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함에 대하여-지연된 종말론에 대하여
먼저 언어에 대한 이해를 생각하며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면서도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고 함에 대하여' 명제적 논리에서 성경적이라고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그러면서도 그러한 언급에 대한 사실이 동의적 차원이라는 점에서 여지를 둘 뿐으로 보여진다.
1. 게할더스 보스의 '이미'와 '아직'에 대하여서
먼저, 게할더스 보스가 주장하고 있는 '이미'와 '아직'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각주1) 좀더 부언적으로 설명한다면, 먼저 'G.보스의 시간관'(각주2)이라고 하는 것을 재고한 다음에 언급됨이 옳다고 하겠다 이는 분명 시간관에 대한 보편성 이해에 차이에서 합리성의 차이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이다.
질문하신 분의 입장은 극히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 아니다 '보스'는 그러한 논쟁적인 것이 있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단적으로 이런 것임을 말하고 있다 즉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시간의 순차적인 개념에서 볼 때에 이미라는 개념과 아직이라고 함의 말을 같이 쓸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종말과 구원이라고 함을 말하게 되는 그 상관성에 질문으로 나타날 수 있게 된다.
즉 이미 종말을 이루었고 이미 구원을 받았다고 하면서 어떻게 미래적으로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있는가 하는 가운데서는 시간의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른 이해에서는 모순을 나타낼 수밖에 없다. 그러나 시간의 보편성을 말하기 전에 시간이라고 함의 피조물적 한정적 의미와 그 규정적 한계라고 함을 기억해야 할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 역사라고 함을 주목하여야 할 것이다. 일반 역사의 흐름에 따라서 앞과 뒤를 생각하는 가운데서는 이미라는 말을 쓸 수 없거나 또는 아직이라는 말을 쓸 수 없으며 또한 그러한 가운데서 성경해석의 당위성을 내놓을 수 있는 합리적 구절을 찾을 수 있는 것이다. 찾을 수 있다는 것과 바르게 찾아 적용되어진 것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판단은 시간에 대한 인식적 관점이 먼저 재고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게 된다.
2. 언급하신 내용에 대한 견해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
먼저 예수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하여야 한다고 언급하였는데, 그 표현은 옳지만 그 판단함에 있어서는 달리 생각해야 할 것으로 본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내용은 시기적으로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했던 그 시점을 기준으로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만 가지고 있고 그가 가르친 내용적 당위성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그러한 것은 역사적이라는 개념에서 그냥 예수님을 전제하고 그의 활동적 시기라고 함만 고려할 뿐이기 때문에 실제적인 그의 주관적이면서도 사상적 정당함을 의지하는 주관적 시간관의 실제를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오히려 일반 역사라는 개념에서 말함에 있어서는 아무런 제약이나 제한이 없다는 것이다 즉 시간의 상식적인 일반적인 보편성에 따르고 있을뿐 진정 예수그리스도의 가르침에서의 시간관에 따른 해석을 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 비판되어질 수 있다.
'지연된 종말론'이라는 것은 일반 역사적 시간관이라고 함에서 판단되어진 종말론이라는 전제를 말하고 있다 즉 우주적 시간이라고함이 구속적 시간의 당위성에서부터 일반적 시간의 당위성을 말해야 할 것인데 이것은 일반적 시간에서 구속적 시간의 형태에 대한 현상적 개연적 시간관으로 주목하고 있는 것이다. 여기서는 어떤 인식의 불연속성이라는 판단밖에 세울 수 없으며 그 모순이라고 함의 문제라고 함의 인식의 사실을 말하기도 부적절한 것이 된다. 그렇기 때문에 지연적 종말론이라고 하는 자체에서 주목한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는 성립되어질 수 없는 것이다.
(질문)지연된 종말론적 입장에서 'already but not yet'문제제기
already but not yet 의 문제점을 제기하려는데, 이는 신학관점이 비성경적이라는 말이 아니다. "already but not yet"이라는 명제의 논리에 문제가 있다는 단순하고 간단한 생각이다.
게할더스 보스를 비롯한 여러 신학자들은 다음과 같이 정의한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 하나님 나라가 도래하였으며,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구원받기로 예정된 자가 구원받았다는 측면이 '이미'의 관점이다. 그러나 아직 우리 가운데 죄성이 있고, 하나님 나라가 온전히 임하지 않았고(새 하늘과 새 땅이 성취되지 않았음), 택함받은 모든 자의 구원이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이루어져가고 있기 때문에 '아직'의 관점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정의에는 한 가지 약점이 있다. 그것은 한 명제 안에 두 관점이 사용된다는 것이다. 이미의 관점은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의 '성경적 의미'에 주안점을 두었다면 아직의 의미는 역사적 성취의 관점에 중점을 두었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이미'와 '아직'의 관점이 다르기 때문에 통일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 돛?역사적 성취의 관점으로만 본다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은, 하나님 나라와 택한 자의 구원의 출발점이며, 지금도 이루어져 가고 있기 때문에 '이미'를 말해서는 안 된다. '아직'만 말해야 한다.
반면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이 가지는, 성경이 말하는 의미에 주안점을 둔다면 '아직'을 말할 수 없다. 왜냐면 예수님의 만유적 인격 즉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 안에서 만물이 함께 죽고 만물이 함께 부활했기 때문이며, 그로 말미암아 만물이 새로운 피조물이 되었고, 만물이 새 하늘과 새 땅이 되었기 때문이다. '아직'의 개념이 들어올 개연성은 없다.
그런데 성경은 이미와 아직의 두 개념을 말하고 있다.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가?
먼저, '이미'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예수 그리스도 중심의 종말론을 이해해야만 한다.
둘째 '아직'의 관점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서신서가 말하는 '지연된 종말론의 의미'를 찾아야 한다. 좀 더 구체적으로 말한다면 "복음서의 종말론과 서신서의 종말론에서 '지연된 종말'의 핵심이 무엇인가?" 를 이해해야 한다.
