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n a dishonored time - 시간이해의 정당성 시비에 대하여서..
모든 신학은 칸트에게로.. 그러한 구호가 철학적으로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주장할 수 있는 여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치고 '칼 바르트'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러한 말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식의 요소로써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시간관에서 출발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떤 시간관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저의 입장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주관적인 시간관이라고 함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신학이 시간의 보편성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현대신학 자체적 정당함이 상실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물론 현대신학이 부정되었음에 전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부정되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실재를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또 하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부정한 현대신학에서 공통적으로 또는 심도있는 증거적인 지혜가 있다고 함을 형태적으로 가질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또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믿음안에서 구별하여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말해둡니다.
그것이 현대신학을 하신 분들의 선한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중심을 말씀드리는 것이며 또한 대화가 역시 가능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현대신학을 연구하시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성도들이 있음과 있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신학의 부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영향력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서 옳지 못한 자리로 인도하게 되어지는 자리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분별있게 생활함이 옳다는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섬김에서 말입니다.
1. 구체적인 신학에 있어서 시간론에 대하여서...
신학적 종말론과 철학적 종말론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철학적 종말론이라고 함은 임의의 시간이해라고 함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그 시간의 정당함을 잃었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그 이유:
성경에서는 시간이라고 함을 해와 달에 따른 주기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연한을 이루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에서 그 시간의 창조와 함께 그 시간의 정체성과 그 정당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신학적인 입장의 정기철 박사님(독일 보쿰대학.. 호남신학교교수)은 꼭 시간이라고 함을 말함에서 영원과 상관, 상반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당위가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그의 시간철학과 시간신학에 대한 서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정기철, 시간문제와 종말론 한들출판사)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언급이면서도.. 현대신학적 입장의 기본임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되어지는 현대신학자들의 입장을 볼 때에 그렇게 말할수 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일상적인 시간을 말씀하시고 있는 성경의 시간관을 상대적이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의 자체적 정당함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자존적 실존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의 주권적 자기 정당함을 가진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 리츨신학에 따라서 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을 이루었고 이것은 종교개혁당시의 여론이었음에 대한 것도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임을 말할 수 있습니니다.
그렇기에 신론이라고 함의 염증적 개념으로 윤리적 개념에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종교개혁적 실재를 잊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관을 철학적으로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정당함을 상실한 시간관이었던 것입니다.
2. 현대신학에서의 시간관과 개혁신학에서의 시간관 이해의 비교..
게할더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이승구, 오광만역, 엠마오출판)에서 역시 시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서문에서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트만이 신약신학을 바울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을 말함과 달리 두가지를 말할 수 있고 그 두가지는 하나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메시아직(Messiahship)과 종말론(Eschatology)..
메시아직(Messiahship)에 대하여서는 게할더스 보스의 '예수의 자기계시'(이승구역, 엠마오)라고 함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도록 하고 종말론(Eschatology)라고 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역시 그의 종말론이라고 함을 어원적으로 살피면서 시간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칸티안적인 그러한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하는 현대적개념의 시간관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적 개념의 시간관으로 역사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그 종말론이라고 하는 말을 구약성경의 70인역에서 찾게 되어짐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와 상관관계에서 종말이라고 함의 시간에 대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이라는 말은 헬라어 '에스카타이 헤메라이'라는 말로써 창세기 49장에 나타나는 말을 처음 언급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로 '아하르'라는 말이 됩니다.
