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요일, 4월 24, 2004

Justo. L. Gonzalez의 역사적 철학이해를 주목하며..



유스토 곤잘레스의 사상사 세권을 접할 수 있고 또 그의 사상적 입장의 주관적 신학적 입장의 사상사를 간추린 책도 있는데(각주 1) 그 책중에서 한 부분적 언급을 놓고 생각하며 나눔이 있었으면 합니다.

그러한 것은 신학과 철학에 대한 이해를 지난 세기에서는 어떻게 행하고 있고 오늘날 작금에서는 또한 어떠한 방향이 이루어지지고 있고 그 철학에 대한 이해를 신학에서 어떻게 함이 옳은 것인가 하는 것을 마음에 한번 둠도 필요하기 때문에 이 글을 준비합니다. 다소 신앙에 있어서 철학적인 것이 무슨 필요가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극단적 배척과 극단적인 성경택스트주의적 입장이 나누어질 수 있는 가운데서 역사적 안목이라고 하는 것을 곤잘레스 저자의 안목에서 배울 수 있다고 함을 지적할 수 있다고 보기 때문입니다.

먼저 인용하고 본론을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필요에 따른 것은 각주로 참고를 달아둡니다.

인용)

고전철학을 사용했던 변증론자들의 경우가 - 사실상, 이들이 변증론자의 대다수였지만 - 이에 대한 분명한 보기가 된다. 그들은 기독교가 이교철학의 최선의 것과 모순되지 않는다는 것을 증명하려 했으며, 마침내 그들과 그들의 후계자들은 성경의 의미와 기독교의 본성을 이해하는 데 있어서 그 철학을 기본적인 해석도구로 사용하기 시작했다.
(J.L. 곤잘레스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이후정 컨콜디아사 p. 136.)

본론에 즈음해서..

저자의 사상적 역사인식의 모델은 A 형 B형 C형, 으로 나뉩니다. A형은 카르타고의 신학적 경향으로 터툴리안을 중심으로한 사상적 경향을 말하고 있고 B형으로는 알렉산드리아 지역을 중심으로 한 오리겐의 사상적 중심을 배경으로 하고 있고 C형은 안디옥 소아시아를 중심으로 한 사상적 입장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인용되어진 부분은 A형과 B형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즉 터툴리안의 법철학적 개념과 오리겐의 동일철학적 개념의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기술되어지고 있는데 도덕적인 개념의 법적인 것과 기독교가 철학적인 것의 최선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오리겐의 사상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세상적인 개념의 모습과 동일한 정치철학적 개념으로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음을 비판하고 있습니다.