그것은 예수님이 율법을 완성하? ?오셨다는 말씀에서 찾을 수 있다. 율법의 완성은 다니엘서 9장에서 말? 求?것과 같이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육적 이스라엘의 심판과 성전의 파괴로 끝나는 것이다.
예수님의 죽으심으로 말미암아 율법이 완성되었고 하나님 나라가 들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태복음 24장 종말론에서 말하는, 율법의 완성의 요소인 '성전', '제사장', '육적 이스라엘'이 남아 있다. 이것이 지연된 종말론의 핵심이다.
다니엘서가 말하는 한 이레의 기간이 남아 있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과 성전에 대해 70이레의 언약을 정하신다. 그중 69 이레동안 성전이 중건되고 메시야가 죽임을 당하는 사건이 발생하고 마지막 한 이레 후에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파괴된다.
왜 하나님은 한 이레 동안을 참으시고 기다리시는가? 그것은 유대인들이 예루살렘과 유대와 사마리아와 땅끝(로마제국 전역)에 흩어져 있기 때문에 그들에게 복음이 전파되어 유대인 가운데 기독인의 엑소더스가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이다. (유대인 중에서) 택함받은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이스라엘과 성전이 파괴되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한 사람이라도 더 구원받기를 원하! 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표현이다.
롯이 소돔을 떠날 때까지 심판을 미룰 수 밖에 없는 하나님께서 아브라함의 육적 자손 중에 택한 자들이 다 구원받기 전에 예루살렘 성을 심판하실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율법의 완성과 하나님 나라의 도래는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 승천으로(이미의 관점) 이루어졌다. 그러나 "아직"의 시기, 한 이레 동안 옛 시대(율법)을 묵과하시며 심판을 미루시는 기간이 있다. 그러나 한 이래가 끝나자, AD 70년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은 구약 시대 소돔이 멸망하듯 끝을 맺는다.
그러므로 성경이 말하는 '이미와 아직'에서 '아직'이 역사의 마지막에 성취된다는 관점보다 AD 70년 온전히 성취된다고 보는 것이 더욱 성경적이다. 하나님 나라 도래의 "이미와 아직" 측면을 예수 그리스도의 죽으심과 부활 그리고 구약 율법과의 관계(특히 육적 이스라엘과 성전)의 를 통해 잘 설명하고 있기 때문에 관점의 일치라는 측면에서 옳다.
요한계시록 마저 '아직'이라는 측면에서, 바벨론의 멸망과 새하늘과 새땅의 도래를 노래한다면, 요한계시록도 70년 이전에 기록되었음을 반증한다.
!
각주1)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89-94.
'그러므로 목회 실제에서는 칭의에 대한 몇몇 안 되는 언급들에서 도출되는 논의는 바울이 변개(變改,conversion) 이후에 지은 죄들을 하나님의 칭의 선언의 범주에서 제외하였을 것을 증명하지 못한다. 만일 위에서 언급한 바 있는 베르늘(Wernle)의 견해가 옳고 칭의가 순전히 회고적인 것이라면 *** 칭의와 최후 심판 간의 실제적인 연관성이 끊어지리라는 것은분명하다. 그러나 미래와 현재의 밀접한 관계성과 미래로부터 현재로의 '사유의 역행 운동'(the backward movement in thought)에 대해서는 이 논쟁에 의해 직접적으로 영향을 받는 것보다 훨씬 더 많은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로마서 8:33,34("누가 능히 하나님의 택하신 자들을 송사하리요 의롭다 하신 이는 하나님이시니 누가 정죄하리요)의 언어는 최후의 심판에서 내려지는 선언보다 더 절대적이지는 않다(그러나 그만큼은 절대적이다-보역) 사실 이는 현재 과거 미래의 범주를 무시할 정도로 절대적인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칭의의 사실은 예지(prognosis)와 예정(predestination) 사실의 다른 면에 불과하다. 만일 그 범위가 여기 열거된 다른 개념들보다 그 무제한성과 무조건성이 덜 하다면, 칭의는 29절의 '구원의 울타리'로부터 빠졌을 것이다. 칭의는 '디카이오시스 조에스'( , 생명의 칭의)이고, 여기서 의롭다고 선언된 생명은 그 결과 끝없는 삶(endless life)이고, 성도들이 그 생명 안에서 "다스리라"고 약속된 그런 삶이다(롬 5:18-21) 일반적으로 구원의 확실성은, 만일 신적 구원 과정의 중심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상대적인 측면을 가지고 있다면 그리스도인은 그런 확신을 가질 수 없다고 할 만큼, 사도에 의하여 강하게 확언되고 있다.*'
*** 위에서도 시사되었듯이, 칭의가 회고적(retrospective)이라 함은 칭의가 칭의 순간 이전의 죄에 대해서만 발생한다는 뜻이다. 따라서 그 이후의 죄는 칭의의 범주에 들어오지 못하게 된다(역주)
* 이는 구원의 중심적 행위가 미래와 관련하여 절대성을 가지므로 구원의 확실성이 강하게 드러난다는 함의를 가진다.(역주)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93-94. 본문 인용)
각주2)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13-70. 제 1장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 참고,
보스가 말하고 있는 '바울의 종말론'이라는 '바울 신학'은 제 1장 바울 종말론의 구조로서 시작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간론으로 시작하고 있다 즉 시간의 보편성을 어떻게 이해하고 그러한 것이 현 세대를 어떻게 규정하는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가운데서 소위 '이미'와 '아직'이라는 말이 나오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그러한 시간적 보편성에 따른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관관계를 먼저 구원의 요소로써의 칭의라는 개념으로 그 상관관계를 기술하는 것이 2장이 되어진다.
