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요일, 7월 24, 2007

사유의 행방

다원주의를 논하기 앞서 정초되어야 될 사유(思惟)

다원이라는 것은 여러 기원적 실체 또는 실재를 전제로 하는 것인데, 그러한 실재의 객관적 근거지움은 임의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현상적 측면에서의 실재의식과 기독교의 실재의식의 상관성이 있는 것은 사실이면서도, 현상적 측면에서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른 다원이라는 개념은 기독교 실재를 상관하는 동일범주적인 입장에서 논할 것이 비로소 되지 않는다는 것을 유념해야 한다.

그것은 임의적 객관적 근거지움에 따라 비롯되어진 파생적 언어 '다원', 상대적인 확실성에 따른 개연적 실재일뿐 비로소의 의미적인 실재가 없는 허상적 개념의 실존 언어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현실태라는 가능성에 있어서의 인식실제인 가운데서 그 존재적 정당함이 상대적 범주에서 벗어나지 못하기 때문이다.

더 나아가 이런 실재없는 개념이 바로 알곡이 아닌 가라지일진대, 그러한 임의적 허상적 개념의 실존을 자존의 절대자에서 자존적 절대 정당함을 얻는 실존으로서의 기독교 실재와 동일비교적 개념과 그 상관성에서 다룬다는 것은 범주설정에 모순적 개념이 있는 것이다.

따라서 허상적 실존의 언어로서의 '다원','다원주의'의 객관적 근거지움의 수행적 모순이나 전 사유의 행보는 그나마 상대적으로 설정되어질 때에는 반드시 그 범주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설정해야 할 것이며 이러한 것이 이해되어진다면, 흔히들 말하는 기독교의 배타성에 대한 비판은 의미를 상실한다. 실재 비교가, 정당성 시비에 따라, 불가능한 것을 놓고 동일 범주안에서 이루어질 수 있는 비판적 언어로서의 '배타성'을 말한다는 것은 수행되어질 수 없는 모순에서 비롯된 인식의 오류이기 때문이다(각주1).


객관적 근거지움을 앞서는 사유의 실존

이미 '지혜를 사랑한다'는 것의 종언을 말한 비트겐슈타인의 입장이나 그 앞서 회의주의자들이나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하는 사람들에게 있어서는 사유의 실존이라고 하는 것을 확신할 수 없거나 또는 그 존재를 알 수 없다는 것이며 칸트 이후에는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에서 불가지론적 입장에서도 상정되어질 수 있는 보편에 따른 당위성에 따라 그 확실성을 다소 인정할 수 있다는 입장을 취하고 있다.

그러나 여전히 의문시되는 것은 그런 철학적 불가해성이라고 하는 것도 그 확실성을 상대적으로 얻을뿐 비로소 말할 수 없는 것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할 것이다.

이러한 사유 행방의 실종이라고 하는 것은 철학 자체와 신학의 시녀역활을 했던 철학의 입장들도 개연적 당위성의 충돌일뿐 진정한 의미에서의 사상의 실존와 해석과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다.


이와는 달리 예수그리스도의 죽으심을 마음에 둘 때(각주2)에 그것으로 인해서 사상의 실존적 정당함을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사상이 비로소 기술되어질 수 있고 그 객관성의 정당함이 상대적으로도 표현됨에 불구하고 절대자의 정당함이 부여됨에 따라서 그 실존을 비로소 말하게 된다.

철학적 당위성도 구별되어지는 가운데서 그 당위성을 인정받게 된다. 그것이 신학의 본연적인 것과 철학적신학이 아닌 신학적 철학이면서도 철학 그 자체가 되어질 수도 있다. 그렇기 때문에 임의적인 변형에 따른 철학의 요청을 상대적인 측면에서 하게 되는 것이 아니라, 이제는 사람의 인식과 그 사유라고 함의 본래성을 자존의 하나님께 둠에 있어서 새롭게 검증되어지고 실존적 당위성을 세워야 하는 것이다. 이것이 지금까지의 스콜라철학, 아리스토텔레스 철학적 신학을 비롯한, 일반 철학적 반성을 비롯한 모든 사유가 본래성으로서의 실존적 재구성이 되어야 할 것이다.(각주3)




결론에 즈음해서

사유의 행방을 재구성하며 바르게 규정한다는 점에서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했다. 그것은 옛부터 '하나'와 '여럿'의 문제를 상고했던 것이 사유라고 하는 철학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즉 회의주의자들과 불가지론자들의 확신에 대한 고민과 나름대로의 보편을 따른 철학적 불가해성적 입장을 취하게 되지만 그런 것이 현대에서는 '여럿'이라는 개념의 존중으로 나타나고 있다고 하겠다.

그렇게 말함은 임의적으로 상정했던 '일자'라는 존재적 입장과 그러한 전통에 반대하여 존재의 여럿과 그 기원성을 이야기 하려는 다원적입장이라고 하는 것이 철학적 언어를 빌어서 표현하면 여전히 '철학의 영원한(?) 현재'로서의 시작을 말하는 것이라는 시각(視覺)을 말할 수 있다. 그렇기에 여기서 사유의 행방을 위한 개념의 정당성에 따른 바른 구성적 입장을 말함에 다원, 다원주의를 먼저 언급한 것이다.

이러한 사유의 시점으로서의 철학은 확실성을 위한 보편을 지향하게 되었고 그러한 보편으로 인한 사유의 굴절과 관절을 만들어 사상의 구조를 만들어냈다. 그러나 그러한 가운데서도 기억해야 할 것은 이러한 사유의 굴절과 규정이라는 사유의 행방을 규정한 보편인식추구라고 하는 것이, 중세의 보편으로서 공회(Catholic)까지도, 그 전체성이라는 개념이 임의적이어서 임의적 객관적 근거에 따른 개념들로 인해 사유의 행방은 사변으로서의 실재를 대신하고 말았고 그러한 사태는 사유의 행방을 헛되게 만들었다.

여기에서 메시아적 사유(각주4)라고 함에 따른 사유의 행방의 사실을 말하게 되는데, 그리스도 안에서, 즉 자존의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 안에서 사유의 행방의 실존이 사실화되어지며 그 가운데서 일반 사유라고 하는 것도 '지혜를 사랑하는 행위'도 모두 그 존재적 당위성을 비로소 얻게됨을 언급하는 바이다.

모든 사유와 그 기초로서의 개념들이라고 하는 것도 임의적 보편의식에서 법적 당위성을 얻는 것이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로부터 얻는 가운데서 사유가 거듭나 바른 본래의 행보를 나타내야 할 것이다.

한마디로 메시아적 사유라고 함은 예수님 안에서 지식의 구별적 사실이라는 것으로 사유까지도 경건의 자리에 나가야 한다는 것이다. 반지성적 독트린에서 임의적 초월이라는 개념까지 잘못되게 사용하고 있는가운데서 자존의 절대자 안에서의 초월이라는 개념이 그런 것과 다르면서도 본래적 개념임을 알 때에 초월을 위한 합리성의 굴절은, 반성된 가운데서, 비로소 다시 경건의 사유의 궁전으로서의 방주를 형성하게 될 것이다.

인류의 사유의 행방은 아리스토텔레스적 철학적 신학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요 일반 철학적 반성에서 비롯되어지는 것도 아니며, 메시아적 사유에서 그 본래적 행방이 비로소 시작되어지며, 철학과 신학의 사유의 행방으로서 마땅히 자리매김 되어야 할 것이다.










