객관성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제 3세계 신학자로써 그의 이 주저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어진 가운데서 남미과 영어권에서 택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 롤란트 베인톤이 언급한 것과 같이 영어와 이탈리어와 독일어와 기타 언어에 능숙하신 분으로써 사상의 전반적인 측면을 다룸에 있어서 그를 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욱 곤잘레스는 그 사상을 전계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상의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함이 그의 저서의 장점으로 역자들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과 실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 입장에서 비판적 입장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주목하신다면 저의 앞서 판단하고 책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당위성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2)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문맥상의 결함에서 나온 오해인듯 합니다.

번호: 6135 글쓴이: 인권의 왕도
조회: 29 날짜: 2005/02/24 22:12

(중략..)

먼저 신화(Deification) 교리란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고, 믿었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는 것을 말 합니다.


교부들로는 아타나시우스와 클레멘트(150-215), 성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Hippolytus of Rome(3c), Basil(330-379) 등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격(Godhead/경배의 대상으로서)에서는 아니며,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베드로 후서 1:4절 참조)로 설명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후절 생략) ..



각주3)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351-352.

'바로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이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분만이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는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일종의 신격화(神格化:divinization: θεοποιησι(데오포이에시스))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와 유사한 존재를 수여해 주실 수 있으므로 신격화에 있어서도 구세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pp. 351-352.)


각주4)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모든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근본 원리로서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는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면 판단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원리는 근본적으로 두개인데, 즉 유일신관과 기독교 구원론이었다.(p.347.)'

각주5)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그의 신학은 내용적으로 오리겐의 내용과 아주 가까운 점이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그의 관심사는 사색적이고 학문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출신 신학자들이 추종했던 방법론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그는 이론적 문제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실천적인 주제들만 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교리적 주제들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뜻이다.'(p.347.)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1.

기독교 사상사를 영ㄴ구하는 일젼의 역사가들은 “초기 니케아 사상”과 “후기 니케아 사상”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바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 가운데 하르낙(Harnack)은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앙형식은 유사본질-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 아니고 비슷한 본질이라고 보는 이론-주장을 니케아 신앙의 형태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르낙은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이론은 “동일본질”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 381.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3.

'이러한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p. 383.


각주8)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 347-348

‘이방인에 반대해서’를 살펴보면, 고대 변증신학자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교들의 다신론을 공격한 다음,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들이 무엇인지 토론한다. 원리적으로 이 수단들은 둘이 있는데, 영혼과 자연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그분(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며, 우리 자신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 속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만 몇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중략)...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말씀(Word)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죄가 그 거울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사전에 말끔히 닦지 않으면 거기에 비추이는 말씀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표현은 오리겐 이래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흔하게 유행했던 플라톤적인 주제이다.(pp. 347-348.)


각주9) 화이트헤드 '이성의 기능' 정연홍 역 이문출판사

여기서 화이트 헤드는 신을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이성(Geist)을 '플라토닉 이성'과 '율리시스 이성' 또는 '생물학적 이성'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인데 결국은 플라톤적 실재에 입각해서 당위성을 받는 그러한 신으로 내제적 이성을 말한다고 할 때에 즉 헤겔의 자연이성의 자기를 알아가는 가운데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것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영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르낙(Harnack)도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동일 본질'을 말할 때에 '유사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동일본질이라는 귀결적 판단이 그 실제적 즉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견해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도달 할 수있는가에 대하여서 두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철학이란 말에 있어서, 지혜를 사랑하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헬라어 '필레인'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덕이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함으로써 고르기아스적인 회의론적 입장과 달리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지식이라고 함이 본성에 이를 수 없다는 개념에서 그 실천적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상승이라고 할 때에 동일본질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유사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하지 못하는 잘못된 플라톤적 실재론이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적 편협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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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4, 2005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에서 나타나는 율법과정에 대하여..



comments

* 신앙에 대한 그 아름다운 모범들을 맹목적으로 고수한다는 것은 전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보수라는 개념,그것이 맹목적 사수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배척되어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 물론 분별하여서 주 안에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지만 강요받게 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현상적인 판단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 실재론의 부제의 신학적 입장에서는 최선이 되어질 수도 있지만 그 최선은 어그러진 것으로 말할수 있음에 자성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통이해에 대하여서 칼빈이 신앙의 전통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에서 기본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과 같은 일반적인 것과 우리의 일상적인 것의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귀할 것 같아서 글을 남겨봅니다.

