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3월 19, 2005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며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면서도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함에 대하여' 명제적 논리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언급에 대한 사실이 동의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여지를 둘 뿐으로 보여진다.

1. 게할더스 보스의 '이미'와 '아직'에 대하여서

먼저, 게할더스 보스가 주장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1) 좀더 부언적으로 설명한다면, 먼저 'G.보스의 시간관'(각주2)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한 다음에 언급됨이 옳다고 하겠다 이는 분명 시간관에 대한 보편성 이해에 차이에서 합리성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은 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 아니다 '보스'는 그러한 논쟁적인 것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단적으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차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고 함의 말을 같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종말과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그 상관성에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종말을 이루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미래적으로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가운데서는 시간의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는 모순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보편성을 말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함의 피조물적 한정적 의미와 그 규정적 한계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역사라고 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앞과 뒤를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거나 또는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구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바르게 찾아 적용되어진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판단은 시간에 대한 인식적 관점이 먼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2.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견해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

먼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표현은 옳지만 그 판단함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했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고 그가 가르친 내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역사적이라는 개념에서 그냥 예수님을 전제하고 그의 활동적 시기라고 함만 고려할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그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상적 정당함을 의지하는 주관적 시간관의 실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역사라는 개념에서 말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르고 있을뿐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의 시간관에 따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되어질 수 있다.

'지연된 종말론'이라는 것은 일반 역사적 시간관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진 종말론이라는 전제를 말하고 있다 즉 우주적 시간이라고함이 구속적 시간의 당위성에서부터 일반적 시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 시간에서 구속적 시간의 형태에 대한 현상적 개연적 시간관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인식의 불연속성이라는 판단밖에 세울 수 없으며 그 모순이라고 함의 문제라고 함의 인식의 사실을 말하기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자체에서 주목한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지연된 종말론적 입장에서 'already but not yet'문제제기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데, 이는 신학관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다.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았다는 측면이 '이미'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죄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고(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지 않았음), 택함받은 모든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의 관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명제 안에 두 관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미의 관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성경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아직의 의미는 역사적 성취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와 '아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 돛?역사적 성취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택한 자의 구원의 출발점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만 말해야 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다면 '아직'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의 만유적 인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안에서 만물이 함께 죽고 만물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개념이 들어올 개연성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와 아직의 두 개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완성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 求?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4장 종말론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의 요소인 '성전', '제사장', '육적 이스라엘'이 남아 있다. 이것이 지연된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한 이레의 기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해 70이레의 언약을 정하신다. 그중 69 이레동안 성전이 중건되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한 이레 후에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파괴된다.

왜 하나님은 한 이레 동안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 가운데 기독인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이스라엘과 성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심판을 미룰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중에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이미의 관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의 시기, 한 이레 동안 옛 시대(율법)을 묵과하시며 심판을 미루시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한 이래가 끝나자, AD 70년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구약 시대 소돔이 멸망하듯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에서 '아직'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취된다는 관점보다 AD 70년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와 아직" 측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구약 율법과의 관계(특히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의 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옳다.

요한계시록 마저 '아직'이라는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노래한다면, 요한계시록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반증한다.
!




각주1)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89-94.
'그러므로 목회 실제에서는 칭의에 대한 몇몇 안 되는 언급들에서 도출되는 논의는 바울이 변개(變改,conversion) 이후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의 칭의 선언의 범주에서 제외하였을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늘(Wernle)의 견해가 옳고 칭의가 순전히 회고적인 것이라면 *** 칭의와 최후 심판 간의 실제적인 연관성이 끊어지리라는 것은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8:33,34("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의 언어는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선언보다 더 절대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만큼은 절대적이다-보역) 사실 이는 현재 과거 미래의 범주를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사실은 예지(prognosis)와 예정(predestination) 사실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만일 그 범위가 여기 열거된 다른 개념들보다 그 무제한성과 무조건성이 덜 하다면, 칭의는 29절의 '구원의 울타리'로부터 빠졌을 것이다. 칭의는 '디카이오시스 조에스'( , 생명의 칭의)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endless life)이고, 성도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롬 5:18-21)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은, 만일 신적 구원 과정의 중심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도에 의하여 강하게 확언되고 있다.*'
*** 위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칭의가 회고적(retrospective)이라 함은 칭의가 칭의 순간 이전의 죄에 대해서만 발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죄는 칭의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역주)
* 이는 구원의 중심적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절대성을 가지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함의를 가진다.(역주)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93-94. 본문 인용)


각주2)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13-70. 제 1장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참고,

보스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이라는 '바울 신학'은 제 1장 바울 종말론의 구조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시간의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현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시간적 보편성에 따른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관관계를 먼저 구원의 요소로써의 칭의라는 개념으로 그 상관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2장이 되어진다.

'구약의 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antithetical)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울의 기독교가 가진 모든 근본적 특성을 가진 그 전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는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지고 연관된 것(circle as correlated and eschatologcally-complexioned parts)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그저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이를 자세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시도의 종말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신학을 전체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계속해서 점차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념적 반전(a conceptual retroversion)을 통하여 마지막이 진리를 드러내는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26-27. 본문 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다른 저서인 성경신학에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말할 때에 초자연적인 것과 사람들의 사고적 입장을 통하는 그러한 형태로서의 성경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있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의 계시적 이해라고 함과 증거와 같은 인식적 작용을 통하여서 성경이 기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해와 달이 년한을 이루는 보편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해아래 되어지는 것들의 판단의 주권이라고 함도 실제적이며 한정적이면서도 무한한 능력이 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신학적 개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러한 것의 형태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인식의 방향을 고려할 때에 구속적인 성경적 입장에서의 자연신학을 말할 수 있어도 자연신학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성경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야 한다.

자연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보편성 논쟁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지고 그것의 논쟁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비롯하여 여러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에서의 처음 첫 장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라는 측면을 시간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스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이라고 함과 공간이라고 함 즉 세대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전부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을 그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스의 한역 '바울의 종말론'을 번역하신 이승구 박사님은 보스의 실재론을 같이하지 않는 가운데서 본문의 잘못이해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 26) 즉 각주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이분적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구속하심의 시간관이라고 함의 차이를 보스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해의 주관성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시간이해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서의 주관이 아닌 플라토닉 신관을 비롯해서 임의적 당위성에 따른 주관적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때에, 시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써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시간이라고 함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국한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임의적 주관에 따른 시간관에 반대하여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겠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에서의 계시라는 것만 인식하겠다는 측면의 안티적 극단적 보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역할적인 인물을 들 수 있다면 랑케와 같은 신학자이다 그는 시간관이라고 함을 일반 역사적 개념의 입장에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증이라고 함을 판단함에 많은 분별을 요구하게 된다고 하겠다.

보스의 언급에서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세대의 이해라고 함이 어떻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에 따른 사실 규정이라고 함이 역사적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규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로써의 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함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이미'와 '아직'을 말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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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3월 14, 2005

잘못된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각주2)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각주3)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각주 2번 보스의 견해 해석 참고)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은 세 사람 사이에 있는 통일성으로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언뜻 보기에 니케아의 결정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즉 니싸의 그레고리 같은 인물은 그의 철학적 대전제에 따라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이의 공통성은 세 사람 각각 개인들이 지닌 개체성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본문 인용)

해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서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것으로 역사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비평가 하르낙의 입장이나 또는 화이트헤드 그의 저서인 이성의 기능에서 그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플라토닉이라고 할 때에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르낙의 입장에서는 삼위의 동일 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이라는 언급을 말하고자 하였고 화이트헤드의 경우에서는 플라토닉 이성과 다른 생물학적 이성이라고 함의 다른 보편적 이성을 말하기도 하며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알아간다는 헤겔적 진화론적 사관에 따른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삼위일체로 믿지 아니하고 플라토닉 삼위일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그러나 피크는 궁켈이나 그레스만이 제시한 방법론을 따르는 여러 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많은 연구들이 가지는 중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궁켈과 그레스만은 오경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보다 더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전승의 발달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으며, 가능한 한 그 전승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연구하면서, 히브리시(詩)와 예전(cultic)과의 관계를 조사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가 지그문트 모빙켈(Sigmund Mowinckel)이다. 그는 대단히 명헉한 구약 학자였으며, 시편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 저서를 통해 여러 가지 장르의 문학 양식을 분석하고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초로해서 이 양식들이 포로기 이전에 있었던 성소의 예전과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궁켈이 히브리 종교 문학의 개인적인 성격에 큰 관심을 두었던 반면에 모빙켈은 히브리 종교문학을, 사회를 움직여 가는 추진력의 전개와 더욱 끈질기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본문인용)

양식비평이라고 할 때에 문학비평이라고 함과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인식과 정황이라고 함에 기준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궁켈과 더 나아가서 그레스만은 그것의 역사적인 것으로 적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빙켈의 입장도 그러한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궁켈이라고 하는 자의 중심은 '개인적인 성격이라는 인식'으로써의 개체적인 보편을 말하고 있고 모빙켈은 그러한 개인들의 모임적 인식으로 인한 정황적 세력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양식비평에 있어서 보편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서 철학적 보편으로써의 '하나'와 '여럿'이라는 입장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추구하는 아르케 논쟁에서 그 보편적 실재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있어서 자체적 당위성은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인 당위성의 요구성이라는 선상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비평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허구적 실제로써의 인식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식의 산물로써의 본문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양식비평의 학문적방향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데 이는 성경의 상대성이라고 함의 모습을 불완전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어지면서도 온전하고 절대적인 재가에 따른 완전성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으로써의 성경연구라는 합목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절대자로써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때에 그 합리성의 완성적 개념에서 그 성경의 실체와 원본을 찾지 않고 그 자체의 '완전영감론'을 받으며 그 비합리적인 연속성에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라고 함의 바람직한 성경연구의 합목적성의 방향과 실체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비평학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 자체에서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원본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각주2)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롤록(Robert Rollock)은 1583-1599년까지 에딘버러 대학의 학장이었다. 그의 신학 강의는 1597년 [Treatise on Effectual Calling]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Shorter Catechism concerning the way in Which God from the Beginning Revealed Both Covenants to the Human Race]이다. 1603년 런던에서 영어판이 나타났다. 롤록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언약에 속하였다는 사상에서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본문인용)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사상이라고 함은 상당히 보편을 말하는 가운데서 많이 알려진 개혁 신학적 입장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는 듯한 언급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 안에서 언약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형식을 갖추면서도, 분명 하나님 중심의 형태를 말하면서도 실재에 입각한 실제로는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 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로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본문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로 읽는 법 '독도법'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이 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면서도 이 해석이 상대적으로 용인되어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에는 이 해석은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다른 독도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해석 가능성에만 머물고 있지 그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자신 스스로 취하시는 절대 정당함과 절대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으로만의 가능성이 있는 해석적 당위성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 안에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을 읽음이 더욱 합리성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따라서 여러 독도법의 해석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라는 형식적인 가능성의 한 해석뿐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해석적 하나님의 이름의 해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그 합리성은 있지만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은 빠져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 인식의 합당한 순서가 되어진다. 따라서 언약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실존적 정당함이 되어진 가운데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자존적 삼위하나님의 일체적 증거에서 시작하여서 언약의 실존을 말하여야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참고 칼빈이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요에서 언급한 내용을 소개한다.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주3)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비판- 삼인 1996
김경재 :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교(Utrecht Univ)에서 '그리스도와 동아시아 종교의 만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정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원장. 해석학과 종교신학, 폴틸리히 신학연구, 김재준 평전, 영과 진리 안에서.
폴틸리히의 신학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신론에 해당되어지는 비존재(Non-Being)라는 것에서는 그 합리성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인 플라토닉적 신관에 따른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플라토닉 삼위라는 개념이 이미 그 실재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무제약자와 같은 그러한 철학적 해석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에 동의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플라토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과 같이 전제로 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사실들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그 비판의 합리성을 그의 신관에서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도 먼저 기정된 사실임을 말해둔다.