'구약의 관점과는 달리 바울 종말론의 구조는 대조적인 것(antithetical)으로 나타난다. 즉 마지막을 이전에 있는 포괄적 규범의 원칙과는 반대되는 또 하나의 포괄적인 원칙 아래 배치한다.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 그것은 계시된 진리 전체의 한 부분이 아니라 바울의 기독교가 가진 모든 근본적 특성을 가진 그 전체의 핵심이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 전체는 종말론적인 색조를 가지고 연관된 것(circle as correlated and eschatologcally-complexioned parts)이 된다. 여기서는 이를 그저 전제할 것이다. 그리고 점차 이를 자세히 검토해 나갈 것이다. 따라서 시도의 종말론을 드러낸다는 것은 그의 신학을 전체로서 제시한다는 것을 의미함이 계속해서 점차 분명히 나타나게 될 것이다. 개념적 반전(a conceptual retroversion)을 통하여 마지막이 진리를 드러내는 시작을 가능케 하는 것으로 보여질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p. 26-27. 본문 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의 다른 저서인 성경신학에서는 계시로서의 성경을 말할 때에 초자연적인 것과 사람들의 사고적 입장을 통하는 그러한 형태로서의 성경이 이루어짐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극히 성경적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먼저 하나님으로부터의 증거가 있고 그것을 재해석하는 가운데서의 계시적 이해라고 함과 증거와 같은 인식적 작용을 통하여서 성경이 기술되었음을 말하고 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께서 세상을 창조하시고 모든 것을 아담에게 주셨던 것과 같이 해와 달이 년한을 이루는 보편성의 임무를 부여받았다고 하면 해아래 되어지는 것들의 판단의 주권이라고 함도 실제적이며 한정적이면서도 무한한 능력이 그 아담에게 주어졌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자연을 이해하는 자연신학적 개념의 형태로 나타나고 하나님의 특별계시는 이러한 것의 형태를 취하기를 기뻐하셨다. 그러나 인식의 방향을 고려할 때에 구속적인 성경적 입장에서의 자연신학을 말할 수 있어도 자연신학적인 입장에서 비로소 성경적인 입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야 한다.
자연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보편성 논쟁이 되어질 수 있는데 이것은 시간의 보편성에 대한 언급이 되어지고 그것의 논쟁에 대하여서 사도 바울은 유대교를 비롯하여 여러문헌들에서 전제하고 있는 시간에 대한 것을 분별하고 있는 것이 바울의 종말론에서의 처음 첫 장으로써 바울의 종말론의 구조라는 측면을 시간론으로 이끌고 있는 것이다. 그러한 보스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앞서 말한 것과 같이 자연적인 신학이라고 할 수 있는 보편성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철학적 인식의 계기로서 시간이라고 함과 공간이라고 함 즉 세대에 대한 이해를 분명히 하는 가운데서 그의 신학을 전부 말하고 있다 그것이 그의 종말론을 그의 신학이라고 부르는 이유가 된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보스의 한역 '바울의 종말론'을 번역하신 이승구 박사님은 보스의 실재론을 같이하지 않는 가운데서 본문의 잘못이해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엠마오출판사 p. 26) 즉 각주에서 옛 언약과 새 언약에 대한 이분적 개념으로 본문을 해석하고 있는데, 이것은 일반적인 시간관과 그에 따른 구속하심의 시간관이라고 함의 차이를 보스가 말하고 있다는 점을 알지 못하고 있다. 이것은 시간이해의 주관성을 말하면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은 것으로써의 주관적 판단에 따른 시간이해의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것이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의 용납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그것은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기본으로 하는 가운데서의 주관이 아닌 플라토닉 신관을 비롯해서 임의적 당위성에 따른 주관적 시간관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역사적인 신앙이라고 할 때에, 시간을 하나님의 피조물의 하나로써 받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시간이라고 함에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국한되어야만 하는 당위성을 부여할 수는 없다
일반적으로 현대의 임의적 주관에 따른 시간관에 반대하여 역사적 시간관을 고수하겠다는 점에서 극단적으로 시간에서의 계시라는 것만 인식하겠다는 측면의 안티적 극단적 보수의 입장을 취할 수 있다. 이러한 것의 역할적인 인물을 들 수 있다면 랑케와 같은 신학자이다 그는 시간관이라고 함을 일반 역사적 개념의 입장에서만 기술하고 있는데 이것은 창조된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으로 하나님의 계시의 자증이라고 함을 판단함에 많은 분별을 요구하게 된다고 하겠다.
보스의 언급에서 "이로써 전체 역사 과정이 크게 양분되는 것이다. 구원적 운동을 부여함으로써 이 우주적 배경은 세계의 진행 과정의 중심이 되고 이 핵(核)을 중심으로 시간 내의 모든 발생사가 뭉쳐지는 것으로 주장되는 것이다. 이 하나의 사건으로 질서는 사건들의 산발적 다양성으로 깨져 버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종말론은 역사와 관련성을 잃지 아니하면서도 철학적-신학적인(Philosophico-theological) 것이 된다."라는 말을 잘 이해하여야 할 것이다.
시간의 보편성과 그에 따른 세대의 이해라고 함이 어떻게 성경에 나타나고 있는가 그리고 그것의 정당성에 따른 사실 규정이라고 함이 역사적 판단이라고 함의 사실규정에 매이지 않으면서도 역사적 사실로써의 규정되어 나타나고 있다는 점을 기억함이 바울 신학에 있어서 종말론의 구조를 이해하는 것이며 그러한 가운데서의 '이미'와 '아직'을 말하게 된다.
http://geocities.com/vosscare
플라토닉 삼위일체를 주장하는 것을 보며..
