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독교 사상에서 신앙의 표준이라고 하는 것을 성경과 전승 또는 전통에 입각해야 한다는 그러한 구교의 입장과 오직 성경만이 그것이라는 신교의 대립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이러한 인식에 대한 차이라는 것은 중세에도 있었던 것이지만 종교개혁에서 그 사실을 말할 수 있고 그것이 구교와 신교의 차이라고 할 수 있을만큼 상당히 분별의 기준이 되어지고 있습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극단적으로 신교에서는 전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동일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이라고 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지혜의 증거와 전통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함을 말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하였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논하는 것이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 그리고 마틴 루터 그리고 존 칼빈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주체자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칼빈의 입장을 통하여서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각주1)
역사적 사태적 입장에서 본다면 칼빈이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이해되어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프랑스와 방델이 칼빈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각주2)
'프랑스와 방델'은 칼빈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방델'의 입장은 칼빈의 실재론(각주3)과 전혀 다른 신관적 입장이기 때문에 즉 바르트적 입장이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학자들도(각주4) 칼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각주5) 역사보편적인 상황적 사태파악에서는 또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방델의 언급을 주목해보면 이러한 언급을 칼빈이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각주2에서 재인용)
아타나시우스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따라야할 권위가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앙고백에 대한 카돌릭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각주6)
그런데 칼빈의 실재론을 이해할 때에는 그의 실재론에서의 정당함을 얻는다면 비록 실재론적 기반은 다르다고 하여도 합리적 방향성의 동일한 표현인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실재론이 다른 가운데서도 동일한 실제의 기술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심이 달라도 표현이 같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각기 모두 자신의 실재론에서 기본적인 중심에서 그 합리성의 진실을 동일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해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움을 감추는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실재론적 입장이 다르면서도 플라톤에 대한 칭찬을 하였던 것인데 그 플라톤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전부 수용한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들이 있고 이미 '플라톤적 입장에 내제하였다고 할 수도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각주7)의 실재론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가운데 동일철학자들의 자기 기만적 해석과 사실로 칼빈을 오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론적인 즈음에..
칼빈이 이러한 카롤리와의 대화와 상관성에서 말한 내용은 전통을 무시한다는 개념 자체를 획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맹목적인 사수라는 개념은 신앙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 달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자기의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수라는 개념의 언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고백으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실재론에 부합되어지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상대적인 것을 사실로 취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운데서 전통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통을 이해함이며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동일하게 전통의 이해로 고백함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1) 많은 종교개혁적 입장의 지도자들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보다도 칼빈을 언급하는 것은 먼저 그들의 실재관이 모두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성만찬의 실제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 또한 그러한 실재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 중에 그 실재관에 가장 분명하였던 자가 바로 칼빈이라고 함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라고 함은 본문을 기술하는 가운데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각주2) 칼빈의 신학서론, 프랑스와 웬델/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pp. 63-64.
'카롤리(caroli)의 비방은 심각하였으며, 그러한 비방이 칼빈 자신의 모든 일을 해치리라는 것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활발한 토론이 개최되었으며, 토론기간 중에 비례(viret)는 자신의 제네바 동료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칼빈은 카롤리의 반박을 제대로 견디어 내지 못하였고, 또한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에 대하여서는 더욱 인내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자신이 전통적인 기독론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주장하였지만, 카롤 리가 요구한 증거를 거부하였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베른(Bern)시의회로 회부되었으며 그곳에서 칼빈의 입장은 많은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칼롤 리가 잘못이라는 것도 베른시의 중재인이 확인하지 못한채, 두 반대자는 서로 제각기 갈라서게 되었다.'
각주3) 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유명론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을 축출하게 되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되어진 'contemplated'라는 말은 단순히 명상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뜻하심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으로써의 삼위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정당함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강요의 시작에서의 지식을 말함의 기본이 되어지는 실재적 분별력이며 이것은 여호와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칼빈이 그의 신앙과 신학의 실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각주4) 에밀 두메르그, 칼빈신학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에밀 두메르그는 칼빈의 합리성은 불연속성적인 합리성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삶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칼빈이 그러한 불연속성적인 측면의 언급의 당위성의 출처가 칼빈의 실재론적 정당함을 찾고 있다는 점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인 기술을 위한 노력과 사실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실제적인 본모습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각주5) 게할더스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역 엠마오
게할더스보스는 그의 바울의 종말론에서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언어라고 하는 것도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와 같은 자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책으로 만나는 70인의 사상가'에서 롤랑바르트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음) 자신의 학문이라고 함이 언어의 한계로 나타난다고 하였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도 언어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아일랜드 철학교수 리차드 커니의 현대 유럽철학의 동향에서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에서 그 롤랑바르트와 함께할 수도 있는 입장이 되어지지만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언어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함을 말함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
도이베르트, 신사유비판, 크리스찬다이제스트..