목차 개요..
1.유일신 신앙에 대한 오해들
유일신 신앙은 하나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신들 중 최고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셈족계 종교들의 문명신 신앙이 아니다.
유일신은 성경적 신앙의 독점물이 아니다.
2.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체험
야훼라는 신이름의 유일신 신앙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유대신비주의 카발레에 나타나는 유일신신앙
3.그리스도교의 유일신신앙과 삼위일체론
신약성경에는 야훼라는 신 이름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유일신 신앙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의 고백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4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5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
6종교 다원주의와 해석학적이론들
7에필로그 종파적 유일 신앙에서 우주적생명의 광장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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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요일, 3월 05, 2005

플라톤적 삼위일체와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



comments:
역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에서 현대의 동일철학과 신플라톤적 실재론으로 제한되어지는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참된 삼위일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옳음을 근거로 제시한 글입니다.

다음카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구원론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화를 말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신화의 창시자라는 개념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플라톤적 실재론에 입각한 삼위일체에 근거한 합리성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비판과 책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글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위적차원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많은 이단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것에 있어서 제고찰하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함과 증거함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음카페에 기록했던 글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의 '신화' 언급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비판에 있어서..

글을 씀에 앞서서..

아타나시우스는 신화의 창시자임에 대한 것을 지적함으로 논란이 있는 가운데 그 신화 언급이라고 하는 것이 신론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의 당위성을 느끼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기아 신학에 대한 고찰에서 그 신화 이해에 대한 것을 후스토 L. 곤잘레스(각주1) 견해를 따라서 보다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글을 준비했습니다.


1.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신화(Deification)(각주2)'또는 '신격화(divinization)(각주3)'라는 말이 그 상관성을 전제로 하는 말인가 하는 것과 단적으로 어느 하나만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이해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게 되었다면(각주4) 그것은 삼위를 배제한 구원론에 대한 것을 말한 것으로써의 신화를 말한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은 신론적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며 하나님의 강생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나님께 나오는 성화의 개념이 있게 되어지며 이것은 플라톤적 개념입니다. 즉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취하고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관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 오리겐의 입장이라는 사변적 입장을 아타나시우스가 경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방향적 입장과 그 노력이라고 함을 그러한 실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각주5)

이러한 노력들이 캅바도기아 교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 삼위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그들을 하르낙의 판단(각주6)과 같은 유명론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각주7)


2. 비판함에 있어서..

여기에 대하여서 저는 '삼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인 입장을 말씀하심에 비판함'과 '곤잘레스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변호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 실천적 입장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아타나시우스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곤잘레스와 같은 실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라는 에로스가 상기설에 따라서 회귀적 본능이 있음에 대한 것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상승운동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것을 영혼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 8) 이것은 플라톤의 종교적 실재를 전제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말하게 되어질 때에 역사적으로 캅바도기아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신플라톤적 실재론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심각한 잘못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9)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플라톤의 실재의 판단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이데아의 한 구석에 있게 되어지는 한정된 신을 화이트헤드는 잘못되게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본질을 말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그러한 하르낙과 같이 그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에서 비로소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실천적인 구원론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축소하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가 유일신과 그 가운데서 구원론을 말한 것이라고 함을 그러한가운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격하하여 구원론적 입장의 개념의 창시자라는 언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에서의 그 존재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의 표현의 합리성의 불연속성 속에서도 삼위하나님을 표현하실 수 있음과 그렇게 행하심의 신실하심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는 비로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의 노력이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실재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실재론에서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과 이것은 삼위하나님을 해석하는 곤잘레스를 비롯하여 신론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어 임의적 행함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합목적적 신론을 배제한 구원론을 어색하게 내놓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라는 개념도 결국은 신의 본질을 도달 할 수 없는 유사본질을 동일 본질로써 말하고자 하는 노력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그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신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함으로 글을 맺습니다.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큐바출신/감리교목사로서
예일(Yale)대학대학원 졸업(M.A.Ph.D.)
에모리(Emory)대학교 교수(8년간)
W.C.C. Faith and Order 위원
현재 International Theological Center 교수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교수

감리교 목사님이시고 또한 세계 에큐메니칼 위원으로써 그 사상적 실재는 개인적으로 달리합니다. 그러나 실재에 입각한 실제론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합리성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고 할 때에 저자 목사님의 합리성의 객관성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제 3세계 신학자로써 그의 이 주저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어진 가운데서 남미과 영어권에서 택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 롤란트 베인톤이 언급한 것과 같이 영어와 이탈리어와 독일어와 기타 언어에 능숙하신 분으로써 사상의 전반적인 측면을 다룸에 있어서 그를 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욱 곤잘레스는 그 사상을 전계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상의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함이 그의 저서의 장점으로 역자들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과 실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 입장에서 비판적 입장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주목하신다면 저의 앞서 판단하고 책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당위성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2)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문맥상의 결함에서 나온 오해인듯 합니다.

번호: 6135 글쓴이: 인권의 왕도
조회: 29 날짜: 2005/02/24 22:12

(중략..)

먼저 신화(Deification) 교리란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고, 믿었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는 것을 말 합니다.


교부들로는 아타나시우스와 클레멘트(150-215), 성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Hippolytus of Rome(3c), Basil(330-379) 등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격(Godhead/경배의 대상으로서)에서는 아니며,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베드로 후서 1:4절 참조)로 설명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후절 생략) ..



각주3)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351-352.

'바로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이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분만이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는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일종의 신격화(神格化:divinization: θεοποιησι(데오포이에시스))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와 유사한 존재를 수여해 주실 수 있으므로 신격화에 있어서도 구세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pp. 351-352.)


각주4)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모든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근본 원리로서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는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면 판단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원리는 근본적으로 두개인데, 즉 유일신관과 기독교 구원론이었다.(p.347.)'

각주5)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그의 신학은 내용적으로 오리겐의 내용과 아주 가까운 점이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그의 관심사는 사색적이고 학문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출신 신학자들이 추종했던 방법론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그는 이론적 문제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실천적인 주제들만 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교리적 주제들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뜻이다.'(p.347.)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1.

기독교 사상사를 영ㄴ구하는 일젼의 역사가들은 “초기 니케아 사상”과 “후기 니케아 사상”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바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 가운데 하르낙(Harnack)은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앙형식은 유사본질-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 아니고 비슷한 본질이라고 보는 이론-주장을 니케아 신앙의 형태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르낙은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이론은 “동일본질”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 381.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3.

'이러한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p. 383.


각주8)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 347-348

‘이방인에 반대해서’를 살펴보면, 고대 변증신학자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교들의 다신론을 공격한 다음,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들이 무엇인지 토론한다. 원리적으로 이 수단들은 둘이 있는데, 영혼과 자연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그분(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며, 우리 자신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 속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만 몇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중략)...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말씀(Word)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죄가 그 거울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사전에 말끔히 닦지 않으면 거기에 비추이는 말씀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표현은 오리겐 이래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흔하게 유행했던 플라톤적인 주제이다.(pp. 347-348.)


각주9) 화이트헤드 '이성의 기능' 정연홍 역 이문출판사

여기서 화이트 헤드는 신을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이성(Geist)을 '플라토닉 이성'과 '율리시스 이성' 또는 '생물학적 이성'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인데 결국은 플라톤적 실재에 입각해서 당위성을 받는 그러한 신으로 내제적 이성을 말한다고 할 때에 즉 헤겔의 자연이성의 자기를 알아가는 가운데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것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영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르낙(Harnack)도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동일 본질'을 말할 때에 '유사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동일본질이라는 귀결적 판단이 그 실제적 즉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견해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도달 할 수있는가에 대하여서 두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철학이란 말에 있어서, 지혜를 사랑하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헬라어 '필레인'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덕이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함으로써 고르기아스적인 회의론적 입장과 달리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지식이라고 함이 본성에 이를 수 없다는 개념에서 그 실천적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상승이라고 할 때에 동일본질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유사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하지 못하는 잘못된 플라톤적 실재론이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적 편협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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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2월 14, 2005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에서 나타나는 율법과정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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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앙에 대한 그 아름다운 모범들을 맹목적으로 고수한다는 것은 전통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보수라는 개념,그것이 맹목적 사수라는 개념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면, 그것은 배척되어지는 것이 옳다는 것입니다.
* 물론 분별하여서 주 안에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지만 강요받게 되어지는 것은 동일한 현상적인 판단에서 있을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을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 실재론의 부제의 신학적 입장에서는 최선이 되어질 수도 있지만 그 최선은 어그러진 것으로 말할수 있음에 자성의 시간이 되어야 할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신앙의 전통이해에 대하여서 칼빈이 신앙의 전통을 어떻게 이해했는가 하는 것에서 기본적인 입장을 밝혔습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과 같은 일반적인 것과 우리의 일상적인 것의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생각해보는 것이 귀할 것 같아서 글을 남겨봅니다.

아름다운 전통과 율법화 과정..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우리 인생이 주의 뜻하심을 나타낼 때에는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고 참으로 사람들이 보기에 너무나 아름답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사실입니다. 그래서 그 아름다움이라고 하는 것을 지속하고자 하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문제는 그러한 것의 지속적 행위라고 하는 것에 주님께서 주시는 믿음을 획일화하게 되어지는 경향이 나타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행위에 대한 해석의 일반적인 획일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율법적인 성격으로 나타나며 그것은 율법화 되어지는 경향과 실제를 초래하게된다고 하겠습니다.

역사적인 한 예로서 언급하게 되어진다면 여러가지 인식의 획일적인 판단을 가능하게 하였던 것으로써 존재론에 대한 이해의 획일적 개념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각주1)

우리의 믿음의 고백들이 종들의 고백인데 그러한 것을 인위적인 것으로써 고수하고자 하는 것에 있어서는 진정한 전통의 인식과 사실들을 이어갈 수 없다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전통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이 획일화 되어지는 가운데서 종의 고백이 어떤 성문법이 아니라고 하여도 불문법적인 개념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으며 인식의 변화를 가져온다고 하여도 그것은 그러한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경향도 말할 수 있겠습니다.(각주2)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존경과 이해가 합당한 정도의 공존되어진 가운데서 진실로 바르게 이어갈 수 있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맹목적인 존경은 그 아름다운 신앙을 율법적 개념으로 어그러지게 할 뿐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는 것이 아름다운 신앙과 전통을 율법이 아닌 진정한 사실로 이어가며 또한 주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귀한 살아있는 재가가 있는 것으로 나타낼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함이 하나의 지혜로 자리매김 되어질 수 있을 것으로 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중세편 II,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198-210p.12세기 문예부흥 부분에서..