일반적으로 삼위일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이 이단이라는 것의 기준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12세기에서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삼위일체를 인정하면서도 임의적 차원에서 삼위를 말하는 경향이 있어왔습니다.(각주1)
그리고 그러한 것에 대하여서 공교회에서 비판하고 정죄하였지만 그러한 삼위일체에 대한 논의는 계속되었고 현대의 신학의 매력적 변증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기도 함을 주목하게 되는데 참으로 기만적인 세대라고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에 대한 실체를 언약이라는 것으로, 인위적 규정하여 언약이라는 실제적 판단에서 비로소 이해할 수 있는 하나님이라는 것으로 말하고 있는 에덴버러 신학장의 모습들(각주2)과 그러한 신학적 전통에서 이루어지는 신학과 신앙을 볼 때에 참으로 하나님을 믿는 자들을 보겠느냐는 그러한 말씀을 절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러한 것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 입장을 바르게 분별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파생되어졌고 지금도 그러한 사상적 연속성 속에서 고민해야 하는 그러한 것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우리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을 기억함이 없이 삼위하나님을 합리성의 제한 속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착각하고 그로 인한 그러한 잘못된 인식을 비판하면서 마치 하나님을 비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생각하는 어리석음의 비평들이 득세를 말하려고 하고 있음을 주목합니다.(각주3)
참으로 하나님의 이름이(각주 2번 보스의 견해 해석 참고) 거룩히 여기심을 받으시기를 기도하는 종들로서 우리 성도들의 전인격적인 회개가 있어야 할 것입니다.
꼬리말 쓰기
이명신 여호와는 나의 목자이시니 내게 부족함이 없으리로다라는 말씀의 의미를 새겨봅니다. 자존의 하나님의 광대하심 그 보편성이 세상의 상대적인 보편과 상대적인 초월이라는 플라톤적 신관으로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인위적 삼위일체에 대한 이해는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는 것이며 그러한 자들은 이단에 대한 답변할 수 있는 능력을 이미 상실했습니다. [2005/03/05]
이명신 그러한 자들이 신앙의 신조를 바르게 해석할 수 없다고 하겠습니다. 해석적 정황이라는 인식의 판단이라고 함의 기준이 신관이 이미 그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한신대 김경재 교수의 유일신 비판도 마찬가지로 폴틸리히의 non-being의 사상에서 하나와 여럿의 상관성에서 고민하며 상황적 보편에서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의 신관은 자체적 당위성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이명신 하나 숫자라는 개념이 편협함을 김교수는 비판했는데.. 하나님 자신의 절대 보편은 그러한 하나라는 상식적 편협의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자체적 보편은 그러한 상식적인 편협의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미 김교수님은 하나와 여럿의 딜레마에서 비평학의 자료를 따라서 비판가능성을 제기한 것뿐입니다. [2005/03/05]
이명신 비교종교학이라고 함에서는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전제에서 자유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3/05]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캅바도키아 교부들은 하나님의 통일성은 세 사람 사이에 있는 통일성으로 유추해서 해석할 수 있다고 주장했는데, 이러한 견해는 언뜻 보기에 니케아의 결정과 거리가 먼 것처럼 보이나 실제는 그렇지 않다. 즉 니싸의 그레고리 같은 인물은 그의 철학적 대전제에 따라서 베드로, 야고보, 요한 사이의 공통성은 세 사람 각각 개인들이 지닌 개체성보다도 더 실제적인 것으로 보았다. 이러한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가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후스토 L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383 본문 인용)
해설: 일반적으로 기독교의 삼위일체에 대한 교리 정립은 니케아 콘스탄티노플을 이어서 캅파도키아 교부들에 의해서 확정되어진 것으로 역사적 인식을 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을 전제로 비평가 하르낙의 입장이나 또는 화이트헤드 그의 저서인 이성의 기능에서 그 삼위일체에 대한 인식이 플라토닉이라고 할 때에 그 인식의 확실성을 말할 수 없다고 하면서 하르낙의 입장에서는 삼위의 동일 본질이 아니라 유사본질이라는 언급을 말하고자 하였고 화이트헤드의 경우에서는 플라토닉 이성과 다른 생물학적 이성이라고 함의 다른 보편적 이성을 말하기도 하며 그러한 것들이 자신을 알아간다는 헤겔적 진화론적 사관에 따른 과정신학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우리 기독교에서 믿고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삼위일체로 믿지 아니하고 플라토닉 삼위일체로만 생각하는 경향이 얼마나 두드러지게 나타나고 있는지 생각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고 할 것입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그러나 피크는 궁켈이나 그레스만이 제시한 방법론을 따르는 여러 학자들이 벌이고 있는 많은 연구들이 가지는 중대성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음은 명백하다. 궁켈과 그레스만은 오경의 범위를 벗어나서 그보다 더 폭넓은 자료를 바탕으로 전승의 발달을 추적하는 작업을 했으며, 가능한 한 그 전승들의 원형을 복원하기 위해 노력했다. 이러한 입장을 따라서 연구하면서, 히브리시(詩)와 예전(cultic)과의 관계를 조사하는데 혁혁한 성과를 올린 학자가 지그문트 모빙켈(Sigmund Mowinckel)이다. 그는 대단히 명헉한 구약 학자였으며, 시편에 관한 여러 권의 연구 저서를 통해 여러 가지 장르의 문학 양식을 분석하고 조사했다. 그리고 그 결과를 기초로해서 이 양식들이 포로기 이전에 있었던 성소의 예전과 관계가 있음을 밝혀낸 것이다.
궁켈이 히브리 종교 문학의 개인적인 성격에 큰 관심을 두었던 반면에 모빙켈은 히브리 종교문학을, 사회를 움직여 가는 추진력의 전개와 더욱 끈질기게 연결시키는 작업을 했다."