아름다운 전통과 율법화 과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생이 주의 뜻하심을 나타낼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참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의 지속적 행위라고 하는 것에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획일화하게 되어지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행위에 대한 해석의 일반적인 획일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율법적인 성격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율법화 되어지는 경향과 실제를 초래하게된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한 예로서 언급하게 되어진다면 여러가지 인식의 획일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으로써 존재론에 대한 이해의 획일적 개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각주1)

우리의 믿음의 고백들이 종들의 고백인데 그러한 것을 인위적인 것으로써 고수하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는 진정한 전통의 인식과 사실들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이 획일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종의 고백이 어떤 성문법이 아니라고 하여도 불문법적인 개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각주2)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존경과 이해가 합당한 정도의 공존되어진 가운데서 진실로 바르게 이어갈 수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맹목적인 존경은 그 아름다운 신앙을 율법적 개념으로 어그러지게 할 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을 율법이 아닌 진정한 사실로 이어가며 또한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귀한 살아있는 재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함이 하나의 지혜로 자리매김 되어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중세편 II,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210p.12세기 문예부흥 부분에서..

곤잘레스는 안셀름의 저서를 이야기 하면서 안셀름의 신학방법론에 대한 간략하게 언급함과 그의 '프로스로기온'에서 신존재에 대한 언급을 합리적으로 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201p.) 여기서 존재론을 말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01p.) 또한 그곳에서 그는 어려운 표현을 넘어서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기술적 표현보다도 합리적인 개념에서 말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서 존재론적 실제론이라고 함이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막스 밀러는 그의 '철학소사전'(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이문출판사)에서 기초존재론을 말하면서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나온다고 함을 시사하고 있다.(290~295p 참고) 또한 이러한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교수인 리챠드 커니 교수(현대 유럽철학의 동향, 마틴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중에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가 카돌릭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의 언급은 이처럼 존재론적 실재론에 대한 영향으로 추론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러한 존재론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식상해 하면서 인식론적인 존재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막스 밀러의 입장에서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을 말함에 있어서 중세적 존재론의 기본이라고 함을 전제로 한 그것을 비판한 입장임을 말하고 있다. 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철학 소사전 이문출판사290~295p 참고)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사실 쉽게 말한다는 개념의 적용적 개념을 생각하다가 바르게 합당하게 증거한다는 개념을 마음에 두지 못함에 대한 판단과 또한 중세적인 잘못된 존재론적 실제론에 입각한 것이 존재론의 본래적인 기초인 것과 같이 인식이 굳어져서 합리성의 방향성과 인식적 사실들을 잘못되게 이끌었다. 그러한 중세적 존재론에 대한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쟁이 있어왔고 인식의 잘못된 사고의 전통은 존재론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잘못된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하였고 이것은 인식의 율법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칼빈이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획일적 고백을 강요받음에 반대하였던 것도 그러한 것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믿음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게 고백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앞서 고백되어진 것과 동일하게 고백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을 말하고 이어가야 함이 옳은 것이며 아름다운 신앙이 율법화 되어지는 것을 벗어나 더욱 풍성한 주의 증거가 되도록 힘써야 함이 옳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주2) 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철학소사전 이문출판사 290~295p.

여기서는 막스 뮐러와 알로이스 할더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론적 입장의 차이를 말하면서 존재와 존재론에 대한 언어적 차이를 말하는 가운데 존재의 소외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 비판으로 실제적인 범주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차이와 반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티적 개념에서의 상관성을 항상 말할 수 있고 주관적이라도 하더라도 강조점의 이해와 납득에 있어서는 동일한 범주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의 불연속적 사상을 말할 수 있는 실제론에 달려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가해성을 말하는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론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전통이해에 있어서 화석화적인 율법적 경향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리고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덕이라는 개념의 용인으로 인한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신학적 불가해성,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으로써의 그것은 상대적인 연속성의 사실의 형식을 나타내면서도 실제적인 불연속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짐에 따라서 인식의 범주의 상관성에 따른 불가지론적 자리에서 벗어나며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입장은 종교개혁자로서의 칼빈에서 이루어져서 오늘날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적 입장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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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월 27, 2005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개념이 있기 마련이라고 함은 인지상정적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인정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개념들이 서로 상관성을 맺고 그 차이성에서 또한 인식의 발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또한 할 수 있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는 개념(각주1)에서 사실 이해가 차이가 나는데 그러한 경우를 모두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재고할 필요가 우선적이라는 생각으로 기술한다.



1.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선 상관성을 생각할 때에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지만 항상 인식적인 차원에서 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같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우를 먼저 보면 상당히 이상(理想)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는 가운데서 동질성을 가질 수 있는 개념의 확보와 인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동질성에서 그 인식의 흐름의 한 동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나타날 경우에는 두 가지로 주목되어질 수 있다.