곤잘레스는 안셀름의 저서를 이야기 하면서 안셀름의 신학방법론에 대한 간략하게 언급함과 그의 '프로스로기온'에서 신존재에 대한 언급을 합리적으로 말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고(201p.) 여기서 존재론을 말할 수 있음을 언급하고 있습니다.(201p.) 또한 그곳에서 그는 어려운 표현을 넘어서기 위해서 성경에 대한 기술적 표현보다도 합리적인 개념에서 말하기를 원했고 그러한 가운데서 존재론적 실제론이라고 함이 출발하게 되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막스 밀러는 그의 '철학소사전'(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이문출판사)에서 기초존재론을 말하면서 이것이 하이데거의 존재론에 나온다고 함을 시사하고 있다.(290~295p 참고) 또한 이러한 하이데거에 대한 평가는 아일랜드 출신의 철학교수인 리챠드 커니 교수(현대 유럽철학의 동향, 마틴하이데거에 대한 언급중에서..)에게서 찾아 볼 수 있는데 그가 카돌릭의 신학적 영향을 받았다는 것의 언급은 이처럼 존재론적 실재론에 대한 영향으로 추론이 가능하다고 하겠다.


이처럼 이러한 존재론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사람들은 식상해 하면서 인식론적인 존재론적 입장에서 상대적으로 부정하고자 하는 노력들을 볼 수 있다 (실제로 막스 밀러의 입장에서는 하이데거의 기초존재론을 말함에 있어서 중세적 존재론의 기본이라고 함을 전제로 한 그것을 비판한 입장임을 말하고 있다. 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철학 소사전 이문출판사290~295p 참고)

이러한 것을 말하는 것은 사실 쉽게 말한다는 개념의 적용적 개념을 생각하다가 바르게 합당하게 증거한다는 개념을 마음에 두지 못함에 대한 판단과 또한 중세적인 잘못된 존재론적 실제론에 입각한 것이 존재론의 본래적인 기초인 것과 같이 인식이 굳어져서 합리성의 방향성과 인식적 사실들을 잘못되게 이끌었다. 그러한 중세적 존재론에 대한 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논쟁이 있어왔고 인식의 잘못된 사고의 전통은 존재론에 대한 생각을 그렇게 생각하도록 하는 잘못된 기정사실로 굳어지게 하였고 이것은 인식의 율법화 되었던 것이다

그러한 것은 칼빈이 전통을 이해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획일적 고백을 강요받음에 반대하였던 것도 그러한 것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다.

진정으로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과 그러한 가운데서 자신의 믿음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합당하게 고백되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고 자신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 것이 앞서 고백되어진 것과 동일하게 고백되어질 수 있다는 점에서 전통을 말하고 이어가야 함이 옳은 것이며 아름다운 신앙이 율법화 되어지는 것을 벗어나 더욱 풍성한 주의 증거가 되도록 힘써야 함이 옳은 것이라고 보아야 할 것이다.


각주2) 막스 뮐러,알로이스 할더, 강성휘 철학소사전 이문출판사 290~295p.

여기서는 막스 뮐러와 알로이스 할더는 하이데거가 존재와 존재론적 입장의 차이를 말하면서 존재와 존재론에 대한 언어적 차이를 말하는 가운데 존재의 소외라는 개념을 주장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그 비판으로 실제적인 범주를 벗어났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상대적인 차이와 반박이라고 하는 것은 그 안티적 개념에서의 상관성을 항상 말할 수 있고 주관적이라도 하더라도 강조점의 이해와 납득에 있어서는 동일한 범주를 형성할 수 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중요한 것은 상대적이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인식의 불연속적 사상을 말할 수 있는 실제론에 달려진 것이다.

그러면서도 한가지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가해성을 말하는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에서는 그러한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론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것이 전통이해에 있어서 화석화적인 율법적 경향을 아주 정교하게 만들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고 말았다.

그리고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덕이라는 개념의 용인으로 인한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신학적 불가해성,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절대의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으로써의 그것은 상대적인 연속성의 사실의 형식을 나타내면서도 실제적인 불연속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짐에 따라서 인식의 범주의 상관성에 따른 불가지론적 자리에서 벗어나며 실제를 말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한 사상적 입장은 종교개혁자로서의 칼빈에서 이루어져서 오늘날 게할더스 보스의 신학적 입장으로 흐른다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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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1월 27, 2005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리의 삶 속에서 여러 가지 개념이 있기 마련이라고 함은 인지상정적인 입장에서도 충분히 인정되어질 수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그러한 개념들이 서로 상관성을 맺고 그 차이성에서 또한 인식의 발상이 달라지는 경우가 있다고 또한 할 수 있다.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사실을 말하는 개념(각주1)에서 사실 이해가 차이가 나는데 그러한 경우를 모두 말하지 않는다고 하여도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재고할 필요가 우선적이라는 생각으로 기술한다.



1. 이해와 존경에 대하여서

우선 상관성을 생각할 때에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은 같이 나타날 수 있지만 항상 인식적인 차원에서 같이 나타나지 않는다.

같이 나타나게 되어지는 경우를 먼저 보면 상당히 이상(理想)적인 경우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 마음을 같이 하는 가운데서 동질성을 가질 수 있는 개념의 확보와 인식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물론 그러한 인식이 항상 동일한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동질성에서 그 인식의 흐름의 한 동일체를 형성할 수 있을 것이다.

다르게 나타날 경우에는 두 가지로 주목되어질 수 있다.

먼저 이해는 하는데 존경하지 않는 경우, 이것은 합리성의 차이라고 함을 확인할 수 있고 때를 따라서는 방법론적인 입장에서라는 한정적인 입장의 동일한 표현이 가능한 것이며 그 표현적 실재와 그에 따른 실제론에 따른 차이에서 그 인식의 방향성을 같이 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존경을 하는데 이해하지 못하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경우에서는 형식적인 측면에서 그 인식의 동질성을 같이 할 수 있고 또한 어떤 임의성이 있는 가운데서 맹목적인 인식의 동질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당위성에서 자유롭지 못하게 되는 것이며 실제적으로는 추종적 인식의 흐름의 자리에 서지 않는 경향이 있다. 이러한 것은 사변과 신비가 만나는 곳이나 신비에 대한 맹목적 입장이 있게 된다고 할 수 있다.(각주2)

그리고 그 다르게 나타난다고 할 때에 그 두 가지의 정도면에서 차이가 있게 되어지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사실 첫 번째의 말의 부언적인 언급이 되어질 것이다. 그러면서도 이러한 두 가지의 정도면에 따른 것은 어느 쪽의 인식의 강조가 되어지는가 하는 것이 앞서 언급한 두 가지 방향성을 가진 인식을 향하여 열려진 것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2. 이해와 존경에 대한 신학적 사조(思潮)적 관점에 대하여..

일반적으로 신비주의적 개념이나 교리적인 개념보다도 다른 것을 경건의 기초로 받아들이고 있는 신학사조가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을 같이 하지 않는 것으로써의 학문과 인식 더 나아가서 믿음의 실체를 주목하게 한다고 하겠다.

이러한 것은 구체적으로 신학적 사조의 철학적 경향이라고 함의 긍정적 또는 부정적 역할에 대한 안티적 인식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있게 되어지는 교회에서의 신지식에 대한 것과 철학에 대한 이분적 생각의 입장과 실제의 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동일성의 인식과 이해의 개념이 그 대립되어진 가운데서 혼돈이 있어왔던 것이다.

한 가지 더 구체적인 언급을 한다고 할 때에는 포이엘바하의 역사에 대한 비평을 의식하여서 칼바르트는 '원역사'를 말한 것으로 코넬리우스 반틸을 언급하고 있는데(각주3) 이러한 것이 바르트의 신학의 실재로써의 '무성'(nothingness)신학을 말하게 되며 그에 안티적 개념이라고 할 수 있는 내제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폴틸리히의 비존재(non-being)의 신학을 주목할 수 있다.(각주4)

사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의 부재로 인하여서 상대적인 측면에서 임의적 사상적 불연속성을 주장하는 가운데 비평학의 합리적 일관성을 피하고자 하는 도피성에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5)

상대적 인식의 불연속성을 주장하고 있는 것은 사실 이해의 연속성을 막으려고 하는 것과 같은 것의 인식이 이해와 같이 할 수 없는 것과 같이 말하고 이것은 맹목적인 것으로 열려지게 만들고 신앙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의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과 같이 생각하게 만드는 잘못을 범하고 말았던 것이다.

칼바르트의 부룬너와의 일반은총에 대한 논의와 반박(Nein!)(각주6)에서 그는 일반은총적 개념에서의 학문적 입장에 대한 비판을 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역사적으로 카롤링 시대에 있었던 철학자 에리게나의 철학적 입장과 같은 것으로 나타난다는 그 유사적 판단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비약의 철학을 말하는 에리게나의 입장의 모습이 바르트의 입장에 나타나고 있는 것이라고 함의 유사적 판단을 할 수 있는 것이다.(각주7)

한편 이성적 입장에서의 이성주의자들은 이해라는 개념의 실존적 입장을 취하여서 신비라는 개념의 납득 당위성을 말할 수 없고 그 신비에서 나타나는 그 계시적 존경이라고 함을 말하지 못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였던 것이며 이러한 것은 비평학에 있어서 기본적인 입장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러한 치우친 신학적 입장의 모습들..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에 대한 실존적 동일한 범주에서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분별할 수 없는 가운데서의 아픔들이라고 하겠다. 사실 역사적으로 이러한 사실에 대한 것을 제대로 말하지 못한 가운데서 교회는 많은 똑똑한 사람들을 잃었다. 물론 그러한 것까지도 하나님의 섭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의 선하심에는 변함이 없지만 종들의 고백에 있어서는 참으로 재고함이 하나님 앞에서 더욱 아름답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으로 본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사실들이 같이 나타남이 하나님 앞에서 보다 합당한 증거가 될 수 있다고 본다. 그렇게 말함은 다니엘서에서는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충만함이 있을 것을 예언하는 것도 있는데 사실 메시아 예수님 안에서 구별되어진 복음의 사실의 실존성이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의 재가가 있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난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적으로 참으로 아픈 기억을 볼 수 있는데, 우리 한국사에 있어서 한국 신학사조의 흐름을 볼 때에 교계의 지도자들의 앞선 세대 메이천, 존 머리, 워필드, 코넬리우스 반틸과 같은 자들이 프린스톤 신학교에서 게할더스 보스(Geehardus Vos)가 하나님의 실재론에 입각한 이해와 존경이라고 함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고 가르쳤는데, 코넬리우스 반틸을 제외한 앞서 언급한 자들이 그를 이해하지 못하고 존경만 하였던 것을 기억하게 된다.(각주8)

그로 인해서 그 당시에 있게 되었던 프린스톤 신학교에 들어온 '스코틀랜드 보편철학'(각주9)이라고 함을 추종하는 가운데서의 신학적 계보를 따를 수 밖에 없었던 것이다. 물론 액면적으로 그러한 것의 추종적 사실을 말하지 못한다고 하여도 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을 말하는 실제론적 입장을 취하지 않을 때에는 상대적인 보편성을 따를 수 밖에 없는 당위성에서 자유로울 수 없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 상대적인 치우침과 분명함을 위한 노력은 이해와 존경의 한 인식적 사실을 선택할 것을 강요받게 되는 자리에 섰던 것으로 말할 수 있다.

이러한 인식에 있어서 합당한 이해와 존경이 같이 나타날 때에 믿음 안에서 참된 분별과 지혜의 은사가 온전해지며 참으로 뱀처럼 지혜롭고 비둘기처럼 순결한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을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의 중심이라는 개념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해석되어지고 이해되어지지 않는 한에 있어서는 하나의 슬로건에 지나지 않을 것이며 이러한 것은 순결함의 사실을 잃어버리고 뱀처럼 지혜로운 것이 아니라 뱀처럼 간교한 자리에 설 수 있는 위험에 노출 되어지는 것이라고 하겠다.

