목요일, 9월 23, 2004

실재론에 대한 객관성 시비의 답변으로..


comments: 인드라라는 닉네임의 분이 저의 자존의 하나님의 이름에서의 정당함을 말하는 실제론을 거론할때에 그것도 주관적인 것이 아니냐는 반문에 따른 답변으로 준비한 글이었습니다. 카페에서 대화되어진 것을 그대로 살려서 글을 옮겼습니다.

본문..

인드라님이 지적한 객관에 대한 시비, 특히 피해의식에 대한 객관성 시비에 답변으로..


객관을 어떻게 이해할 것인가 하는 문제는 그 객관적이라는 판단함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받을 것인가 하는 것을 말하는 기본적 입장이 되어지며.. 또한 이 객관은 사태를 파악하는 가운데서 인식되어지는 공감대로 형성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관념의 실제라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이며 또한 이것은 인식론적인 측면에서 상당한 중요한 것입니다.

생각과는 달리 이러한 실재라는 개념의 논쟁은 많이 있어왔고 또한 그러한 실재논쟁이 바로 기독교의 핵심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문학이나 문화의 역사적으로, 기독교적인 역사적인 측면에서도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이루어지는 인식의 형성에서 벗어나기 위한 노력들이 많았고 그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의 정체성을 인정하지 못한다는 개념입니다. 한마디로 실재하지 않는 것에 임의적으로 말한다는 것에 기독교의 진리라고 하는 것도 같은 판단을 받아야 한다는 것이 무신론자들이나 안티적인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러한 인식론적 회의라는 개념은 인위적인 실제 즉 객관적 사태분석에 따른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뿐 진정으로 실재를 말할 수 없기 때문에 구태어 어렵게 묘사사기 보다는 쉽게말하고 표현함이 실제적으로 납득 정당함에 따른 진리에 가깝다는 방법론에 입각한 사람은 좀 장황한 판단과 표현이라고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싫어하며 그러한 것이 그 사람의 의식을 표현하는 것이기보다는 그의 표현하지 못함이라고 하는 것을 나타내는 것이라는 입장을 취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대화라고 하는 것이 너무 피상적으로 인식의 차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그 기반적 인식을 찾음이 좀더 서로를 이해하고 건설적인 대화가 되어질 수 있을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쉽게 표현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이라고 하는 인식의 근원이 이미 판단되어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으니 그것에 대한 자의적이나마 변명적 타당성을 세우고 그러한 당위성을 주장하라는 것입니다.

물론 장황한 해석이나 그러한 것을 위한 일변도를 의도하고 말씀드리는 것은 아닙니다. 다만 그러한 것에 실제적인 가운데서 간결하든 장황하든 그 형태의 모습과는 달리 타당성이 있는 글이 있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하시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실제의 문제를 말씀드렸던 것입니다.


인드라님의 반론에 피해의식이라고 함을 제가 말한 것에 대하여서..


기독교의 다양성이라는 현상적 이해와 그에 따른 실제의 분별의식이 없는 가운데서 이단들을 비롯하여서 사회에 악을 끼치는 모습이 전혀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들이 실제분별이 없는 가운데서 의미를 상실하는 자들의 악함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 전반의 정체성이라고 필요이상으로 확대해석해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역시 실제의식이라고 하는 것이 없는 전형적인 똑같이 기독교의 입장에서 비판을 받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확대해석을 의도하는 것으로 보이게 되어지는 것은 인드라님의 직접적인 인식에서 비롯되었던 그렇지 않든 그 상관성의 여부를 떠나 그러한 방향성에서 인드라님이 자유롭지 못하다는 점까지 지적하겠습니다.

이것은 현대 비평신학이라고 함과 철학들의 피해의식적인 표현의 정체성이 가능한 것에서 비롯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이미 철학과 신학에서 다루어졌던 것들인데 그러한 학문적 경향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연스럽게 신앙을 가지지 않은 혐오하시는 분들의 입장에 의도하든 하지 못하든 인식강요가 되어진 가운데 승인되어지고 있다는 것입니다.

‘독일 신학’각주1)과 ‘영미철학적 신학’에서의 견해 차이는 생각 외로 아주 심합니다.각주2) 그리고 그러한 것에 있어서 상관성이 있는데 이러한 것은 역시 모두 비판되어질 수 있는 "추상적 실재의 상관성"각주3)에 따른 연민으로 이미 이성적 상식적인 판단에서도 지나친 판단을 하고 있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의 눈치를 보면서도 안토니 씨슬튼은 자신의 합리성을 펼치고 있는데’각주4) 이는 그의 실재의식의 비판이라고 함에 거부할 수 없음을 또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이러한 판단들이라고 함이 비정상적인 사고를 하는 것에 대하여서 판단하고 있는데 이는 추상적 실제라고 하는 것 보편성과 추상적 실재의 특수성에 대하여서 실제를 통한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그 타당성에서 의미를 상실했음에 대하여서 그러한 사람들의 입장이 ‘환자’라는 표현을 하고 있습니다.각주5)

한마디로 하나님에 대하여서 안믿어지니깐 상대적이지 않은가 확실성이 어디 있는가 객관성이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자신의 주관적 표현의 객관성에 동의를 해달라고 말하는 것은 이미 받아들여질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 오히려 객관적인 진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인드라님에 필요이상의 주관적 인식의 확대로 피해의식을 말하게 되어지는 객관성의 진술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이미 어떤 종교심리학자들이 자신의 방법이 끝나고 있을 알았던 지점에서 끝나고 있다고 볼 수 있다’각주6)각주7)는 언급을 주목한 바 있는데 ..

이것은 추상적 실재와 보편의식으로 인위적으로 신앙과 종교를 말하려고 하는 것은 이미 의미를 상실한 말들밖에 안된다는 것은 지각있는 자들의 결론이라고 하는 사실을 알고 제가 말하고 있는 것의 객관성이 저의 주관이라고 함의 언급이라고 단정하며 자위하는 자리에 서지 않았으면 합니다.

상대방이 어떤 객관성에서 말하고 있는지 그것을 일축하려고 하시는 가운데서 그러한 의도가 성립되어질 수 있는지 보시라고 저의 주관적이면서도 객관적 승인이 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 인드라님에 대한 판단이라고 함에 객관성의 근거를 포함해서 글을 남깁니다. 앞으로는 그만한 객관성으로 말한다는 기본적인 신뢰는 대화를 위해 남겨두는 것도 좋을 것같다는 생각이 듭니다.





각주1) 포스터는 더 나아가서 우리가 전에 제기했던 방법이 자체를 서술에 국한시키는지 아니면 자체를 설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지 하는 문제를 제기하려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최근의 독일 신학이 똑같은 문제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빈델반트-리케르트(Windelband-Rickert) 역사학파는 ‘표의기술적인 방법’(method ideographic)을 선정하고, 딜타이-분트(Dilthey-Wundt) 학파는 ‘법칙정립적인 방법’(method nomothetic)을 선정한다. 전자는 사실상 서술적(descriptive)이고 후자는 설명적(explanatory)이다”(George Burnam Foster, The Finality of the Christian Religion, p. 309.)