각주1) 배타성이라는 언어는 동일한 범주또는 범위에서 반대되어질 수 있고 또한 양립되어질 수 없음을 나타내는 경향이나 성질을 의미하는 것으로 말할 수 있을 때에, 기독교의 특수성은 상대적인 범주로 나타나면서도 상대적인 범주로 비로소 판단할 수 없는 범주적 특수성이 있다. 이것은 인식의 조건과 방향으로 인해 설정되는 범주에 따른 것이다

http://toagainstism.blogspot.com/2007/06/blog-post.html(링크되어지는 글 각주2번 참고) 그리고 본인이 사용하는 언어로서 '비로소'는 이런 범주적 개념의 시원성(始原性)과 방향성과 합리성의 굴절적 당위성을 의식해서 구별하여 사용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2) 예수님의 죽으심과 부활의 증거는 예수님이 자신의 존재를 스스로 주관하시는 분이심에 대한 자기 계시이다. 그렇기 때문에 예수님의 자존적 하나님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심은 상대적 자기 계시이시면서도 절대자기 계시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시고 예수의 뜻하심에서 비롯되어지는 상대적인 것도 왕적 제사장적 직분적 입장에서 거룩하게 구별하심에 따라 사실의 상대적이면서도 비로소 절대적 실존을 말하도록 하심의 정당성을 말씀하심으로 재창조의 본래성을 말씀하시는 것이다.

물론 이 예수님의 죽으심 '대속의 범위에 대한 견해'(**)는 여러가지 있을 수 있으나 그것마저도 앞서 언급한 내용을 부인하는 당위성을 비로소 가지지 않는다.

(**)(코넬리우스 반틸, 변증학, 신국원 기독교문서선교회. pp. 248-250.) 여기에서는 반틸의 일반은총적 입장을 옹호하는 측면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사람들에게 주신 인식의 상대적인 개념이면서도 구별되어진 주의 주신 은사로서 해석되어짐을 전제로 하는 것으로서 여기서 기독교 철학의 실재와 일반 철학적 실재의 실존을 말학에 된다. 그러한 이성적 사유라고 하는 것도 인간의 전인격적인 속성의 하나로서 구별되어지는 대속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실존적 자리매김이 이루어진다. 즉 대속은 우리의 사유의 경건을 전제하고 있는 것이다. 그것은 후에 언급되어질 메시아적 사유를 말하게 된다. 그리고 그 안에서 일반상식이 구별되어지는 실존적 현상에서 세상의 일반 이성들이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위상을 인정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이 반틸의 상게서 p270.이하에서 신학에서의 이성의 실존적 위치를 말하고 있다. 그리고 일반적 이성의 상식적 입장에서 언급되어질 것과 비교되어지는 것도 주목해볼 수 있다.

반틸이 말하는 '자충족적 하나님'이란 상대적인 상식보편에서 실재론에 허용되어질 수 있는 개념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규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언급임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이것에 대한 이해부족으로 인해서 오늘날 반틸의 '계층이론'을 상대적 분리라는 개념의 일방적인 해석으로 바르트식으로 오해하는 경향이 있다. 이것은 상대적인 초월개념으로 인한 실재론에서 있게되어지는 하나의 인식 오류이다. 전제는 맹목적 전제가 아니라,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신실하심을 읽을 때에 합리적 요청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 전제적 당위성이 당연히 전제되어진다는 것이다.

각주3)폴 코블리, 기호학, 리차잔츠 그림/ 조성택 변진경 옮김 김성도 감수 김영사 p. 70.

1967년 프랑스의 문예잡지《Quinzaine Littéaire》에 구조주의의 핵심 인물들이 그려진 만화가 개제되었다. 푸코가 강의하고 라캉은 팔짱을 끼고 듣고 있고 레비스트로스와 롤랑바르트가 듣고 있는 것인데 이것을 사람들은 보다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고 한다. 이 만화는 기호학적 사고라는 새로운 흐름이 텍스트의 범위를 뛰어넘는 보다 큰 영력으로 확장된다는 점을 예연함을 말하고 있는데,

그 그림의 공시적 개념적 예측은 이들을 기준으로 하는 사상들의 관계로 확장 유추할 수 있다고 본다. 사르트르 이후에 있게되어지는 구조주의적 입장은 성경텍스트 이해의 상위보편적 입장으로 이해되어질 수도 있다. 또한 그러한 구조주의적 입장의 기호학적 보편을 읽게 되어진다는 인식의 확장이 예상된다.

그러나 사실 이것은 자존의 절대자의 신적 속성적 범주라고 하는 것에서 정당함을 입은 텍스트는 임의적 생기존재론에 입각한 의지적 텍스트와 다른 범주적 입장을 취한다는 점에서 이들의 입장과 사상은 성경을 비로소 판단할 수 없으며 성경해석의 보편으로서의 구조주의적 보편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다.

이것은 재구성적인(reconstructive)(고든 카우프만, 신학방법론, 기독교통합학문연구소 엮 한들 p. 8. ‘책을 번역해내며’ 中 소장 이정배 글 참고) 상상적 보편에 따른 재구성과는 정당성 시비에서 전혀 다른 것이라고 하는 것을 분명히 말해둔다. 즉 인식론적 존재론과 존재론적 인식론의 차이가 있어왔지만 그러한 것과 달리 본문에서 본인이 언급한 재구성은 자존의 하나님의 정당성에서 비롯되어지는 비로소 본래성의 실존을 말할 수 있는 개념으로서의 실존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각주4)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로서의 의식적 비판이 있어왔는데 그것에 대한 부인이라고 하는 것은 예수님이 진정 메시아가 아니라는 입장을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조들이 있었다. 그것에 대하여서 게할더스 보스는 메시아 의식의 전략적 중요성을 말하고 그러한 경향들에 대하여서 언급하고 그것을 기준으로 기독론을 성경신학적으로 전개하여 합당한 기독론적 증거를 나타내고 있다.(게할더스 보스 예수의 자기계시 이승구 엠마오, pp. 8-115, p. 116-.)

메시아의 의식적 상대성은 구별되어진 자존적 하나님 자신의 의식으로서의 상대적 표현이기 때문에 인식의 전환이라는 개념과 진화적 발전적 개념의 형태가 비로소 예수님의식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할 때에 그 인식의 분명해지심의 경험적 성장이라고 하는 것도 이미 성장에 앞서 이미 그 성장으로서의 성숙을 다 취하신 분으로서 진실되게 성숙이라는 경험을 취하심을 의미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상대적인 측면의 발전적 개념의 인식에서 메시아라고 하는 자의식은 비로소 실존하지 않으며 그것을 취했다고 하는 신의 대리인들은 이미 거짓으로 나타나는 것이다. 신성은 상대적인 개념에서 비로소 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존자만이 그것을 나타내신 예수님만이 진정 하나님의 아들로서 메시아적 권세를 왕적으로 취하시고 그 왕적 권세로 성도들의 제사장적 직분을 행할 수 있도록하심에 따라 메시아 안에서 정당함을 따르는 가운데서의 사고의 실존을 사유의 실존과 행방을 말할 수 있게 되는데 이것이 메시아적 사유라고 할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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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11월 17, 2006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 - The Life in Bible

앞서 언급하게 되는 것에 대하여

우리가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보다도 앞서는 진리와 사실이라고 하는 것은 기독교의 하나님은 참된 하나님(각주1)이시라는 것과 그러한 진리와 사실로 인해서 우리 인생의 행보의 사실을 말하게 되고 또한 그 행보를 위한 실제적 사실도 말하게 되는데 그것의 근거가 되는 것은 성경말씀이다.

