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요일, 7월 05, 2006

지식의 숙성

지식의 숙성

음식에 있어서 간편하게 즉석에서 또는 일정한 요리연구가에 의해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장기간 보관과 숙성이라고 함을 거쳐 만들어진 발효식품이라고 하는 것도 있게 되는데 소금과 관련되어진 음식이 그러한 것의 한 예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를 비롯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일부에서 염장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러한 다큐방송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기억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3)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거칠고 투박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게 됨에 있어서 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섬김의 전부는 하나님께 드림의 예물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소금을 빼는 것과 같은 그러한 중심이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지혜의 경험에서 있게 되어지는 축적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소금에 의해 숙성되어져서 참으로 주의 종들을 위한 주님께 드림의 음식으로 준비되어져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로마카돌릭은 마치 음식을 숙성시키듯이 전통속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을 시켜왔습니다. 즉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은 옳은 것이나 그 전통이 그 사실적 당위성을 잃어 소금이 맛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변질적 숙성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에 있어서 주께 드리는 숙성된 지식적 음료를 다시 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중세에 풍미한 연예사건이 극적이면서도 적절한 예가 되어질 것입니다.(각주 1)

존경하는 제가 다닌 신대원 은사님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천안 신대원시대이지만, 제가 다닐 때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치셨는데 항상 아쉬워하셨던 것은 그 피곤한 가운데서의 연구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도 그 배움에 있어서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는시간을 가지는 가운데서 준비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졸업하고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의 그 숙성적 섭리라고 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마음에 두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학문의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좀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적 작업에로의 소명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식 맛갈나는 음식이라고함의 노력과 시장기를 거둘 수 있는 참된 음료와 같은 주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제는 숙성시키시는 주의 말씀하심의 깊이를 따라 학문적 소명으로의 부르심에 귀한 종들이 함께하였으면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중세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기억하면서 그 지식의 숙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태파악과 현상적 지식의 숙성은 오히려 독이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주님의 뜻하심을 저버리고 있는 가운데서 지식의 재 숙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치나 장을 담그더라도 그 재료가 부실하면 다시 그 재료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장이나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지식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샘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서 소금으로써 그 마라의 쓴 물을 고치셨던 섭리를 기억하면서 그러한 지식의 근원을 고치심에 노력하시는 종들이 있으셔서 수가성 여인과 같은 자들이 그 샘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듯 그 숙성된 지식의 샘물에서도 만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그러한 지식의 샘을 준비하는 지식의 숙성에로의 소명을 받들 수 있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치셨던 그 섭리가 이제 필요한 시대입니다.






각주 1)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후스토 곤잘레스와 프레드릭 파제의 글을 참고로 추천하면서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I 中世編 이형기 차종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210-218.

저는 피터 아벨라드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로맨틱하다고 표현하고 있고 아벨라드의 사상과 그 시대상황에 대하여서 비교적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 파제 '유쾌한 철학자'

저자는 중세의 수도사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아주 풍자적으로 비난과 조소와 해학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행한 말에 대한 인용은 사실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할 때에 엘로이즈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글쓴이로서의 부언

"나는 당신의 창기가 될 수 있어도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로이즈가 아벨로이드를 사랑하고 학문에 정진한 사람으로서의 그 위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어느정도의 성과라고 하는 것은 '후스토곤잘레스는 아벨라드를 대단한 문필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세의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으로부터의 비로소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학문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의 숙성을 담당해온 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를 두는 것이 가정을 돌아보는 것이요, 그러한 자가 교회를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의 자격을 성경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헌신의 현실적 실제의 시간적 부족과 집중의 어려움은 있으나 결혼하여서 그러한 지식의 숙성을 찾아 전통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의 그 방법의 실제와 사실을 이룬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반론적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음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일반화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부동의원동자적 개념의 입장으로 합리성에 대한 숙성을 말할 때에는 그 반론에 정당함을 비로소 부여하여 사실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답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임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사모님들께 한말씀드리는 것은 ..

엘로이즈는 현실적 실제적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를 위해 창기를 선택하면서도 아내가 되지 않아 그를 자유하게하는 자로서 결코 김치담그는 것과 같은 숙성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숙성을 위해 창기가 아니라 당당한 아내로서 함께해주시길 주 안에서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사모된 나의 아내는 주 안에서 기꺼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해야할 일을 하는 가운데 이 말씀을 드립니다. 창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말했던 엘로이즈와는 달리 아내를 선택하는 자들로서 종들을 섬김으로 숙성된 지식의 숙성으로 인해 그 우물에서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시면 좋겠습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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