각주 2) ‘독일 철학의 전통 속에서 훈련을 받은 신학자들은, 역사성(historicality) 또는 역사적 제약성(historical conditionedness)의 양면적 성질, 즉 고대 택스트 및 현대의 해석자라는 양측의 역사적 제약성을 진지하게 취급하는데 별로 어려움을 느끼지 않는다. 그러나 많은 영국 및 미국의 학자들은 그 문제를 신약 성서 해석자에게 주변적 관심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단지 이론적 문제에 불과한 것으로 간주하는 듯이 보인다. 따라서 상식의 차원에서 그 문제의 중요성을 보여 줄 수 있는 구체적인 예를 제시하는 것이 필요하리라 여겨진다. 그래야만 우리는, 우리 앞에 놓인 이 문제가 Dilthey나 Heidegger의 도움이 없었다면 결코 형성되지 않았을, 엉뚱한 지성의 산물에 불과하다는 의구심을 떨쳐 버릴 수 없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42.)


각주3) 셋째, 또다른 이유로 인하여 철학적 기술이 문제시 된다. 해석학적 과제의 기술을 용의하게 하는 것에 덧붙여, 철학적 범주들은 신약성경의 텍스트를 실제로 해석할 때에도 역시 유용하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3.)

본문에서 이어지고 있는 것은 독일 신학의 해석학적 실제와 실체에 대한 이야기를 비판하고 있는데 하이데거의 철학적 영향력으로 실체를 나타내는 용어를 사용하기를 거부함에 대한 것이다.

이러한 것은 해석적 실제규정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하는 것이 이 독일 신학과 영미 신학의 차이로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이며 반목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


각주4) Cornelius Van Til을 중심으로 한 미국의 보수주의 학파와 같은 어떤 특정학파는, 명백히 기독교적이지 않은 철학들로부터 유래하는 통찰력들을 이용하는 어떠한 시도도 혐오스럽게 생각한다
(Anthony C. Thiselton, 두 지평, 권성수 외 총신대학교출판부 p. 38.)

안토니 시쓸튼이 의식하고 있는 반틸의 책은 반틸의 변증학이라고 하는 책입니다. 안토니 그는 각주에서 반틸의 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사실 반틸의 입장에 대한 합리성을 말하려고 하는 것은 자제한다고 입장을 표명하고 있지만 사실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실제라는 것에 있어서는 이미 그 합리성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고 할 때에 그 답변은 궁색할 수밖에 없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더욱 그렇게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안토니 시쓸튼이 비판하고 있는 Dilthey와 같은 자들로써의 헤겔 철학적인 영향력을 거부하고 비판하고 있는데 사실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의 변증적 입장 대화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헤겔적인 입장을 따르는 것인데 그것자체를 부인하고 있다는 점은 궁색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물론 버틀란트 러셀의 표의기술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지만 이도 역시 그 범주적 실체라는 개념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 사실이기 때문입니다.


각주5) 따라서 현대 종교 심리학파의 방법 전체는 영구적인 것과 일시적인 것의 동일한 궁극성의 승인된 가정에 근거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가정은 우연의 우주로부터 생긴 인간이 자기 설명적(self-explanatory)이라는 가정에 근거한다. 종교 심리학자들의 방법은 전적으로 영원한 세계에서 오는 것처럼 보이는 주장들에 직면한 때조차 성공적이었다는 프랏트의 진술들을 우리는 너무 심각하게 받아들이지는 않을 것이다. 사람들이 다른 분야에서 과학적인 방법을 적용시킴으로써 성취한 놀라운 업적들에 대해 자유롭고 유창하게 말할 때, 그리고 모든 종교가 똑같은 조사에 따라야 할 것이라는 개념에 찬성해서 그럴듯한 주장을 분명히 할 때, 우리는 실제로 그가 전체의 비전을 볼 수 있도록 정상에 오르지 못한 내적인 병으로 고통당하고 있지만 자기가 우선 아주 잘 느끼며 산을 오를 준비가 된 것처럼 생각하는 환자를 생각한다.


각주6)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69.


각주7) “심각하게 복잡한 과정을 정의 내리기 위한 탐구는 항상 그와 같이 시험적인 융통성이 있는 진술로 끝난다. 그것은 경험의 산 실새에 대한 의식을 내포하며, 그것을 서술하려는 그리고 그것을 분석하고 또 그것의 특성들과 단계들에 대한 확실한 설명을 얻으려는 신중한 노력으로 끝난다”
(Edward Scribner Ames, The Psychology of Religious Experience, p. 13.)
(코넬리우스 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 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7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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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9월 16, 2004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를 이해함에 있어서..



일반적으로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할 때에 성경본문만 다루는 것이 좋은 성경해석이라고 함을 말하는 입장을 취함을 봅니다. 이러한 입장에 서 있는 분들을 보면 일반적으로 이단으로 알려진 '새교회'라는 입장의 사람들과 '말씀보존학회'의 입장이 되어짐을 봅니다. 이들의 표면적인 경건이라고 함 때로는 신실함이 왜곡되어진 형태를 취하게 되어지는 가운데 이단이라고 판정받음의 옳음에 대하여서 한마디 할까 합니다.


잘못된 성경맹목주의를 벗어나기를 바라면서..


1,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이해에 대하여..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은 종교개혁자들의 입장이었습니다.(각주1.) 그러나 그러한 것을 정황적 배경에서 이해하지 않고 그 문구적인 입장만 취하는 경향이 있다는 점은 잘못된 것임을 말해둡니다.

이것은 성경의 실존에 대하여서는 눈을 감고 그 실존의 이해에 대하여서는 전혀 생각하지 않고 성경본문을 다루겠다고 하는 것은 성경을 이해하지 못하고 말하는 잘못됨의 자리에 나서게 되는 것입니다.

종교개혁자들이 오직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중심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은 성경의 자증(Autopistia)을 말하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성경의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의 그 실존적 이해는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 계시에 근거한 것이기 때문에 성경의 실존적 형상이라고 함과 실존의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이 자증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스스로존재하시는 하나님의 형상의 계시임으로 성경의 자증을 말할 수 있고 그 자증의 계시의 성격은 그 말씀으로서 사람을 창조하심과 같이 기록자들을 상대적인 측면에서도 주장하여서 자기를 나타내는 계시로서의 성경이 자기를 형성한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여호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이루어진 것이며, (이것은 칼빈을 비롯한 종교개혁자들 칼빈이외에 그러한 것에 분명한 사람은 거의 없었다고하여도 그러한 인식의 경향이 있었던 것은 사실로도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성경해석에 있어서 기독교 유신론적 접근이라고 하는 것이, 즉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적인 증거의 정당함을 따른 실재적인 보편적 인식에서 해석함이, 성경본문해석의 문맥적 해석이라고 함보다도 더 합당할 뿐만 아니라 그러한 문맥적 해석을 하는 판단에 실재적인 기준이 된다는 사실을 말해둡니다.

그렇기에 성경해석에 있어서 본문의 문장의 조합식으로 말하는 그러한 해석이라고 함이 이미 그 자체적 증거의 능력을 상실했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2,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 오해에 따른 결과에 대하여..

이처럼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말에 대하여서 문구만 떼어내어 말하고 있는 가운데서 잘못된 성경해석의 원리가 나타난다는 점은 객관적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즉 현상학적인 입장에서 말하는 현대주의 신학적 입장과 원하지않는 조우를 경험해야만 하는 정황에서 침몰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특히 새교회에 있어서 주된 신학자로서 주장하고 있는 스베덴보리의 입장(각주 2.)에 대하여서 이미 다른 사람들이 판단받고 있고 현대의 과정신학적 입장과 동일하게 나타날 수 있고 진화론적 개념에서 자유할 수 없는 자리에 서는 것도 강요되어질 수밖에 없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정황적인 측면에서 즉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에서 파생되어진 것이라는 자체적 정당함을 생각하지 않고 그 문구만 해석하고 있다는 것은 현상학에서 '판단중지'(epoch)라는 판단과 의도하지 않는 만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그러한 것에서 벗어나려면 정황적인 측면에서도 실재적인 성경이 성경을 해석함에 대한 판단에 근거해야 할 것입니다.