물론 형식적 순환론적 모순이라는 판단이 가능하지만 그러한 것이 기각되어지는 것은 또한 앞서 합당하게 마음에 두게 되어지는 신의식과 신지식이라는 것의 실존으로부터의 타당성을 힘입는 것이기 때문이다.


본론에 즈음해서

성경대로 살아야 할 이유라고 하는 것과 그것에 앞서는 진리와 사실은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출 3:14)이시기 때문이다.

먼저 이러한 사실에 대하여 반론적 입장의 고전적 입장이라고도 할 수 있는 것은 니체의 입장인데, 그것은 인식론적 존재론에 입각한 임의적 신해석과 그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말할 수 있다는 것과 정당하다는 것은 항상 양립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은 재고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다.)

자존의 하나님이 참되다고 함을 핑계할 수 없는 것은, 우리가 인식적 한계내에서 또는 한계밖이라는 이성적 규정의 탈실존을 말한다고 하여도 이성의 객관적 근거지움이라고 하는, 이성의 재가를 받고 이성의 재구성에 따른 구성체로서의 타당성을 입는다는, 소위 속된 표현으로, 등떠밀리어 신의 자리에 서게 되는 자들은 진정한 신이 아님은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니체가 생각했다고 하는 철학의 입장(각주2)에서 본다면 결국 그러한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에서는 인위적인 신이라는 개념에서 참된 신을 말하지 못한다고 한 것은 정직할 수 있으나 그러한 것이 기독교의 하나님인 것과 같이 말하고 있는 것은 그의 시각이 정당성을 이미 얻지 못한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석적 정당성을 그 자체에서 찾지 않고 의지적으로 부여하고 싶어하는 정신으로의, 내어준 임의적 의지의, 잘못된 선택이기 때문이다.

그의 해석은 그와 같이 인식론적 존재론에서는 비로소 신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으로써 또한 인식론적 존재론에서 객관적 신존재적 규정과 그에 따른 신에 대한 비판도 성립되어질 수 없다는 것과 최소한 자기를 기만하기 위한 비이성적 삶의 고통을 완화하기위한 진정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이처럼 인식론적인 존재론, 쉽게 이야기해서 인위적으로 존재규정과 비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신을 이성의 한계에서 규정하고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사실적 근거없는 이야기라고 할 때에 참된 신의 말씀에 의거한 그 말씀하심과 규정하심이 진정 사실로서의 실제가 되어지는 절대의 재가가 되어진 실존으로서 나타난다는 것이다.

이러한 가운데 우리 인간이 자존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을 받았음을 기억할 때에 하나님의 자의식은 시간의 판단여부와 상관없이 자신의 속성적 진실함과 영원함에 신실하게 스스로 취하신 것과 같이 우리 성도들도 스스로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된 것에 대한 자의식적 인식의 충족을 위해 노력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시간을 창조하심에 있어서 시간의 연속성이라고 하는 것에 의식적 영향을 비로소 받지 않으시지만 우리 피조물은 그러한 시간이라고 하는 계기적 영향을 받기 때문에 우리는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자녀로서 알고있는 상태에서도 알아간다는 그 중심에 힘써야 하는 것이다.

이러한 것은 우리 성도들이 시간이 허락되어진다는 개념보다도 시간을 주장하는 가운데서 성경을 통한 하나님의 형상적 우리의 실존을 배워나가야 하는 것과,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실존적 의미와 그 윤리적 행보라고 하는 것과 같은 모든 총체적인 것이다.


결론에 즈음해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 할 이유는 하나님이 참된 하나님이시라고 하는 것과 그의 형상으로 지음받은 자들로서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의 형상적 영광 즉 그의 왕되심과 그의 제사장적 권세와 그의 선지적 권세라고 하는 그 사역적 측면이 우리의 신앙의 삶의 고백되어져야 한다는 것과 자연스러운 마음과 몸의 표현이 되어진다는 것이다.

그것은 임의적 생각과 사유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 메시야적 사유에서 비롯되어지는데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자존적영감을 나타내는 '성경의 자증(Autopistia)(각주3)의 영광'을 따라서, 그 계시의 영광을 따라서 섭리를 나타내야 하는데 그것이 바로 성경말씀대로 살아야할 이유의 총체적 기본적 이유의 실재와 실제인 것이다.








각주1) 이슬람에서는 지나친 종교적 패러디를 행하고 있고 그것은 기만성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절제하는 것이 그들의 정체성에도 합당할 것으로 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하지 말아야할 말을 함부로 하는 경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알라외에 다른 신이 없다'(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는 말을 함부로 말하고 있다 이것은 분명 기독교를 모방하고 있고 또한 기독교의 언어까지도 모방하며 진리까지도 모방하는 가운데서 악을 범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이슬람의 전통에서의 진화적 개념의 신이라고 하는 개념이 또는 격상된 신이라는 개념진정한 고유의 신(God)를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하여서 말해야 할 것이다. 이슬람의 진화라는 개념에서 고유하지 않던 신의 개념이 고유라고 하는 개념으로써 본래성을 비로소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것을 답변해야 한다. 그것없이는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종교적 패러디라고 함은

그러나 나는 일부러 개혁이란 용어를 사용한다. 이슬람 세계의 여러 지역에서 목격되는 폭력과 유혈사태가 (이슬람과 서양의 전쟁이라기보다는) 주로 무슬림 사이의 내적 투쟁의 결과임을 강조하고, 이슬람 내부의 갈등이 모든 종교가 근대화의 도전에 직면했을 때 겪게되는 그런 종교의 갈등임을 강조하기 위해서다. 기독교와 이슬람 개혁에 대한 대비가 가능하지만, 간과되어서는 안될 유사성이 있는 것도 사실이다. 왜냐하면 그것은 모든 종교 전통에 존재하는 보편적 갈등을 반영하기 때문이다. 이 가운데 중요한 것은 누가 신앙을 정의 내릴 권한을 가지고 있느냐, 개인인가 기관인가에 대한 갈등이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8.)

알라가 고유의 신이 아니라고 하는 것과 고유의 신이 된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창조자는 ‘알라Allah’라고 불렀는데, 알라는 고유명사가 아니라 단순히 신을 의미하는 ‘알 알라 al-ilah’가 축약된 것이다. 그리스의 제우스처럼 알라 역시 비와 하늘의 신이었으나, 이슬람 이전 시대에 최고신으로 격상되었다. 아랍신들 가운데 알라의 두드러진 위상은 평민들이 탄원하기 어려운 최고의 신으로 인식되었으므로, 오직 위기에 처했을 때나 감히 탄원할 nt 있는 존재였다. 알라의 세 딸 알라트 Allat(여신), 알 웃자 al-Uzza(전능자), 마나트 Manat (운명의 여신)과 같은 중재자에게 접근하는 것이 훨씬 편리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2.)