참으로 하나님 앞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 이해와 존경의 실제를 분별하고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가운데서 주님의 보내심에 합당한 종들이 되었으면 하며 그 섬김으로 주님의 영광의 나라를 예비하시는 자리에 서게 되는 은혜가 있으시기를 바란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 서양철학사 최민홍역 집문당 p 102
‘파르메니데스 이후로 오늘에 이르기까지 철학이 그에게서 배운 것은 너무나 지나친 역설인 변화의 불가능성이 아니라, 실체(實體, substance)의 불멸성이었다.

실체라는 말은 그의 직접 후계자들로부터는 나오지 않지만, 그 개념은 그들의 사색중에 나타나 있다. 실체란 변하는 술어(述語)에 대하여 존속하는 주어(主語)로 생각되었다. 실체는 이러한 것들로써 2천년 이상이나 철학과 심리학, 및 신학의 기본적인 개념의 하나로 존속되어 왔다. 이에 대해서는 나중에 많이 언급하려고 한다. 다만 지금은 파르메니데스의 주장을 뚜렷한 사실에 입각하여 공정하게 다루려고 할 경우에 이 실체의 개념이 도입된다는 것만 유의하려고 한다.’(본문인용)

파르메니데스라는 인물은 사람들이 인식되어지는 것에서 실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주장을 한 사람으로 후대에 인식되어지고 평가되어지는 자이다 한마디로 인식론적인 실제라는 개념을 말하게 되어지며 형식논리학에서 가정이 거짓이라고 하여도 결론적 사실이 형성되어질 수 있다는 것의 기반을 구축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여기서 여러 문학과 양식비평의 사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여겨지며 신학의 정체성에 대한 비판과 논란이 되어져왔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인식적 측면에서의 사실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 그 가능성이라고 함이 있다고 하여도 그 가능성이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는가 아니면 일반적인 상대적 정당함을 가진다고 할 때에 절대 자존적 정당함을 가진 신학적 정체성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파르메니데스의 인식론적 기반에서의 사실의 실체는 그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없다

다만 허락되어질 수 있는 인식의 일반적인 정당함에 따른 인식적 사실을 말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 개념의 분명함은 분별되어질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언어의 분명성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을 이해할 수 있으며 또한 러셀은 이러한 결과에 대하여 회의적이라고 함의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는 그 사실을 말함에 항상 여지를 남겨야 한다는 점에서이다. 그러나 신학적 불가해성적인 입장에서는 분별이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오늘 주제로 존경과 이해에 대한 짧은 글을 쓰고자 한다.


각주2)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셀링, 철학적 원리로서의 자아 서광사 서문.
“..이 신비는 구원을 위해서 필수적인 것으로 3가지가 있는데, 삼위일체, 세례, “생명에 이르는 두 개의 성만찬, 즉 주님의 피와 살을 포함하는 것이다

성체 성사는 삼위일체와 세례와 비슷하게, 이성으로 알 수 없고 신앙을 통해서만 알 수 있는 대상이다. “〔성체성사의〕신비는 지상적인 것이 아니고 하늘적인 것이다. 인간의 깨달음의 대상이 아니고 찬양의 대상이다. 논란의 대상이 아니고 경외의 대상이다.… 육체의 환상이 판단할 것이 아니라 성령의 직관으로 판단할 것이다.” 성체성사 안에 그리스도의 몸은 가시적인 성물(elements:떡과 즙) 안에 참으로 임재하기 때문에 여기에 참여하는 자는 그리스도의 몸을 먹는 것과 같다. 만일 말씀이 육신이 되셨다면, 그리고 우리가 주의 만찬을 통해서 그리스도의육체에 참으로 동참한다면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자연적으로(naturaliter) 계시고 우리는 하나님 안에 있다고 고백해야 한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86p 본문인용)

후스토 곤잘레스가 언급하고 있는 이 내용은 중세기간중 카롤링 왕조가 와해되어지는 가운데 12세기를 잇게 되어지는 11세기의 신학을 언급하는 중에 당시 삭소니가(the House of Saxony)의 영향력에 있는 사르트르 지방의 풀베르트(Fulbert of Chartres)신학에 대하여서 기술하고 있는 내용 중 한 부분이다.

언급되어지는 인용 본문에서 주목할 수 있는 것은, 풀베르트의 주장이라고 하는 것에서, 신비라는 개념이 이성이 도달할 수 없는 영역 비존재영역이라고 함의 의미를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상대적 보편성에 따른 판단일 뿐이다. 이것의 단적인 사상의 흐름은 이러한 풀베르트의 사상이 12세기에 안셀름을 비롯한 보편논쟁이 전면에 나타나게 된다는 곤잘레스의 판단이 옳다고 할 수 있다.

즉 하나님 자존의 절대자의 자기 정체성이기에 그 신비를 말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그 실재론이 자존적 정당함에 따른 신의 절대 속성이기에 신비를 말함이 옳은 것이다.

그런데 그러한 것을 생각하지 않음은 상대적 보편으로써 오늘날 많은 현대주의의 기반을 형성하게 되었다. 바르트와 폴틸리히의 무성의 신학과 비존재 신학이라고 하는 것으로 재생되어진 것이다.(참고,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에서 볼 수 있듯이 상대적보편이라고 함에서의 신학연구라는 개념으로 하나님의 자존적 초월성을 상대적 초월로 바꾸는 잘못을 범하고 있다)

한마디로 신비에 대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면서 신비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을 임의적으로 부여하려고 하는 것은 그 합리성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사변이라고 함이 임의적 신비에 추종적 형태를 말할 수 있는 가능성을 다르고 있다.

셀링은 ‘철학적 원리로써의 자아’(한자경 역 서광사)라는 자신의 저서의 서문에서 객관적인 것이 또 다른 객관적인 것을 요구하기 때문에 객관적인 것이 아니면서도 철학의 원리가 존재할 것이라는 언급과 함께 임의적 인식의 전환을 시도함을 볼 수 있다.

물론 이러한 것은 독일 관념론의 실체적인 원리들의 기본적인 이해의 시초라고 할 수도 있다고 하겠다. 한자경 교수님의 사상은 바로 이와 같이 자아라는 개념으로 그 주관적 원리라는 개념을 통해 소크라테스적인 너 자신을 알라는 입장을 그의 역자로서의 서문에서 밝히고 있다.

그러나 이러한 객관이 아닌 주관적 이해의 철학의 원리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 객관적인 것의 판단여부를 벗어난다는 주관적인 입장의 합리성이 자체적으로 정체성의 정당함을 가질 수 있는가 할 때에 그러한 것에 답변할 수 없다는 것이다. 셀링을 비롯한 한교수님의 입장은 한교수님의 저서에서 ‘누군가는 어김없이 꼭대기에서 다시 굴러 떨어지는 시지프스의 돌을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시 끌고 올라갈 수 밖에 없는 그런 비극적 삶을 사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나는 내가 이 중 어떤 부류에 속하는 사람인지를 사실 잘 모르겠다.’(한자경, 자아의 연구 서광사 5p)라고 함과 같이 그러한 행위적 당위성을 말하면서도 자아를 말함에 있어서는 그 정체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에 대하여 부정적임을 볼 수 있다.

인식의 확실성으로 나타나게 되어지는 사실로써의 인(印)쳐진 것에 대하여 불가지적인 입장에서 러셀이 지적하는 것과 같이 직접지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의 확실성을 임의적으로 취하고 있는 것뿐이다.

물론 셀링은 그의 서문에서 부분적 합리성에 대한 비판에 대하여서 자제해줄 것과 그것의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한교수님도 그것에 대하여 동의할 수 있을 것이며 이러한 점에서 지금의 판단이라고 함에 당위성을 부인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되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것은 독일의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 즉 전체가 있는 가운데서 개체를 말할 수 있다는 그러한 입장의 실제론으로 일관하는 가운데서의 입장을 취할 수 있는데 중요한 것은 그러한 브레들리의 보편인식이라고 함에서 비롯되어질 수 있는 합리성의 실제관이 과연 참된 실제관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하여서는 여전히 상대적인 입장이기 때문에 한 부분에 대한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전체를 비판함의 당위성이 부여되어지는 경우를 생각할 때에 임의적인 반론이 성립 강요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할 수 있다.

이처럼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주관적 사실이라고 함의 원리를 말하자는 불가지론적 입장에서의 가지론적 입장 즉 철학적 불가해성은 칸트 이후로 이렇게 피히테와 셀링을 비롯하여 이어지고 있다고 할 수 있는데 상대적 인위성의 제가라는 당위성을 벗어난다고 할 때에 상대적 신비와 관념에 대한 존경이라고 함이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참된 신의 신비를 해석하는 것으로 옳은 것이 아니며 또한 그러한 임의적 존경이라고 함에는 사실이해라고 하는 것이 전무한 이해의 실존의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이해사멸’이 있게 된다.

이러한 것은 현대주의 신학과 현대 철학에서는 존경은 있으면서도 이해가 실제적으로 없다는 것의 판단의 범주에서 자유하지 못하다고 함과, 신비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방법론적인 신비라는 개념들의 합리성의 진행을 주목할 수 있을 때에 그것을 신비주의로 말할 수 있고 더 나아가서 사람들이 말하는 신비와 사변이 만남을 말할 수 있다.


각주3) 코넬리우스 반틸 신현대주의 김해연옮김 성광문화사 1992, 133p이하, 137p이하 참고


각주4) 정성민 김균진교수 추천 ‘폴 틸리히와 칼 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비존개 개념을 통한 신학 비교연구’라는 부제를 주목함에서도 전반적인 합리성의 재고를 분별할 수 있다.


각주5)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참고할 것


각주6) 에밀 부르너 칼 바르트 지음,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pp. 75-141.


각주7)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II) 중세편 169p,
‘하나님은 원초적 원인까지 포함해서 만물을 무에서 만드셨다. 이 “무”는 존재에 대한 절대적 부정, 즉 전체적인 진공상태를 말하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 자신이기도 하다. 좀더 적절하게 표현한다면 하나님은 다른 피조물이존재하는 것처럼 존재하시지 않기 때문에 우리는 그를 “무”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따라서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는 “하나님으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가 된다’(본문인용)

곤잘레스의 견해에 보는 바와 같이 에리게나는, 신학자라기보다는 철학자로서 언급이 적절한데, 창조와 피조라는 개념의 경우의 수 개념으로써 네 가지를 말하고 있으며, 이러한 것은 스피노자적인 개념의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론을 따라 이루어지고 있는 것이다. 일자(一者)라는 개념의 초월적 의미로 무를 하나님의 존재로 규정하는, 임의적으로 상대적인, 관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8) 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p. 103-107.
‘리처드 개핀(Richard B. Gaffin)은 보스에 대해서 평가하기를 프린스톤의 학생들은 그를 그다지 추종하지 않았다고 하면서 어째서 그렇게 되었는지를 다음과 같이 분석하고 있는데, 그의 판단이 확실히 옳다 하겠다: “많은 학생들은, 어쩌면 학생들 대부분이, 그를 이해했다기 보다는 그를 존경하는 쪽이었다. 그의 강의들은 그의 저작과 같아서 이해하기 정말로 어려웠다. 풍성한 통찰이 문장마다 가득가득 들어차 있었기 때문이었다.”(Richard B. Gaffin Jr., ed., REDEMPTIVE HISTORY AND BIBLICAL INTERPRETATION The Shorter Writings of Geerhardus Vos, Phillipsburg, New Jersey, 1980, p. xiii.)