먼저 이해는 하는데 존경하지 않는 경우, 이것은 합리성의 차이라고 함을 확인할 수 있고 때를 따라서는 방법론적인 입장에서라는 한정적인 입장의 동일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며 그 표현적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론에 따른 차이에서 그 인식의 방향성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경을 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 인식의 동질성을 같이 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임의성이 있는 가운데서 맹목적인 인식의 동질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는 추종적 인식의 흐름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은 사변과 신비가 만나는 곳이나 신비에 대한 맹목적 입장이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2)

그리고 그 다르게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두 가지의 정도면에서 차이가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첫 번째의 말의 부언적인 언급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두 가지의 정도면에 따른 것은 어느 쪽의 인식의 강조가 되어지는가 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진 인식을 향하여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해와 존경에 대한 신학적 사조(思潮)적 관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적 개념이나 교리적인 개념보다도 다른 것을 경건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사조가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을 같이 하지 않는 것으로써의 학문과 인식 더 나아가서 믿음의 실체를 주목하게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은 구체적으로 신학적 사조의 철학적 경향이라고 함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역할에 대한 안티적 인식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있게 되어지는 교회에서의 신지식에 대한 것과 철학에 대한 이분적 생각의 입장과 실제의 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동일성의 인식과 이해의 개념이 그 대립되어진 가운데서 혼돈이 있어왔던 것이다.

한 가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다고 할 때에는 포이엘바하의 역사에 대한 비평을 의식하여서 칼바르트는 '원역사'를 말한 것으로 코넬리우스 반틸을 언급하고 있는데(각주3) 이러한 것이 바르트의 신학의 실재로써의 '무성'(nothingness)신학을 말하게 되며 그에 안티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내제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폴틸리히의 비존재(non-being)의 신학을 주목할 수 있다.(각주4)

사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의 부재로 인하여서 상대적인 측면에서 임의적 사상적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비평학의 합리적 일관성을 피하고자 하는 도피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5)

상대적 인식의 불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이해의 연속성을 막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의 인식이 이해와 같이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하고 이것은 맹목적인 것으로 열려지게 만들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바르트의 부룬너와의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와 반박(Nein!)(각주6)에서 그는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 카롤링 시대에 있었던 철학자 에리게나의 철학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그 유사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약의 철학을 말하는 에리게나의 입장의 모습이 바르트의 입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함의 유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7)

한편 이성적 입장에서의 이성주의자들은 이해라는 개념의 실존적 입장을 취하여서 신비라는 개념의 납득 당위성을 말할 수 없고 그 신비에서 나타나는 그 계시적 존경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것은 비평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치우친 신학적 입장의 모습들..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한 실존적 동일한 범주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아픔들이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가운데서 교회는 많은 똑똑한 사람들을 잃었다. 물론 그러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종들의 고백에 있어서는 참으로 재고함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아름답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사실들이 같이 나타남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합당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말함은 다니엘서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것도 있는데 사실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구별되어진 복음의 사실의 실존성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참으로 아픈 기억을 볼 수 있는데, 우리 한국사에 있어서 한국 신학사조의 흐름을 볼 때에 교계의 지도자들의 앞선 세대 메이천, 존 머리, 워필드, 코넬리우스 반틸과 같은 자들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게할더스 보스(Geehardus Vos)가 하나님의 실재론에 입각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고 가르쳤는데, 코넬리우스 반틸을 제외한 앞서 언급한 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만 하였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각주8)

그로 인해서 그 당시에 있게 되었던 프린스톤 신학교에 들어온 '스코틀랜드 보편철학'(각주9)이라고 함을 추종하는 가운데서의 신학적 계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액면적으로 그러한 것의 추종적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실제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치우침과 분명함을 위한 노력은 이해와 존경의 한 인식적 사실을 선택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자리에 섰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 합당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날 때에 믿음 안에서 참된 분별과 지혜의 은사가 온전해지며 참으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의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것은 순결함의 사실을 잃어버리고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뱀처럼 간교한 자리에 설 수 있는 위험에 노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 이해와 존경의 실제를 분별하고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가운데서 주님의 보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었으면 하며 그 섬김으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시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 서양철학사 최민홍역 집문당 p 102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그에게서 배운 것은 너무나 지나친 역설인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체(實體, substance)의 불멸성이었다.

실체라는 말은 그의 직접 후계자들로부터는 나오지 않지만, 그 개념은 그들의 사색중에 나타나 있다. 실체란 변하는 술어(述語)에 대하여 존속하는 주어(主語)로 생각되었다. 실체는 이러한 것들로써 2천년 이상이나 철학과 심리학, 및 신학의 기본적인 개념의 하나로 존속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많이 언급하려고 한다. 다만 지금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뚜렷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다루려고 할 경우에 이 실체의 개념이 도입된다는 것만 유의하려고 한다.’(본문인용)

파르메니데스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인식되어지는 것에서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으로 후대에 인식되어지고 평가되어지는 자이다 한마디로 인식론적인 실제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며 형식논리학에서 가정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결론적 사실이 형성되어질 수 있다는 것의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문학과 양식비평의 사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신학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되어져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적 측면에서의 사실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 그 가능성이라고 함이 있다고 하여도 그 가능성이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는가 아니면 일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가진다고 할 때에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신학적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의 실체는 그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없다

다만 허락되어질 수 있는 인식의 일반적인 정당함에 따른 인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개념의 분명함은 분별되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언어의 분명성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러셀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회의적이라고 함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말함에 항상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신학적 불가해성적인 입장에서는 분별이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주제로 존경과 이해에 대한 짧은 글을 쓰고자 한다.