좀더 스베덴보리의 입장이 과학철학자로 인식되어지고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과학인식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인식은 그 종말론적 인식은 진화론적 입장에서의 계시사를 말해야 하는 자리에 서기도 하는데 우선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은 시간의 보편성이라고 함이 이미 비판되었다고 하는 사실과 과학이라고 함을 말하는 절대시간론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시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아리스토텔레스의 입장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점을 지적해둡니다.(각주 3.)





각주1.) 스콜라 신학과 교회 전통에 대항한 종교개혁자들의 전투구호가 된 개신교의 성경해석 원리인 “오직 성경으로”(sola scriptura)는 “성경이 성경을 해석한다.”(sui ipsius interpres)는 원리와 함께 후대 성경신학 발전의 원천이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성경신학’이란 용어를 만들지도 않았고 후대 사람들이 이해한 하나의 학문 분야로서 성경신학을 시도하지도 않았다.
(게하르트 하젤, 구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김정우역 엠마오, pp. 21-22)
(게하르트 하젤, 신약신학 :현대논쟁의 기본이슈 권성수역 엠마오, 14p.)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에서 판단되어지는 실제의식 안에서의 성경해석이라고 함의 성경 중심을 말하는 것입니다. 성경의 문자적 개념에서 비로소 하나님의 존재와 증거의 발생이 되어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문자로써 표현되어진 하나님의 이름의 문자적 개념에서는 이와 같은 판단을 받으면서도 자존적 자체적 절대 정당함을 가지기 때문에 앞서 말한 판단을 받지 않는 것도 부언합니다.

종교개혁에서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접근을 한 칼빈의 사상이라고 함이 바르게 전달되어지지 않는 가운데서 오직 성경이라고 하는 말이 성경 맹목주의적 개념의 분별없는 실제를 초래하는 것과 같이 오해되었던 것입니다.

각주 2.) 예를 들면, 영적 세계에 대한 스베이던 보리(Swedenborg)의 사상들을 도그마라는 칭호를 붙인다는 것은 생각할 수 없는 일이다. 다만 정확하게도 도그마는 그것의 역사적 의미에 따라 개념적으로 파악되고 관할하는 권위에 의해서 즉 당면한 사건에 있어서 국가와 제휴한 교회에 의해서, 공적으로 고백된 신조, 무오한 교회에 의하여 제안되었고 절대적인 국가 권력에 의해서 공인되어 의무화된 신조와 다름이 없다고 말할 수 있다.

결국 하나의 도그마의 권위는 슐라이어마허(Schleiermacher)와 그 이후 다른 많은 사람들이 가르친 대로 교회의 선언이나 확정에 의존하지 않고 있다. 그것이 교회의 무오성을 부여하고 있기 때문에 로마는 이것을 가르치고 있다. 그러나 종교개혁은 성경에 있는 오직 하나님의 권위 위에 있는 것 외에 어떤 진리도 인정하지 않고 있다.

그 때문에 개혁주의 신학자들은 몇 번이고 재삼 그 입장으로 돌아가고 있다. 즉 모든 신학적 도그마들이 귀착되는 원리는 하나님이 가라사대이다(principium, in quod omnia dogmata theologica resolvuntur, est: Deus dixit).
(헤르만 바빙크 개혁주의 신학 1. 교의학 용어와 개념 17p)


각주 3.)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을 언급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는 그 시간의 실재라고 함에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고 있음에 대한 언급이 있음을 말해둡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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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요일, 9월 06, 2004

About 'Der sprung'



About 'Der sprung'


1. 글을 씀에 있어서

지난번 제가 쓴 글에 식상해 하시는 분들이 있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그 식상이라고 함에 대하여서 재고하는 것도 좋은 대화의 주제로써 자리매김 되어지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물론 개인적인 경우에 따른 것이라는 점에서 객관성 시비를 할 수 있지만 그러나 그러한 것에 앞서 그러한 식상의 요소를 살펴보는 보편성은 저의 글에 대한 식상이라고 함의 연연함이라고 함의 판단을 넘어서는 것이며 또한 신학과 철학의 사상의 전반적인 반성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할 수 있겠습니다.

기본적인 초점이 되어지는 것은 김종두 교수님(각주1)과 Karl Albert 교수님(각주2)의 글입니다. 그러면서도 전반적으로는 플라톤의 입장과 소위 현대신학의 거장들이라고 하는 자들의 사상적 인식을 주목하도록 하겠습니다.

2. Der Sprung

'Der Sprung'이란 말은 ‘비약’, ‘건너뜀’이라는 말로 논리 비약을 의미하는 ‘키에르케고르’의 언어입니다. 이러한 언어를 소개하게 되어지는 것은 그만큼의 ‘논리적 비약’이라고 하는 것이 식상을 불러올 수 있음을 말하고자 하는 것입니다.

앞서 서문적인 입장에서 말씀드린 것과 같이 객관적인 것을 주장하였던 것에 대하여서 주관적인 이해의 합리성을 말함에 있어서 이 키에르케고르식의 합리성의 정당함을 의식하든지 못하든지 따를 수밖에 없는 정황적 당위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키에르케고르의 입장이라고하는 것은 신학자적인 개념이나 철학자적인 개념을 말하고자 하는 것과 그러한 논리적 비약을 의도한 것은 아니라는 것이 김교수의 입장이다 그러면서도 그와 달리 그 키에르케고르의 기도문이 시중에 책으로 나와 있고 김교수가 인정하고 있는 것과 같이 실존철학과 20세기의 철학자들에게 영향력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키에르케고를 거치지 않고는 현대 독일철학과 신학을 이해할 수 없다고 단정하고 있습니다.(각주 3)

앞서 말한 것과 같이 키에르케고르의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것과 실존의 문제가 진리의 문제임을 말함에 있어서(각주4) 부정적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하여도 최선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 ‘김교수님의 입장이지만 그리고 그것에 대한 대안 없는 비판은 거절하는 입장(각주5)이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달리 생각해야 한다는 것이 저의 입장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김교수님의 대안없는가(각주6) 라는 질문에 답변함으로써 그 키에르케고르의 언어를 놓으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언급은 지금에 있어서 있게 되어지는 논리적 비약 그리고 임의적이면서도 주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가운데서 진리인 것같이 말하고 그것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식상하는 자리에 서는 어리석음은 반복되지 않기를 바라는 것입니다.

3 신학에서의 논리 비약(‘Der Sprung’ in Theology)

가장 크게 이러한 논리적 비약이라고 함을 의식하고 주장하게 된 신학자는 당연히 김교수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칼바르트라고 할 것입니다.(각주7)

칼바르트(Karl Barth)는 포이엘바하의 역사비평학에 대한 도피(각주8)로 찾아낸 것이 원역사이며 그의 삼위하나님은 원역사 안에 존재하는 즉 원역사라는 범주의 카테고리에서 한정되어지는 실존이라는 개념을 말할 때에 하나님의 전능하심과 무소부재라는 개념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는 신학자입니다.