그러나 그를 이해했고 그의 가르침에 깊은 영향을 받은 사람들도 있었다. 젊은 그레샴 메첸은 “랍오니여”라는 제목의 보스의 설교를 듣고서 그의 모친께 열정적인편지를 써 보냈다:’(게할더스 보스, 하나님 나라와 교회 은혜와 영광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104p.인용)

보스의 설교를 소개하는 글을 쓰는 싱클레어 퍼거슨은 리처드 개핀의 판단의 여지를 그레샴 메첸에서 찾아서 언급하고 있는데, 그것은 잘못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 퍼커슨이 소개글 마지막 부분에서 보스의 설교에 대한 형태적인 측면에서 비판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이는 그의 실제론적인 입장을 그도 이해하지 못한 가운데서 형태적인 설교의 잘 정리되어짐의 판단에서의 실제적인 판단이 가능한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기 때문이다.

더욱 메이첸과 코넬리우스 반틸은 그 변증적인 개념이 다른 가운데서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에서 같이 사역하게 되어진다. 즉 상식보편철학적인 입장에서의 변증과 반틸의 전제주의적인 변증은 그 차이가 실재론에 있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 메이첸의 그 흥분은 이해가 동반되어지지 않은 존경의 한 표현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보스가 반틸의 입장적인 것을 이해하고 또한 그가 합당하게 사역할 것에 대한 것을 읽을 수 있는 것은 보스와 반틸의 대화에서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윌리엄 화이트 Jr 반틸의 생애와 사상 강승주 역 새순출판사pp. 53~57. 56p 참고)


각주9) 데이빗 F. 웰스 프린스톤신학, 박용규 옮김 도서출판 엠마오, 후기형식으로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에 대한 내용이 잘 정리되어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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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12월 07, 2004

칼빈은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는가..

.

기독교 사상에서 신앙의 표준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과 전승 또는 전통에 입각해야 한다는 그러한 구교의 입장과 오직 성경만이 그것이라는 신교의 대립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차이라는 것은 중세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종교개혁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이 구교와 신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상당히 분별의 기준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극단적으로 신교에서는 전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동일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이라고 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지혜의 증거와 전통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함을 말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하였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논하는 것이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 그리고 마틴 루터 그리고 존 칼빈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주체자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칼빈의 입장을 통하여서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각주1)


역사적 사태적 입장에서 본다면 칼빈이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이해되어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프랑스와 방델이 칼빈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각주2)

'프랑스와 방델'은 칼빈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방델'의 입장은 칼빈의 실재론(각주3)과 전혀 다른 신관적 입장이기 때문에 즉 바르트적 입장이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학자들도(각주4) 칼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각주5) 역사보편적인 상황적 사태파악에서는 또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방델의 언급을 주목해보면 이러한 언급을 칼빈이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각주2에서 재인용)

아타나시우스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따라야할 권위가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앙고백에 대한 카돌릭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각주6)

그런데 칼빈의 실재론을 이해할 때에는 그의 실재론에서의 정당함을 얻는다면 비록 실재론적 기반은 다르다고 하여도 합리적 방향성의 동일한 표현인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실재론이 다른 가운데서도 동일한 실제의 기술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심이 달라도 표현이 같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각기 모두 자신의 실재론에서 기본적인 중심에서 그 합리성의 진실을 동일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해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움을 감추는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실재론적 입장이 다르면서도 플라톤에 대한 칭찬을 하였던 것인데 그 플라톤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전부 수용한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들이 있고 이미 '플라톤적 입장에 내제하였다고 할 수도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각주7)의 실재론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가운데 동일철학자들의 자기 기만적 해석과 사실로 칼빈을 오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론적인 즈음에..

칼빈이 이러한 카롤리와의 대화와 상관성에서 말한 내용은 전통을 무시한다는 개념 자체를 획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맹목적인 사수라는 개념은 신앙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 달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자기의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수라는 개념의 언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고백으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실재론에 부합되어지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상대적인 것을 사실로 취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운데서 전통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통을 이해함이며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동일하게 전통의 이해로 고백함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1) 많은 종교개혁적 입장의 지도자들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보다도 칼빈을 언급하는 것은 먼저 그들의 실재관이 모두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성만찬의 실제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 또한 그러한 실재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 중에 그 실재관에 가장 분명하였던 자가 바로 칼빈이라고 함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라고 함은 본문을 기술하는 가운데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각주2) 칼빈의 신학서론, 프랑스와 웬델/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pp. 63-64.

'카롤리(caroli)의 비방은 심각하였으며, 그러한 비방이 칼빈 자신의 모든 일을 해치리라는 것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활발한 토론이 개최되었으며, 토론기간 중에 비례(viret)는 자신의 제네바 동료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칼빈은 카롤리의 반박을 제대로 견디어 내지 못하였고, 또한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에 대하여서는 더욱 인내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자신이 전통적인 기독론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주장하였지만, 카롤 리가 요구한 증거를 거부하였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베른(Bern)시의회로 회부되었으며 그곳에서 칼빈의 입장은 많은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칼롤 리가 잘못이라는 것도 베른시의 중재인이 확인하지 못한채, 두 반대자는 서로 제각기 갈라서게 되었다.'

각주3) 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유명론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을 축출하게 되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되어진 'contemplated'라는 말은 단순히 명상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뜻하심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으로써의 삼위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정당함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강요의 시작에서의 지식을 말함의 기본이 되어지는 실재적 분별력이며 이것은 여호와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칼빈이 그의 신앙과 신학의 실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각주4) 에밀 두메르그, 칼빈신학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에밀 두메르그는 칼빈의 합리성은 불연속성적인 합리성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삶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칼빈이 그러한 불연속성적인 측면의 언급의 당위성의 출처가 칼빈의 실재론적 정당함을 찾고 있다는 점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인 기술을 위한 노력과 사실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실제적인 본모습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각주5) 게할더스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역 엠마오

게할더스보스는 그의 바울의 종말론에서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언어라고 하는 것도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와 같은 자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책으로 만나는 70인의 사상가'에서 롤랑바르트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음) 자신의 학문이라고 함이 언어의 한계로 나타난다고 하였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도 언어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아일랜드 철학교수 리차드 커니의 현대 유럽철학의 동향에서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에서 그 롤랑바르트와 함께할 수도 있는 입장이 되어지지만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언어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함을 말함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

도이베르트, 신사유비판, 크리스찬다이제스트..

도이베르트의 기독교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상대적 차원의 특정 철학만이 기독교 철학이라는 식의 접근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계로 코넬리우스반틸이 자신의 저서 개혁주의신학 서론의 서문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 도이베르트의 신사유비판의 글 서문에서는 자신의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오해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실재적 입장은 달리하나 실재론적 입장이해가 합리성의 재고를 앞선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 중세편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81-82

'빈센트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것들과 우리에게 축적된 사항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원작자로서의 교만함보다는 해설자로서 충실함을 보이겠다”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성경은 참된 교리의 근본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확정할 수 있도록 수단으로써 전통을 주셨다.

더욱이 카돌릭교회 안에서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모든 곳에서 믿어지는 사항을 우리도 계속 주장함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빈센트는 이단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 감독이 예정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이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가톨릭교회의신앙이 결코 아닌 형식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에 있어서 빈센트라는 자의 어거스틴을 반론하는 가운데서 전통을 말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분명한 반론적 입장이 없어왔다고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역사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되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지론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위개적 실재론에서는 그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반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거스틴적 입장에서도 변론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그 때 당시 신학사상가들이 고민했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7) 전광식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사랑광기' 대한철학회논문집 63권
에로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항상 상기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그러한 기억되어진 곳을 사모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적 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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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23, 2004

실재론에 대한 객관성 시비의 답변으로..


comments: 인드라라는 닉네임의 분이 저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말하는 실제론을 거론할때에 그것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 따른 답변으로 준비한 글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대화되어진 것을 그대로 살려서 글을 옮겼습니다.

본문..

인드라님이 지적한 객관에 대한 시비, 특히 피해의식에 대한 객관성 시비에 답변으로..


객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객관적이라는 판단함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기본적 입장이 되어지며.. 또한 이 객관은 사태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공감대로 형성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관념의 실제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실재라는 개념의 논쟁은 많이 있어왔고 또한 그러한 실재논쟁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문화의 역사적으로, 기독교적인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많았고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실재하지 않는 것에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에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신론자들이나 안티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회의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실제 즉 객관적 사태분석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뿐 진정으로 실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태어 어렵게 묘사사기 보다는 쉽게말하고 표현함이 실제적으로 납득 정당함에 따른 진리에 가깝다는 방법론에 입각한 사람은 좀 장황한 판단과 표현이라고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싫어하며 그러한 것이 그 사람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의 표현하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화라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의 차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기반적 인식을 찾음이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되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인식의 근원이 이미 판단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자의적이나마 변명적 타당성을 세우고 그러한 당위성을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장황한 해석이나 그러한 것을 위한 일변도를 의도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에 실제적인 가운데서 간결하든 장황하든 그 형태의 모습과는 달리 타당성이 있는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문제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인드라님의 반론에 피해의식이라고 함을 제가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의 다양성이라는 현상적 이해와 그에 따른 실제의 분별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이단들을 비롯하여서 사회에 악을 끼치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실제분별이 없는 가운데서 의미를 상실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전반의 정체성이라고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석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똑같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어지는 것은 인드라님의 직접적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그렇지 않든 그 상관성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방향성에서 인드라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까지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현대 비평신학이라고 함과 철학들의 피해의식적인 표현의 정체성이 가능한 것에서 비롯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이미 철학과 신학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인데 그러한 학문적 경향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지지 않은 혐오하시는 분들의 입장에 의도하든 하지 못하든 인식강요가 되어진 가운데 승인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각주1)과 ‘영미철학적 신학’에서의 견해 차이는 생각 외로 아주 심합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것에 있어서 상관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시 모두 비판되어질 수 있는 "추상적 실재의 상관성"각주3)에 따른 연민으로 이미 이성적 상식적인 판단에서도 지나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눈치를 보면서도 안토니 씨슬튼은 자신의 합리성을 펼치고 있는데’각주4) 이는 그의 실재의식의 비판이라고 함에 거부할 수 없음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이러한 판단들이라고 함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하여서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추상적 실제라고 하는 것 보편성과 추상적 실재의 특수성에 대하여서 실제를 통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그 타당성에서 의미를 상실했음에 대하여서 그러한 사람들의 입장이 ‘환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각주5)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안믿어지니깐 상대적이지 않은가 확실성이 어디 있는가 객관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주관적 표현의 객관성에 동의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진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드라님에 필요이상의 주관적 인식의 확대로 피해의식을 말하게 되어지는 객관성의 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이미 어떤 종교심리학자들이 자신의 방법이 끝나고 있을 알았던 지점에서 끝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6)각주7)는 언급을 주목한 바 있는데 ..