각주2)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셀링, 철학적 원리로서의 자아 서광사 서문.
“..이 신비는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3가지가 있는데, 삼위일체, 세례, “생명에 이르는 두 개의 성만찬, 즉 주님의 피와 살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체 성사는 삼위일체와 세례와 비슷하게,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이다. “〔성체성사의〕신비는 지상적인 것이 아니고 하늘적인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고 찬양의 대상이다. 논란의 대상이 아니고 경외의 대상이다.… 육체의 환상이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관으로 판단할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은 가시적인 성물(elements:떡과 즙) 안에 참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과 같다. 만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의 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육체에 참으로 동참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naturaliter)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본문인용)

후스토 곤잘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이 내용은 중세기간중 카롤링 왕조가 와해되어지는 가운데 12세기를 잇게 되어지는 11세기의 신학을 언급하는 중에 당시 삭소니가(the House of Saxony)의 영향력에 있는 사르트르 지방의 풀베르트(Fulbert of Chartres)신학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 중 한 부분이다.

언급되어지는 인용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풀베르트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에서, 신비라는 개념이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비존재영역이라고 함의 의미를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상대적 보편성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이것의 단적인 사상의 흐름은 이러한 풀베르트의 사상이 12세기에 안셀름을 비롯한 보편논쟁이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는 곤잘레스의 판단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체성이기에 그 신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재론이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신의 절대 속성이기에 신비를 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은 상대적 보편으로써 오늘날 많은 현대주의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르트와 폴틸리히의 무성의 신학과 비존재 신학이라고 하는 것으로 재생되어진 것이다.(참고,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보편이라고 함에서의 신학연구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초월성을 상대적 초월로 바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비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신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그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변이라고 함이 임의적 신비에 추종적 형태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르고 있다.

셀링은 ‘철학적 원리로써의 자아’(한자경 역 서광사)라는 자신의 저서의 서문에서 객관적인 것이 또 다른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철학의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임의적 인식의 전환을 시도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독일 관념론의 실체적인 원리들의 기본적인 이해의 시초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한자경 교수님의 사상은 바로 이와 같이 자아라는 개념으로 그 주관적 원리라는 개념을 통해 소크라테스적인 너 자신을 알라는 입장을 그의 역자로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이 아닌 주관적 이해의 철학의 원리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객관적인 것의 판단여부를 벗어난다는 주관적인 입장의 합리성이 자체적으로 정체성의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가 할 때에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셀링을 비롯한 한교수님의 입장은 한교수님의 저서에서 ‘누군가는 어김없이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사실 잘 모르겠다.’(한자경, 자아의 연구 서광사 5p)라고 함과 같이 그러한 행위적 당위성을 말하면서도 자아를 말함에 있어서는 그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하여 부정적임을 볼 수 있다.

인식의 확실성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사실로써의 인(印)쳐진 것에 대하여 불가지적인 입장에서 러셀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직접지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셀링은 그의 서문에서 부분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서 자제해줄 것과 그것의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한교수님도 그것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판단이라고 함에 당위성을 부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독일의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 즉 전체가 있는 가운데서 개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입장의 실제론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합리성의 실제관이 과연 참된 실제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를 비판함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지는 경우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인 반론이 성립 강요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관적 사실이라고 함의 원리를 말하자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가지론적 입장 즉 철학적 불가해성은 칸트 이후로 이렇게 피히테와 셀링을 비롯하여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 인위성의 제가라는 당위성을 벗어난다고 할 때에 상대적 신비와 관념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신의 신비를 해석하는 것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임의적 존경이라고 함에는 사실이해라고 하는 것이 전무한 이해의 실존의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이해사멸’이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은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 철학에서는 존경은 있으면서도 이해가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의 판단의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함과, 신비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방법론적인 신비라는 개념들의 합리성의 진행을 주목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신비주의로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와 사변이 만남을 말할 수 있다.


각주3) 코넬리우스 반틸 신현대주의 김해연옮김 성광문화사 1992, 133p이하, 137p이하 참고


각주4)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를 주목함에서도 전반적인 합리성의 재고를 분별할 수 있다.