(롤란드 해리슨, 구약서론 류호준 박철현 옮김 상 크리스챤다이제스트 p. 72. 본문인용)
양식비평이라고 할 때에 문학비평이라고 함과 같은 형식을 취하면서도 그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인식과 정황이라고 함에 기준을 두는 것을 의미하는데 궁켈과 더 나아가서 그레스만은 그것의 역사적인 것으로 적용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모빙켈의 입장도 그러한 경우를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궁켈이라고 하는 자의 중심은 '개인적인 성격이라는 인식'으로써의 개체적인 보편을 말하고 있고 모빙켈은 그러한 개인들의 모임적 인식으로 인한 정황적 세력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양식비평에 있어서 보편에 대한 인식의 차이이며 더 나아가서 철학적 보편으로써의 '하나'와 '여럿'이라는 입장을 말하게 된다고 하겠습니다. 이것은 철학이 추구하는 아르케 논쟁에서 그 보편적 실재를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께 두지 않음에 있어서 자체적 당위성은 절대적일 수 없는 상대적인 당위성의 요구성이라는 선상에 머물게 되어지는 것뿐입니다.
이처럼 비평학에서는 기본적으로 그러한 것을 전제로 하고 있습니다. 허구적 실제로써의 인식의 산물이며 그러한 인식의 산물로써의 본문의 원형을 찾아야 한다는 양식비평의 학문적방향성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데 이는 성경의 상대성이라고 함의 모습을 불완전의 실체로 생각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자존의 하나님을 믿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말씀의 상대적인 모습으로 나타내어지면서도 온전하고 절대적인 재가에 따른 완전성을 믿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의 원본을 찾아가기 위한 여정으로써의 성경연구라는 합목적성을 말하지 않습니다.
진정으로 자존의 절대자로써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심에 대한 자기 절대 정당함을 가지신 분이라고 할 때에 그 합리성의 완성적 개념에서 그 성경의 실체와 원본을 찾지 않고 그 자체의 '완전영감론'을 받으며 그 비합리적인 연속성에서 뜻하심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나타나기를 원하시는가 하는 것에 대한 연구라고 함의 바람직한 성경연구의 합목적성의 방향과 실체를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비평학의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믿지 않는 가운데서 합리성 자체에서의 당위성에서 성경의 원본을 말할 수 있다고 하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망령되이 일컫고 있는 것입니다.
각주2)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롤록(Robert Rollock)은 1583-1599년까지 에딘버러 대학의 학장이었다. 그의 신학 강의는 1597년 [Treatise on Effectual Calling]이라는 제목으로 부분적으로 출판되었다. 여기에 추가된 것이 [Shorter Catechism concerning the way in Which God from the Beginning Revealed Both Covenants to the Human Race]이다. 1603년 런던에서 영어판이 나타났다. 롤록은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언약에 속하였다는 사상에서 진행한다. "하나님께서 언약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말씀하시지 아니하신다.""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11 본문인용)
이러한 하나님의 언약 사상이라고 함은 상당히 보편을 말하는 가운데서 많이 알려진 개혁 신학적 입장임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언약이라고 함에서 비로소 하나님을 규정할 수 있는 듯한 언급은 성경적이지 않으며, 오히려 하나님의 실재 안에서 언약이라고 함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형식을 갖추면서도, 분명 하나님 중심의 형태를 말하면서도 실재에 입각한 실제로는 하나님의 중심이 아닌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전락할 수 있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이 모든 해석들이 가지고 있는 반론들을 피할 수 있는 것은 고전적 견해이다. 이는 처음부터 내려 읽으며 해석하는 것으로서 우리가 흔히 하나님의 주권이라 부르는 구원 관계에서의 하나님의 독립성 또는 자결성을 표현한다는 해석이다. 문맥에서의 강조가 은혜스러우시겠다는 약속을 시행하셔서 은혜스로우시다는 것을 확언하는데 있다기보다도, 자신의 은혜로우심을 보이심에 있어서의 하나님의 주권성에 대한 강조에 있기 때문이다. 이런 이장을 취하고 보면 여호와의 이름은 기본적으로 자신의 백성에게 행하시는 모든 일에 있어서 외부에서 어떤 영향도 받으심이 없이 스스로 결정하심을 보여주는 것이다.'
(게할더스 보스, 성경신학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150. 본문인용)
해설: 게할더스 보스는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것을 말하면서 여러 가지로 읽는 법 '독도법'을 나열하고 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는 이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해석이 한 해석의 하나일 뿐이면서도 이 해석이 상대적으로 용인되어질 수 있음의 가능성을 인정한다고 할 때에는 이 해석은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는 해석으로 나타나게 된다. 즉 다른 독도법에 따라서 하나님의 이름에서 하나님을 '언약의 하나님'으로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이 있다고 하여도 그러한 해석 가능성에만 머물고 있지 그 자체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말할수 있는 것은 아니다. 따라서 자존의 하나님의 실재론적 자신 스스로 취하시는 절대 정당함과 절대 신실함은 언약의 하나님으로만의 가능성이 있는 해석적 당위성에 머물러 있지 않게 된다. 오히려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신실하심 안에서 언약의 하나님으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을 읽음이 더욱 합리성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진다.
따라서 여러 독도법의 해석들 가운데서 하나일 뿐이라는 형식적인 가능성의 한 해석뿐이라는 개념으로 다른 해석적 하나님의 이름의 해석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분명 그 합리성은 있지만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은 빠져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주권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게 된다는 것은 인식의 합당한 순서가 되어진다. 따라서 언약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도 분명 하나님의 실존적 정당함이 되어진 가운데서 그 자리매김이 되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개혁신학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는 자존적 삼위하나님의 일체적 증거에서 시작하여서 언약의 실존을 말하여야 한다.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참고 칼빈이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신학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강요에서 언급한 내용을 소개한다.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삼위일체적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각주3) 김경재, 이름없는 하느님 - 유일신 신앙에 대한 김경재 교수의 본격비판- 삼인 1996
김경재 : 네덜란드 유트레히트 대학교(Utrecht Univ)에서 '그리스도와 동아시아 종교의 만남이라는 논문으로 박사학위 현재 한신대학교 신학과 정교수 크리스찬 아카데미원장. 해석학과 종교신학, 폴틸리히 신학연구, 김재준 평전, 영과 진리 안에서.