이것은 추상적 실재와 보편의식으로 인위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말들밖에 안된다는 것은 지각있는 자들의 결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의 객관성이 저의 주관이라고 함의 언급이라고 단정하며 자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객관성에서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일축하려고 하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의도가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보시라고 저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승인이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 인드라님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에 객관성의 근거를 포함해서 글을 남깁니다. 앞으로는 그만한 객관성으로 말한다는 기본적인 신뢰는 대화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주1) 포스터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전에 제기했던 방법이 자체를 서술에 국한시키는지 아니면 자체를 설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려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최근의 독일 신학이 똑같은 문제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빈델반트-리케르트(Windelband-Rickert) 역사학파는 ‘표의기술적인 방법’(method ideographic)을 선정하고, 딜타이-분트(Dilthey-Wundt) 학파는 ‘법칙정립적인 방법’(method nomothetic)을 선정한다. 전자는 사실상 서술적(descriptive)이고 후자는 설명적(explanatory)이다”(George Burnam Foster, The Finality of the Christian Religion, p. 309.)


각주 2) ‘독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은, 역사성(historicality) 또는 역사적 제약성(historical conditionedness)의 양면적 성질, 즉 고대 택스트 및 현대의 해석자라는 양측의 역사적 제약성을 진지하게 취급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영국 및 미국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신약 성서 해석자에게 주변적 관심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단지 이론적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상식의 차원에서 그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가 Dilthey나 Heidegger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형성되지 않았을, 엉뚱한 지성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42.)


각주3) 셋째, 또다른 이유로 인하여 철학적 기술이 문제시 된다. 해석학적 과제의 기술을 용의하게 하는 것에 덧붙여, 철학적 범주들은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할 때에도 역시 유용하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3.)

본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독일 신학의 해석학적 실제와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적 영향력으로 실체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함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해석적 실제규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독일 신학과 영미 신학의 차이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반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각주4) Cornelius Van Til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주의 학파와 같은 어떤 특정학파는, 명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들로부터 유래하는 통찰력들을 이용하는 어떠한 시도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8.)

안토니 시쓸튼이 의식하고 있는 반틸의 책은 반틸의 변증학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안토니 그는 각주에서 반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반틸의 입장에 대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제한다고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실제라는 것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안토니 시쓸튼이 비판하고 있는 Dilthey와 같은 자들로써의 헤겔 철학적인 영향력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변증적 입장 대화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적인 입장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은 궁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표의기술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이도 역시 그 범주적 실체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각주5) 따라서 현대 종교 심리학파의 방법 전체는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동일한 궁극성의 승인된 가정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우연의 우주로부터 생긴 인간이 자기 설명적(self-explanatory)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방법은 전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에 직면한 때조차 성공적이었다는 프랏트의 진술들을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성취한 놀라운 업적들에 대해 자유롭고 유창하게 말할 때, 그리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조사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개념에 찬성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가 전체의 비전을 볼 수 있도록 정상에 오르지 못한 내적인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우선 아주 잘 느끼며 산을 오를 준비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환자를 생각한다.


각주6)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69.


각주7) “심각하게 복잡한 과정을 정의 내리기 위한 탐구는 항상 그와 같이 시험적인 융통성이 있는 진술로 끝난다. 그것은 경험의 산 실새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며, 그것을 서술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또 그것의 특성들과 단계들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얻으려는 신중한 노력으로 끝난다”
(Edward Scribner Ames, The Psychology of Religious Experience, p. 13.)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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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6, 2004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를 이해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성경본문만 다루는 것이 좋은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하는 입장을 취함을 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이단으로 알려진 '새교회'라는 입장의 사람들과 '말씀보존학회'의 입장이 되어짐을 봅니다. 이들의 표면적인 경건이라고 함 때로는 신실함이 왜곡되어진 형태를 취하게 되어지는 가운데 이단이라고 판정받음의 옳음에 대하여서 한마디 할까 합니다.


잘못된 성경맹목주의를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1,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이해에 대하여..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각주1.) 그러나 그러한 것을 정황적 배경에서 이해하지 않고 그 문구적인 입장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잘못된 것임을 말해둡니다.

이것은 성경의 실존에 대하여서는 눈을 감고 그 실존의 이해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경본문을 다루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잘못됨의 자리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중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경의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의 그 실존적 이해는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실존적 형상이라고 함과 실존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계시임으로 성경의 자증을 말할 수 있고 그 자증의 계시의 성격은 그 말씀으로서 사람을 창조하심과 같이 기록자들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장하여서 자기를 나타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기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칼빈이외에 그러한 것에 분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하여도 그러한 인식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기독교 유신론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이,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의 정당함을 따른 실재적인 보편적 인식에서 해석함이, 성경본문해석의 문맥적 해석이라고 함보다도 더 합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맥적 해석을 하는 판단에 실재적인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둡니다.

그렇기에 성경해석에 있어서 본문의 문장의 조합식으로 말하는 그러한 해석이라고 함이 이미 그 자체적 증거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오해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

이처럼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에 대하여서 문구만 떼어내어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잘못된 성경해석의 원리가 나타난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현대주의 신학적 입장과 원하지않는 조우를 경험해야만 하는 정황에서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새교회에 있어서 주된 신학자로서 주장하고 있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각주 2.)에 대하여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판단받고 있고 현대의 과정신학적 입장과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진화론적 개념에서 자유할 수 없는 자리에 서는 것도 강요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정황적인 측면에서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에서 파생되어진 것이라는 자체적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고 그 문구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현상학에서 '판단중지'(epoch)라는 판단과 의도하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정황적인 측면에서도 실재적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함에 대한 판단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스베덴보리의 입장이 과학철학자로 인식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과학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인식은 그 종말론적 인식은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계시사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는데 우선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보편성이라고 함이 이미 비판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과학이라고 함을 말하는 절대시간론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시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해둡니다.(각주 3.)





각주1.) 스콜라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항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투구호가 된 개신교의 성경해석 원리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와 함께 후대 성경신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후대 사람들이 이해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성경신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게하르트 하젤,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김정우역 엠마오, pp. 21-22)
(게하르트 하젤, 신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권성수역 엠마오, 14p.)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판단되어지는 실제의식 안에서의 성경해석이라고 함의 성경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개념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와 증거의 발생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문자로써 표현되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문자적 개념에서는 이와 같은 판단을 받으면서도 자존적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기 때문에 앞서 말한 판단을 받지 않는 것도 부언합니다.

종교개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을 한 칼빈의 사상이라고 함이 바르게 전달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말이 성경 맹목주의적 개념의 분별없는 실제를 초래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각주 2.) 예를 들면, 영적 세계에 대한 스베이던 보리(Swedenborg)의 사상들을 도그마라는 칭호를 붙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확하게도 도그마는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관할하는 권위에 의해서 즉 당면한 사건에 있어서 국가와 제휴한 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고백된 신조, 무오한 교회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절대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서 공인되어 의무화된 신조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도그마의 권위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그 이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의 선언이나 확정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교회의 무오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에 있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몇 번이고 재삼 그 입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즉 모든 신학적 도그마들이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이다(principium, in quod omnia dogmata theologica resolvuntur, est: Deus dixit).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학 1. 교의학 용어와 개념 17p)


각주 3.)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을 언급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간의 실재라고 함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말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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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06, 2004

About 'Der sprung'



About 'Der sprung'


1. 글을 씀에 있어서

지난번 제가 쓴 글에 식상해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식상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재고하는 것도 좋은 대화의 주제로써 자리매김 되어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경우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객관성 시비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에 앞서 그러한 식상의 요소를 살펴보는 보편성은 저의 글에 대한 식상이라고 함의 연연함이라고 함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신학과 철학의 사상의 전반적인 반성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초점이 되어지는 것은 김종두 교수님(각주1)과 Karl Albert 교수님(각주2)의 글입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는 플라톤의 입장과 소위 현대신학의 거장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사상적 인식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2. Der Sprung

'Der Sprung'이란 말은 ‘비약’, ‘건너뜀’이라는 말로 논리 비약을 의미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를 소개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만큼의 ‘논리적 비약’이라고 하는 것이 식상을 불러올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서문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객관적인 것을 주장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주관적인 이해의 합리성을 말함에 있어서 이 키에르케고르식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따를 수밖에 없는 정황적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이라고하는 것은 신학자적인 개념이나 철학자적인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러한 논리적 비약을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김교수의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그와 달리 그 키에르케고르의 기도문이 시중에 책으로 나와 있고 김교수가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실존철학과 20세기의 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키에르케고를 거치지 않고는 현대 독일철학과 신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각주 3)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것과 실존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임을 말함에 있어서(각주4) 부정적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최선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김교수님의 입장이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은 거절하는 입장(각주5)이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김교수님의 대안없는가(각주6) 라는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그 키에르케고르의 언어를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지금에 있어서 있게 되어지는 논리적 비약 그리고 임의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진리인 것같이 말하고 그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식상하는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신학에서의 논리 비약(‘Der Sprung’ in Theology)

가장 크게 이러한 논리적 비약이라고 함을 의식하고 주장하게 된 신학자는 당연히 김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칼바르트라고 할 것입니다.(각주7)

칼바르트(Karl Barth)는 포이엘바하의 역사비평학에 대한 도피(각주8)로 찾아낸 것이 원역사이며 그의 삼위하나님은 원역사 안에 존재하는 즉 원역사라는 범주의 카테고리에서 한정되어지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라는 개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 칼바르트의 입장이 극단적인 이분적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논리 비약을 한다고 함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각주9)

이러한 주체적 사유와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실존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어지는 신학, 그 신론에 대한 재구성에 대하여서 좋은 책이 하나 있다(각주10)

그곳에서는 바로 주체적 사유로서 실존을 말함에 따른 바르트의 무성이론 그리고 그곳에서 신에 대한 결백적 개념으로써의 절대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구성되어지는데 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자신의 속성으로써의 절대라는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초월로써 플라톤의 독사(dogsa) 키엘케골의 sprung을 기반으로 역사상대주의적 개념의 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칼바르트와 폴틸리히의 삼위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그 하나님을 무성(nothingness), 그리고 비존재 (non-being)로 표현함에 있어서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냥 넘긴다면 그것은 전부를 부정하는 모습이 된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각주 11)

결론적으로

이러한 것은 정기철 호남대 교수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대표적인 인식으로써 일반역사와 시간과 상관없은 그러면서도 인위적으로 상관성을 말하는 원역사를 말하는 것과 그 시대 그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써 오리겐이 말한 신플라톤적 개념의 사상이 바르트를 비롯한 현대신학의 인식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키엘케골의 언어 논리 비약(Der Sprung)의 실존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방법론을 달리할 뿐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엘케골의 논리 비약으로써의 주체적 사유로써 실존을 말하는 것이 진리라는 그러한 말이 이미 비판되었다고 할 때에 성경의 하나님의 증거라고 함을 인위적 신론을 만들어서 성경을 대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은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체적 사유라는 인식의 보편성이 인식론적 존재론이라는 임의적 하나님의 실존을 바라보는 자들과 그 사상적 연관성과 연속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상식화 되어지고 있고 이러한 것은 현대신학이 개혁신학이라고 함의 이름으로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서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악함의 한부분임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것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주관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러한 판단의 범위에서 이미 판단되어진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관적으로 말함의 자기 합리화를 찾을 때에는 이러한 판단에 귀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인위적 무성과 비존재라는 개념 역사적으로 실존의 문제가 있을 때에 의식하게 되어지는 키엘케골의 사상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은 오늘날도 교회의 묻지마신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불가지적인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념에서 실존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악한 키엘케골의 비약적 주체적 사유와 실존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정당함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후스토 곤잘레스가 쓴 종교개혁사에서 말하고 있는 키엘케골의 전제주의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서 이 전제는 불가지적인 인위적인 절대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키엘케골의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전제나 무성이나 비존재의 상관성에서 그 존재를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기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주관적인 사유의 진리관을 버리시기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참고 각주는 이글 아래글이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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각주 : Der sprung - 식상에 대하여