각주5)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참고할 것


각주6) 에밀 부르너 칼 바르트 지음,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pp. 75-141.


각주7)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69p,
‘하나님은 원초적 원인까지 포함해서 만물을 무에서 만드셨다. 이 “무”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 부정, 즉 전체적인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좀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이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된다’(본문인용)

곤잘레스의 견해에 보는 바와 같이 에리게나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언급이 적절한데, 창조와 피조라는 개념의 경우의 수 개념으로써 네 가지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은 스피노자적인 개념의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론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자(一者)라는 개념의 초월적 의미로 무를 하나님의 존재로 규정하는,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8)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03-107.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보스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프린스톤의 학생들은 그를 그다지 추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판단이 확실히 옳다 하겠다: “많은 학생들은, 어쩌면 학생들 대부분이, 그를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를 존경하는 쪽이었다. 그의 강의들은 그의 저작과 같아서 이해하기 정말로 어려웠다. 풍성한 통찰이 문장마다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Richard B. Gaffin Jr., ed.,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Phillipsburg, New Jersey, 1980, p. xiii.)

그러나 그를 이해했고 그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그레샴 메첸은 “랍오니여”라는 제목의 보스의 설교를 듣고서 그의 모친께 열정적인편지를 써 보냈다:’(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04p.인용)

보스의 설교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싱클레어 퍼거슨은 리처드 개핀의 판단의 여지를 그레샴 메첸에서 찾아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퍼커슨이 소개글 마지막 부분에서 보스의 설교에 대한 형태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실제론적인 입장을 그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형태적인 설교의 잘 정리되어짐의 판단에서의 실제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메이첸과 코넬리우스 반틸은 그 변증적인 개념이 다른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같이 사역하게 되어진다. 즉 상식보편철학적인 입장에서의 변증과 반틸의 전제주의적인 변증은 그 차이가 실재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메이첸의 그 흥분은 이해가 동반되어지지 않은 존경의 한 표현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보스가 반틸의 입장적인 것을 이해하고 또한 그가 합당하게 사역할 것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보스와 반틸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윌리엄 화이트 Jr 반틸의 생애와 사상 강승주 역 새순출판사pp. 53~57. 56p 참고)


각주9) 데이빗 F. 웰스 프린스톤신학, 박용규 옮김 도서출판 엠마오, 후기형식으로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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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07, 2004

칼빈은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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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 사상에서 신앙의 표준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과 전승 또는 전통에 입각해야 한다는 그러한 구교의 입장과 오직 성경만이 그것이라는 신교의 대립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차이라는 것은 중세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종교개혁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이 구교와 신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상당히 분별의 기준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극단적으로 신교에서는 전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동일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이라고 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지혜의 증거와 전통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함을 말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하였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논하는 것이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 그리고 마틴 루터 그리고 존 칼빈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주체자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칼빈의 입장을 통하여서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각주1)


역사적 사태적 입장에서 본다면 칼빈이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이해되어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프랑스와 방델이 칼빈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각주2)

'프랑스와 방델'은 칼빈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방델'의 입장은 칼빈의 실재론(각주3)과 전혀 다른 신관적 입장이기 때문에 즉 바르트적 입장이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학자들도(각주4) 칼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각주5) 역사보편적인 상황적 사태파악에서는 또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방델의 언급을 주목해보면 이러한 언급을 칼빈이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각주2에서 재인용)

아타나시우스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따라야할 권위가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앙고백에 대한 카돌릭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각주6)

그런데 칼빈의 실재론을 이해할 때에는 그의 실재론에서의 정당함을 얻는다면 비록 실재론적 기반은 다르다고 하여도 합리적 방향성의 동일한 표현인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실재론이 다른 가운데서도 동일한 실제의 기술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심이 달라도 표현이 같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각기 모두 자신의 실재론에서 기본적인 중심에서 그 합리성의 진실을 동일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해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움을 감추는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실재론적 입장이 다르면서도 플라톤에 대한 칭찬을 하였던 것인데 그 플라톤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전부 수용한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들이 있고 이미 '플라톤적 입장에 내제하였다고 할 수도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각주7)의 실재론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가운데 동일철학자들의 자기 기만적 해석과 사실로 칼빈을 오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론적인 즈음에..

칼빈이 이러한 카롤리와의 대화와 상관성에서 말한 내용은 전통을 무시한다는 개념 자체를 획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맹목적인 사수라는 개념은 신앙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 달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자기의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수라는 개념의 언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고백으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실재론에 부합되어지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상대적인 것을 사실로 취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운데서 전통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통을 이해함이며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동일하게 전통의 이해로 고백함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1) 많은 종교개혁적 입장의 지도자들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보다도 칼빈을 언급하는 것은 먼저 그들의 실재관이 모두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성만찬의 실제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 또한 그러한 실재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 중에 그 실재관에 가장 분명하였던 자가 바로 칼빈이라고 함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라고 함은 본문을 기술하는 가운데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각주2) 칼빈의 신학서론, 프랑스와 웬델/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pp. 63-64.