패러디라고 함에 있어서는

아랍인들이 알라를 유대인의 야훼와 동일시하는 것처럼 아브라함은 신도 아니고 우상도 아니었다. 6세기 아라비아에서 유대의 유일신교 monotheism는 우상숭배의 아랍인에게 결코 이단이 아니었다. 왜냐하면 아랍인의 우상숭배는 전혀 다른 종교적 이념도 쉽게 받아들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교적 아랍인들은 유대교가 자신들과 비슷한 종교적 개념을 단지 다르게 표현하고 있을 뿐이라고 이해했다.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46.)

앞서간 많은 예언자처럼 무함마드 역시자신이 새종교를 창시했다고 주장한 적은 결코 없다. 스스로 인정한 바와 같이, 무함마드의 메시지는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에 존재하던 종교적 사상과 문화적 관습을 개혁하여 유대인과 기독교의 신을 아랍인에게 알리고자 하는 하나의 시도였다. 꾸란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신께서 노아에게 명하신 종교를 너희들의 종교로 정하셨느니라. ··· 그것은 신께서 아브라함과 모세와 예수에게 명한 것과 같은 종교이니라.(42:13)”

젊은 무함마드가 이슬람 이전 아라비아의 종교적 상황에 영향을 받았다고 해서 이상할 것은 없다. 이슬람의 독특하고 신성한 기운은 다인종 다종교적 사회와 분명히 관련되어 있다. 이러한 사회는 젊은 무함마드의 상상력을 자극했고 믿음없는 아랍인들이 쉽게 이해할 수 있는 혁명적 메시지를 만들게 했을 것이다. 비록 그 시대를 가리켜 ‘무지의 시대(자힐리아)’라고 부른다 할지라도.
(알라신 외에는 다른 신이 없도다. NO. god but God 레자 아슬란 정규영 이론과실천 p. 56.)


글쓰는이의 부언 : 꾸란에서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 권위라고 할 때에 그 정체성이라고 하는 것을 기독교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할 때에 고유의 하나님을 말함에 있어서는 알라의 신격화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은, 임의성의 합리성에서 파생된 당위성이고 본래성의 정당함과 비교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니체적인 삶을 위한 이슬람의 삶을 위한 해석과 기술일뿐 참된 자존의 하나님의 본래성과 동일시할 수는 것은 아닌 것과 같은 것이다. 그러한 진화나 격상에서 본래를 비로소 말한다는 것은 파생적 정당함이 본래적 정당함을 주장할 수 있거나 정당화할 수 있다는 성립되어지지 않는 기만성을 나타내고 있는 것 그 자체이다.

본래적 정당함을 합당하게 취할 수 있는 자는 자존하시는 하나님 여호와(Jehovah) 외에는 없다. 그렇기 때문에 Jehovah is God. 이라는 말씀을 하셨던 것이다. "나는 여호와라 나 외에 다른이가 없나니 나 밖에 신이 없느니라.."(사 45:5). apart from me there is no God. (NIV), there is no God beside me.(KJV), Besides Me there is no God.(NASB)

패러디를 하더라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을 성립되어지는 것과 같이 말한다면 그것은 기만이요 거짓의 사실로써 그리고 거짓존재로서 실존적 자리매김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다시 말하지만 '알라는 한낫 조작되어진 신'(Alah, NO God but just a god made)에 불과하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이 이슬람의 정직일 것이다.

각주2) 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5-107.

"니체에게 ‘가치’에 대한 물음은 언제나 가장 중요한 철학적 질문 방식이며, 이것은 철학에 대한 반성적 물음에도 일관되게 적용된다. 이런 질문방식은 니체로 하여금 철학적 활동을 해석적-예술적 활동으로 이해하게 하며, 철학의 가치론을 삶의 실천Lebens praxis 라는 기능에서 찾게 한다.
(중략)

해석은 해석자의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추구하는 인식의지에 의해 힘의 상승과 삶의 고양을 목적으로 이루어진다. 인식의지로 자신을 표현하는 힘에의 의지가 해석작용의 규제원리로 기능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외의 다른 목적들은 부차적 목적이거나 부수적 현상일 뿐이다. 철학은 해석인 한에서 철학 또는 삶에 봉사하는, 삶의 기술이다.
(중략)

여기서 니체는 해석적 철학의 특징에 대해 ‘비자발적 망각’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이것은 힘에의 의지라는 규제적 원리에 따른 배제이고 망각이며, 그런 한에서 철학적 해석은 가치중립적 인식일 수 없다. 철학적 해석작용의 결과는 삶이라는 목적을 위한 의미 인식일 뿐이다. 삶의 기술로서의 철학개념 ‘진리를 발견하는entdecken 기술’이라는 철학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식 정의를 재검토하게 한다. 이 정의가 불충분한 것은 그것이 진리를 삶보다 우선시하기 때문이고, 진리가 해석자의 삶과 힘에의 의지에 의해 창조schaffen되는 과정에 있는 것이라는 점을 도외시하기 때문이다."


글쓰는이의 언급 : 니체의 생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결국 삶의 의지적 표현으로서 생기를 불어넣는 것과 같은 가운데서 구성적 실제규정과 그것의 정당함을 그는 세우려고 글을 썼다. 1881년에 “생성의 무죄에 대한 입증 Die Unschuld des werdens zu beweisen”(각주참고 KGW VII 1 7[7], 245쪽이하; VII 3 36[10],277쪽)(백승영, 니체, 디오니소스적 긍정의 철학 책세상 pp. 108-109.)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것은 어디까지나 합리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파생적 타당성을 말했을 뿐 진실로 그 자체적 정당함의 실존으로서의 실존적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파생적 정당함과 본래적 정당함은 아이소모픽(isomorphic)한 개념 유사개념이 가능하다고 하여도 동일한 것은 아닌 것이다. 그리고 본래적이라고 하는 말을 철학자들이 말한다고 해도 그것은 상식적 보편적 동의가 가능하다고 임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능성을 따라 말할 뿐이지 비로소 자존적 정당함의 정당성에서 파생되어진 사실로서의 실존을 의지하여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니체역시 삶에 대한 의지적 정당함을 말하는 합리성에서 파생하는 타당성을 말하고 있지만 그것은 역시 절대의 자존의 실존과 그의 행보의 타당성을 비로소 입은 자들을 판단할 수 없는 것으로써의 사실과 실존적 자리매김되어지는 것입니다.

각주 3) Autopistia 성경의 자증 :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이 어떤 닫혀진 진리관을 말하면서도 그 보편성의 자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전제로 하는 것이 되어지며 이것은 자존의 하나님의 계시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그 실존적 영광의 합당한 속성적 성격인 것이다. 즉 이것은 닫혀있다는 개념의 편협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으로서의 보편성을 상실했다는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는다. 비록 판단 가능하다고 해도 절대보편성의 재가가 있다는 실제적 정당함은 닫혀있다는 상식적 판단의 보편성을 기각하고 오히려 판단하기 때문이다.