각주 1)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김종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미국 빌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취득(M.Div), 미국 빌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박사과정이수, 독일 Gottingen 대학에서 신학전공, 독일 Heidelberg 대학, Berlin 자유대학 Munchen 대학 Amsterdam 자유대학에서 철학전공, 독일 Munchen 대학,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취득(Dr. phil.) 총신대철학교수, 한세대철학교수(현재)


각주 2)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의 이해, 임성철 역 한양출판사


각주 3)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9

‘그의 영향으로 20세기 철학사상의주류를 이루었던 실존철학(야스퍼스, 하이데거 마르셀 사르트르, 까뮤등)과 동 세기의 최대의 신학자들(카르 바르트, 에밀부루너, 루돌프 불트만 등)이 발전시킨 “변증법적 신학”이 태동되었다. 지난 세기의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초신성과 도같이 우뚝 솟아 무수한 다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및 일반 지성인들에게 사상적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이들이 사상적 무대에서 물러난 후 현재까지 이들에 버금하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한 사람도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각주 4)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5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존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유는 객관적 사유, 이성적 사유가 아니고 주체적 사유, 실존적 사유다. 주체적 사유는 외부의 세계가 아닌 내면의 세계와 인간의 주체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에 대해 지정의가 합해진 전인의 노력으로 심각하게, “무한성의 정열”(Leidenschaft der Unendlichkeit)로 신중하게 반성하는 사유다. 그러한 주체적 사유로 확보할 수 있는 주체적 진리가 곧 우리의 실존과 연결되는 진리,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살리는 진리다’

이러한 실존의 문제가 진리라는 개념은 실존의 위협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멀어졌음에 대한 것을 김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것에서 오늘날의 실존에 대한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당위성과 그러한 한정적인 인식의 요구라는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가하는 것이 김교수의 입장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각주 5)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6,


각주 6)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9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현실성이 있는 대안은없는가? 이점이 바로 우리가 이 저서 후반부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이란 말에서 그것은 이러한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극단적인 합리성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시대적 반응들이 있었음에 대한 것을 가지고 항존적 개념의 당위성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교수님은 후에 합리성에 따른 필요성 그리고 전제적인 개념의 유익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의 문제와 상관관계가 있는 가운데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것에 합리성을 앞서는 키엘케고르의 비약(sprung)은 불가지적 개념에서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이며 다만 동정적 당위성을 말하는 수준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각주 7) 정기철,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한들출판사 p19

'영원과 시간의 대립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의 대립은 바르트의 신학의 핵심을 이룬다 바르트만큼 20세기에 시간의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없다.'

영원과 시간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적 개념의 원역사와 일반역사의 이분적 사고인데 이러한 것으로 사상적 연관성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불가지론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비평학의 안전지대라는 인식으로써의 원역사는 이후의 신학자들의 신학의 실존을 그곳에서 그곳에 있는 신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키엘케골의 실존적 사유가 진리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비합리성이라고 함과 절대의 개념의 상관없음으로 일관하는 경향을 말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의 실존의 정당함말한다고 하여도 신 자신은 자체적 정당함을 바르트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같은 오류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키엘케골의 실존과 주체적 사유의 정당함은 자체적 정당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동정적 당위성의 상존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의 정당함의 시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된다는 판단을 받게 된다.


각주 8) '바르트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대성 있는 방향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고 열성있게 교통장관처럼 되기를 바랐고, 하잇제마(Haitjema)가 역사를 계시의 한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데, 그 계시는 오직 구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원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제 역사적 상대주의를 당황하게 하는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코넬리우스 반틸, 신현대주의 김해연 역 성광문화사 pp. 146-147.)

‘바르트 학파의 계시 실증주의는 역사 비판 논구의 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원역사의 영역으로 도피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원역사의 범주로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역사는 초역사 내지 원역사의 반영으로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pp. 62-63.)


각주 9) 에밀 부룬너 칼바르트,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여기에서는 에밀부룬너의 자연과 은혜라는 글과 그에 대한 바르트의 답변으로 아니오(Nein)이 실려져 있습니다. 자연은총을 말하는 개념에서 자연신학의 실존을 말하는데 둘다 틀렸습니다. 둘다 개연적인 개념의 당위성과 절대라는 개념을 상대적 관계없음으로 이해함에 있어서는 상대적 차이밖에는 그 분별의 사실로써의 자연신학의 실존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관련해서는 칼바르트의 입장의 이중적 개념 원역사와 일반 역사관의 상관없음이라는 개념에서 이원론을 말하고 있고 이것은 논리비약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즉 논리비약을 함에 있어서 그 당위성은 신의 실존의 당위성을 원역사에서 찾고 있다는 인위적 실존의 문제라는 것을 키엘케골의 실존적 사유라고 하는 것과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그의 키엘케골을 예찬을 말함의 의미도 같이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10) 정성민, 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김균진교수의 추천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논문인데 여기서 바르트의 무성의 신학과 폴틸리히의 비존재의 신학을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론을 재구성하는 방법적 전제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인위적 개념에서의 절대 개념과 하나님을 무성으로 비존재로 표현함에 대한 개연적 정당함을 따르고 있는 가운데서 그 합리성을 출발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그러한 불가지론적 접근에서 바르트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는 아직도 분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각주 11) 정성민, 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p14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이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종말인가? 무성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삶의 종말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까. 비존재는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존재의 한 형태인가? 과연 존재와 무는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은 비존재로 표현될 수 있는가? 과거이 역사 동안 위대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통해 무성과 비존재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보여주었다. 조지 패터슨(George Pattison)은 무성과의 만남은 현대 종교사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라고 말한다.'(George Pattison, Agnosis : theology in the Void(new York:St. Martin's, 1996),2

정성민님이 인용한 조지패터슨은 불가지론(Agnosis)이라는 주제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불가지론이 자체적 자기 정당함의 합리성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제들의 합리성은 자체적 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한 말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에 대하여

forward

납득 당위성을 위한 구체적인 것을 밝히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저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써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같습니다. 한마디로 시간적 불연속성 속성에도 매우 우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하여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용..
밤하늘★처... 이러한추상적인 말의 연속성으로인하여 필연성과 당위성으로 결정되어지는 논리는 추론하는본인의머리속에서부터 공허하고 혼돈해짐을 우리들은 이명신님을 통하여 유추해볼수있을것임을 시사하는것임을 밝혀둡니다 이러한사실은 객관 타당성의 원리에서도 납득당위성에 위배됨은 물론이요 역사적 언어변화의 시간적 불연 [2004/07/25]
밤하늘★처... 속성에도 매우우둔함을 보여주는것이라 함을 밝혀둠과동시에 일반화된 분별력을 흐트리는우둔한 논리적모순에 빠짐을 알수 있다할것입니다, 이러한 대중적 언어변화에대한 인식에 철저한 자기당위성 철학적 우월주의에입각한 자기모순의논리야말로 우리 교회사의 공동의적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번역해보세요,,

답변에 즈음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함이 인식의 연속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미르님의 입장이나 또는 천향님의 구속사적인 불연속성을 말함에 있어서 제가 비판한 부분에 대하여서 납득의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답변이 늦어진 것은 이미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제가 언급했던 문제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재고하지 않는 것이, 이미 재고했다면 상당히 맹목적인 주관적 판단으로 일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미 기정사실적인 그러한 입장밖에는 취할 수 없는 당위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분의 입장이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부분은 쉬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논의였는데 그 태제와는 달리 아니 마음에 두시지 않고 쉽게 말하라고 하시면서 제시한 내용도 시간의 의식과 언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글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따로 질문하실 수 있었던 내용이라고 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안티적 입장의 분들의 방법론과 입장정리하는 것과 동일하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구체적인 답변보다는 원하는 것이 인격적인 배척으로써의 저의 합리성의 실제를 부인하시고자 하시는 뜻으로 받았습니다. 변명은 그만하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답변해야 할 것같다는 생각에 다시 피시방을 찾았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생각한 것은 일필휘지의 형식으로 글을 씁니다. 그래서 자세한 각주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의식하고 쓴 것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정도는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좀 구체성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구체적 언급을 시작하며..

인식이 시간이해에 따라 종속되었음에 대하여서는(각주1) 그리고 시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역시 일반 역사와 원역사, 즉 직선적 시간이해와 원환적 시간이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소광희 교수는 그의 책(각주2)에서는 프리드리 니체의 시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환적 시간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과 인식에 대한 것에서 현대의 시간관이 재 해석되어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신플라톤적인 개념의 존재이해와 시간관에 달려진 것입니다.(각주3)

* 현대에서 이해되어지는 원환적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하여서

이러한 것은 프리드리히 니이체의 정오사상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각주4) 간략하게 소개하면 태양이 정오에서 떠서 다시 지나온 곳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정오가 되면 그 시간에 돌아오게 된다는 것으로 시간의 윤회적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시간의 원환적 개념과 존재에 상관성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이것은 플라톤의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플라톤 이해에 대하여서 두 부류의 사상적 해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만 그 동일한 표현으로써 이해하게 되어지는데(각주5) 여기에서 존재의 연장(Extension)이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각주6)

이것은 존재의 이동적 개념으로 물질의 이동이라는 개념이 시간을 말하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cosmos) 자연적인 시간의 보편성을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존재라는 것이 무한일자에서 파생되어진 개념으로써는 일상적인 물질의 움직임이라는 자연과학적 시간 또는 뉴톤의 절대시간관이라고 함과 다른 것이 되어집니다.

즉 회귀에 따른 존재의 이동이라고 함에서 시간의 인식이 가능합니다. 더욱 칼 알베르트의 주장적 개념에서는, 영원이라고 함의 경험적 실제를 임의적으로나마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플라톤의 유개념의 정지에 참여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에서 영원을 시간의 정지로 이해함이라는 인식을 통해 시간을 영원에 투여하여 인식하려고 하는 노력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영원이라고 함을 시간의 정지적 개념 시간의 무개념으로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 합리성의 정체성의 실존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이미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 개연적인 개념의 합리성만 생각한다면 개연적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해라고 함에서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어지며 희랍철학에서 시간이라고 함이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그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영감(각주7)의 역활적 개념으로 존재를 주관하는 시간의 보편성적 실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시간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연이라는 것에 정당함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에 있어서도 역시 그 시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각주8)

* 현대의 시간관과 성경의 시간관에 대하여서..

현대의 시간관의 입장은 이러한 회귀적 개념에서 현재라는 개념은 귀납적인 미래의 개념으로 규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자연과학적 시간관의 또는 실증적인 개념의 인식에서도 동의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신학에서의 말하는 창세기의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바르트의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원역사 안에서의 창조라고 하는 개념(각주9)과 또한 현대의 하루라는 개념을 일상적 개념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러한 진화론적 개념의 시간관의 합리화를 위한 시간개체의 이해에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입장은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시간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합리성의 모순성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뜻하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일상적인 시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 현대의 개혁신학의 변증적 입장에서의 시간관 이해..