종말 '아하르' 라는 시간언어 해설
1) 일상적인 연대기적인 시간
2) 결과를 말하는 시간
3) 과정으로서의 시간과 들어감의 시간
4)어떤 바람에 따른 것, hope로서의 시간
등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신학적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종말 시간관의 언어 선택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과정신학이나 진화론적 신학을 말할 때에는 3)의 시간을 말하게 되어지며, 베자와 같이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고자 할 때에도 3)번의 시간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이 시간해석을 한다고 하면 4)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할 수 있는 것들로서 특히 생태학적인 창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가운데서는 그의 선택은 그리고 현대신학자들 중에서 범재신론적 입장을 말하려고 하면 최소한도 3)번이나 4)번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안에 있는 5가지 유개념 중에 정지라는 개념 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수와 운동의 특별한 형태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표상으로 말할수 있다는 점에서 신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으로 영원과 상관되어진 시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말할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플라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다시 교회 초기에 있게 되어지는 알랙산드리아 학파에서의 플라톤철학이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신의 유출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와 다른 점은 신의 영원과 반대되어진다는 그 중세적 개념이 신의 영원이라고 함을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신을 말할 수 없다는 수긍에서 계시라고 함을 그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시간해석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종말이라는 개념이 앞서 언급한 3)과 4)번으로 해석되어질 때에, 그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포이엘바하의 인간론적인 개념에 쫓겨서 원역사를 말하게 된 칼바르트의 잘못된 시간관에 따른 해석이 어거스틴을 따라서 잘못된 시간관을 열여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로도 표현하고 있는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시간의 주관적 실재와 현실적인 일반 시간의 정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인 시간으로써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현실적인 그러한 정황적 정당함을 일반적으로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시는 특별하심의 구별하심의 성별된 시간으로서의 계시를 말씀하셨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칼바르트의 개입하는 '시간'으로 말하지 않고, 일상적인 전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로서 (consummator of God's world-purpose) 오셨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결론적으로..
태양과 달을 만드시고 그들의 주관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하는 것의 기본이 되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에 원역사와 일반역사를 구분하고 그 변증법적인 접근을 하거나 절충적 개념의 임마누엘을 말하고자 하는 그러한 합리성만 따르는 자들의 모습은 그 시간의 부도와, 시간의 인식에 따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잃었음에 대한 것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일상적인 시간으로써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을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통해 말씀하심이 성경의 증거일 때에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함의 모델적 합리성도 이미 부정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고민하여야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능력도 이미 상실되었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구별하게 되어지는 권세로 인해서 공통적인 측면이나 아니면 그 지혜의 깊이의 산물을 구별하여 말하게 되어지지만 이제 본질적으로 어거스틴의 분명하지 못함과 칼바르트의 도망치는 자로서의 변명으로 열려진 잘못된 시간과 그 부산물을 이제 성도들은 닫아야 할 것입니다.
Author's main homepage
모든 신학은 칸트에게로.. 그러한 구호가 철학적으로 있음을 말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신학자의 견해에 따라 다르게 주장할 수 있는 여지라고 함을 말할 수 있지만 신학을 연구하는 사람치고 '칼 바르트'를 연구하지 않으면 안된다는 그러한 말을 어떤 교수님으로부터 들은 기억이 있습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칸트의 인식론이라고 하는 것은 그 인식의 요소로써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습니다.
제가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시간관에서 출발하고 있음에 대한 것을 말했습니다. 그러한 가운데서 어떤 시간관으로 일관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이 정당한지 그것에 대한 언급을 해야 할 때가 된 것같습니다.
저의 입장은 하나님 앞에서 그들의 주관적인 시간관이라고 함이 정당하지 못하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현대신학이 시간의 보편성을 따르고 있다고 할 때에, 현대신학 자체적 정당함이 상실되었다는 점을 분명히 하고자 합니다.
물론 현대신학이 부정되었음에 전혀 연구하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은 아닙니다. 그러나 그러한 것이 부정되어지지 않았고 그에 따라서 하나님에 대하여서 어떤 실재를 정당하게 말하고 있다는 점 그것을 부정하는 것입니다.
물론 또 하나를 말할 수 있는 것은 그러한 부정한 현대신학에서 공통적으로 또는 심도있는 증거적인 지혜가 있다고 함을 형태적으로 가질수 있다는 점을 인정하며 또한 우리 성도들은 예수님 안에서 그 뜻하심 안에서 정당함을 믿음안에서 구별하여 선하게 사용할 수 있는 권세가 있음을 말해둡니다.
그것이 현대신학을 하신 분들의 선한 중심이 되었으면 하는 중심을 말씀드리는 것이며 또한 대화가 역시 가능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더욱 현대신학을 연구하시면서도 하나님 앞에서 신실한 성도들이 있음과 있을 수 있음을 믿습니다. 하지만 그러한 현대신학의 부정을 말할 수 있다고 하면.. 그 영향력이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자들로서 옳지 못한 자리로 인도하게 되어지는 자리가 있을 수 있음에 대하여서 분별있게 생활함이 옳다는 입장을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섬김에서 말입니다.