자존의 하나님이 그의 계시적 영광을 나타내실 때에 그 성경은 자기 실존적 증거의 능력으로 나타나고 그것은 현실적인 실제의 사람들의 인식의 감화와 그러한 것을 주장하는 가운데 성경이 기록되도록하는 섭리를 나타내는 것으로서의 계시이다. 그 계시의 기록과정의 모순형식이 가능한 것까지도 구별하여서 나타내시기를, 그러한 방법을, 자존자의 절대적 보편성의 재가로 인정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러한 특수하고 개별적인 요소로서의 성격을 임의적으로 축소 또는 배제한다고 하면 사람들이 말하는 인식론적 실재론에 입각한 실제의식에 있어서 합리적 필요성과 가치성에 있어서 만들었다고 주장이 가능해지는 것이다. 물론 니체의 생의 가치철학적 입장에서는 더할나위없이 그러한 개념을 배제할 수 없게 되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한마디로 자기 멋대로 필요라는 정황적 개념때문에 비로소 성경을 맞추어 꾸며내는 신화적 작업을 했다는 거짓된 말이 나오게 되는 것이다. 대표적인 것이 다빈치코드와 그 아류와 같은 문학적 이성의 절제없음에 대한 판단이 유명세를 꿈꾸는 것도 볼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성경의 자증이라고 하는 것은 닫혀있으면서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과 그 절대 보편성이 부여되어진 재가되어진 가운데서의 보편성의 현실적 상대적 실존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기 때문에 상식적인 철학의 보편과 닫힘의 안티적 개념의 열림으로써의 보편을 말하는 것으로는 비로소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오히려 판단을 받게 된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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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요일, 8월 15, 2006

신존재증명과 확신에 대하여

신존재증명에 대하여서

신은 존재증명적 판단을 받지 않습니다. 다만 믿음의 대상입니다. 일반적으로 질문의 성격이라고 하는 것이 오도되어진 상황에서 납득되어져온 잘못된 인식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납득되어짐을 말하는 것은 신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 대한 찬반 또는 학설이 현실적으로 존재한다는 측면에서 거론되어질 수 있는 것입니다.

이 질문에 있어서 먼저 기억하게 되어지는 것이 몇가지 있습니다.

1) 우리가 존재라고 하는 것의 사실성이 증명이라고 하는 것으로 확고히 나타나게 되는 것이 사실일 수도 있지만 항상 그렇게 해야만 한다는 당위성은 고정시킬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 항상 사실을 말할 수 있는가에 대한 반론적 답변에 확실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실존을 항상 말할 수 있는가? 그것에 대한 답변이 절대적이어야 신 존재증명에 대한 필요성과 중요성과 사실성이 확보되어지는 것입니다. 그것의 정당함이라고 하는 것은 절대적인 것이라고 할 수 없을 때에, 그 충족성이 절대적인가에 대한 재고가 분명치 않은 가운데서 개연적으로 증명이 실존의 사실을 말할 수 있을 것이라는 개념이 하나의 맹신적인 개념으로 잘못된 개념으로 통념화되어져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비판적 시각이 필요함을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2) 이러한 재고의 여지가 있다고 하여도 반론적인 필요성에 따른 증명을 말할 수 있는 여지적 강조로 입장을 취할 수도 있는데 그것에 대하여서는 범주 설정이라고 하는 개념이 역시 잘못되었다는 것으로 답변하게 됩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 절대라는 비로소의 개념을 자체적인 개념을 찾을 수 있는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없다는 것이 상식적인 측면에서도 정당한 인식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즉 상대적인 범주에서는 절대를 논할 수 없고 비판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즉 증명이라고 하는 것의 실존적 의미를 위해 합리성의 재구성을 위한 사료적인 개념의 요소를 상대적인 범주에서 찾을 수 없기 때문에 증명이 불가한 것입니다. 즉 신존재증명과 신을 부정하는 증명도 그 실존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3) 신존재증명을 말하게 되는 잘못된 인식들에 대한 재고..

앞서 지적한 것과 같이 인식의 확신을 위한 최선으로써의 한 필요성에 대한 수단적 합목적성이라고 하는 것의 당위성에서 비롯되어진 것입니다. 종교개혁이전 중세이전 고대의 변증가들이 하나님을 이성적으로도 합당한 납득 당위성이 있는 분이심에 대한 변호적 개념을 위해서 철학적인 개념을 사실분별을 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받아들여서 말하는 가운데 그 고통의 문은 열렸던 것(각주1)입니다.

이러한 것은 비평학이 시작되면서 하나님의 이름을 단지 병렬적 나열적 상호관계적 개념을 임의적으로 말하는 가운데서 합당한 하나님의 이름의 대한 실제적 기반을 말하지 못하고 조작적 개념으로써의 문서설이 탄생하게 되었고 그것은 합목적성이 부정되어진 가운데서 합리성의 깊이를 재고하는 가운데 이성의 익사사고가 있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사회적으로 인식이 경험적 실증주의적 개념으로 나아가는 가운데서 더욱 그러한 합리성의 부정의 시비를 간과하는 가운데서 잘못된 정교함만을 추구하였던 것입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믿음의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위해서 그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께 두는 것의 정당함을 마음에 두지 못하고 이성적인 확실성을 말한다는 병열적 개념으로 말하고자 하는 합목적성에서 증명이라고 하는 사실을 가지고 비로소 증거하려고하는 것에서 고통이 있게 되어진 것입니다.

증명을 말하게 되는 것은 확신을 위한 것으로써의 합목적성에 당위성이 있었던 것이며, 그 확신이라고 하는 것을 달리 합당하게 주목한다고 할 때에, 증명이라고 하는 것은 비로소 확신을 주는 주체로서의 모습은 합당하게 상실하게 된다는 것을 지적하게 되는 것입니다.


확신에 대하여서

증명에 따른 것에서 비롯되어진 것이 아니라 증거의 확실성이 증명의 확실성보다도 더 확실하기 때문에 비롯된 확신이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오는 확신은 상대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는 것이며 그것을 인정하면 그것만이 진정한 자체적 절대 자존적 정당함에서 신앙의 확신의 실존과 사실을 말할 수 있으며, 성도의 메타인식이라고 함이 가능한 하나님의 지식의 실존을 말하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앞서 언급한 것과 같이 신 존재증명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은 절대자이시기 때문에 상대적인 범주에서 규정되어질 수 있고 실존되어질 수 있는 존재증명의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분이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확신하는 것과 신에 대한 확신이라는 것을 위한 증명적인 형식의 증거라고 하는 것이 있는 경우가 있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상대적인 것을 구별하시는 그리스도의 메시야적 사유의 권세를 의지하게 되어지는 가운데서의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인 실존적 하나님의 지혜의 사실이 되어지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상대적인 것의 판단을 비로소 받지 않으면서도 그 상대적인 것의 사료적 관점에서 증거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는 합리성의 부활과 탄생적 표현과 실존 그리고 그 자체의 정당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처럼 증명이라고 하는 것이 확신에 근거하기 위한 것인 것과 같이 확신의 그 정도가 부인할 수 없을 때에는 증명적인 개념의 표현이 가능한 것입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존재증명이라고 하는 것에서 비롯되어진 확실성을 위한 비로소의 존재증명적 확신을 말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을 생각해야 할 것으로 봅니다.

자존의 절대자이심에 대한 확신은 주의 말씀하심에서 찾게 되어지고 그 주의 말씀을 표현하는 형식적인 측면의 한 택스트라는 제한적인 양식에도 비로소 판단을 받지 않는 것이라는 점도 생각해야 할 것입니다.