그리고 그 칼바르트의 입장이 극단적인 이분적이라고 함에 있어서는 상당한 논리 비약을 한다고 함에 대한 판단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각주9)

이러한 주체적 사유와 그리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실존의 문제로 접근하게 되어지는 신학, 그 신론에 대한 재구성에 대하여서 좋은 책이 하나 있다(각주10)

그곳에서는 바로 주체적 사유로서 실존을 말함에 따른 바르트의 무성이론 그리고 그곳에서 신에 대한 결백적 개념으로써의 절대의 개념이라고 하는 것이 구성되어지는데 이는 자존의 하나님으로써의 자신의 속성으로써의 절대라는 개념이 아니라 상대적인 초월로써 플라톤의 독사(dogsa) 키엘케골의 sprung을 기반으로 역사상대주의적 개념의 판단을 막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는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이러한 칼바르트와 폴틸리히의 삼위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 그 하나님을 무성(nothingness), 그리고 비존재 (non-being)로 표현함에 있어서 정당한 것인가 하는 것을 그냥 넘긴다면 그것은 전부를 부정하는 모습이 된다는 것을 비판적으로 지적한다는 것입니다.(각주 11)

결론적으로

이러한 것은 정기철 호남대 교수님이 지적한 바와 같이 대표적인 인식으로써 일반역사와 시간과 상관없은 그러면서도 인위적으로 상관성을 말하는 원역사를 말하는 것과 그 시대 그 장소를 말하는 것으로써 오리겐이 말한 신플라톤적 개념의 사상이 바르트를 비롯한 현대신학의 인식방법론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키엘케골의 언어 논리 비약(Der Sprung)의 실존에 대한 이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방법론을 달리할 뿐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키엘케골의 논리 비약으로써의 주체적 사유로써 실존을 말하는 것이 진리라는 그러한 말이 이미 비판되었다고 할 때에 성경의 하나님의 증거라고 함을 인위적 신론을 만들어서 성경을 대하고 있는 자들의 모습은 비판되어야 할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주체적 사유라는 인식의 보편성이 인식론적 존재론이라는 임의적 하나님의 실존을 바라보는 자들과 그 사상적 연관성과 연속성을 말할 수 있기 때문에 상식화 되어지고 있고 이러한 것은 현대신학이 개혁신학이라고 함의 이름으로 들어오고 있는 가운데서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악함의 한부분임을 지적합니다.

이러한 것을 의식하든 하지 않든 주관적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는 것에 대하여서는 이러한 판단의 범위에서 이미 판단되어진 당위성이 있다는 것을 알고 주관적으로 말함의 자기 합리화를 찾을 때에는 이러한 판단에 귀속되어질 수 밖에 없는 당위성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인위적 무성과 비존재라는 개념 역사적으로 실존의 문제가 있을 때에 의식하게 되어지는 키엘케골의 사상이라고 함에 있어서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어지는 것은 오늘날도 교회의 묻지마신앙을 당연하게 받아들이는 것과 같이 오해하고 있는 것입니다. 필요에 따라서 불가지적인 하나님에 대한 질문에 답변하지 못하도록 하는 개념에서 실존을 강조하는 가운데서 이러한 악한 키엘케골의 비약적 주체적 사유와 실존이라고 하는 개념에서 정당함을 찾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후스토 곤잘레스가 쓴 종교개혁사에서 말하고 있는 키엘케골의 전제주의적 신앙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고 있는데 이에 대하여서 이 전제는 불가지적인 인위적인 절대의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기독교의 하나님은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시기에 키엘케골의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전제나 무성이나 비존재의 상관성에서 그 존재를 말씀하시는 분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하나님의 이름이 높여지는 것을 기도하시는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 예수그리스도 주님의 마음을 읽을 수 있기를 바라면서 주관적인 사유의 진리관을 버리시기 바라면서 글을 맺습니다.


***(참고 각주는 이글 아래글이니 참고해주시기 바랍니다.)***


http://geocities.com/vosscare


각주 : Der sprung - 식상에 대하여


각주 1)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김종두, 서울대학교 종교학과 졸업, 미국 빌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학위취득(M.Div), 미국 빌라델피아 웨스트민스터신학교에서 신학석사박사과정이수, 독일 Gottingen 대학에서 신학전공, 독일 Heidelberg 대학, Berlin 자유대학 Munchen 대학 Amsterdam 자유대학에서 철학전공, 독일 Munchen 대학, 철학과에서 철학박사 학위취득(Dr. phil.) 총신대철학교수, 한세대철학교수(현재)


각주 2) Karl Albert, 플라톤 철학의 이해, 임성철 역 한양출판사


각주 3)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9

‘그의 영향으로 20세기 철학사상의주류를 이루었던 실존철학(야스퍼스, 하이데거 마르셀 사르트르, 까뮤등)과 동 세기의 최대의 신학자들(카르 바르트, 에밀부루너, 루돌프 불트만 등)이 발전시킨 “변증법적 신학”이 태동되었다. 지난 세기의 철학계와 신학계에서 초신성과 도같이 우뚝 솟아 무수한 다른 철학자들과 신학자들 및 일반 지성인들에게 사상적 길잡이 역할을 했던 이들이 사상적 무대에서 물러난 후 현재까지 이들에 버금하는 철학자나 신학자가 한 사람도 다시 등장하지 않았다.’


각주 4)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5

‘키에르케고르에 따르면 실존의 문제와 진리의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사유는 객관적 사유, 이성적 사유가 아니고 주체적 사유, 실존적 사유다. 주체적 사유는 외부의 세계가 아닌 내면의 세계와 인간의 주체성에 관심을 기울이며 그에 대해 지정의가 합해진 전인의 노력으로 심각하게, “무한성의 정열”(Leidenschaft der Unendlichkeit)로 신중하게 반성하는 사유다. 그러한 주체적 사유로 확보할 수 있는 주체적 진리가 곧 우리의 실존과 연결되는 진리, 우리를 변화시키며 우리를 살리는 진리다’

이러한 실존의 문제가 진리라는 개념은 실존의 위협의 문제를 의식하지 못하였을 때에는 사람들의 인식에서 멀어졌음에 대한 것을 김교수는 지적하고 있다 그러한 것에서 오늘날의 실존에 대한 것을 의식할 수밖에 없음에 대한 당위성과 그러한 한정적인 인식의 요구라는 개념의 한계를 넘어서는 대안은 없는가하는 것이 김교수의 입장이 되어진다고 할 수 있다.


각주 5)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6,


각주 6) 김종두, 키에르케고르의 실존 사상과 현대인의 자아이해 엠에드 p19

‘그것이 사실이라면 보다 현실성이 있는 대안은없는가? 이점이 바로 우리가 이 저서 후반부에서 규명하고자 하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이란 말에서 그것은 이러한 주체적 사유라고 하는 극단적인 합리성을 받을 필요가 있는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시대적 반응들이 있었음에 대한 것을 가지고 항존적 개념의 당위성으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물론 김교수님은 후에 합리성에 따른 필요성 그리고 전제적인 개념의 유익성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의 문제와 상관관계가 있는 가운데서 규정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본다.

그러나 저는 그러한 것에 합리성을 앞서는 키엘케고르의 비약(sprung)은 불가지적 개념에서 자체적 정당함이 없는 것이며 다만 동정적 당위성을 말하는 수준과 범위를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각주 7) 정기철,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한들출판사 p19

'영원과 시간의 대립 하나님의 시간과 사람의 시간의 대립은 바르트의 신학의 핵심을 이룬다 바르트만큼 20세기에 시간의 문제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사람이 없다.'

영원과 시간의 대립이라고 하는 것은 플라톤적 개념의 원역사와 일반역사의 이분적 사고인데 이러한 것으로 사상적 연관성을 부인하는 가운데서 불가지론을 말하고 있다. 그리고 역사비평학의 안전지대라는 인식으로써의 원역사는 이후의 신학자들의 신학의 실존을 그곳에서 그곳에 있는 신론적 실존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길을 걷게 된다고 본다. 이것은 키엘케골의 실존적 사유가 진리라는 개념을 말하는 것으로써 그 비합리성이라고 함과 절대의 개념의 상관없음으로 일관하는 경향을 말하게 된다고 할 수 있다.