폴틸리히의 신학이라고 함에 있어서 그 신론에 해당되어지는 비존재(Non-Being)라는 것에서는 그 합리성의 재가를 말할 수 있는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가운데서 임의적인 플라토닉적 신관에 따른 비판적 입장을 취하고 있다. 플라토닉 삼위라는 개념이 이미 그 실재적 의미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러한 것에 대한 무제약자와 같은 그러한 철학적 해석도 비판하고 있는데 그것에 동의하면서도 중요한 것은 그 플라토닉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이 아닌데도 불구하고 그러한 하나님인 것과 같이 전제로 해서 비판하고 있다는 점에서 그 비판의 사실들이 의미를 상실한다고 함을 말해둔다. 물론 그 비판의 합리성을 그의 신관에서는 자체적 정당함을 말할 수 없는 것도 먼저 기정된 사실임을 말해둔다.
목차 개요..
1.유일신 신앙에 대한 오해들
유일신 신앙은 하나라는 숫자 개념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신들 중 최고 신을 대상으로 하는 것이 아니다.
유일신 신앙은 셈족계 종교들의 문명신 신앙이 아니다.
유일신은 성경적 신앙의 독점물이 아니다.
2. 이스라엘 민족과 유대교의 유일신 사상
아브라함과 모세의 하나님체험
야훼라는 신이름의 유일신 신앙
이스라엘 예언자들의 유일신 신앙
유대신비주의 카발레에 나타나는 유일신신앙
3.그리스도교의 유일신신앙과 삼위일체론
신약성경에는 야훼라는 신 이름이 없다.
예수와 바울의 유일신 신앙
삼위일체 유일신 신앙의 고백
그리스도교 신비주의 전통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4이슬람교에 나타나는 유일교신앙
5한민족의 하느님 신앙과 유일신 신앙
6종교 다원주의와 해석학적이론들
7에필로그 종파적 유일 신앙에서 우주적생명의 광장으로
http://geocities.com/vosscare
comments:
역사적 삼위일체에 대한 논쟁에서 현대의 동일철학과 신플라톤적 실재론으로 제한되어지는 삼위일체에 대하여서 참된 삼위일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에 대한 증거가 옳음을 근거로 제시한 글입니다.
다음카페에서 아타나시우스가 구원론적인 관심을 가지고 신화를 말함이라고 함에 있어서 삼위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의 여부에 대한 논쟁이 있었고 궁극적으로 아타나시우스를 신화의 창시자라는 개념은 현대적 개념으로서의 플라톤적 실재론에 입각한 삼위일체에 근거한 합리성에서 기인되어진 것으로 비판과 책망이 있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게 되어지는 글입니다.
참고로 그러한 역사적으로 삼위일체에 대한 것을 인정하면서도 인위적차원에서 이해하는 가운데 많은 이단이 있었다는 것과 그러한 것에 있어서 제고찰하며 자존하시는 하나님으로서의 삼위일체를 말함과 증거함이 합당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다음은 다음카페에 기록했던 글입니다.
아타나시우스 의 '신화' 언급에 대한 객관적 고찰과 비판에 있어서..
글을 씀에 앞서서..
아타나시우스는 신화의 창시자임에 대한 것을 지적함으로 논란이 있는 가운데 그 신화 언급이라고 하는 것이 신론적인 입장에서 비판을 받아야 한다는 점을 지적했었는데 그것에 대한 구체적인 입장 표명의 당위성을 느끼면서 글을 쓰게 되었습니다.
아타나시우스와 캅바도기아 신학에 대한 고찰에서 그 신화 이해에 대한 것을 후스토 L. 곤잘레스(각주1) 견해를 따라서 보다 객관성을 취할 수 있도록 노력하면서 글을 준비했습니다.
1.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에 대한 언급에 대하여서..
'신화(Deification)(각주2)'또는 '신격화(divinization)(각주3)'라는 말이 그 상관성을 전제로 하는 말인가 하는 것과 단적으로 어느 하나만 주장하게 되어지는 것인가 하는 것과 그 기준이라고 하는 것이 진정 이해와 오해가 있었던 것으로 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전제로 말하게 되었다면(각주4) 그것은 삼위를 배제한 구원론에 대한 것을 말한 것으로써의 신화를 말한다는 것은 잘못 알고 있다는 것과 또한 그것은 신론적 입장에서 비판받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삼위 하나님을 기준으로 하며 하나님의 강생이라는 것에서 인간의 하나님께 나오는 성화의 개념이 있게 되어지며 이것은 플라톤적 개념입니다. 즉 클레멘트와 오리겐과 같은 알렉산드리아에서 취하고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실재관을 기준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물론 이러한 가운데서 오리겐의 입장이라는 사변적 입장을 아타나시우스가 경계하였던 것은 사실이지만 그러한 방향적 입장과 그 노력이라고 함을 그러한 실재론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삼위 하나님을 설명하기 위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각주5)
이러한 노력들이 캅바도기아 교부들에게도 동일하게 나타났습니다.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후스토 곤잘레스는 그 삼위를 말하는 가운데서의 그들을 하르낙의 판단(각주6)과 같은 유명론이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고 함을 지적하고 있습니다.(각주7)
2. 비판함에 있어서..
여기에 대하여서 저는 '삼위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인 입장을 말씀하심에 비판함'과 '곤잘레스의 삼위 하나님에 대한 변호라는 것에 대해' 비판을 하고 있습니다.