1. 구체적인 신학에 있어서 시간론에 대하여서...
신학적 종말론과 철학적 종말론은 시간이라는 측면에서 공통적인 해석을 시도하고 있는데 철학적 종말론이라고 함은 임의의 시간이해라고 함으로 일관하는 가운데 그 시간의 정당함을 잃었다고 함을 말해둡니다.
그 이유:
성경에서는 시간이라고 함을 해와 달에 따른 주기에 이루어지는 것으로 연한을 이루도록 하심의 말씀하심에서 그 시간의 창조와 함께 그 시간의 정체성과 그 정당함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현대신학적인 입장의 정기철 박사님(독일 보쿰대학.. 호남신학교교수)은 꼭 시간이라고 함을 말함에서 영원과 상관, 상반된 것으로 해석해야 할 당위가 어디 있느냐는 것으로 그의 시간철학과 시간신학에 대한 서론을 시작하고 있습니다.(정기철, 시간문제와 종말론 한들출판사) 이것은 그의 개인적인 언급이면서도.. 현대신학적 입장의 기본임을 그의 저서에서 언급되어지는 현대신학자들의 입장을 볼 때에 그렇게 말할수 있음을 말하게 됩니다.
이러한 것은 일상적인 시간을 말씀하시고 있는 성경의 시간관을 상대적이지 않은가 하는 그러한 전제로 말하고 있고 이것은 성경의 권위와 가르침의 자체적 정당함을 인정하지 못하겠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의 자존적 실존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절대자로서의 자기 계시라고 함의 주권적 자기 정당함을 가진 것에 대하여서 마음을 두지 않는 것입니다.
칸트 이후 리츨신학에 따라서 거의 자유주의 신학에서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한 것을 생각하지 않았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을 알 수 없다는 것이 불가지론을 이루었고 이것은 종교개혁당시의 여론이었음에 대한 것도 헤르만 바빙크의 입장임을 말할 수 있습니니다.
그렇기에 신론이라고 함의 염증적 개념으로 윤리적 개념에 마음을 두게 되었는데 그것은 이미 종교개혁적 실재를 잊은 것입니다. 그것은 하나님에 대한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않겠다는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관을 철학적으로 도입하였는데 그것은 정당함을 상실한 시간관이었던 것입니다.
2. 현대신학에서의 시간관과 개혁신학에서의 시간관 이해의 비교..
게할더스 보스의 '바울의 종말론'(이승구, 오광만역, 엠마오출판)에서 역시 시간적인 측면에서 접근하고 있음을 봅니다. 그는 서문에서 두가지를 말하고 있습니다. 불트만이 신약신학을 바울신학에서 찾아야 할 것을 말함과 달리 두가지를 말할 수 있고 그 두가지는 하나라고 함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습니다. 그 두가지는 이것입니다.
메시아직(Messiahship)과 종말론(Eschatology)..
메시아직(Messiahship)에 대하여서는 게할더스 보스의 '예수의 자기계시'(이승구역, 엠마오)라고 함에서 말하고 있고 그것에 대하여서는 여기서 논하지 않도록 하고 종말론(Eschatology)라고 함에 대하여서 언급하도록 하겠습니다.
바울 역시 그의 종말론이라고 함을 어원적으로 살피면서 시간론적인 개념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도 칸티안적인 그러한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하는 현대적개념의 시간관을 따르고 있지 않다는 점에서 개혁신학적 개념의 시간관으로 역사적인 측면으로 접근하고 있습니다.
게할더스 보스는 그 종말론이라고 하는 말을 구약성경의 70인역에서 찾게 되어짐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와 상관관계에서 종말이라고 함의 시간에 대한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 종말이라는 말은 헬라어 '에스카타이 헤메라이'라는 말로써 창세기 49장에 나타나는 말을 처음 언급할 수 있음을 말하고 있고 그것이 히브리어로 '아하르'라는 말이 됩니다.