중요한 것은 그가 신의 실존의 정당함말한다고 하여도 신 자신은 자체적 정당함을 바르트의 인식에 기초하는 것같은 오류를 남기게 된다는 것이다. 키엘케골의 실존과 주체적 사유의 정당함은 자체적 정당함을 가진 것이 아니라 동정적 당위성의 상존을 요구할 수 있다는 점에서의 정당함의 시비가 된다는 것이다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을 부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밖에는 안된다는 판단을 받게 된다.


각주 8) '바르트는 사람들이 역사적 상대성 있는 방향으로 기울지 않게 하려고 열성있게 교통장관처럼 되기를 바랐고, 하잇제마(Haitjema)가 역사를 계시의 한 증거가 되기를 바라는데, 그 계시는 오직 구원이 있음을 말하는 것이요, 원역사를 통하여 나타나는 것이다. 바르트는 이제 역사적 상대주의를 당황하게 하는문제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고 생각한다.' (코넬리우스 반틸, 신현대주의 김해연 역 성광문화사 pp. 146-147.)

‘바르트 학파의 계시 실증주의는 역사 비판 논구의 홍수로부터 안전하다고 생각되는 원역사의 영역으로 도피한다. 그리스도의 구속사건을 원역사의 범주로 해석함으로써 본래의 역사는 초역사 내지 원역사의 반영으로서만 그 의미를 지니게 된다.’ (김영한, 현대신학과 개혁신학, 한국기독교사상연구소 pp. 62-63.)


각주 9) 에밀 부룬너 칼바르트, ‘자연신학’ 김동건 옮김, 한국장로교출판사 여기에서는 에밀부룬너의 자연과 은혜라는 글과 그에 대한 바르트의 답변으로 아니오(Nein)이 실려져 있습니다. 자연은총을 말하는 개념에서 자연신학의 실존을 말하는데 둘다 틀렸습니다. 둘다 개연적인 개념의 당위성과 절대라는 개념을 상대적 관계없음으로 이해함에 있어서는 상대적 차이밖에는 그 분별의 사실로써의 자연신학의 실존을 말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본문과 관련해서는 칼바르트의 입장의 이중적 개념 원역사와 일반 역사관의 상관없음이라는 개념에서 이원론을 말하고 있고 이것은 논리비약이라고 함의 판단을 받게 됩니다. 즉 논리비약을 함에 있어서 그 당위성은 신의 실존의 당위성을 원역사에서 찾고 있다는 인위적 실존의 문제라는 것을 키엘케골의 실존적 사유라고 하는 것과 상관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그의 키엘케골을 예찬을 말함의 의미도 같이 이해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10) 정성민, 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김균진교수의 추천으로 이루어지는 그의 논문인데 여기서 바르트의 무성의 신학과 폴틸리히의 비존재의 신학을 비교하여 말하고 있는데 여기서 신론을 재구성하는 방법적 전제라고 하는 것을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인위적 개념에서의 절대 개념과 하나님을 무성으로 비존재로 표현함에 대한 개연적 정당함을 따르고 있는 가운데서 그 합리성을 출발시키고 있다. 한마디로 그러한 불가지론적 접근에서 바르트를 성경적이라고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는 아직도 분별이 필요하다고 하겠다.


각주 11) 정성민, 폴틸리히와 칼바르트의 대화, 도서출판 바울 p14

'인간이 자신의 운명에 대해 관심을 가지는 것은 인간 본성 중의 하나이다. 죽음은 인간의 삶의 종말인가? 무성이라는 단어가 인간의 삶의 종말을 적절하게 표현한 것일까. 비존재는 죽음 이후에 맞이하는 존재의 한 형태인가? 과연 존재와 무는 어떤 관계일까? 하나님은 비존재로 표현될 수 있는가? 과거이 역사 동안 위대한 철학자들과 신학자들이 이러한 형이상학적 질문을 통해 무성과 비존재에 대한 많은 호기심을 보여주었다. 조지 패터슨(George Pattison)은 무성과의 만남은 현대 종교사상에서 빈번하게 등장하는 주제라고 말한다.'(George Pattison, Agnosis : theology in the Void(new York:St. Martin's, 1996),2

정성민님이 인용한 조지패터슨은 불가지론(Agnosis)이라는 주제로서 이야기하고 있다 이것은 불가지론이 자체적 자기 정당함의 합리성을 내놓지 못한다는 점에서 그러한 주제들의 합리성은 자체적 정당함이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판단되어진다는 것이다.

신은 죽었다고 한 말에 대한 기본적인 답변에 대하여

forward

납득 당위성을 위한 구체적인 것을 밝히라고 말씀하시고 있고 저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구체적인 것으로써 납득 당위성이 없다는 것을 말씀하시는 것같습니다. 한마디로 시간적 불연속성 속성에도 매우 우둔함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비판에 대하여서 답변하도록 하겠습니다.

인용..
밤하늘★처... 이러한추상적인 말의 연속성으로인하여 필연성과 당위성으로 결정되어지는 논리는 추론하는본인의머리속에서부터 공허하고 혼돈해짐을 우리들은 이명신님을 통하여 유추해볼수있을것임을 시사하는것임을 밝혀둡니다 이러한사실은 객관 타당성의 원리에서도 납득당위성에 위배됨은 물론이요 역사적 언어변화의 시간적 불연 [2004/07/25]
밤하늘★처... 속성에도 매우우둔함을 보여주는것이라 함을 밝혀둠과동시에 일반화된 분별력을 흐트리는우둔한 논리적모순에 빠짐을 알수 있다할것입니다, 이러한 대중적 언어변화에대한 인식에 철저한 자기당위성 철학적 우월주의에입각한 자기모순의논리야말로 우리 교회사의 공동의적이라고 말할수 있을 것입니다,,,,번역해보세요,,

답변에 즈음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함이 인식의 연속성의 기초가 된다는 점을 말한 기억이 있습니다. 이것은 한미르님의 입장이나 또는 천향님의 구속사적인 불연속성을 말함에 있어서 제가 비판한 부분에 대하여서 납득의 구체적 증거를 제시하라고 하시는 것으로 보입니다.

답변이 늦어진 것은 이미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제가 언급했던 문제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것을 재고하지 않는 것이, 이미 재고했다면 상당히 맹목적인 주관적 판단으로 일관할 수 있다는 점에서 였습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미 기정사실적인 그러한 입장밖에는 취할 수 없는 당위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씀하신 분의 입장이 판단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제가 말한 부분은 쉬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논의였는데 그 태제와는 달리 아니 마음에 두시지 않고 쉽게 말하라고 하시면서 제시한 내용도 시간의 의식과 언어에 대한 것이었습니다. 이것은 저의 글에 대한 답변이 아니라 따로 질문하실 수 있었던 내용이라고 함을 인식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안티적 입장의 분들의 방법론과 입장정리하는 것과 동일하게 나타나시기 때문에 구체적인 답변보다는 원하는 것이 인격적인 배척으로써의 저의 합리성의 실제를 부인하시고자 하시는 뜻으로 받았습니다. 변명은 그만하고.. 이제는 구체적으로 답변해야 할 것같다는 생각에 다시 피시방을 찾았습니다.