실제적으로 곤잘레스 저자는 카돌릭과 개신교의 여러 가지 차이점의 논제를 말하지만 그러한 철학적 경향이라고 하는 개념을 말하는 전통에 같이 있는 것이라고 함을 말하고 있는데(각주 2) 이것은 종교개혁이라고 함에 있어서 카돌릭과 기독교의 실재론적 차이라고 함을 생각하지 못하신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습니다. 종교개혁은 하나님의 실재에 대한 견해의 차이가 실제적으로 부정과 긍정의 차이로 나타나는 것에 있다는 점을 간과하신 것으로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러한 점에서는 관점을 실제적으로 달리하면서도, 역사 인식의 상대적 표현이라고 하는 것은 상당히 중요하고 잘 지적하고 있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고전철학을 사용했던 변증론자들의 경우라고 하는 것은 서방신학을 말하고 있는 것인데 이는 터툴리안의 철학에 대한 부정적 입장이면서도 법적인 측면을 소개하고 주장할 때에 그 방법론은 역시 철학적 한 영역으로써의 기술적 방법을 따랐다고 함을 말할 수 있게 됩니다. 이와 같은 가운데서 저자는 인용된 본문에서 그러한 철학의 선한 것이라고 하는 것이 기독교와 상관성이 있다는 것은 마치 세상과 타협하게 되어지는 것으로 오해되어질 수 있는 여지를 남겨두는 듯한 언급을 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여기에 대한 반론을 제시하고자 하는 것은 터툴리안이 철학에 대한 배척을 했다는 점과 그의 법철학이라고 하는 것 법 사상이라고 하는 것은 한마디로 취득시효(取得時效)적인 개념에서 권위적 사상의 정당함을 말하는 것으로 이것은 상술적 개념에서 상대적 개념에서 상대적 보편이라는 개념에서 출발하고 있는 것으로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통한 법사상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적 역사모델로써 간과하기 쉬운 것인데 이러한 중심의 사상들의 때로는 의도적이지 않았을 수도 있고 의도적일 수 있는 가운데서 세속적 타협과 세상의 정치논리적 개념을 만들어 낸 것이 아니냐는 판단을 가질 수 있는데 이는 그의 철학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자체적 정당함의 실재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출발했으므로 그의 철학적 개념이 기독교적 철학이라고 함을 잘 대변하는 것으로써의 사상적 존립을 가정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유형 B로써 오리겐의 철학도 마찬가지로 그 철학의 선함을 위해 말하게 되어지지만 그러한 사상적 철학의 정체성은 기독교적인 철학의 실존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물론 우리가 기억하게 되어지는 터툴리안의 사상적 체계에서 삼위일체라는 용어를 얻게 되어지는 것이 사실이지만 그러나 그러한 상식보편적인측면에서 하나님이 메여서 선함을 전혀 나타내지 못한다는 개념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선하심으로 그의 뜻하심을 교회사에 나타내셨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사상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전부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재가를 받은 것으로써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러한 역사모델이해에서 있게 되어지는 철학적 인식에 존립에 대한 판단이라고 하는 것이 좀더 분별되어야 했다고 하는 것을 생각할 때에 저자의 역사이해에 있어서 종속적 의미로써의 구교와 신교이해라고 함을 말하고 그것에 있어서 철학적 상관성을 말하는 것은 비판되어야 할 것으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상당한 저자의 통찰력을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고전철학을 사용한 변증론자들의 경우가 오늘날도 곤잘라레스의 언급과 같이 계속되어지고 있다는 사실입니다.

연세대학교 철학교수님이신 장욱 교수님은 토미즘과 형이상학적인 인간학에 관점을 두고 있는데(각주 3) 그는 실제에 대한 것보다도 토미즘의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철학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보편성이라고 하는 것의 재가를 말할수 있는 실제를 생각하지 않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즉 오늘날도 중세의 사상적 실존에 따른 구교적인 입장에서는 철학과 기독교의 상관성을 실재의 분별없이 계속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데 이것은 곤잘레스의 지적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과 객관적인 사실을 말하는 것이라고 함도 지적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철학이라고 하는 것을 무조건 배척한다는 그 사실은 성경적이지 않습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성경의 기록이라고 하는 것이 하나님의 직접적인 계시로써 기록하도록 하심도 있고 또한 인간의 내면적 성찰이라고 하는 개념을 구별하여서 실제적으로 성경을 기록하게 하신 것이란 점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 앞에서 재가를 받은 구속철학의 합당함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리고 그러한 성경의 구속철학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과 우리 일반 성도들의 성경에 근거한 철학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그 상관성을 말하면서고 잊지 않아야 할 것은 성경은 특별영감의 계시적 차원에서 사용되어진 것이란 점과 우리 성도들도 일반 영감에 따른 것이란 점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는 것입니다. 즉 사도가 말한 것을 우리 성도들이 동일한 권위와 실제의 말로 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파생적 정당함에서 일반적 영감 안에서 동일하게 증거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각주 1)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J.L. 곤잘레스 지음 이후정 컨콜디아사
CHRISTIAN THOUGHT REVISITED:
Three Types of Theology
By Justo L. Gonzalez
Published by Permission of Abingdon Press.
Copyright 1989 by Justo L. Gonzalez

각주 2)
제국이 기독교화 된 후, 유형 C 신학은 점차로 잊혀졌으나, 유형 A는 유형 B로부터 유래된 몇가지 요소들과 함께 개정되어서 표준적인기독교 신앙이 되었다. - 특히 서방에서, 이 개정된 유형 A는 중세를 걸쳐 지배적인 것이 되었으며 중세신학의 대부분의 과정을 결정하였다. 종교개혁의 시기에, 비록 중요한 논제들이 교회를 갈라 놓았지만, 개신교와 구교 모두 일반적으로 그 신학의 변수 내에 남아 있었다. 이런 점에서 전통적인 카돌릭과 개신교 신학들은 같은 유형의 신학의 표현들이다.
(J.L. 곤잘레스 ‘그 세가지 신학의 유형으로 살펴본 기독교 사상사’ 이후정 컨콜디아사 p. 133. 제 2부 서구 신학의 경과 제목에서 언급한 내용중에서..)