먼저 삼위일체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고 구원론적 실천적 입장을 말한다는 것은 이미 아타나시우스를 잘못 읽고 있다는 것과 그것은 곤잘레스와 같은 실재론을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나고 있는 사랑이라는 에로스가 상기설에 따라서 회귀적 본능이 있음에 대한 것으로 사실로 받아들여 상승운동을 하게 되어지는 것을 말하고 있고 아타나시우스는 그러한 것을 영혼에 적용하여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 8) 이것은 플라톤의 종교적 실재를 전제로 말하고 있음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삼위 하나님을 말하게 되어질 때에 역사적으로 캅바도기아적 입장에서 이루어진 것을 말하고 있고 그것은 신플라톤적 실재론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이것은 심각한 잘못을 유도하고 있다는 것입니다.(각주9)
결국 하나님의 실재를 상대적인 존재로서의 플라톤의 실재의 판단에서 비로소 존재하는 이데아의 한 구석에 있게 되어지는 한정된 신을 화이트헤드는 잘못되게 전제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처럼 동일본질을 말하지 못한다는 잘못된 그러한 하르낙과 같이 그러한 입장에서는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에서 비로소 언급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하고 있고 그러한 가운데서 실천적인 구원론이라고 함을 말함으로 축소하고 접근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아타나시우스가 유일신과 그 가운데서 구원론을 말한 것이라고 함을 그러한가운데서 삼위일체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격하하여 구원론적 입장의 개념의 창시자라는 언급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자존에서의 그 존재적 정당함을 따라서 그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어야 했습니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러한 자신의 표현의 합리성의 불연속성 속에서도 삼위하나님을 표현하실 수 있음과 그렇게 행하심의 신실하심을 받음이 옳은 것입니다.
그런데 동방신학에서는 비로서 삼위하나님에 대한 분명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노력하였고 그것의 노력이 평가절하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하여도 그 실재론에 있어서는 플라톤의 실재론에서 하나님을 상대적 존재로 전락시키고 말았다는 것과 이것은 삼위하나님을 해석하는 곤잘레스를 비롯하여 신론에 대한 언급을 할 수 없어 임의적 행함의 노력을 강조하기 위한 합목적적 신론을 배제한 구원론을 어색하게 내놓고 있는 것은 비판받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아타나시우스의 신화(Deification)라는 개념도 결국은 신의 본질을 도달 할 수 없는 유사본질을 동일 본질로써 말하고자 하는 노력의 초석을 놓은 사람으로서 이해하고 그 말을 사용한 것입니다. 이것은 인위적으로 신을 말한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은 이러한 판단을 받으시지 않으신다는 것을 분명하게 말함으로 글을 맺습니다.
각주1)
후스토 L. 곤잘레스
큐바출신/감리교목사로서
예일(Yale)대학대학원 졸업(M.A.Ph.D.)
에모리(Emory)대학교 교수(8년간)
W.C.C. Faith and Order 위원
현재 International Theological Center 교수
Columbia Theological Seminary 교수
감리교 목사님이시고 또한 세계 에큐메니칼 위원으로써 그 사상적 실재는 개인적으로 달리합니다. 그러나 실재에 입각한 실제론의 차이가 있으면서도 공통적인 합리성이 표현되어질 수 있다고 할 때에 저자 목사님의 합리성의 객관성에서 배우고 있습니다.
그는 제 3세계 신학자로써 그의 이 주저서는 스페인어로 번역되어진 가운데서 남미과 영어권에서 택스트로 사용되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습니다. 그는 역사가 롤란트 베인톤이 언급한 것과 같이 영어와 이탈리어와 독일어와 기타 언어에 능숙하신 분으로써 사상의 전반적인 측면을 다룸에 있어서 그를 귀하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욱 곤잘레스는 그 사상을 전계함에 있어서 역사적인 측면을 고려하여서 언급하고 있기 때문에 전반적인 사상의 일관성을 읽을 수 있다고 함이 그의 저서의 장점으로 역자들은 표현하고 있습니다.
물론 목사님과 실재가 다르기 때문에 사상적 입장에서 비판적 입장이 있게 되어지는데 이 글에서도 그것을 주목하신다면 저의 앞서 판단하고 책망이라고 할 수 있는 것에 당위성을 보실 수 있을 것입니다.
각주2)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하신 내용입니다.
물론 아닙니다. 문맥상의 결함에서 나온 오해인듯 합니다.
번호: 6135 글쓴이: 인권의 왕도
조회: 29 날짜: 2005/02/24 22:12
(중략..)
먼저 신화(Deification) 교리란 삼위일체를 말하지 않는다는 것, 그 당시 교부들 사이에 유행했던 것이고, 믿었던 내용인데 그것은 “하나님이 사람이 된 것은 사람으로 하여금 하나님 되게 하시기 위함이다” “God became a man that men might become God“라는 것을 말 합니다.
교부들로는 아타나시우스와 클레멘트(150-215), 성 어거스틴(354-440), Justin Martyr(2C), Irenaeus of Lyon(2c), Hippolytus of Rome(3c), Basil(330-379) 등이 있다고 합니다.
'사람은 신격(Godhead/경배의 대상으로서)에서는 아니며, 생명과 본성에서 하나님이 된다'(베드로 후서 1:4절 참조)로 설명 합니다. 동방교회에서는 이것이 신앙의 최종 목표라고 합니다. 이와 관련된 가장 대표적인 교부는 아타나시우스라고 합니다.
그는 예수님의 성육신을 다룬 책인 'On the Incarnation, 54:3'에서 '하나님이 사람되신 것은 사람으로 하나님 되게 하기 위함이다(He was made man that we might be made God)' 라고 말했습니다. 아타나시우스(295-373)
(후절 생략) ..
각주3)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351-352.