먼저 양해를 구하는 것은 생각한 것은 일필휘지의 형식으로 글을 씁니다. 그래서 자세한 각주는 말씀드리지 못합니다. 하지만 그 내용을 의식하고 쓴 것의 구체적인 부분에 대한 언급정도는 말씀드리는 것이 좋을 것같아서 좀 구체성을 가지고 말씀드리고자 합니다.

* 구체적 언급을 시작하며..

인식이 시간이해에 따라 종속되었음에 대하여서는(각주1) 그리고 시간의 이해에 있어서는 역시 일반 역사와 원역사, 즉 직선적 시간이해와 원환적 시간이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습니다.

소광희 교수는 그의 책(각주2)에서는 프리드리 니체의 시간관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원환적 시간관입니다. 그리고 이것은 어거스틴의 참회록에 나타나고 있는 시간과 인식에 대한 것에서 현대의 시간관이 재 해석되어짐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사실 신플라톤적인 개념의 존재이해와 시간관에 달려진 것입니다.(각주3)

* 현대에서 이해되어지는 원환적 시간이라는 개념에 대하여서

이러한 것은 프리드리히 니이체의 정오사상이라는 것을 기반으로 말하고 있습니다.(각주4) 간략하게 소개하면 태양이 정오에서 떠서 다시 지나온 곳으로 돌아오는 것과 같이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이 다시 정오가 되면 그 시간에 돌아오게 된다는 것으로 시간의 윤회적 개념을 말하고 있습니다.

* 이러한 시간의 원환적 개념과 존재에 상관성을 이해함에 대하여서

이것은 플라톤의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플라톤 이해에 대하여서 두 부류의 사상적 해석을 달리하고 있습니다만 그 동일한 표현으로써 이해하게 되어지는데(각주5) 여기에서 존재의 연장(Extension)이라는 것이 있게 됩니다.(각주6)

이것은 존재의 이동적 개념으로 물질의 이동이라는 개념이 시간을 말하게 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적인(cosmos) 자연적인 시간의 보편성을 이렇게 생각하면 우리 존재라는 것이 무한일자에서 파생되어진 개념으로써는 일상적인 물질의 움직임이라는 자연과학적 시간 또는 뉴톤의 절대시간관이라고 함과 다른 것이 되어집니다.

즉 회귀에 따른 존재의 이동이라고 함에서 시간의 인식이 가능합니다. 더욱 칼 알베르트의 주장적 개념에서는, 영원이라고 함의 경험적 실제를 임의적으로나마 말하고 있음에 있어서 플라톤의 유개념의 정지에 참여하는 운동이라는 개념에서 영원을 시간의 정지로 이해함이라는 인식을 통해 시간을 영원에 투여하여 인식하려고 하는 노력이 가능하게 된 것입니다.

물론 영원이라고 함을 시간의 정지적 개념 시간의 무개념으로 말해야 하는가 하는 것과 그 합리성의 정체성의 실존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도 말할 수 없는 것뿐이라는 점에서 이미 부정되어야 하지만 그 개연적인 개념의 합리성만 생각한다면 개연적 가능성이 있다고 하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해라고 함에서 존재에 대한 인식을 하게 되어지며 희랍철학에서 시간이라고 함이 모든 것을 소멸시킨다는 점에서 그 신화에 등장하는 시간영감(각주7)의 역활적 개념으로 존재를 주관하는 시간의 보편성적 실재로서의 자기 정체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을 하고 있습니다. 즉 시간의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이 개연이라는 것에 정당함을 따르고 있다는 것입니다.

자연적으로 아리스토텔레스의 시간관에 있어서도 역시 그 시간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고 있습니다.(각주8)

* 현대의 시간관과 성경의 시간관에 대하여서..

현대의 시간관의 입장은 이러한 회귀적 개념에서 현재라는 개념은 귀납적인 미래의 개념으로 규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으로 자연과학적 시간관의 또는 실증적인 개념의 인식에서도 동의할 수 있는 그러한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현대신학에서의 말하는 창세기의 시간의 문제에 있어서도 바르트의 창세기에 나타나고 있는 원역사 안에서의 창조라고 하는 개념(각주9)과 또한 현대의 하루라는 개념을 일상적 개념이 아닌 것으로 말하는 것도 역시 그러한 진화론적 개념의 시간관의 합리화를 위한 시간개체의 이해에 따르고 있습니다.

성경에서의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입장은 시간관이라고 하는 것이 일상적인 시간관을 따르고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됩니다. 이것은 그 합리성의 모순성으로 보일 수 있는 것이면서도 하나님이 말씀하신 시간과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뜻하심으로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일상적인 시간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 현대의 개혁신학의 변증적 입장에서의 시간관 이해..

먼저 현대신학에서의 개혁이라고 함을 말하기 위해서는 헤겔의 시간관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으로 프랑스 사르트르의 절대 무라고 하는 개념을 헤겔의 시간의 흐름이라고 함의 기점이 되어지는 무로 생각하여서 시간의 흐름이 미래로만 흐르는 것이 아니라 과거로도 흐를 수 있음에 대한 것과 무라는 개념에서 다시 비로소 시간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절대 무라는 개념에서 다시 신학의 가능성을 말할 수 있다고 합니다. 이것이 바로 독일의 개혁신학의 시간에 따른 인식론적 신학의 정체성입니다.(각주10)

헤겔의 시간관에 대하여서 좀 쉽게 구체적으로 접근하는 것으로 추천하는 것은 소광희씨의 철학적 시간관에서 헤겔을 말함에 있어서 헤겔의 시간의 차원이라고 함을 이해함을 통하여서 이루어질 수 있습니다.

- 신은 죽었다는 말에 대한 처방으로써-

프리드리히 니체의 말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은 '정오사상'과 같이 언급되어진 것입니다. 이것은 시간관과 그에 따른 시간의 종속적 인식이라고 함이 정당할 때에 성립되어지는 태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인식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은 개연적 정당함을 따르고 있을 뿐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고 있는 시간의 종속적 개념으로써의 성경의 기술은 자존하시는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나타내는 그 영광의 실제적 능력으로 계시되어지는 것이기 때문에 형식적인 시간의 종속적 개념으로 나타나면서도 시간을 지배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는 권세가 그 계시의 실존에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의 보편성에 따른 여러가지 판단들 시간의 불연속성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의 비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하는 정당함에서 그리고 그것에 따른 합리성적 비판은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합리성을 비판함에 있어서 그 자체적 정당함을 가질 수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시간의 임의적이고 개연적인 정당함에서 존재의 실존을 말함에 있어서 그리고 합리성의 실체를 말함에 있어서의 모든 비판들, 그 모체적 신은 죽었다는 개념의 니체의 언급도 그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것은 정오의 사상이라는 개념의 임의적 개념에서 파생된 임의적 의지적 표현으로 자신의 주관적 정당함을 따를 뿐 진정한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지 못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철학적 우월주의적 개념이라는 것은 철학과 일반학문과 인식의 상관성을 임의적으로 부인하시는 가운데서 삶의 실증적 개념으로 말씀하시겠다는 입장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렇지만 그러한 실증적 개념도 철학적 기반에서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은 생각하심이 좋겠습니다.

