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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에서 현대의 동일철학과 신플라톤적 실재론으로 제한되어지는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참된 삼위일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옳음을 근거로 제시한 글입니다.
다음카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구원론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화를 말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신화의 창시자라는 개념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플라톤적 실재론에 입각한 삼위일체에 근거한 합리성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비판과 책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글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위적차원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많은 이단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것에 있어서 제고찰하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함과 증거함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음카페에 기록했던 글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의 '신화' 언급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비판에 있어서..
글을 씀에 앞서서..
아타나시우스는 신화의 창시자임에 대한 것을 지적함으로 논란이 있는 가운데 그 신화 언급이라고 하는 것이 신론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의 당위성을 느끼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기아 신학에 대한 고찰에서 그 신화 이해에 대한 것을 후스토 L. 곤잘레스(각주1) 견해를 따라서 보다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글을 준비했습니다.
1.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신화(Deification)(각주2)'또는 '신격화(divinization)(각주3)'라는 말이 그 상관성을 전제로 하는 말인가 하는 것과 단적으로 어느 하나만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이해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게 되었다면(각주4) 그것은 삼위를 배제한 구원론에 대한 것을 말한 것으로써의 신화를 말한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은 신론적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며 하나님의 강생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나님께 나오는 성화의 개념이 있게 되어지며 이것은 플라톤적 개념입니다. 즉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취하고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관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 오리겐의 입장이라는 사변적 입장을 아타나시우스가 경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방향적 입장과 그 노력이라고 함을 그러한 실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각주5)
이러한 노력들이 캅바도기아 교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 삼위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그들을 하르낙의 판단(각주6)과 같은 유명론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각주7)
2. 비판함에 있어서..
여기에 대하여서 저는 '삼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인 입장을 말씀하심에 비판함'과 '곤잘레스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변호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 실천적 입장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아타나시우스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곤잘레스와 같은 실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라는 에로스가 상기설에 따라서 회귀적 본능이 있음에 대한 것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상승운동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것을 영혼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 8) 이것은 플라톤의 종교적 실재를 전제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말하게 되어질 때에 역사적으로 캅바도기아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신플라톤적 실재론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심각한 잘못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9)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플라톤의 실재의 판단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이데아의 한 구석에 있게 되어지는 한정된 신을 화이트헤드는 잘못되게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본질을 말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그러한 하르낙과 같이 그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에서 비로소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실천적인 구원론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축소하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가 유일신과 그 가운데서 구원론을 말한 것이라고 함을 그러한가운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격하하여 구원론적 입장의 개념의 창시자라는 언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에서의 그 존재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의 표현의 합리성의 불연속성 속에서도 삼위하나님을 표현하실 수 있음과 그렇게 행하심의 신실하심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는 비로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의 노력이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실재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실재론에서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과 이것은 삼위하나님을 해석하는 곤잘레스를 비롯하여 신론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어 임의적 행함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합목적적 신론을 배제한 구원론을 어색하게 내놓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라는 개념도 결국은 신의 본질을 도달 할 수 없는 유사본질을 동일 본질로써 말하고자 하는 노력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그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신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함으로 글을 맺습니다.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큐바출신/감리교목사로서
예일(Yale)대학대학원 졸업(M.A.Ph.D.)
에모리(Emory)대학교 교수(8년간)
W.C.C. Faith and Order 위원
현재 International Theological Center 교수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교수
감리교 목사님이시고 또한 세계 에큐메니칼 위원으로써 그 사상적 실재는 개인적으로 달리합니다. 그러나 실재에 입각한 실제론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합리성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고 할 때에 저자 목사님의 합리성의 객관성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제 3세계 신학자로써 그의 이 주저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어진 가운데서 남미과 영어권에서 택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 롤란트 베인톤이 언급한 것과 같이 영어와 이탈리어와 독일어와 기타 언어에 능숙하신 분으로써 사상의 전반적인 측면을 다룸에 있어서 그를 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욱 곤잘레스는 그 사상을 전계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상의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함이 그의 저서의 장점으로 역자들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과 실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 입장에서 비판적 입장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주목하신다면 저의 앞서 판단하고 책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당위성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2)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문맥상의 결함에서 나온 오해인듯 합니다.
번호: 6135 글쓴이: 인권의 왕도
조회: 29 날짜: 2005/02/24 22:12
(중략..)
먼저 신화(Deification) 교리란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고, 믿었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는 것을 말 합니다.
교부들로는 아타나시우스와 클레멘트(150-215), 성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Hippolytus of Rome(3c), Basil(330-379) 등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격(Godhead/경배의 대상으로서)에서는 아니며,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베드로 후서 1:4절 참조)로 설명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후절 생략) ..
각주3)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351-352.
'바로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이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분만이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는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일종의 신격화(神格化:divinization: θεοποιησι(데오포이에시스))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와 유사한 존재를 수여해 주실 수 있으므로 신격화에 있어서도 구세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pp. 351-352.)
각주4)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모든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근본 원리로서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는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면 판단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원리는 근본적으로 두개인데, 즉 유일신관과 기독교 구원론이었다.(p.347.)'
각주5)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그의 신학은 내용적으로 오리겐의 내용과 아주 가까운 점이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그의 관심사는 사색적이고 학문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출신 신학자들이 추종했던 방법론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그는 이론적 문제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실천적인 주제들만 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교리적 주제들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뜻이다.'(p.347.)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1.
기독교 사상사를 영ㄴ구하는 일젼의 역사가들은 “초기 니케아 사상”과 “후기 니케아 사상”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바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 가운데 하르낙(Harnack)은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앙형식은 유사본질-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 아니고 비슷한 본질이라고 보는 이론-주장을 니케아 신앙의 형태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르낙은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이론은 “동일본질”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 381.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3.
'이러한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p. 383.
각주8)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 347-348
‘이방인에 반대해서’를 살펴보면, 고대 변증신학자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교들의 다신론을 공격한 다음,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들이 무엇인지 토론한다. 원리적으로 이 수단들은 둘이 있는데, 영혼과 자연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그분(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며, 우리 자신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 속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만 몇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중략)...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말씀(Word)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죄가 그 거울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사전에 말끔히 닦지 않으면 거기에 비추이는 말씀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표현은 오리겐 이래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흔하게 유행했던 플라톤적인 주제이다.(pp. 347-348.)
각주9) 화이트헤드 '이성의 기능' 정연홍 역 이문출판사
여기서 화이트 헤드는 신을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이성(Geist)을 '플라토닉 이성'과 '율리시스 이성' 또는 '생물학적 이성'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인데 결국은 플라톤적 실재에 입각해서 당위성을 받는 그러한 신으로 내제적 이성을 말한다고 할 때에 즉 헤겔의 자연이성의 자기를 알아가는 가운데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것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영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르낙(Harnack)도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동일 본질'을 말할 때에 '유사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동일본질이라는 귀결적 판단이 그 실제적 즉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견해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도달 할 수있는가에 대하여서 두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철학이란 말에 있어서, 지혜를 사랑하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헬라어 '필레인'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덕이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함으로써 고르기아스적인 회의론적 입장과 달리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지식이라고 함이 본성에 이를 수 없다는 개념에서 그 실천적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상승이라고 할 때에 동일본질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유사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하지 못하는 잘못된 플라톤적 실재론이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적 편협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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