이것은 개혁신학까지도 스콜라 신학의 연상으로 보는 입장인데 그러한 것은 리차드 밀러의 16세기 진정한 칼뱅신학이라는 책에서도 말하고 있는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칼뱅의 실재론이 그 하나님의 이름에서 ?O을 수 있음에 대한 것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언급들이다. 즉 사상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의 연속성과 비연속성이라고 하는 개념, 그것이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측면에서 실재를 달리 할 수 있다는 점을 생각하지 못하는 것으로 지적될 수 있다.

각주 3)
장욱 토마스 아퀴나스의철학(ens et veritas) 동과서 pp. 5-6 서언 중
...성 토마스의 철학은 여러 이유로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았다.
첫째, 중세는 이성적으로 궁핍한 시대이며 진정하고 순수한 철학적 사유가 부재하다는 편견이다. 즉 그리스도교로 인해 왜곡된 철학 사상만 있을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중세는 이성적으로 빈곤한 시대가 아니며, 그리스도교 신학뿐 아니라 철학이 풍부하게 탐구된 시대이다. 중세를 거치는 동안 그리스 철학과 로마 철학은 유태, 아랍, 그리고 그리스도교 사상가들에 의해 지속적으로 연구되었다. 그리고 그 철학들은 13세기에 이르러 완성되었다. 그리스 철학과 로마 철학은 그리스도교 사상과의 접촉으로 인해 왜곡되거나 변질되기 보다는 그들이 지향하는 바를 달성하였다. 그리고 그 철학들은 그리스도교 사상의 지평 하에서 자신들의 한계를 드러내었다.

장욱교수님은 신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말하면서도 13세기 철학의 완성을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신학의 시녀로써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토미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체라는 개념의 실재성을 임의로 말씀하기에는 토미즘에서는 실재론을 말할 수 없고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해둔다.



철학적 사고의 맹목적 비판과 그에 따른 성경택스트 맹목적 주장을 하는 분들에게 비판적 언급..

1. 상식철학이라고 하는 것의 보편성은 상식적인 측면에서 접근하는 사람들과 관념을 동일하게 할수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상식적은 측면에서 현상을 그대로 이해하자는 현상학적 입장은 하나님을 마음에 두지 않는 사람들의 인식과 동일선상에 있습니다.

2. 오늘날 성경택스트만 주목하면서 하나님의 말씀으로서 하나님의 뜻하심 안에서의 성경적 택스트를 무시하고 택스트로서의 성경만 본다면 하나님 믿지 않는 자로써 자신을 기만하는 자로 나타납니다. 그것이 분리된 삼신을 말하는 괴로움이 그의 소득이 되는 것입니다.

3. 정말로 성경으로 돌아가고자 하는 사람은 성경이 말하는 성경의 실존을 이해하고 그것이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개념에서 실존을 말한다면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성경택스트 이해를 함이 옳은 것입니다.

4. 이 말은 현대의 포이엘바하의 자의적 당위성으로써 성경의 신인동형을 비판하는 개연성이 성립되어지지 않음에 대한 합당한 판단으로도 나타난다고함을 말해두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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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기독교인들의 안티적 인식의 향방에 대하여서



우리가 어떤 사상적 진술을 할 때에 또는 그것을 기술하거나 설명하려고 할 때에 그 인식의 방향성을 말할 수 있습니다. 이것은 기술적(descriptive)이거나 설명적(Explanatory)인(각주1) 개념에서 이루어지는 것들인데 일반적 명제적 언급을 말할 수 있고 단순논리 형식논리적 향방이라고 하는 것과 같이 나타날 수도 있음을 말하며 지적할 수 있습니다.

좀더 포괄적인 의미에서 언급을 한다면..

하나님이 상대적으로 자신을 표현하셨다는 것과 그 신실성을 말함이 기독교의 입장이라면
그러한 상대적인 표현으로써 하나님을 생각할 때에는 하나님의 존재와 하나님의 표현이라고 하는 것이 거절될 수 있다는 것이 비기독교인들의 안티적 인식방향(각주 2)입니다.