예를 들어 프랑스 혁명에서 파생된 것으로써의 실증주의적 개념은 프랑스 혁명을 주도했던 사상들 특히 꽁트의 사상적 입장을 의식하지 않고 이야기 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고 함을 말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철학적 우월주의라는 개념도 임의적인 배척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다는 점을 말하고자 합니다. 저는 철학적 우월을 말한 적도 없고 그 상관성이라고 하는 것과 그것의 신앙과의 관계성을 '오리겐과는 다른 입장'(각주11)에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시간의 정체성에 대한 이해는 인식과 존재와 합리성의 존재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데 그 시간의 실존이라고 함이 자체적 실존의 정당함을 가지고 있지 않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시간은 성경의 종속적 개념으로써 그 안에서의 계시를 담을 수 있는 특권으로써의 실존적 자기 의식을 가지는 것으로 창조되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시간이해에 있어서 시간의 현대적 개념으로써 특히 신플라톤적 개념의 시간관과 자연적 시간관 즉 생체시간이라는 것, 예를 들어서 꽃이 피고 지는 것과 태양을 바라보는 해바라기와 같은 것과 같은 꽃시계라는 것과 같은 것들도 있고 자연적인 운동의 균일설을 말하는, 뉴톤의 절대시간관을 기반으로하는 자연과학적 시간이라고 함과 같은 시간이라는 것등 여러가지가 있습니다.

그러한 시간관에서 실존은 개연적 정당함과 관찰이라는 개념에서의 인식확실성을 말하게 되어지며 유추적 개념에서의 파생되어진 시간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들 이러한 것들이 결국 인위적 창조물로써 사람들의 인식을 주장하게 되어지는데 이러한 것은 죄악을 인하여서 그 실존의 정당함을 잃은 자들의 자기 결박이 되어질 수밖에 없고 그 의식의 저변에 있는 신에 대한 의식을 지워버리고 싶은 충동으로써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복음을 핑계치 못하는 것으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 1)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 문예출판사,

칸트의 시간관을 말함에 있어서 지적하고 있음 그리고 이것은 저자가 서울대 인문대학장으로서 칸트의 시간관을 말함에 있어서 그것이 보편적인 철학계와 신학계에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는 입장을 취하고 있습니다.


각주 2) 상게서..


각주 3) 후스토 곤잘레스 (CHRISTIAN THOUGHT REVISITED: Three Types of Theology By Justo L. Gonzalez Published by Permission of Abingdon Press. Copyright 1989 by Justo L. Gonzalez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J.L. 곤잘레스 지음 이후정 컨콜디아사)는 어거스틴의 신론이라고 하는 것이 '무한의 일자'라는 것을 지적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그가 지적하고 있는 것과 같이 카르타코 지역을 중심으로 하는 서방신학 보다는 알렉산드리아 신학으로써 오리겐의 전통적 개념에서 언급되어지는 신학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것은 곤잘레스가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오늘날 선호하는 신학적 개념입니다. 그것은 그들의 인식의 기반이 신플라톤적 개념이며 또한 이것은 시간관이 우리의 일상적인 시간관을 따르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각주 4) 소광희씨의 상게서의 프리드리히 니체의 시간관에서 언급되어지고 있습니다.


각주 5) 칼 알베르트의 '플라톤의 철학이해'(Uber Platons begriff Philosophie by Karl Albert)(한양대학출판사)에서 알베르트는 플라톤의 이해의 새로움을 말하고 있습니다. 즉 목적적인 개념에서 플라톤이 원형의 이데아를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각주 6) 스피노자(Spinoza)의 사유와 연장이라고 함을 기억할 때에 중세의 이단자 유대인으로 알려지고 있지만 칼알베르트의 사상적 입장에서 본다면 다시 재고할 수 있는 카돌릭의 형이상학적인 측면에서 재고할 수 있는 것을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중세의 시간관이라고 함이 어거스틴의 영향력에서 이미 그러한 현대의 시간과 종말론에 대한 인식의 차이를 예견한 것으로 말할 수 있고 재해석되어질 수 있다고 봅니다.


각주 7) 시간의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정기철 한들출판사

여기서는 신화에 따른 이야기 가운데서 시간의 소멸에 대한 것을 자식을 잡아먹는 자의 모습으로 그 시간의 파괴에 대한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각주 8) 소광희, 철학적 시간의 성찰, 문예출판사,
이책에서 소크라테스의 시간관을 다룰 때에 언급하고 있음.


각주 9) 코넬리우스 반틸, 칼바르트 (원제 신정통주의는 정통주의인가?)개혁주의신행협회출판사

이러한 것은 원역사라는 개념이 일상적인 시간에서의 창조가 아니라는 점에서 지구의 창조라는 개념의 실제성을 인정하지 못하게 되는데 이러한 것은 시간이라는 개념의 원형이 플라톤적 개념과 같이 이데아적인 개념으로써의 원역사의 흐름속에서 존재한다는 것입니다.


각주10) Wilhelm Weischedel, Der Gott der philosophen,Grundlegung einer philosophischen Theoiogie im Zeitalter des Nihismus,Wissenschaftliche Buchgegelschaft, Darmstadt, 1994, I

철학자들의 신, 허무주의 시대에 있어 철학적 신학의 근거지음 빌헬름 바이셰델 철학자들의 신(Der Gott Der Philosophen) 빌헬름 바이셰델(Wilhelm Weischedel) 최상욱 옮김 동문선

서론에서 이루어지는 신학의 존재규정지음을 말할 때에 절대의 무에서 사상적 전환을 할 수 있다는 입장을 말하고 있는데 이것은 그 사상을 말함에 있어서 시간을 말해야 함의 당위성을 의식하고 있는 것이고 이것은 무에서 시간의 흐름을 말하게 되어지는 독일의 헤겔의 시간관이라고 함 헤겔의 시간의 차원이라고 함의 시간적 보편정당함을 따른다고 함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각주 11) 후스토 곤잘레스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이후정 컨콜디아사)

곤잘레스는 교회사를 서방신학과 동방신학과 그리고 목회적 개념의 신학으로 나누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즉 이레니우스적인 목회의 입장을 선호하시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에 동의하는 것은 아니면서도 그의 역사인식의 상관성을 말함에 있어서 동방신학적 개념으로써의 오리겐은 '신학과 철학의 동등적 위치의 개념'을 말하고 있다는 점을 저는 반대하고 있습니다. 계시의 실존 안에서 그 철학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는 가운데 '동연적인' 측면의 도구적 실존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동연적'(coterminous)이란 말은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개념을 말하지 않는 가운데서의 존재의 동일한 위치적 의미를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 앞서 하나님의 재가라는 개념도 시간의 판단과 상관없는 가운데서 이루어진 것으로의 사실규정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영원전이라는 말이 현대에서 말하는 시간의 판단을 받는 영원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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On the castle, named 'easy'


On the castle, named 'easy'


1. 쉽다는 개념에 대한 이해와 사실에 대하여서..

쉽다는 개념의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원리적으로 정의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역사적 인식에 대한 또 앞서는 그 시간이해에 있어서의 주관성에서 인식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이 역사마져도 해석을 달리하는 가운데서 역사적 보편사실로써의 한 개체.. 사실을 규정한다는 것은 불가지론적 범주에서 행하여져야 하는데 그것은 설정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그러한 개념의 실제적인 정의라고 하는 것이 잘 정의(Well define) 되어지지 않지만 납득되어 온 것도 사실이라고 봅니다.

즉 인식공동체라고 하는 것에서의 받아들여지는 당위성에서 그 사회에서 그 공동체적인 인식의 당위성으로 '쉽다'는 것을 말해왔던 것입니다.

물론 단지 한 규정적 사실로써의 개체 인식의 쉬움이라는 개념뿐만 아니라 모든 개념들이 그러한 형태를 취하고 있음은 인정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역사적 사실이라는 보편성에서도 그 사실을 사실로 받을 당위성은 여전히 남겨진 가운데서 어떤 그 시대의 조건적 당위성에서 받아들여지는 것입니다.