종말 '아하르' 라는 시간언어 해설
1) 일상적인 연대기적인 시간
2) 결과를 말하는 시간
3) 과정으로서의 시간과 들어감의 시간
4)어떤 바람에 따른 것, hope로서의 시간
등등으로 해석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현대신학적 입장에서 선택할 수 있는 종말 시간관의 언어 선택이라고 함을 볼 수 있습니다. 과정신학이나 진화론적 신학을 말할 때에는 3)의 시간을 말하게 되어지며, 베자와 같이 타락전 선택설을 말하고자 할 때에도 3)번의 시간이 되어질 것입니다.
그리고 몰트만이 시간해석을 한다고 하면 4)번으로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소망할 수 있는 것들로서 특히 생태학적인 창조라고 함을 말하기 위한 가운데서는 그의 선택은 그리고 현대신학자들 중에서 범재신론적 입장을 말하려고 하면 최소한도 3)번이나 4)번을 선택해야 할 것입니다.
철학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안에 있는 5가지 유개념 중에 정지라는 개념 운동이라는 개념이 있는데 그것은 수와 운동의 특별한 형태로 말할 수 있습니다. 이러한 것은 이 운동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표상으로 말할수 있다는 점에서 신을 이해하기 위한 철학적 노력으로 영원과 상관되어진 시간을 말할 수 있게 되어집니다. 그리고 그것으로 하나님을 말할수 있다는 전제를 가지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이미 플라톤의 저작에서 볼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다시 교회 초기에 있게 되어지는 알랙산드리아 학파에서의 플라톤철학이 신학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받아들여졌고 그것은 신의 유출을 말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물론 현대와 다른 점은 신의 영원과 반대되어진다는 그 중세적 개념이 신의 영원이라고 함을 시간으로 해석할 수 있다는 점으로 말하고자 했던 것이며 불가지론적 입장에서 신을 말할 수 없다는 수긍에서 계시라고 함을 그러한 철학적 입장에서 시간해석을 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특히 종말이라는 개념이 앞서 언급한 3)과 4)번으로 해석되어질 때에, 그 가능성을 보았던 것입니다. 이것이 포이엘바하의 인간론적인 개념에 쫓겨서 원역사를 말하게 된 칼바르트의 잘못된 시간관에 따른 해석이 어거스틴을 따라서 잘못된 시간관을 열여놓게 되었던 것입니다.
그리고 개혁주의 성경신학의 아버지로도 표현하고 있는 게할더스 보스의 입장에서는 그러한 시간의 주관적 실재와 현실적인 일반 시간의 정합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 일반적인 시간으로써 구속사적인 하나님의 뜻하심이 현실적인 그러한 정황적 정당함을 일반적으로 말하면서도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시는 특별하심의 구별하심의 성별된 시간으로서의 계시를 말씀하셨던 것을 말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그는 예수님을 칼바르트의 개입하는 '시간'으로 말하지 않고, 일상적인 전 역사에서 하나님의 뜻하심을 이루는 자로서 (consummator of God's world-purpose) 오셨음에 대한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3. 결론적으로..
태양과 달을 만드시고 그들의 주관이라고 함을 통하여서 시와 연한을 이루라고 하심의 그 정체성이 하나님의 계시를 판단하는 것의 기본이 되어진다는 것을 분명히 할 때에 원역사와 일반역사를 구분하고 그 변증법적인 접근을 하거나 절충적 개념의 임마누엘을 말하고자 하는 그러한 합리성만 따르는 자들의 모습은 그 시간의 부도와, 시간의 인식에 따른 그 합리성의 정당함을 잃었음에 대한 것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하나님의 뜻하심이 일상적인 시간으로써의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심을 자신의 절대 주권적 정당함을 통해 말씀하심이 성경의 증거일 때에 주관적 시간의 개입이라고 함의 모델적 합리성도 이미 부정되었다고 하는 점에서 고민하여야하며 하나님의 뜻하심을 증거하는 능력도 이미 상실되었다고 함을 말해두겠습니다.
다만 예수님을 믿는 성도들의 구별하게 되어지는 권세로 인해서 공통적인 측면이나 아니면 그 지혜의 깊이의 산물을 구별하여 말하게 되어지지만 이제 본질적으로 어거스틴의 분명하지 못함과 칼바르트의 도망치는 자로서의 변명으로 열려진 잘못된 시간과 그 부산물을 이제 성도들은 닫아야 할 것입니다.
Author's main homepag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