'카롤리(caroli)의 비방은 심각하였으며, 그러한 비방이 칼빈 자신의 모든 일을 해치리라는 것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활발한 토론이 개최되었으며, 토론기간 중에 비례(viret)는 자신의 제네바 동료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칼빈은 카롤리의 반박을 제대로 견디어 내지 못하였고, 또한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에 대하여서는 더욱 인내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자신이 전통적인 기독론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주장하였지만, 카롤 리가 요구한 증거를 거부하였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베른(Bern)시의회로 회부되었으며 그곳에서 칼빈의 입장은 많은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칼롤 리가 잘못이라는 것도 베른시의 중재인이 확인하지 못한채, 두 반대자는 서로 제각기 갈라서게 되었다.'

각주3) 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유명론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을 축출하게 되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되어진 'contemplated'라는 말은 단순히 명상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뜻하심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으로써의 삼위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정당함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강요의 시작에서의 지식을 말함의 기본이 되어지는 실재적 분별력이며 이것은 여호와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칼빈이 그의 신앙과 신학의 실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각주4) 에밀 두메르그, 칼빈신학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에밀 두메르그는 칼빈의 합리성은 불연속성적인 합리성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삶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칼빈이 그러한 불연속성적인 측면의 언급의 당위성의 출처가 칼빈의 실재론적 정당함을 찾고 있다는 점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인 기술을 위한 노력과 사실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실제적인 본모습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각주5) 게할더스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역 엠마오

게할더스보스는 그의 바울의 종말론에서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언어라고 하는 것도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와 같은 자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책으로 만나는 70인의 사상가'에서 롤랑바르트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음) 자신의 학문이라고 함이 언어의 한계로 나타난다고 하였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도 언어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아일랜드 철학교수 리차드 커니의 현대 유럽철학의 동향에서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에서 그 롤랑바르트와 함께할 수도 있는 입장이 되어지지만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언어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함을 말함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

도이베르트, 신사유비판, 크리스찬다이제스트..

도이베르트의 기독교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상대적 차원의 특정 철학만이 기독교 철학이라는 식의 접근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계로 코넬리우스반틸이 자신의 저서 개혁주의신학 서론의 서문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 도이베르트의 신사유비판의 글 서문에서는 자신의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오해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실재적 입장은 달리하나 실재론적 입장이해가 합리성의 재고를 앞선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 중세편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81-82

'빈센트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것들과 우리에게 축적된 사항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원작자로서의 교만함보다는 해설자로서 충실함을 보이겠다”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성경은 참된 교리의 근본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확정할 수 있도록 수단으로써 전통을 주셨다.

더욱이 카돌릭교회 안에서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모든 곳에서 믿어지는 사항을 우리도 계속 주장함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빈센트는 이단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 감독이 예정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이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가톨릭교회의신앙이 결코 아닌 형식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에 있어서 빈센트라는 자의 어거스틴을 반론하는 가운데서 전통을 말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분명한 반론적 입장이 없어왔다고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역사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되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지론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위개적 실재론에서는 그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반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거스틴적 입장에서도 변론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그 때 당시 신학사상가들이 고민했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7) 전광식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사랑광기' 대한철학회논문집 63권
에로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항상 상기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그러한 기억되어진 곳을 사모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적 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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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23, 2004

실재론에 대한 객관성 시비의 답변으로..


comments: 인드라라는 닉네임의 분이 저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말하는 실제론을 거론할때에 그것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 따른 답변으로 준비한 글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대화되어진 것을 그대로 살려서 글을 옮겼습니다.

본문..

인드라님이 지적한 객관에 대한 시비, 특히 피해의식에 대한 객관성 시비에 답변으로..