2. 성경의 사실에 대한 쉬움이라는 개념에 대하여서..

일반적으로 다른 사람들 불특정 다수라고 하여도 또는 소수라는 개념을 다수로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어떤 특정한 부류의 인식의 납득되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의 쉬움을 말할 수 있다고 함을 말할 때에..

중요한 것은 성경의 사실이 그러한 것에 매여야 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일반 상식적인 사람들 그리고 현대신학과 철학에서의 사람들은 그렇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언급의 당위성을 예수님의 증거적 차원의 현상적 이해에서 찾고 있음도 주목하게 됩니다.

주님이 사용하신 언어가 '코이네' 헬라어로써 그 때 당시에 사용되어진 한정적 언어의 특수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점에 동의할 수 있다고 할 때에, 그리고 그 당시 사람들의 상식적 언어와 비유로 말씀하시고 있다고 할 때에 상식적으로 사람들이 납득 당위성을 고려한 증거와 가르침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입니다.

이러한 사실의 보편성을 이해함에 있어서..

이러한 것은 종교개혁이후에 실재론에 대한 이해를 상식적으로 이끌어간 결과의 소산임을 기억함이 좋겠습니다. 즉 스코틀랜드 보편철학이 신학에 어떻게 들어왔는지 그 경로라고 함을 살펴볼 때에 그리고 비단 스코틀랜드 보편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의 특색을 가지지 않는 가운데서도 상식보편철학적 동질성을 말하는 가운데서 철학이 신학화 되어지고 그러한 것은 오늘날 보수주의적 개념의 신학적 체계에도 많이 들어왔습니다.

그래서 쉽게 말한다는 그러한 좋은 취지는 있지만 그 쉽다는 판단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현대철학과 현대신학의 상식보편적 합리성에 노출되어지고 있는 모습은 참으로 교회가 회개하여야 할 문제라고 생각합니다.

이러한 것을 분별하지 않은 가운데서 그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너무 일방적으로 이해하고 단순화하여서 오히려 믿음의 획일화화 그러한 가운데서 단순함에 따른 모자람으로 일관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게 되어지는 것을 주목하게 됩니다. 이 또한 분별력없는 것으로써 오늘날 교회가 회개하여야 할 문제라고 하겠습니다.

'쉬움'이라고 하는 개념은 상식적인 측면에서의 여러 사람들의 납득 당위성을 고려한 것으로써만 정체성을 가지는 것은 아닙니다. 하나님의 재가적 차원에서의 그 실존적 개념으로써 상식적 형태의 동일한 형태를 취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의 중요성은 인식의 방향성과 그 근원이라고 함을 하나님으로부터 둔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3. 예수님에 대한 순종인가 예수님에 대한 모방인가..

이러한 것에 형태적인 개념으로 일관하는 사람은 예수님이 행하신 것에 대한 모방적 행함을 강요하고 있습니다.

즉 예수님이 그 시대의 그 사람들의 언어로써 그들이 납득할 수 있는 상식적으로도 쉬운 것을 말하였다고 하는 것의 형태적 측면에 고찰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주님이 그렇게 하신 것은 그 계시를 받는 자들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에 메여서 판단하신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오히려 하나님 자신이신 예수께서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으로 그 한 대중을 선택하셨고 그들의 언어를 그들의 생활을 통해 말해야만 하는 당위성에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라, 자신의 기뻐하심으로 선택하셨음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것의 중요성은 주님의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그 선택하신 그 대중적 언어라고 함과 그들의 인식의 고려는 주님을 묶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우리 성도들도 그 대중을 선택함에 있어서 한 대중적 언어로만 이야기 해야 한다는 당위성에 메여지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모든'이라는 어패적 언어로써의 대중의 모든 인식의 고려를 말해야 한다는 당위성으로 성도들의 믿음의 분량이라고 하는 것을 제한함에 있어서는 그 잘못을 말하게 되며 그렇게 함의 당위성이 악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입니다.

허락되어진 상식에서도 읽을 수 있는 것과 같이 우리가 글을 쓸 때에 독자의 층을 고려해서 나름대로 선택하여 글을 쓰는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그 자신의 믿음의 분량적 개념에서 또한 어떤 사람들의 언어적 개념에서 글을 쓸 수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믿음의 분량과 그 자유를 주님안에서 찾는 자의 기쁨과 사역의 자유로움의 사실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 안에서 사실을 말하지 않는 자들은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벗어나지 못하며 그 개념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의 '쉬움'이라는 개념을 사용함에 있어서는 성도들을 묶을 수 있는 권세가 없다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 성도들이 그러한 연약함을 정죄하는 것도 아니요 고려하지만 그러나 일괄적인 쉬움이라는 개념의 단조로움에서 모자람을 낚시질하여서 증거적 사실의 풍요함을 제한하는 어리석음을 정당화 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On the castle, named ''easy"

상식적으로 그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하나의 파라독스적인 개념의 사실들의 범주를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것은 증거적 자유라고 함을 단조로움과 모자람으로 일관하게 하는 가운데서 상식의 범주로 전락시키는 가운데서 하나님의 재가를 마음에 두지 않는 것으로 하나의 감옥처럼 사용하려는 악한 자들의 모습이 있고 또한 그들이 머무는 곳입니다.

그렇게 말함은 비평학에서도 특히 사본학에서도 사본의 진위를 말할 때에는 그 사본들의 비교에서 짧은 것이나 쉬운 표현이 더 사본의 진정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후대에 사람들이 합목적적으로 기술한 것을 배제하기 위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도 역시 그 인식에 따른 단정적 규정이라고 하는 것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에 있어서는 결정된 바가 없고 또 더 바른 기술을 누락되어질 수 있다는 개념에서 달리 생각할 수 있는 여지도 생각하지 않는 편협된 것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상대적 측면에서 본다고 하여도 이러한 비평학의 치우친 판단의 일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그 쉬움이라는 한정적 개념에서 편협을 주장하고 자신들의 합리성의 전환적 실제를 모색하는 모습들 이러한 것이 바로 그들이 사람들을 가두려고 하는 그 '쉬움의 성'이며 또한 그들 자신들이 갇혀진 '쉬움의 성'일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쉽다고 하는 개념이 상식적인 개념으로 나타날 수 있고 사람들의 납득 당위성을 고려해야 한다는 것은 인정할 수 있으나 그것만이 사실을 규정하는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는 점은 하나님의 절대 재가에 따른 합리성으로써의 상식적인 표현으로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제대로 판단하지 못하고 있는 것으로 그 자유로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고 그것을 말하고자 하는 가운데 자신들을 묶어 버리는 것으로 나타날 수 있다는 점을 지적합니다.

인위적으로 주관적으로 쉬움이라고 하는 것을 정적으로 말하기 보다는 그야말로 납득되어질 수 있는 객관성을 기반으로 말할 수 있도록하고 더 본질적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받는 가운데서의 믿음의 분량적 표현이라고 함에 그 존중함을 나타낼 수 있는 그러한 자리에 설 때에 형제들을 서로 분별력없이 정죄하는 어리석음을 범하지 않고 더 풍성한 교제를 나눌 수 있는 가운데서 하나님께 영광을 돌릴 것으로 믿습니다.

쉬움이라고 하는 개념의 사실이 하나님으로부터의 규정되어지는 것으로써의 상식적 표현으로써 사람들의 납득도 고려할 수 있는 가운데 하나님의 뜻하심을 하늘에서 이루신 것과 같이 땅에서도 이루어내는 종들이 되시는 은혜가 있었으면 하는 마음에서 글을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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