도이베르트의 기독교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상대적 차원의 특정 철학만이 기독교 철학이라는 식의 접근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계로 코넬리우스반틸이 자신의 저서 개혁주의신학 서론의 서문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 도이베르트의 신사유비판의 글 서문에서는 자신의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오해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실재적 입장은 달리하나 실재론적 입장이해가 합리성의 재고를 앞선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 중세편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81-82
'빈센트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것들과 우리에게 축적된 사항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원작자로서의 교만함보다는 해설자로서 충실함을 보이겠다”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성경은 참된 교리의 근본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확정할 수 있도록 수단으로써 전통을 주셨다.
더욱이 카돌릭교회 안에서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모든 곳에서 믿어지는 사항을 우리도 계속 주장함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빈센트는 이단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 감독이 예정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이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가톨릭교회의신앙이 결코 아닌 형식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에 있어서 빈센트라는 자의 어거스틴을 반론하는 가운데서 전통을 말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분명한 반론적 입장이 없어왔다고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역사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되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지론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위개적 실재론에서는 그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반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거스틴적 입장에서도 변론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그 때 당시 신학사상가들이 고민했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7) 전광식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사랑광기' 대한철학회논문집 63권
에로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항상 상기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그러한 기억되어진 곳을 사모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적 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극단적으로 신교에서는 전통을 전혀 생각하지 않는다는 것으로 오해하기 쉽습니다. 그렇지 않습니다. 성경과 동일한 판단 기준이라는 것에 반대한다는 측면에서 전통이라고 함을 부인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지지를 받을 수 있는 지혜의 증거와 전통은 여전히 유효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오직 성경이라고 함을 말했던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에서는 어떻게 말하였을까 하는 것에 대하여서 논하는 것이 상당한 중요성을 가진다고 하겠습니다. 스위스의 개혁자 쯔빙글리, 그리고 마틴 루터 그리고 존 칼빈을 일반적으로 종교개혁의 주체자들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중에서도 칼빈의 입장을 통하여서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점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각주1)
역사적 사태적 입장에서 본다면 칼빈이 전통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가 하는 것은 상당히 이해되어지지 않는 부분이기도 합니다. 이것에 대하여서는 프랑스와 방델이 칼빈을 서술하는 가운데서 읽을 수 있는 부분이기도 합니다.(각주2)
'프랑스와 방델'은 칼빈의 이러한 모습을 이해할 수 없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자신도 이해할 수 없음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프랑스와 방델'의 입장은 칼빈의 실재론(각주3)과 전혀 다른 신관적 입장이기 때문에 즉 바르트적 입장이기 때문에 칼빈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다른 신학자들도(각주4) 칼빈을 바르게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실재론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는 것이며'(각주5) 역사보편적인 상황적 사태파악에서는 또한 이루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프랑스와 방델의 언급을 주목해보면 이러한 언급을 칼빈이 말한 것으로 기술하고 있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각주2에서 재인용)
아타나시우스에게 신앙고백을 하는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은 아타나시우스의 고백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따라야할 권위가 비로소 나오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이것은 중세의 신앙고백에 대한 카돌릭적 입장에서 보면 이해할 수 없는 것이기도 하다(각주6)
그런데 칼빈의 실재론을 이해할 때에는 그의 실재론에서의 정당함을 얻는다면 비록 실재론적 기반은 다르다고 하여도 합리적 방향성의 동일한 표현인 가능하다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실재론이 다른 가운데서도 동일한 실제의 기술을 할 수 있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중심이 달라도 표현이 같을 수 있는 것이 있고 각기 모두 자신의 실재론에서 기본적인 중심에서 그 합리성의 진실을 동일하게 말하기 때문이다.
쉽게 표현해서 사랑한다고 하면서도 진실로 사랑하는 사람과 미움을 감추는 입장에서도 사랑한다는 표현을 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의미에서 전혀 실재론적 입장이 다르면서도 플라톤에 대한 칭찬을 하였던 것인데 그 플라톤적 실재론이라고 하는 것을 전부 수용한 가운데서 언급되어지는 것과 같이 오해하는 자들이 있고 이미 '플라톤적 입장에 내제하였다고 할 수도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각주7)의 실재론으로 이해하려고 하는 가운데 동일철학자들의 자기 기만적 해석과 사실로 칼빈을 오해하기에 이르렀던 것입니다.
결론적인 즈음에..