이러한 인식의 양방성이라고 하는 것을 어떻게 이해하여야 하는가는 인식의 중요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문제는 공통적인 부분이라고 하는 것의 해석적 차이와 공감을 어떻게 실제적으로 분별하여 받아들임의 정당함을 말하는가 하는 것입니다.

즉 믿지 않는 사람들이나 하나님을 믿는 사람들 모두 성경의 기록되어진 바를 놓고 해석적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상학적인 측면에서 성경 택스트의 표현사태인식의 차이를 합리성의 당위성을 가지고 논하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될 때에 누구의 말이 성경택스트의 표현적 사태라고 하는 것을 현상적으로 해석함에 있어서 옳은 것인가 하는 것입니다. 모두 상대적인 범주 안에서의 인식이라는 것에서 그 상대적 합리성의 충족성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상대적 합리성이라고 하는 공통적 입장이 되어지면서도 그 합리성이 객관적 사실로써의 실제를 말할 수 있고 그것이 정당화 되어질 수 있는가 하는 것까지 생각하는 것이 합리성의 보편성을 말할 수 있다는 것입니다.

비기독교인과 기독교인의 합리적인 공통적인 측면 그러나 그 인식의 논리 전계는 그 반대방향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고 할 때에 하나님이 상대적으로도 절대를 말씀하실 수 있다는 것과 절대의 정당함을 그럼에도 말씀하심에서 그 성경택스트의 상대적 현상적 입장을 실제로 받음에 절대의 재가적 차원에서 실제상황과 실제의 증거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상대적인 표현이라고 해서 절대를 묘사함에 있어서 불가능하다 또는 상대적인 설득력으로 볼 때에 절대가 제한(각주 3)되어진다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는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을 가지는 것은 사실이나 그러한 당위성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진 실제상황으로써의 계시의 실존을 말함을 판단할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은 그렇게 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전제와 방향성이라고 하는 것의 정당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존의 절대자 하나님께서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지고 상대적인 것을 통하여서도 절대를 말씀하신다면 그 상대적인 것은 형식적인 측면에서 상대적이면서도 그러한 것을 고려한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상대적인 보편당위성에서 파생되어지는 상대적 비판과 판단이라고 함이 성립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인식의 방향이 하나님을 의지하여서 그 증거의 실제를 말하는 것과 상대적으로 개연적일뿐이라고 하는 인식의 상반성으로 흐르는 인식의 향방이라고 하는 것은 분명히 주목되어야 하고 이러한 개연성이라고 함의 인식의 방향이라고 하는 것은 상식보편적 입장에서 하나님을 의지 하지 않는 가운데서는 쉽게 동화되어지고 동일한 목소리를 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의지하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을 주목한다고 하는 그것도 역시 외식하는 가운데서의 성경주의로써 결국 하나님을 세 개의 신 삼신정도로 아는 자리에 나가는 삼위일체 하나님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는 자들이 될 것입니다. 하나님을 허공에 두고 하나님의 이름을 그냥 맹목적으로 슬로건적으로 생각하는 자리에서 나와서 진정 하나님의 이름을 위한 사도바울과 같은 은혜의 자리를 구함이 기독교인으로서의 합당한 모습일 수 있음을 말씀드립니다.







각주1) 포스터는 더 나아가 우리가 전에 제기했던 방법이 자체를 서술에 국한시키는지 아니면 자체를 설명적인 것으로 간주하는 문제를 제기하는 방향으로 돌린다. 그는 최근의 독일 신학이 똑같은 문제와 씨름했다는 사실을 지적하고 있다.
“빈델반트-리케르트(Windelband-Rickert)역사학파는 ‘표의기술적인 방법’(method ideographic)을 선정하고, 딜타이-분트(Dilthey-Wundt)학파는 ‘법칙정립적인 방법’을 선정한다. 전자는 사실상 기술적(descriptive)이고 후자는 사실상 설명적(Explanatory)이다”
(George Burnam Foster, The Finality of the Christian Religion. p. 309.)
(코넬리우스반틸 종교심리학 위거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 67.)

이것은 독일의 철학적 신학의 범주를 이해할 수 있고 영미철학과 신학 그리고 독일을 비롯한 유럽의 철학적 차이를 말하게 되는 것을 말할수 있는 것으로 전반적인 학문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할 수 있는 판단이 성립되어진다.