즉 성경이라고 하는 한 책의 표현이라는 한정적 의미에서 다른 책들과의 형평성에서 비교되어질 수 있는 편협성이라고 하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자가 절대적으로 자신을 계시하심과 계시할 수 있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부인할 수 없다는 것에서 성도의 매타인식적 신지식은 그 확실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따라서 하나님은 증명해서 확신하는 것이 아니라 믿음에 따른 확신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각주1)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사상사 이형기 차종순역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 19 ; p. 57

'유태인 필로(Philo)는 희랍어권 알렉산드리아에 살면서 앞으로 다가올 세대들에게 그렇게도 풍부하고 뜻깊은 사상을 잉태시켜 주었다. 필로는 구약성경을 플라톤적인 의미의 우의(allegorically)로 해석함으로써 유태주의와 헬라주의를 조화시켜 놓았다. '(p. 19)

“필로는 이방 세계에서 모든 지식은 따지고 보면 유태주의가 그 뿌리라고 주장했다. 왕국의 이론도 유태적이라고 생각하며, 플라톤의 형이상학, 피타고라스의 수, 희랍 과학의 우주론, 헬라화 세계의 신비주의, 윤리, 심리학 등등 모든 것들을 자신이 유태인으로서 이방 세계에서 배웠으나, 이것들은 희랍인들이 모세에게서 배운 것들에 불과하다.” Erwin R. Goodenough, An Introduction to Philo Judaeus, 2nd ed. (New York : Barnes & Noble, 1963), p.75. (p. 57 각주 34번인용함)



이러한 것은 카돌릭교회의 입장을 대변하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그것은 에뜨엔느 질송의 표현이 이렇게 언급되어지고 있기 때문이다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그러나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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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7월 05, 2006

지식의 숙성

지식의 숙성

음식에 있어서 간편하게 즉석에서 또는 일정한 요리연구가에 의해서 음식이 만들어집니다. 그런데 이러한 가운데서도 장기간 보관과 숙성이라고 함을 거쳐 만들어진 발효식품이라고 하는 것도 있게 되는데 소금과 관련되어진 음식이 그러한 것의 한 예가 되어질 수 있을 것입니다.

일반적으로 한국을 비롯한 극동아시아를 비롯해서 중앙아시아 그리고 유럽일부에서 염장기술이 발달한 것으로 알려지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고 또 그러한 다큐방송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그런데 주께서 말씀하신 것 가운데 기억하는 말씀은 이것입니다.

'네 모든 소제물에 소금을 치라 네 하나님의 언약의 소금을 네 소제에 빼지 못할찌니 네 모든 예물에 소금을 드릴찌니라'(레 2:13)
'소금이 좋은 것이나 소금도 만일 그 맛을 잃었으면 무엇으로 짜게 하리요'(눅 14:34)

거칠고 투박한 인생이 하나님의 자녀로서의 존재적 정당함을 입게 됨에 있어서 그 존재를 하나님께 드림이라는 그러한 중심을 가지게 될 때 우리의 섬김의 전부는 하나님께 드림의 예물이라고 하는 것이 된다는 사실입니다.

그런데 아쉽게도 하나님께 드림이라고 하는 것에 있어서 소금을 빼는 것과 같은 그러한 중심이 있음을 주목합니다. 즉 경험이라고 하는 것과 지혜의 경험에서 있게 되어지는 축적적인 지식이라고 하는 것이 소금에 의해 숙성되어져서 참으로 주의 종들을 위한 주님께 드림의 음식으로 준비되어져야 할 것인데 그러한 것에 마음을 두지 못하는 것을 봅니다.

로마카돌릭은 마치 음식을 숙성시키듯이 전통속에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을 시켜왔습니다. 즉 전통을 중요시 한 것은 옳은 것이나 그 전통이 그 사실적 당위성을 잃어 소금이 맛을 잃게 된 것입니다. 그리고 비로소 변질적 숙성의 사실을 드러내고 있음에 있어서 주께 드리는 숙성된 지식적 음료를 다시 담아야 할 것으로 보입니다. 하나의 중세에 풍미한 연예사건이 극적이면서도 적절한 예가 되어질 것입니다.(각주 1)

존경하는 제가 다닌 신대원 은사님을 기억합니다. 지금은 천안 신대원시대이지만, 제가 다닐 때는 서울과 부산을 오가며 열심히 가르치셨는데 항상 아쉬워하셨던 것은 그 피곤한 가운데서의 연구하실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을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그리고 신학생들도 그 배움에 있어서 좀더 깊이 있게 연구하는시간을 가지는 가운데서 준비되었으면 하는 그러한 말씀하셨던 것이 기억이 납니다.

이제 졸업하고 작은 교회를 개척하여 섬기면서 연구하는 시간을 가지면서 하나님의 인도하심에서의 그 숙성적 섭리라고 하는 것을 참으로 많이 마음에 두게되었습니다. 개인적으로는 그릇이 되지 못하지만, 하나님께 은혜를 입어서 학문의 깊이 연구하신 분들은 좀 개인적인 연구를 통해서 학문의 깊이를 더하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숙성적 작업에로의 소명을 이루는 일에 힘써야 함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습니다.

아름다운 음식 맛갈나는 음식이라고함의 노력과 시장기를 거둘 수 있는 참된 음료와 같은 주의 말씀에 대한 가르침과 준비를 게을리 하지 않으면서 이제는 숙성시키시는 주의 말씀하심의 깊이를 따라 학문적 소명으로의 부르심에 귀한 종들이 함께하였으면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중세의 종교개혁과 르네상스를 기억하면서 그 지식의 숙성이라고 하는 것이 이미 그 하나님에 대한 실재론이 잘못되어진 가운데서 이루어지고 있는 현실적 사태파악과 현상적 지식의 숙성은 오히려 독이 되어지고 있고 하나님의 이름이 거룩히 여김을 기도하도록 가르치신 주님의 뜻하심을 저버리고 있는 가운데서 지식의 재 숙성이 필요한 시대입니다.

김치나 장을 담그더라도 그 재료가 부실하면 다시 그 재료들을 다 버리고 새롭게 장이나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지식에 대한 바른 중심을 가지지 못함에 따라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의 샘이 흐려졌습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야를 통하여서 소금으로써 그 마라의 쓴 물을 고치셨던 섭리를 기억하면서 그러한 지식의 근원을 고치심에 노력하시는 종들이 있으셔서 수가성 여인과 같은 자들이 그 샘가에서 예수님을 만나듯 그 숙성된 지식의 샘물에서도 만날 수 있도록 주님의 마음을 시원케하는 그러한 지식의 샘을 준비하는 지식의 숙성에로의 소명을 받들 수 있으셨으면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고치셨던 그 섭리가 이제 필요한 시대입니다.






각주 1)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기술함에 있어서는 여러 사람이 있는데 후스토 곤잘레스와 프레드릭 파제의 글을 참고로 추천하면서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II 中世編 이형기 차종순 대한예수교장로회총회출판국 pp. 210-218.

저는 피터 아벨라드와 엘로이즈의 사랑을 로맨틱하다고 표현하고 있고 아벨라드의 사상과 그 시대상황에 대하여서 비교적 아주 자세하게 기술하고 있습니다.

프레드릭 파제 '유쾌한 철학자'

저자는 중세의 수도사 아벨로이드(Peter Abelard)와 엘로이즈(Heloise)의 사랑을 아주 풍자적으로 비난과 조소와 해학적인 표현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사실성에 대한 여지를 남겨두고 있는 것은 사실이나 그들이 행한 말에 대한 인용은 사실적으로 받을 수 있다고 할 때에 엘로이즈가 한 말을 기억합니다.