칼빈이 이러한 카롤리와의 대화와 상관성에서 말한 내용은 전통을 무시한다는 개념 자체를 획일적으로 표현하는 것이 아니라 전통이기 때문에 그 자체적 권위가 있는 것으로 맹목적인 사수라는 개념은 신앙적이 아니라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믿음의 분량이 달라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따르는 가운데서 정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믿을 때에 자기의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오늘날도 보수라는 개념의 언어를 많이 쓰고 있는데, 전통이라고 하는 것은 무조건 지켜야 한다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분별하여서 하나님 앞에서 나의 고백으로 동일한 고백을 할 수 있는 것을 말하고자 하는 것이 칼빈의 입장이었던 것입니다. 즉 하나님 앞에서 실재론에 부합되어지는 것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얻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때에 그 상대적인 것을 사실로 취할 수 있고 상대적으로 동일하게 고백하는 가운데서 전통의 실존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전통을 이해함이며 이것은 우리 성도들이 동일하게 전통의 이해로 고백함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1) 많은 종교개혁적 입장의 지도자들을 말할 수 있으며 또한 일반적으로 받아들여지는 마틴 루터나 쯔빙글리 보다도 칼빈을 언급하는 것은 먼저 그들의 실재관이 모두 달랐다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으로 성만찬의 실제에 대한 입장이 다른 것 또한 그러한 실재관의 차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두번째는 그들 중에 그 실재관에 가장 분명하였던 자가 바로 칼빈이라고 함을 말하도록 하겠습니다. 그 이유라고 함은 본문을 기술하는 가운데서 밝히도록 하겠습니다.
각주2) 칼빈의 신학서론, 프랑스와 웬델/저, 한국칼빈주의연구원/편역 기독교문화협회 pp. 63-64.
'카롤리(caroli)의 비방은 심각하였으며, 그러한 비방이 칼빈 자신의 모든 일을 해치리라는 것을 칼빈은 잘 알고 있었다. 매우 활발한 토론이 개최되었으며, 토론기간 중에 비례(viret)는 자신의 제네바 동료들을 돕고자 최선을 다하였다. 칼빈은 카롤리의 반박을 제대로 견디어 내지 못하였고, 또한 자신에 대한 개인적인 공격에 대하여서는 더욱 인내하지 못하였다. 칼빈은 자신이 전통적인 기독론의 지지자임을 당당히 주장하였지만, 카롤 리가 요구한 증거를 거부하였다. 즉 그는 고대의 세 상징(Symbols), 곧 사도신경, 니케아 신조, 아타나시우스 신조에 자신이 서명하였다는 증거를 보이기를 거부하였다. 그 거부의 이유는 매우 불분명하다. 그러나 교의적 문제에 있어서 칼빈이 전통에 중요성을 부여하지 않고자 하였던의도는 명백하였다. 그가 논전을 시작할 때부터 “우리는 한 하나님(one God)에게 신앙 고백을 하는 것이지 아다나시우스에게 신앙을 고백하는 것이 아니다. 그러한 상징은 어떠한 합법적 교회에 의해서도 용납되지 않는다.”라고 분명하게 밝히지 않았던가? 그렇지만 또한 칼빈은 자신의 반태파들 앞에서 자신을 변명하고자 원하였던 것 같지는 않다. 이 문제는 베른(Bern)시의회로 회부되었으며 그곳에서 칼빈의 입장은 많은 의심을 받게 되었지만, 칼롤 리가 잘못이라는 것도 베른시의 중재인이 확인하지 못한채, 두 반대자는 서로 제각기 갈라서게 되었다.'
각주3) 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But God also designate himself by another special mark to distinguish himself more precisely from idols. For he so proclaims himself the sole God as to offer himself to be contemplated clearly in three persons. Unless we grasp these, only the bare and empty name of God flits about in our brains, to the exclusion of the true God." (234p)(기독교 강요 I권 13장 2절)
"그러나 하나님은 또 다른 특별한 표식으로 자신을 나타내 주심으로써 우상으로부터 보다 세밀하게 자신을 구별하신다. 하나님은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천명하심으로서 자신의 삼위(三位)안에서 명료하게 명상되도록 제시하셨다. 만약우리가 이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의미없고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만이 우리의 두뇌를 맴돌아 결국 참 하나님은 축출되게 될 것이다."(한영기독교 강요 245p)
여기서 우리가 주목하게 되어지는 것으로서 공허한 하나님의 이름에 대한 칼빈의 중심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을 전제로 말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이다.
즉 하나님의 이름의 유명론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자들의 모습과 그 인식이라고 함이 하나님을 축출하게 되어질 것이라는 점을 지적하고 있다. 그리고 여기서 번역되어진 'contemplated'라는 말은 단순히 명상의 개념이라기보다는 삼위 하나님의 뜻하심을 깊이 생각하다는 것으로써의 삼위 하나님의 절대보편적인 정당함이 어디 있는가 하는 것을 분별하는 은혜를 말하는 것이다.