'바로 여기에서 아타나시우스의 구원론의 핵심이 무엇인지 알게 된다 즉 오로지 하나님 한분만이인간을 구원할 수 있다는 내용이다. 만일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이 새로운 창조라면, 창조자 한분만이그것을 우리에게 가져다 줄 수 있다. 한편 우리가 상실한 불멸성은 하나님의 형상에 따라서 사는 존재 속에 자리 잡고 있었으므로, 즉 하나님과 비슷한 존재를 뜻하기 때문에 우리가 필요로 하는 구원은 일종의 신격화(神格化:divinization: θεοποιησι(데오포이에시스))이다. 하나님만이 우리에게 자신의 존재와 유사한 존재를 수여해 주실 수 있으므로 신격화에 있어서도 구세주는 하나님이어야 한다.'(pp. 351-352.)
각주4)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모든 교리는 기독교의 핵심을 내포하고 있는 근본 원리로서 종교적 의의가 있었다. 어떤 교리가 옳은지 혹은 그른지는 그것이 기독교의 원리를 어느 정도로 그리고 어떻게 표현하는지 살펴보면 판단할 수 있다. 아타나시우스에게 있어서 이러한 원리는 근본적으로 두개인데, 즉 유일신관과 기독교 구원론이었다.(p.347.)'
각주5)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347
'그의 신학은 내용적으로 오리겐의 내용과 아주 가까운 점이 있음을 종종 발견할 수 있으나, 그의 관심사는 사색적이고 학문적인 면보다는 실제적이고 신앙적인 데 있었기 때문에 그의 방법론은 고대 알렉산드리아의 출신 신학자들이 추종했던 방법론과는 사뭇 달랐다. 그렇다고 그는 이론적 문제들을 한쪽으로 제쳐놓고 실천적인 주제들만 논의했다는 뜻이 아니라, 모든 교리적 주제들이 갖는 신앙적 의미를 끊임없이 추구했다는 뜻이다.'(p.347.)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1.
기독교 사상사를 영ㄴ구하는 일젼의 역사가들은 “초기 니케아 사상”과 “후기 니케아 사상” 사이에 현저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하고 이러한 바문을 제기하였다. 이러한 역사가들 가운데 하르낙(Harnack)은 캅바도키아 교부들의 신앙형식은 유사본질-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이 동일본질이 아니고 비슷한 본질이라고 보는 이론-주장을 니케아 신앙의 형태로 교묘하게 탈바꿈시킨 것이라고 강조했다. 따라서 하르낙은 최종적인 승리를 얻은 이론은 “동일본질”이 아니고, “유사본질”이라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p. 381.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 383.
'이러한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이론은 플라톤적인 실재론의 구조 안에서 형성된 것이기 때문에 현대의 유명론적인 맥락에서 해석하려 드는 것부터 정당하지 못한 일이다.' p. 383.
각주8)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 pp. 347-348
‘이방인에 반대해서’를 살펴보면, 고대 변증신학자들과 유사한 방법으로 이교들의 다신론을 공격한 다음, 아타나시우스는 하나님을 알 수 있는 수단들이 무엇인지 토론한다. 원리적으로 이 수단들은 둘이 있는데, 영혼과 자연이라고 보았다.
인간의 영혼을 통해서 하나님을 알 수 있다. “비록 하나님께서 모든 것 위에 계시지만, 그분(하나님)에게 이르는 길은 멀지 않으며, 우리 자신들 밖에 있는 것도 아니며 오히려 우리 속에 있으며, 우리들 스스로도 얼마든지 찾을 수 있다. 모든 사람들은 영혼이라는 이 길을 가고 있는데 다만 몇 사람들이 그 길을 따르지 않으려 할 뿐이다.
(중략)...
영혼은 하나님의 형상과 모습으로 만들어졌으며 또한 하나님의 형상, 즉 하나님의 말씀(Word)을 반사시킬 수 있는 거울의 역할을 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죄가 그 거울을 흐리게 했기 때문에 사전에 말끔히 닦지 않으면 거기에 비추이는 말씀을 볼 수 없다. 이상과 같은 표현은 오리겐 이래로 알렉산드리아 학파에서는 흔하게 유행했던 플라톤적인 주제이다.(pp. 347-348.)
각주9) 화이트헤드 '이성의 기능' 정연홍 역 이문출판사
여기서 화이트 헤드는 신을 의미한다 할 수 있는 이성(Geist)을 '플라토닉 이성'과 '율리시스 이성' 또는 '생물학적 이성'으로 나누어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화이트헤드의 입장에서 본다면 기독교의 하나님은 삼위 하나님인데 결국은 플라톤적 실재에 입각해서 당위성을 받는 그러한 신으로 내제적 이성을 말한다고 할 때에 즉 헤겔의 자연이성의 자기를 알아가는 가운데서의 성령의 역사는 그것과 달리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전제에서 그 영역을 나누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르낙(Harnack)도 캅바도기아 교부들이 '동일 본질'을 말할 때에 '유사 본질'을 말하고 있는 것은 그 동일본질이라는 귀결적 판단이 그 실제적 즉 사실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이야기 하고 있는 것입니다.
플라톤의 견해에서 신에 대한 지식을 가질 수 있는가 도달 할 수있는가에 대하여서 두 견해가 나뉘어지고 있습니다.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이해 한양대학교출판부, 철학이란 말에 있어서, 지혜를 사랑하다는 말을 함에 있어서, 헬라어 '필레인'이라는 말이 구체적인 지식을 가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의 덕이라는 개념에서 알 수 있는 지식을 말함으로써 고르기아스적인 회의론적 입장과 달리 신에 대한 인식의 가능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읽게 합니다.)
이러한 플라톤의 지식이라고 함이 본성에 이를 수 없다는 개념에서 그 실천적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인식의 상승이라고 할 때에 동일본질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유사본질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 옳다는 입장을 취할 수 있다고 봅니다.
즉 합리성의 연속성을 말하지 못하는 잘못된 플라톤적 실재론이 삼위하나님을 말할 수 있다는 식으로 언급하고 있는 것은 하나님을 상대적 편협한 존재로 전락시키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