객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객관적이라는 판단함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기본적 입장이 되어지며.. 또한 이 객관은 사태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공감대로 형성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관념의 실제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실재라는 개념의 논쟁은 많이 있어왔고 또한 그러한 실재논쟁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문화의 역사적으로, 기독교적인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많았고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실재하지 않는 것에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에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신론자들이나 안티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회의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실제 즉 객관적 사태분석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뿐 진정으로 실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태어 어렵게 묘사사기 보다는 쉽게말하고 표현함이 실제적으로 납득 정당함에 따른 진리에 가깝다는 방법론에 입각한 사람은 좀 장황한 판단과 표현이라고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싫어하며 그러한 것이 그 사람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의 표현하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화라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의 차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기반적 인식을 찾음이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되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인식의 근원이 이미 판단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자의적이나마 변명적 타당성을 세우고 그러한 당위성을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장황한 해석이나 그러한 것을 위한 일변도를 의도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에 실제적인 가운데서 간결하든 장황하든 그 형태의 모습과는 달리 타당성이 있는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문제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인드라님의 반론에 피해의식이라고 함을 제가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의 다양성이라는 현상적 이해와 그에 따른 실제의 분별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이단들을 비롯하여서 사회에 악을 끼치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실제분별이 없는 가운데서 의미를 상실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전반의 정체성이라고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석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똑같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어지는 것은 인드라님의 직접적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그렇지 않든 그 상관성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방향성에서 인드라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까지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현대 비평신학이라고 함과 철학들의 피해의식적인 표현의 정체성이 가능한 것에서 비롯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이미 철학과 신학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인데 그러한 학문적 경향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지지 않은 혐오하시는 분들의 입장에 의도하든 하지 못하든 인식강요가 되어진 가운데 승인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각주1)과 ‘영미철학적 신학’에서의 견해 차이는 생각 외로 아주 심합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것에 있어서 상관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시 모두 비판되어질 수 있는 "추상적 실재의 상관성"각주3)에 따른 연민으로 이미 이성적 상식적인 판단에서도 지나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눈치를 보면서도 안토니 씨슬튼은 자신의 합리성을 펼치고 있는데’각주4) 이는 그의 실재의식의 비판이라고 함에 거부할 수 없음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이러한 판단들이라고 함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하여서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추상적 실제라고 하는 것 보편성과 추상적 실재의 특수성에 대하여서 실제를 통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그 타당성에서 의미를 상실했음에 대하여서 그러한 사람들의 입장이 ‘환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각주5)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안믿어지니깐 상대적이지 않은가 확실성이 어디 있는가 객관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주관적 표현의 객관성에 동의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진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드라님에 필요이상의 주관적 인식의 확대로 피해의식을 말하게 되어지는 객관성의 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이미 어떤 종교심리학자들이 자신의 방법이 끝나고 있을 알았던 지점에서 끝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6)각주7)는 언급을 주목한 바 있는데 ..

이것은 추상적 실재와 보편의식으로 인위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말들밖에 안된다는 것은 지각있는 자들의 결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의 객관성이 저의 주관이라고 함의 언급이라고 단정하며 자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객관성에서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일축하려고 하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의도가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보시라고 저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승인이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 인드라님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에 객관성의 근거를 포함해서 글을 남깁니다. 앞으로는 그만한 객관성으로 말한다는 기본적인 신뢰는 대화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주1) 포스터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전에 제기했던 방법이 자체를 서술에 국한시키는지 아니면 자체를 설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려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최근의 독일 신학이 똑같은 문제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빈델반트-리케르트(Windelband-Rickert) 역사학파는 ‘표의기술적인 방법’(method ideographic)을 선정하고, 딜타이-분트(Dilthey-Wundt) 학파는 ‘법칙정립적인 방법’(method nomothetic)을 선정한다. 전자는 사실상 서술적(descriptive)이고 후자는 설명적(explanatory)이다”(George Burnam Foster, The Finality of the Christian Religion, p. 309.)


각주 2) ‘독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은, 역사성(historicality) 또는 역사적 제약성(historical conditionedness)의 양면적 성질, 즉 고대 택스트 및 현대의 해석자라는 양측의 역사적 제약성을 진지하게 취급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영국 및 미국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신약 성서 해석자에게 주변적 관심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단지 이론적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상식의 차원에서 그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가 Dilthey나 Heidegger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형성되지 않았을, 엉뚱한 지성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42.)


각주3) 셋째, 또다른 이유로 인하여 철학적 기술이 문제시 된다. 해석학적 과제의 기술을 용의하게 하는 것에 덧붙여, 철학적 범주들은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할 때에도 역시 유용하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3.)

본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독일 신학의 해석학적 실제와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적 영향력으로 실체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함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해석적 실제규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독일 신학과 영미 신학의 차이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반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각주4) Cornelius Van Til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주의 학파와 같은 어떤 특정학파는, 명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들로부터 유래하는 통찰력들을 이용하는 어떠한 시도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8.)

안토니 시쓸튼이 의식하고 있는 반틸의 책은 반틸의 변증학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안토니 그는 각주에서 반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반틸의 입장에 대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제한다고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실제라는 것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안토니 시쓸튼이 비판하고 있는 Dilthey와 같은 자들로써의 헤겔 철학적인 영향력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변증적 입장 대화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적인 입장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은 궁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표의기술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이도 역시 그 범주적 실체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각주5) 따라서 현대 종교 심리학파의 방법 전체는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동일한 궁극성의 승인된 가정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우연의 우주로부터 생긴 인간이 자기 설명적(self-explanatory)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방법은 전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에 직면한 때조차 성공적이었다는 프랏트의 진술들을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성취한 놀라운 업적들에 대해 자유롭고 유창하게 말할 때, 그리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조사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개념에 찬성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가 전체의 비전을 볼 수 있도록 정상에 오르지 못한 내적인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우선 아주 잘 느끼며 산을 오를 준비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환자를 생각한다.