여기서 이러한 것의 영향력을 개인적으로 언급할 수 있는 것은 버트란트 러셀의 신에 대한 기술적 존재의 가능성인정이라고 하는 것과 러셀의 헤겔철학적 입장에서 돌아서며 비판적인 입장을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또는 그의 어떤 전기에서 읽을 수 있는데 이는 독일에 헤겔철학적 입장과 관련되어진 가운데서의 토론적 영향력이라고 하는 것에 힘입어서 포스터가 말하고 있는 최근의 독일의 신학적 경향이 생성되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것의 학문적 학파적 경향이라고 하는 것은 오늘날 학문적 전체의 기원적 의미를 판단할 수 있게 하는 흐름으로 말할 수 있는 중요성도 지적해둘 수 있겠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보편성이 있는 사람들의 인식이라고 함을 말함에 이러한 예를 마음에 두고 글을 쓰고 있다.

각주 2) 그러나 헤겔의 철학은 또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다른 결론에 이르도록 하였다 그들은 신 묘사에 있어서 모든 구체적인 표상을 버린다는 것은 전혀 불가능할 것이라고 확언하였다. 따라서 그런 생각을 가진 이들은 무신론을 채용하였다. 이런 식으로 추론하여 포이엘바하(Feuerbach)는 인격적인 하나님이란 사람의 존재에 불과하고, 신학은 인간학(anthropology)일 뿐이라고 하였다. 하나님에 대해 언급되는 모든 것은 인격성뿐만 아니라, 그 모든 속성도 인간의 영역에서 빌어온 것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종교는 인간의 신격화(deification)이다. 이처럼 결코 그 자신의 존재를 초월하지 못한다 따라서 기독교 교의학에서 뿐만 아니라 철학에서도 신은 항상 물리적 인간 존재(a physical human being)로 남는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이러한 포이에르바하의 생각에 동의하였다. 그들은 신에 관한 신인동형론적인 묘사나 표현만을 버린 것이 아니라 그와 함께 신개념 자체를 포기한 것이다.
(헤르만바빙크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39-40.)

포이엘바하의 인식의 방향성에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은 개연적인 측면에서만 본다면 납득당위성을 최소한 부인하지 못한다는 것을 말할 수 도 있다. 그러나 그러한 그의 납득당위성을 위한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이 절대의 자기 정당함을 가진 상대적 표현을 본질적으로 판단할 수 있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 앞에서와 상대적으로도 납득되어지지 않는다는 것이다.

상대적인 측면의 합리성을 위한 당위성을 고찰해보면 인간학적인 측면에서 신의 개념을 포기하고 또한 신의 죽음을 말하지만 그래도 여러 가지 전통이라고 하는 것이 신의 개연적인 측면에서도 인정되어져야 한다는 것은 독일 튀빙겐 대학 교수로서 그리고 자유대학에서 교수한 빌헬름 바이세델의 ‘철학자들의 신’(Der Gott der Philosophen)에서 철학적 신관의 상대성을 통한 변론도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이러한 바이세델의 철학자들의 신이라고 하는 개념설정이 실재의 하나님을 드러내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아니라 정도면에서 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일반적인 핑계할 수 없는 가운데서 모든 사람들이 부인할 수 없다는 개념만의 한정적인 의미를 인정한다는 점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 3) 슐라이어막허는 많은 점에서 칸트와 피히테와 다르고, 오히려 스피노자의 견해와 상당히 가깝게 접근하지만, 신의 불가지성에 대한 입장에 있어서는 칸트나 피히테와 의견을 같이 한다. 존재와 사유, 또 실재와 이상(즉, 신관념)의 통일성개념은 우리의 모든 지식의 전제요 우리 사상의 원천이다. 그러나 이 개념 자체는 전적으로 사유로 파악될 수 있는 것은 아니고, 항상 배후에 남아 있는 것이다. 절대적인 것을 우리 수준에 가깝게 하려고 하자마자, 우리는 그를 우리 사고에 제한시키고, 결국 은유로 말하는 것이 되고 만다. 한마디로 절대적인 것은 우리 지식에 접근할 될 수 없는 것이다. 그의 신앙론에서 슐라이어마허는 같은 개념들을 좀더 발전되고 좀더 종교적인 방식으로 진술하며 발전시켰다. 신은 우리 실존의 원천이다. 이런 절대적 원인으로서 신은 우리의 지적 이해의 대상이 될 수 없고, 단지 우리의 절대 의존감정의 내용이 될 수 있을 뿐이다.
(헤르만 바빙크 신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 pp. 38-39)