이것은 또한 기독교 강요의 시작에서의 지식을 말함의 기본이 되어지는 실재적 분별력이며 이것은 여호와 이름의 실재론적 증거를 칼빈이 그의 신앙과 신학의 실체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와 같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에서 칼빈은 삼위일체에서 신학적 실제를 시작하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옮김 크리스챤다이제스트, 제7장 개혁주의 신학에서 언약의 교리 논문 참고 p. 307.)
각주4) 에밀 두메르그, 칼빈신학의 성격과 구조, 이오갑역 기독교문서선교회
에밀 두메르그는 칼빈의 합리성은 불연속성적인 합리성을 그대로 기술하고 있다는 점을 그 특징으로 삶고 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칼빈이 그러한 불연속성적인 측면의 언급의 당위성의 출처가 칼빈의 실재론적 정당함을 찾고 있다는 점을 읽지 못하고 있다는 점에서는 객관적인 기술을 위한 노력과 사실들이 많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칼빈의 중요한 실제적인 본모습은 놓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각주5) 게할더스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역 엠마오
게할더스보스는 그의 바울의 종말론에서 특히 종말론과 구원론의 상호작용에 대한 언급을 하면서 그 언어라고 하는 것도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을 주장한 바가 있다. 사실 롤랑 바르트와 같은 자는 '문학은 어디로 가는가'라는 책에서('책으로 만나는 70인의 사상가'에서 롤랑바르트에 대한 언급에서 찾을 수 있음) 자신의 학문이라고 함이 언어의 한계로 나타난다고 하였고 프랑스 철학자 메를로 퐁티도 언어의 보편성을 말하고 있다는 점(아일랜드 철학교수 리차드 커니의 현대 유럽철학의 동향에서 언급한 것을 찾을 수 있다) 에서 그 롤랑바르트와 함께할 수도 있는 입장이 되어지지만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언어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적 판단을 받아야 함을 말함으로 받을 수 있게 한다.
도이베르트, 신사유비판, 크리스찬다이제스트..
도이베르트의 기독교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어떤 상대적 차원의 특정 철학만이 기독교 철학이라는 식의 접근은 옳은 것이 아니라고 보는 관계로 코넬리우스반틸이 자신의 저서 개혁주의신학 서론의 서문에서 반대하고 있는 것과 같이 반대할 수 있다고 본다 그러면서도 그 도이베르트의 신사유비판의 글 서문에서는 자신의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하여서 오해하고 있음을 언급하고 있는데 그의 실재적 입장은 달리하나 실재론적 입장이해가 합리성의 재고를 앞선다는 점에서는 동의할 수 있는 것이다.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II 중세편 이형기 차종순 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81-82
'빈센트의 말에 의하면, “우리의 조상들이 유산으로 물려준 것들과 우리에게 축적된 사항들을 기술함에 있어서 원작자로서의 교만함보다는 해설자로서 충실함을 보이겠다”고 자신의 목적을 밝혔다. 성경은 참된 교리의 근본적인 자료이다. 그러나 성경의 의미를 발견하기도 어렵고 또 여러 가지로 해석될 수 있기 때문에 주님께서는 무엇을 믿을 것인가 확정할 수 있도록 수단으로써 전통을 주셨다.
더욱이 카돌릭교회 안에서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하여, 모든 곳에서 믿어지는 사항을 우리도 계속 주장함을 분명하게 해야 한다.
빈센트는 이단들의 역사에서 볼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들면서 자신의 주장을 재천명한다. 어거스틴이라는 이름을 언급하지 않았으나, 아프리카 감독이 예정에 대하여 가르친 내용이 항상, 모든 사람에 의해서, 모든 곳에서 가르쳐지지 않기 때문에 그의 가르침은 가톨릭교회의신앙이 결코 아닌 형식이므로 마땅히 배격되어야 할 것이라고 했다.'
이는 후스토 곤잘레스의 중세에 있어서 빈센트라는 자의 어거스틴을 반론하는 가운데서 전통을 말하였던 것인데 이러한 것에 대한 분명한 반론적 입장이 없어왔다고 할 수 있는 전반적인 역사이해에 있어서 칼빈의 이러한 언급이라고 하는 것은 이해되어질 수 없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리고 중세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지론적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 가운데서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위개적 실재론에서는 그 권위라고 하는 것을 인정해야 하는데 그것을 반박하고 있는 상황에서 어거스틴적 입장에서도 변론되어질 수 없는 것이라는 것쯤은 그 때 당시 신학사상가들이 고민했을 수도 있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각주7) 전광식 '플라톤의 파이드로스에 나타난 사랑광기' 대한철학회논문집 63권
에로스를 이해함에 있어서 항상 상기하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미 그러한 기억되어진 곳을 사모하는 것으로써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신플라톤적 회귀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