각주6)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69.


각주7) “심각하게 복잡한 과정을 정의 내리기 위한 탐구는 항상 그와 같이 시험적인 융통성이 있는 진술로 끝난다. 그것은 경험의 산 실새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며, 그것을 서술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또 그것의 특성들과 단계들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얻으려는 신중한 노력으로 끝난다”
(Edward Scribner Ames, The Psychology of Religious Experience, p. 13.)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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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6, 2004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를 이해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성경본문만 다루는 것이 좋은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하는 입장을 취함을 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이단으로 알려진 '새교회'라는 입장의 사람들과 '말씀보존학회'의 입장이 되어짐을 봅니다. 이들의 표면적인 경건이라고 함 때로는 신실함이 왜곡되어진 형태를 취하게 되어지는 가운데 이단이라고 판정받음의 옳음에 대하여서 한마디 할까 합니다.


잘못된 성경맹목주의를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1,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이해에 대하여..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각주1.) 그러나 그러한 것을 정황적 배경에서 이해하지 않고 그 문구적인 입장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잘못된 것임을 말해둡니다.

이것은 성경의 실존에 대하여서는 눈을 감고 그 실존의 이해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경본문을 다루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잘못됨의 자리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중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경의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의 그 실존적 이해는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실존적 형상이라고 함과 실존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계시임으로 성경의 자증을 말할 수 있고 그 자증의 계시의 성격은 그 말씀으로서 사람을 창조하심과 같이 기록자들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장하여서 자기를 나타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기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칼빈이외에 그러한 것에 분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하여도 그러한 인식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기독교 유신론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이,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의 정당함을 따른 실재적인 보편적 인식에서 해석함이, 성경본문해석의 문맥적 해석이라고 함보다도 더 합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맥적 해석을 하는 판단에 실재적인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둡니다.

그렇기에 성경해석에 있어서 본문의 문장의 조합식으로 말하는 그러한 해석이라고 함이 이미 그 자체적 증거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오해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

이처럼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에 대하여서 문구만 떼어내어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잘못된 성경해석의 원리가 나타난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현대주의 신학적 입장과 원하지않는 조우를 경험해야만 하는 정황에서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새교회에 있어서 주된 신학자로서 주장하고 있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각주 2.)에 대하여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판단받고 있고 현대의 과정신학적 입장과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진화론적 개념에서 자유할 수 없는 자리에 서는 것도 강요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정황적인 측면에서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에서 파생되어진 것이라는 자체적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고 그 문구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현상학에서 '판단중지'(epoch)라는 판단과 의도하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정황적인 측면에서도 실재적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함에 대한 판단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스베덴보리의 입장이 과학철학자로 인식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과학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인식은 그 종말론적 인식은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계시사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는데 우선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보편성이라고 함이 이미 비판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과학이라고 함을 말하는 절대시간론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시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해둡니다.(각주 3.)





각주1.) 스콜라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항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투구호가 된 개신교의 성경해석 원리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와 함께 후대 성경신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후대 사람들이 이해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성경신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게하르트 하젤,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김정우역 엠마오, pp. 21-22)
(게하르트 하젤, 신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권성수역 엠마오, 14p.)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판단되어지는 실제의식 안에서의 성경해석이라고 함의 성경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개념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와 증거의 발생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문자로써 표현되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문자적 개념에서는 이와 같은 판단을 받으면서도 자존적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기 때문에 앞서 말한 판단을 받지 않는 것도 부언합니다.

종교개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을 한 칼빈의 사상이라고 함이 바르게 전달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말이 성경 맹목주의적 개념의 분별없는 실제를 초래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각주 2.) 예를 들면, 영적 세계에 대한 스베이던 보리(Swedenborg)의 사상들을 도그마라는 칭호를 붙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확하게도 도그마는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관할하는 권위에 의해서 즉 당면한 사건에 있어서 국가와 제휴한 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고백된 신조, 무오한 교회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절대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서 공인되어 의무화된 신조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도그마의 권위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그 이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의 선언이나 확정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교회의 무오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에 있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몇 번이고 재삼 그 입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즉 모든 신학적 도그마들이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이다(principium, in quod omnia dogmata theologica resolvuntur, est: Deus dixit).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학 1. 교의학 용어와 개념 17p)


각주 3.)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을 언급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간의 실재라고 함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말해둡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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