우리가 신에 대하여서 증거한다면 이해한다면 신을 제한시키는 것이라고 하는 것은 인용한 것에서 보는 것과 같이 헤르만바빙크가 진술하고 있는 맥락이 불가지론에 대한 것임을 주목할 수 있다. 이것은 슐라이허마허의 신앙이라고 하는 것이 불가지론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는 것과 이것은 사실 개혁파 신앙을 가지고 있는 개신교 가정에서 자라난 자로써 그가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가지지 않고 있고 오히려 카돌릭적인 개념에서의 신관을 주목할 때에 그는 혼선이 온 것으로 지적되어질 수 있다.

그렇게 말할 수 있는 것은 “절대적 원인”을 언급하고 있는데 이는 토미즘에서 입각해 주장하고 있는 자들의 형이상학적인 존재의 근거지움을 말할 때에 현실의 가능태 현실태에 대한 이해로써 원리가 해석되어질 때에(각주 4) 그 원리라고 하는 것이 절대자로 제시되어질 수 있음을 말하고 있고 이러한 절대는 상대적인 것으로 규정되어지지 않는 상대적인 것을 상대적으로 초월한 존재로 상관성을 가질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고 있고 그러나 상대적으로 상대적인 것을 초월한다는 의미는 상대적인 초월로 진정한 초월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슐라이허마허도 인정해야 했던 것이고 그것은 그의 한계적인 차원에서 감정으로 그의 견해를 선회하여야만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이것은 카돌릭시즘에서 ‘존재의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인위적 개념의 신관을 통해 부정의 신학적 영향력에서 못 벗어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말하는 합리성의 범주에 국한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각주 4) 장욱 토마스 아퀴나스의철학(ens et veritas) 동과서 p. 18 각주 참고
장욱교수님은 신학과 철학의 상관성을 말하면서도 13세기 철학의 완성을 말할 수 있고 긍정적인 신학의 시녀로써의 철학을 말할 수 있다는 점에서 아리스토텔레스적인 토미즘을 소개하고 있다. 그러나 철학자체라는 개념의 실재성을 임의로 말씀하기에는 토미즘에서는 실재론을 말할 수 없고 실제를 말할 수 있는 사상적 근거는 없다는 것을 간과하고 있음을 지적해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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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4월 01, 2004

인간의 타락과 하나님의 예정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사람의 타락을 인식하지 않으려고 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러한 의도에서 또는 분명함이 없는 가운데서 인간이 타락했다고 하면, 그것은 하나님께서 실수하시거나 잘못을 범하시는 것으로 말하면서 자신들의 정당성을 세우고자 하는 자들이 있습니다. 온전한 전능하신 하나님의 존재에 대하여서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그의 행하심을 재려고 하는 어리석음이라고 하는 것을 전제로 일축되어질 수 있는, 기각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하지만 굳이 언급하는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이 어떠한 것인가 하는 것을 우리 성도들이 또는 우리의 연약함 때문에 상한 마음을 가질 수도 있다는 차원에서 기술하도록 하겠습니다.

