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omments: 인드라라는 닉네임의 분이 저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말하는 실제론을 거론할때에 그것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 따른 답변으로 준비한 글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대화되어진 것을 그대로 살려서 글을 옮겼습니다.
본문..
인드라님이 지적한 객관에 대한 시비, 특히 피해의식에 대한 객관성 시비에 답변으로..
객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객관적이라는 판단함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기본적 입장이 되어지며.. 또한 이 객관은 사태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공감대로 형성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관념의 실제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실재라는 개념의 논쟁은 많이 있어왔고 또한 그러한 실재논쟁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문화의 역사적으로, 기독교적인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많았고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실재하지 않는 것에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에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신론자들이나 안티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회의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실제 즉 객관적 사태분석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뿐 진정으로 실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태어 어렵게 묘사사기 보다는 쉽게말하고 표현함이 실제적으로 납득 정당함에 따른 진리에 가깝다는 방법론에 입각한 사람은 좀 장황한 판단과 표현이라고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싫어하며 그러한 것이 그 사람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의 표현하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화라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의 차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기반적 인식을 찾음이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되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인식의 근원이 이미 판단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자의적이나마 변명적 타당성을 세우고 그러한 당위성을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장황한 해석이나 그러한 것을 위한 일변도를 의도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에 실제적인 가운데서 간결하든 장황하든 그 형태의 모습과는 달리 타당성이 있는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문제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인드라님의 반론에 피해의식이라고 함을 제가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의 다양성이라는 현상적 이해와 그에 따른 실제의 분별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이단들을 비롯하여서 사회에 악을 끼치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실제분별이 없는 가운데서 의미를 상실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전반의 정체성이라고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석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똑같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어지는 것은 인드라님의 직접적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그렇지 않든 그 상관성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방향성에서 인드라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까지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현대 비평신학이라고 함과 철학들의 피해의식적인 표현의 정체성이 가능한 것에서 비롯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이미 철학과 신학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인데 그러한 학문적 경향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지지 않은 혐오하시는 분들의 입장에 의도하든 하지 못하든 인식강요가 되어진 가운데 승인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각주1)과 ‘영미철학적 신학’에서의 견해 차이는 생각 외로 아주 심합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것에 있어서 상관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시 모두 비판되어질 수 있는 "추상적 실재의 상관성"각주3)에 따른 연민으로 이미 이성적 상식적인 판단에서도 지나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눈치를 보면서도 안토니 씨슬튼은 자신의 합리성을 펼치고 있는데’각주4) 이는 그의 실재의식의 비판이라고 함에 거부할 수 없음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이러한 판단들이라고 함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하여서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추상적 실제라고 하는 것 보편성과 추상적 실재의 특수성에 대하여서 실제를 통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그 타당성에서 의미를 상실했음에 대하여서 그러한 사람들의 입장이 ‘환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각주5)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안믿어지니깐 상대적이지 않은가 확실성이 어디 있는가 객관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주관적 표현의 객관성에 동의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진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드라님에 필요이상의 주관적 인식의 확대로 피해의식을 말하게 되어지는 객관성의 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이미 어떤 종교심리학자들이 자신의 방법이 끝나고 있을 알았던 지점에서 끝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6)각주7)는 언급을 주목한 바 있는데 ..
이것은 추상적 실재와 보편의식으로 인위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말들밖에 안된다는 것은 지각있는 자들의 결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의 객관성이 저의 주관이라고 함의 언급이라고 단정하며 자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객관성에서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일축하려고 하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의도가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보시라고 저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승인이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 인드라님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에 객관성의 근거를 포함해서 글을 남깁니다. 앞으로는 그만한 객관성으로 말한다는 기본적인 신뢰는 대화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주1) 포스터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전에 제기했던 방법이 자체를 서술에 국한시키는지 아니면 자체를 설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려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최근의 독일 신학이 똑같은 문제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빈델반트-리케르트(Windelband-Rickert) 역사학파는 ‘표의기술적인 방법’(method ideographic)을 선정하고, 딜타이-분트(Dilthey-Wundt) 학파는 ‘법칙정립적인 방법’(method nomothetic)을 선정한다. 전자는 사실상 서술적(descriptive)이고 후자는 설명적(explanatory)이다”(George Burnam Foster, The Finality of the Christian Religion, p. 309.)
각주 2) ‘독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은, 역사성(historicality) 또는 역사적 제약성(historical conditionedness)의 양면적 성질, 즉 고대 택스트 및 현대의 해석자라는 양측의 역사적 제약성을 진지하게 취급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영국 및 미국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신약 성서 해석자에게 주변적 관심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단지 이론적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상식의 차원에서 그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가 Dilthey나 Heidegger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형성되지 않았을, 엉뚱한 지성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42.)
각주3) 셋째, 또다른 이유로 인하여 철학적 기술이 문제시 된다. 해석학적 과제의 기술을 용의하게 하는 것에 덧붙여, 철학적 범주들은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할 때에도 역시 유용하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3.)
본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독일 신학의 해석학적 실제와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적 영향력으로 실체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함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해석적 실제규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독일 신학과 영미 신학의 차이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반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각주4) Cornelius Van Til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주의 학파와 같은 어떤 특정학파는, 명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들로부터 유래하는 통찰력들을 이용하는 어떠한 시도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8.)
안토니 시쓸튼이 의식하고 있는 반틸의 책은 반틸의 변증학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안토니 그는 각주에서 반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반틸의 입장에 대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제한다고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실제라는 것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안토니 시쓸튼이 비판하고 있는 Dilthey와 같은 자들로써의 헤겔 철학적인 영향력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변증적 입장 대화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적인 입장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은 궁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표의기술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이도 역시 그 범주적 실체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각주5) 따라서 현대 종교 심리학파의 방법 전체는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동일한 궁극성의 승인된 가정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우연의 우주로부터 생긴 인간이 자기 설명적(self-explanatory)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방법은 전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에 직면한 때조차 성공적이었다는 프랏트의 진술들을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성취한 놀라운 업적들에 대해 자유롭고 유창하게 말할 때, 그리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조사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개념에 찬성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가 전체의 비전을 볼 수 있도록 정상에 오르지 못한 내적인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우선 아주 잘 느끼며 산을 오를 준비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환자를 생각한다.
각주6)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69.
각주7) “심각하게 복잡한 과정을 정의 내리기 위한 탐구는 항상 그와 같이 시험적인 융통성이 있는 진술로 끝난다. 그것은 경험의 산 실새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며, 그것을 서술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또 그것의 특성들과 단계들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얻으려는 신중한 노력으로 끝난다”
(Edward Scribner Ames, The Psychology of Religious Experience, p. 13.)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70.)
http://geocities.com/vosscar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