먼저 현대신학에서의 개혁이라고 함을 말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시간관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 사르트르의 절대 무라고 하는 개념을 헤겔의 시간의 흐름이라고 함의 기점이 되어지는 무로 생각하여서 시간의 흐름이 미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도 흐를 수 있음에 대한 것과 무라는 개념에서 다시 비로소 시간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 무라는 개념에서 다시 신학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개혁신학의 시간에 따른 인식론적 신학의 정체성입니다.(각주10)

헤겔의 시간관에 대하여서 좀 쉽게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추천하는 것은 소광희씨의 철학적 시간관에서 헤겔을 말함에 있어서 헤겔의 시간의 차원이라고 함을 이해함을 통하여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처방으로써-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은 '정오사상'과 같이 언급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관과 그에 따른 시간의 종속적 인식이라고 함이 정당할 때에 성립되어지는 태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은 개연적 정당함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시간의 종속적 개념으로써의 성경의 기술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나타내는 그 영광의 실제적 능력으로 계시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시간의 종속적 개념으로 나타나면서도 시간을 지배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권세가 그 계시의 실존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보편성에 따른 여러가지 판단들 시간의 불연속성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의 비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하는 정당함에서 그리고 그것에 따른 합리성적 비판은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을 비판함에 있어서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임의적이고 개연적인 정당함에서 존재의 실존을 말함에 있어서 그리고 합리성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의 모든 비판들, 그 모체적 신은 죽었다는 개념의 니체의 언급도 그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오의 사상이라는 개념의 임의적 개념에서 파생된 임의적 의지적 표현으로 자신의 주관적 정당함을 따를 뿐 진정한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철학적 우월주의적 개념이라는 것은 철학과 일반학문과 인식의 상관성을 임의적으로 부인하시는 가운데서 삶의 실증적 개념으로 말씀하시겠다는 입장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증적 개념도 철학적 기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생각하심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것으로써의 실증주의적 개념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사상들 특히 꽁트의 사상적 입장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우월주의라는 개념도 임의적인 배척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철학적 우월을 말한 적도 없고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신앙과의 관계성을 '오리겐과는 다른 입장'(각주11)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인식과 존재와 합리성의 존재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데 그 시간의 실존이라고 함이 자체적 실존의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시간은 성경의 종속적 개념으로써 그 안에서의 계시를 담을 수 있는 특권으로써의 실존적 자기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해에 있어서 시간의 현대적 개념으로써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시간관과 자연적 시간관 즉 생체시간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은 것과 같은 꽃시계라는 것과 같은 것들도 있고 자연적인 운동의 균일설을 말하는, 뉴톤의 절대시간관을 기반으로하는 자연과학적 시간이라고 함과 같은 시간이라는 것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관에서 실존은 개연적 정당함과 관찰이라는 개념에서의 인식확실성을 말하게 되어지며 유추적 개념에서의 파생되어진 시간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위적 창조물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주장하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죄악을 인하여서 그 실존의 정당함을 잃은 자들의 자기 결박이 되어질 수밖에 없고 그 의식의 저변에 있는 신에 대한 의식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핑계치 못하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 1)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 문예출판사,

칸트의 시간관을 말함에 있어서 지적하고 있음 그리고 이것은 저자가 서울대 인문대학장으로서 칸트의 시간관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이 보편적인 철학계와 신학계에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주 2) 상게서..


각주 3) 후스토 곤잘레스 (CHRISTIAN THOUGHT REVISITED: Three Types of Theology By Justo L. Gonzalez Published by Permission of Abingdon Press. Copyright 1989 by Justo L. Gonzalez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J.L. 곤잘레스 지음 이후정 컨콜디아사)는 어거스틴의 신론이라고 하는 것이 '무한의 일자'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카르타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신학 보다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으로써 오리겐의 전통적 개념에서 언급되어지는 신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곤잘레스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 선호하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의 기반이 신플라톤적 개념이며 또한 이것은 시간관이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관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주 4) 소광희씨의 상게서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간관에서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각주 5) 칼 알베르트의 '플라톤의 철학이해'(Uber Platons begriff Philosophie by Karl Albert)(한양대학출판사)에서 알베르트는 플라톤의 이해의 새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목적적인 개념에서 플라톤이 원형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주 6) 스피노자(Spinoza)의 사유와 연장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중세의 이단자 유대인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칼알베르트의 사상적 입장에서 본다면 다시 재고할 수 있는 카돌릭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재고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중세의 시간관이라고 함이 어거스틴의 영향력에서 이미 그러한 현대의 시간과 종말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예견한 것으로 말할 수 있고 재해석되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 7) 시간의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정기철 한들출판사

여기서는 신화에 따른 이야기 가운데서 시간의 소멸에 대한 것을 자식을 잡아먹는 자의 모습으로 그 시간의 파괴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주 8)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 문예출판사,
이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시간관을 다룰 때에 언급하고 있음.


각주 9) 코넬리우스 반틸, 칼바르트 (원제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인가?)개혁주의신행협회출판사

이러한 것은 원역사라는 개념이 일상적인 시간에서의 창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구의 창조라는 개념의 실제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플라톤적 개념과 같이 이데아적인 개념으로써의 원역사의 흐름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각주10) Wilhelm Weischedel, Der Gott der philosophen,Grundlegung einer philosophischen Theoiogie im Zeitalter des Nihismus,Wissenschaftliche Buchgegelschaft, Darmstadt, 1994, I

철학자들의 신, 허무주의 시대에 있어 철학적 신학의 근거지음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Der Gott Der Philosophen) 빌헬름 바이셰델(Wilhelm Weischedel) 최상욱 옮김 동문선

서론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의 존재규정지음을 말할 때에 절대의 무에서 사상적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사상을 말함에 있어서 시간을 말해야 함의 당위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무에서 시간의 흐름을 말하게 되어지는 독일의 헤겔의 시간관이라고 함 헤겔의 시간의 차원이라고 함의 시간적 보편정당함을 따른다고 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각주 11) 후스토 곤잘레스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이후정 컨콜디아사)

곤잘레스는 교회사를 서방신학과 동방신학과 그리고 목회적 개념의 신학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레니우스적인 목회의 입장을 선호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의 역사인식의 상관성을 말함에 있어서 동방신학적 개념으로써의 오리겐은 '신학과 철학의 동등적 위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저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실존 안에서 그 철학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 '동연적인' 측면의 도구적 실존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연적'(coterminous)이란 말은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개념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존재의 동일한 위치적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앞서 하나님의 재가라는 개념도 시간의 판단과 상관없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의 사실규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영원전이라는 말이 현대에서 말하는 시간의 판단을 받는 영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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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castle, named 'easy'


On the castle, named 'easy'


1. 쉽다는 개념에 대한 이해와 사실에 대하여서..

쉽다는 개념의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원리적으로 정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인식에 대한 또 앞서는 그 시간이해에 있어서의 주관성에서 인식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마져도 해석을 달리하는 가운데서 역사적 보편사실로써의 한 개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지론적 범주에서 행하여져야 하는데 그것은 설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개념의 실제적인 정의라고 하는 것이 잘 정의(Well define) 되어지지 않지만 납득되어 온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즉 인식공동체라고 하는 것에서의 받아들여지는 당위성에서 그 사회에서 그 공동체적인 인식의 당위성으로 '쉽다'는 것을 말해왔던 것입니다.

물론 단지 한 규정적 사실로써의 개체 인식의 쉬움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들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보편성에서도 그 사실을 사실로 받을 당위성은 여전히 남겨진 가운데서 어떤 그 시대의 조건적 당위성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사실에 대한 쉬움이라는 개념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 불특정 다수라고 하여도 또는 소수라는 개념을 다수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어떤 특정한 부류의 인식의 납득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의 쉬움을 말할 수 있다고 함을 말할 때에..

중요한 것은 성경의 사실이 그러한 것에 매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적인 사람들 그리고 현대신학과 철학에서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언급의 당위성을 예수님의 증거적 차원의 현상적 이해에서 찾고 있음도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언어가 '코이네' 헬라어로써 그 때 당시에 사용되어진 한정적 언어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상식적 언어와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다고 할 때에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납득 당위성을 고려한 증거와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은 종교개혁이후에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상식적으로 이끌어간 결과의 소산임을 기억함이 좋겠습니다. 즉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이 신학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 경로라고 함을 살펴볼 때에 그리고 비단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의 특색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상식보편철학적 동질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철학이 신학화 되어지고 그러한 것은 오늘날 보수주의적 개념의 신학적 체계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한다는 그러한 좋은 취지는 있지만 그 쉽다는 판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상식보편적 합리성에 노출되어지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교회가 회개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않은 가운데서 그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단순화하여서 오히려 믿음의 획일화화 그러한 가운데서 단순함에 따른 모자람으로 일관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또한 분별력없는 것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회개하여야 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쉬움'이라고 하는 개념은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여러 사람들의 납득 당위성을 고려한 것으로써만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가적 차원에서의 그 실존적 개념으로써 상식적 형태의 동일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중요성은 인식의 방향성과 그 근원이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순종인가 예수님에 대한 모방인가..

이러한 것에 형태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모방적 행함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시대의 그 사람들의 언어로써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으로도 쉬운 것을 말하였다고 하는 것의 형태적 측면에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메여서 판단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으로 그 한 대중을 선택하셨고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활을 통해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뻐하심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주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그 선택하신 그 대중적 언어라고 함과 그들의 인식의 고려는 주님을 묶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그 대중을 선택함에 있어서 한 대중적 언어로만 이야기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메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이라는 어패적 언어로써의 대중의 모든 인식의 고려를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을 제한함에 있어서는 그 잘못을 말하게 되며 그렇게 함의 당위성이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허락되어진 상식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글을 쓸 때에 독자의 층을 고려해서 나름대로 선택하여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그 자신의 믿음의 분량적 개념에서 또한 어떤 사람들의 언어적 개념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분량과 그 자유를 주님안에서 찾는 자의 기쁨과 사역의 자유로움의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사실을 말하지 않는 자들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쉬움'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도들을 묶을 수 있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그러한 연약함을 정죄하는 것도 아니요 고려하지만 그러나 일괄적인 쉬움이라는 개념의 단조로움에서 모자람을 낚시질하여서 증거적 사실의 풍요함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On the castle, named ''easy"

상식적으로 그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파라독스적인 개념의 사실들의 범주를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증거적 자유라고 함을 단조로움과 모자람으로 일관하게 하는 가운데서 상식의 범주로 전락시키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재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감옥처럼 사용하려는 악한 자들의 모습이 있고 또한 그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비평학에서도 특히 사본학에서도 사본의 진위를 말할 때에는 그 사본들의 비교에서 짧은 것이나 쉬운 표현이 더 사본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대에 사람들이 합목적적으로 기술한 것을 배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역시 그 인식에 따른 단정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결정된 바가 없고 또 더 바른 기술을 누락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에서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생각하지 않는 편협된 것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이러한 비평학의 치우친 판단의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그 쉬움이라는 한정적 개념에서 편협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합리성의 전환적 실제를 모색하는 모습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들이 사람들을 가두려고 하는 그 '쉬움의 성'이며 또한 그들 자신들이 갇혀진 '쉬움의 성'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쉽다고 하는 개념이 상식적인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람들의 납득 당위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만이 사실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님의 절대 재가에 따른 합리성으로써의 상식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유로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고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묶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인위적으로 주관적으로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정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객관성을 기반으로 말할 수 있도록하고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의 믿음의 분량적 표현이라고 함에 그 존중함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설 때에 형제들을 서로 분별력없이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더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으로 믿습니다.

쉬움이라고 하는 개념의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상식적 표현으로써 사람들의 납득도 고려할 수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내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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