여기서 모든 것을 말할 재주도 없거니와 모두 말한다는 것은 의미가 없을 것같습니다. 다만 두가지만 언급하고 질문하시는 분이 있다고 하면 대답을 하는 것으로 기약하고 글을 씁니다. 그 두 가지라고 하는 것은 한가지는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이 전능하신 전지하신 하나님의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을 마치사람들은 그것을 직무유기라고 하는 식의 의미로 비방하고 있는 점에 대해서와 또한 예정에 대한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아담의 타락과 하나님이 전능하신 전지하신 하나님의 그것을 막지 않으신 것을 마치사람들은 그것을 직무유기라고 하는 식의 의미로 비방'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이것은 전에 한번 한 고등학교 학생이 질문하셔서 제가 질문에 답한 기억이 있습니다. 참고하셔도 좋겠습니다. 그래도 여기서 진술함에 순서를 따라서 같은 내용이라고 할 수 있지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질문하여질 수 있는 것이 인간이 창조주에게 피조물로서 당위성을 부과할 수 있는가 하는 차원을 묻고 싶습니다. 지금 전제되어지는 가정에서는(물론 진리이지만 언급되어지는 순서상..) 그들도 피조물로서의 인간임을 인정한다고 하는 점을 기억할 때에 더욱 그렇다고 하겠습니다. 결코 그렇게 할 수 없다고 할 때에 하나님께서 인간의 타락에 어떤 도움이나 조치를 하지 않았다는 식의 비난이라고 하는 것은 그렇게 어리석은 비난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리고 오히려 하나님께서 그러한 죄악을 짓는 아담에게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을 허락하신 것은 하나님의 선하심의 반영이라고 하겠습니다. 즉 하나님은 사람을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으셨습니다.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었다고 할 때에, 그에게는 하나님께서 주권을 가지시고 자신의 기뻐하시는 뜻대로 행하심의 반영을 인간에게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으로 받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그러한 것은 그 인간에게 부여된 주권이라고 하는 것과 책임이라고 하는 것은 같이 나타나고 있는 것이며 선함을 따라 순종할 수 있는 경우도 허락하시고 죄악을 따라 타락할 수 있는 경우도 만들어 주셔서 자유로운 선택을 할 수 있는 주권행사마저도 허락하셨습니다. 이러한 것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은 존재로서의 인간을 믿어주시고 받아주시는 선하심을 보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하나님의 부여하신 은사 그 은혜와 선물로서의 그들의 주권적인 임의의 행동은 그들의 책임이라고 하는 것과 하나님의 말씀의 범위에서 그 책임이 주어진다는 것은 당연하다고 하겠습니다. 따라서 선악을 알게 되는 열매를 따먹는 주 하나님의 말을 거억하는 것은 죄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죄를 범할 수 없다고 하는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또한 그렇게 행하지 않을 수 있는 능력도 주셨다는 것을 감안할 때에 인간의 타락은 인간의 주권적인 임의의 의도적인 불순종에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두 번째 언급되어질 문제는 '예정에 대한 것을 인식함에 있어서 주의할 점이라고 하는 것'입니다. 이 예정에 대하여서 오해가 참으로 많은 것 같습니다. 일일이 언급한다고 하면 장황해질 것이고 다만 여기서는 이 문제에 관한 것만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예정이라고 하는 말을 오해하고 있는데 그것은 결정론적인 차원에서 생각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정이라고 하는 것이 아주 굳어지고 결정되어진 기정사실로서 변함이 없다는 사실을 가지고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서 당위성에 매여진 분으로 매도하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는데 이는 참으로 사람들, 자신들의 인식의 한계를 하나님에게 이입시키고 싶어하고 자신들의 인식의 한계를 하나님의 모순이라고 말하고 자위하는 모습이라고 하는 것은 가엽다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 역시 사람이지만 하나님의 존재와 자신의 계시하심을 인정하고 믿는 사람으로서 진정한 저 자신의 존재의 의미와 정당성 그리고 하나님에 대한 증인으로서의 말할 수 있는 정당성은 확보되어 있다고 말하겠습니다. 다만 믿지 아니하는 사람들은 온전한 신을 온전히 인식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비판한다고 함에 정당성이 결여된 만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하여서 비난하는 것들은 모두 기각되어진다는 것은 기정사실이라고 할 때에 저의 이렇게 하나님과 하나님의 행하심에 대한 증거에 합리성 있는 비난을 할 수 없는 것이라고 봅니다.

본 주제로 돌아가서 언급한다고 할 때에 예정이라고 하는 것은 우리 하나님께서 모든 것을 이미 그의 기뻐하시는 뜻에 따라 정하여 놓으신 것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함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의 영적인 다스리심은 이러한 예정된 가운데서 나타나게 되는 것입니다. 이 예정하심에는 우리의 모습들 모자란 모습도 학식 아픔 악함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정하심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간단하게 언급하여서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인간의 의지적 행동이라고 하는 것에 매이지 않으시는 가운데서 그의 정하심을 나타내실 수 있다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어떤 이들은 손바닥을 뒤집으며 말하기를 하나님이 이것도 예정하셨나는 식의 말을 하는데 사실 자신의 인식의 한계적 상황과 이해의 상황을 넘어서신다는 것을 인식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여러 가지 언급이 되어질 수 있는데 하나님의 존재와 행하심에 대한 것을 인식하지 못하고 다만 사람들이 권위를 부여한 사람의 형상을 가진 신들의 개념을 가지고 하나님 창조주를 보려고 하는 가운데서 모순이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자존의 절대자이십니다. 자존하심으로써 상대적 판단이라고 하는 것과 상관없이 존재하시는 그 절대자가 상대적인 개념의 악이라고 하는 것과 상대적인 모순이라고 하는 것에서 매여 있다고 하면 그 자체가 모순이라고 하겠습니다.