글쓴이로서의 부언

"나는 당신의 창기가 될 수 있어도 아내가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그것은 엘로이즈가 아벨로이드를 사랑하고 학문에 정진한 사람으로서의 그 위상을 바라고 있기 때문이라고 함을 짐작할 수 있는데 이에 대한 어느정도의 성과라고 하는 것은 '후스토곤잘레스는 아벨라드를 대단한 문필가로 말하고 있습니다.'

말하고자 하는 것은 중세의 철학적 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실재론으로부터의 비로소 정당함을 찾는 것으로써의 학문적 정당함을 찾는 것과는 다른 방법론을 택하는 것이 일반적인 지식의 숙성을 담당해온 자들의 보편적인 인식이라고 함을 읽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즉 아내를 두는 것이 가정을 돌아보는 것이요, 그러한 자가 교회를 돌아 볼 수 있다는 것의 자격을 성경이 지지하고 있기 때문에 비록 헌신의 현실적 실제의 시간적 부족과 집중의 어려움은 있으나 결혼하여서 그러한 지식의 숙성을 찾아 전통을 세우는 것이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으로써의 그 방법의 실제와 사실을 이룬다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아 반론적 입장에서 결혼하지 않음의 당위성을 말할 수 있는 것은 사실이나 중요한 것은 그러한 것이 일반화되어질 수 있는 것으로 획일화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더 나아가서 하나님의 실재론적 입장이 아리스토텔레스적 부동의원동자적 개념의 입장으로 합리성에 대한 숙성을 말할 때에는 그 반론에 정당함을 비로소 부여하여 사실화 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는 답변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것임을 말해둡니다.


그리고 사모님들께 한말씀드리는 것은 ..

엘로이즈는 현실적 실제적 남편?이라고 하는 존재를 위해 창기를 선택하면서도 아내가 되지 않아 그를 자유하게하는 자로서 결코 김치담그는 것과 같은 숙성이라고 하는 것을 바르게 할 수 없었지만 이제 '김치를 담그는 것과 같이 숙성을 위해 창기가 아니라 당당한 아내로서 함께해주시길 주 안에서 부탁드립니다.

이 글을 쓰면서 사모된 나의 아내는 주 안에서 기꺼이 나를 용서하고 사랑해주는 것을 기억하면서 부끄러우면서도 실제적으로는 해야할 일을 하는 가운데 이 말씀을 드립니다. 창기를 선택할 수도 있음을 말했던 엘로이즈와는 달리 아내를 선택하는 자들로서 종들을 섬김으로 숙성된 지식의 숙성으로 인해 그 우물에서 수가성의 여인이 주님을 만날 수 있도록 돕는 자리에 서시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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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5월 19, 2006

'니체'와 '상품화된 니체'

니체는 그의 사상에 대한 긍정적 입장을 후기에 나타내고 있는 것이 사실이라고 하여도 그것은 초인적인 그러한 점에서 표현하고 싶을 뿐이었고 그런 의지의 표현이었으면서도 자신의 생각이 잘못되었음을 말해주기를 소망했다는 점을 기억할 때에 요즘에 해석되어지는 니체의 디오니소스적인 긍정적 평가는 너무 인위성을 가진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것의 근거로는 아래에 출처를 밝힙니다.



뤼디거 자프란스키, 오윤희역, '니체 그의 생애와 사상의 전기' pp 406-407

..니체는 차라투스트라에게 이 파괴의 욕망을 설명하게 한다 하지만 그도 종종 언짢은 기분이 된다. 1883년 8월말에 <<차라투스트라>>2권을 끝내고 나서 가스트에게 차라투스트라의 전체 모습에 대한 심한 반감을 가슴에 안고 다니네(B6,443)라고 써 보낸다. 그리고 <<차라투스트라>>4권을 끝내고 친구 오버베크에게 편지한다. 내가 바라는 것은 모든 만물이 내가 파악한 것과는 다르게 진행되어서 그 누군가 나의 이론이 잘못된 것으로 만드는 것이라네(B7, 63; 1885,7.2)

글쓴이의 부언: 이 니체의 말이라고 함이 어떤 계산되어진 도전장을 접수하기 위한 것으로 해석되어질 수도 있고 또 많은 사람이 그에게 말을 하게 되는 것으로 이해되어질 수 있지만 그러나 그의 정신의 규정적 입장이라고 함을 말하기 어려움이라고 함에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이라고 함을 권력에의 의지적 임의적 생기론을 말함에 부담이 됨에 따라서 긍정과 부정에 대한 기로에서 길을 잃음에 대한 상대적 여지를 솔직히 남기고 있는 것으로 보여진다. 즉 니체는 긍정을 의지적으로 말했지만 그 긍정에 대한 회의적 개념을 잊기 위한 노력일뿐 긍정으로의 전환적 확신을 가지고 자신의 사상이 쓰여지기를 원하였다고 말할 수 없게 된다. 행하여야 한다는 도덕이라고 함에서 철학의 실패를 말하고 있는 그의 입장에서는 그의 사상적 입장의 실패를 인정하고 싶지 않은 의지적 표현이라고 함을 지적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창조적 파괴니 또는 긍정적 개념으로써의 결론적 니체의 사상을 일괄적으로 말하는 것은 거의 임의적인 상품화된 니체의 모습이라고 하는 것을 말해둔다.. 즉 창조적 파괴를 통한 긍정을 위한 해체적 입장이라고 하는 것은 진정 긍정의 사실을 말하지 못할 뿐이라는 것이며 다만 그런 위험하게 살라고 하는 그의 우상의 황혼에서의 말이 있을 뿐이다. 그것은 그의 딜레마가 그를 미치게 하였던 것으로 볼 수도 있다.

지나가는 말로 다빈치코드라고 하는 것도 그와 같은 한 표현에 지나지 않는 정신없는 행위들이다.

참고로 니체에 대한 글을 연결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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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체 해석에서의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에 대하여서..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그 첫번째가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말입니다.

이 말은 택스트를 읽을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옳다는 해석보다는 잘 되었다는 해석을 취함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 마련한 아주 중요하게 보일 수 있는 말입니다. 즉 상대적 합리성의 정당함을 상대적으로도 잘 정립하는 말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러면서도 이 말의 의미는 니체를 온전히 묘사할 수도 없고 또 니체를 비판하는 것까지도 니체를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말할 수 있는 인식을 나타내는 말입니다.

즉 한마디로 니체를 부정할 수 있는가?에 대한 답변으로 없다는 말의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은 것으로 사용되는 인식의 표현이 되어질 수 있는 말로 사용되어지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신은 죽었다는 그 말에 대하여서 합리적인 측면에서 아무리 비판하여도 그것은 니체의 판단을 따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즉 비판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먼저 용어의 뜻을 말한다면 '택스트를 해석하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인 것이어서 그러한 표현적 인식을 위한 그보다 상위의 인식이 중요하고 더 나아가서 그러한 상위의 인식들을 존재하게 하는 상대적 무한의 길을 열어놓았다는 것'입니다.