옛날 스토아학파에서는 선과 악이라고 하는 것은 두 쌍으로 불려지는 것으로 인식하였고 그러한 가운데 선이라고 하는 것의 충만 정도를 신의 개념으로 인식했던 중세의 잘못된 신학관이 오늘날도 진정한 신의 개념으로 오해되고 있는 것을 인정할 수 있다고 할 때에 우리 하나님 절대자의 모습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을 인정하게 될 것입니다. 그리고 죄라고 하는 것도 선의 결핍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자도 있어왔음을 기억하는데 그가 물론 지난날 유명한 기독교의 스승이었던 것도 알고 있습니다. 언급하자면 어거스틴의 경우가 그것이라고 할 수 있는데, 그의 가르침이 절대적으로 오늘날 개혁신앙과 신학에 들어온 것처럼 생각하고 있는 단순한 발상은 아직도 중세철학적 신학의 불분명한 정체성을 가진 신학의 잔제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하겠습니다.

종교개혁을 중심으로 이루어진 바른 신학과 신앙적인 체개로서의 신앙은 무조건적인 전통에 대한 맹종을 말하고 고집하는 것은 아닌 것입니다. 성경에 권위에 입각해서 각자가 자신의 믿음을 고백하는데 그 믿음의 고백이 공통적으로 나타나게 될 수 있다는 차원에서 신앙을 바탕으로 한 신학이 준비되어지는 것이고 종교개혁을 완성한 칼빈의 경우도 그러한 입장으로 가르쳤는데 그 시대의 많은 사람들과 오늘날도 피상적으로 칼빈을 위시한 개혁신학과 신앙에 대하여서 아주 편협하고 새로운 스콜라 신학이라는 잘못된 비난을 하여왔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잘못된 역사관의 반영이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따라서 어거스틴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에 전적인 맹목적인 신뢰가 있는 것처럼 생각하여서 카톨릭의 잘못된 신관과 신학을 기독교와 분별하지 못하고, 그 가운데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잘못 알고 있고 또한 하나님의 행하심을 잘못이해하고 있으며 또한 하나님의 예정하심도 보지 못하고 있다고 하겠습니다.

앞에서 중세의 신관이 사실 존재들의 충만과 선의 충만 정도로 인식하고 선과 악이라고 하는 개념을 하나의 쌍이라고 하는 식의 발상을 가지고 있다고 할 때에 그 신은 어디까지나 상대적인 신이요 그의 예정하심이 있다고 할 때에 그 자신의 예정함에 걸려 넘어지는 자요, 죄라고 하는 것은 선의 결핍으로써 이해한다고 하면 그 예정하심과 죄라고 하는 문제는 모순 덩어리라고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인식에 있어서 패러다임이라고 하는 것을 언급을 한다고 하면 사람들의 인식의 정직하지 못함과 인식의 한계를 마치 신의 모순인 것처럼 착각하는 것과, 중세 신학의 잘못된 신학적 관점을 본의가 있든지 없든지 철학을 하는 가운데서 습득하게 된 것과 또 한가지는 카돌릭과 기독교의 정체성을 분별하지 못하고 있는 자들의 견해라고 하는 것이 톱니바퀴처럼 맞물리고 있는 상황에서 빗어지는 사상의 혼돈에서 이루어진다고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혀 그러한 분이 아니라고 하는 사실과 전능하신 하나님께서 예정하심에는 우리의 모습들 모자란 모습도 학식 아픔 악함 전인격적인 모든 것이 허용되어지는 가운데서도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예정하심이 나타나고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겠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도 죄와 예정하심에서도 전능하신 분이 그러한 모순에 잡히실 수 있다는 그러한 발상 그것이 참으로 어리석은 발상이라고 하겠습니다. 우리 하나님은 전혀 선하신 분이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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