쉽게 말하면 한마디로 모든 것이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입니다. 즉 어떠한 정의를 내린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표현에 지나지 않고 니체를 반박하는 것으로 보이는 해석이라고 하여도 그것도 상대적인 가운데서의 한 표현일뿐 그것을 말할 옳은 해석은 아니라고 함이 더 보편적이다라는 뜻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니체의 관점도 역시 거짓이라고 함을 주장한다고 하여서 그것이 옳다고 하여도 상대적으로 개체적인 한 표현과 관점밖에 안된다면 그것이 잘된 것이라고 함을 말할 수 없다는 것이 니체와 그 해석의 자체적 인식추구 방향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쉽게 해석한다면 컴퓨터의 예를 들겠습니다. 악성코드에 비교되어질 수 있는 것과 같이 파일을 아예 지울 수 없는 경우도 있지만 어떤 파일은 보호장치가 되어 있어서 지우면 지울 수 있는데 다시 복구되는 그러한 파일을 본 기억이 있을 것입니다.그것과 같이 레지스터리까지 지웠는데 다 지우지 못하면 다시 파일이 나타나는 그러한 모습과 비교할 수 있습니다.

니체는 모든 관점이 거짓이라고 함을 말함에 있어서 그럼 니체의 관점 자체도 거짓이 아니냐는 말에 그들은 수긍을 하면서도 그것은 하나의 개체적인 것이고 니체의 추구하는 전체적인 관점의 보편성을 말하기는 편협한 독단적인 것이라고 상대적인 보편적 정당함이 결여되었다고 배척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한 반론에 즈음해서..

한마디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상대적 무한과 절대의 무한이라는 개념을 혼돈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특히 정당성의 문제에 있어서 그렇다고 함을 말해두는 것입니다.

니체의 합리성의 정당함은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적 개념으로써의 상대적 무한이라는 보편성을 읽게 되어지며 그것은 종의 개념에서의 사실을 말하고자 하는 해석적 인식의 무한을 말하고 그것에 정당함을 찾게 되는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을 임의적으로 선택하고 있습니다.

시간론으로 접근함에 있어서

과거와 현재와 미래의 그 상대적 무한의 인식의 범주의 비교에서 현재에서 인식의 주체적 기준의 실제를 말할 수 없다는 것에서 현재 표현되어지는 것은 실재를 반납한 실재와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기호론으로 지나지 않는다는 것과 임의적으로 그러한 실재를 부여한다는 것에서 특히 그 임의적이라는 것은 삶을 위한 것으로써 정당함에 기초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권력에의 의지'를 기반으로 하는 합리성의 불연속성을 넘는 정당성을 임의적으로 합리성에 부여함으로 취하게 되어지는 것인데 그 과정에 대한 묘사가 바로 '메타 해석 인식의 증식'이라는 입장을 취하고 있는 것입니다.

상당히 공감을 하면서도 다른 입장을 취하는 것은 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이 임의적이지 그것이 절대적 자존의 정당함을 얻는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말해야 할 것입니다.

물론 이미 인식의 메비우스 띠를 따르고 있는데 그것에 분별점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지 않으려고 하는 것의 권력에의 의지적 표현을 따른다고 말할 수 있겠지만, 진정 그것을 말하려면 그들의 언어로서의 메타적 해석 인식의 기초의 처음인 권력에의 의지라는 것의 생성과 정의라는 것의 정당함을 말해야 하는 당위성은 상대적으로도 열려있어야 한다는 것과 그것이 절대적인 평가에서 좌초되어진다고 하면 상대적인 합리성의 마련한 니체의 메타해석 인식의증식이라는 그 자체의 존재와 해석과 거짓관점의 실존을 말할 수 없게 되어지는 것입니다.

쉽게 두가지 예를 든다고 하면 첫번째 메비우스 띠위의 직선들은 무한하며 그것의 직선의 방향은 무한한 것이 사실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메비우스 띠라는 존재는 한정되어진 것입니다. 공중에 메비우스 띠를 하나 띠워놓고 본다면 그 공중 안에 한정되어진 띠하나를 그냥 볼 수 있는 것입니다.

이처럼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개념의 조합도 상대적일 수밖에 없으며 상대적인 무한의 특성인 그 경계선의 규정적 설정이 어렵다는 개념을 인문학적 문학적 개념으로 읽어내는 니체와 그 추종자들은 지혜롭기는 하지만 정직하지 못한 가운데서 초등학문의 범주에 지나지 못하는 것입니다.

상대적 무한과 상대적 무한의 조합에서 절대의 무한을 찾을 수 있다는 망상은 아이들이 무지개를 잡을 수 있다는 개념과 뭐가 다르겠습니까.. 실재라는 개념을 이해하지 못하고 논리를 말하는 사람..

또 한가지를 말한다면 컴퓨터인데.. 악성코드나 보호장치가 있는 파일은 자체로 지워지지 않거나 지울 수 있다고 하여도 다시 수록되는 특성이 있는데 사실 그것에 대하여서는 전혀 대처방향이 없는 것은 아닙니다. 즉 자료 파일들을 백업한 후에 전체 포맷을 하면 되는 것입니다. 좀더 컴퓨터의 지식이 있다면 레지스터리를 통해 그 일을 할 수도 있습니다.

해석에 있어서 메타인식의 증식이라는 것은 상대적으로 어려울 뿐이지 절대의 속성과 개념을 판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즉 자존의 절대자가 절대 자기 정당함으로 말한 것을 다 상대적이다 라는 개념으로 사실을 인정하지 않는다면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서 그 상대적 판단의 사실을 절대적으로 말함에 대하여서(기독교의 관점)는 소득없는 구걸적 정당함으로 자신을 기만하기를 바래야하는 초라함에 머물고 말것입니다.

그러한 겨우 상대적 무한의 정당함의 인식에서 무리하게 표현한 말인 신이 죽었다고 하는 것은 그 시대 당시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것을 믿으면서도 그 실재에 대한 분명한 개념이 없어 보이는 정황에서 상대적 정당함을 위해서 변명한 것에 지나지 않습니다.

상대적인 정당함을 따라서 비로소 합리성의 실존을 말한다는 그 표현은 옳지만 그리고 그것을 위해 해석에서의 메타적 인식의 증식을 말하는 지혜로움을 말하지만, 그것은 다 상대적이다라는 말에서 삶을 위한 상대적 정당함을 의지하고 있다는 점에서 합리성의 방향성을 설정하고 있지만, 그것은 상대적인 인식 자체에서 절대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상대적인 인식의 기만이 교만으로 사실화 되는 것처럼 거짓되게 정교하게 나타났던 것입니다. (상대적인 것의 반대가 절대라는 개념)이 아닌 것과 같이 상반적 개념설정의 범주에 절대가 포함되어지지 않는 다는 것을 재고하지 못한 정직하지 못한 모습이라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니체의 사상은 상대적인 어떤 합리성에서는 그의 사상을 비판할 수 있는 여지는 있으나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으로 정교하게 나타나고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비판의 여지라는 것이 절대의 재가를 받은 것이라고 할 때에는 절대의 보편성의 정당함을 따라서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의 보편성의 재가를 받은 합당한 정당성을 가진 상대적 합리성의 개체적 표현으로써 그 니체의 사상을 실제적으로 비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이것은 철학에서는 있을 수 없으며 기독교의 메시아적 사유에 따른 철학의 실존에서 비로소 말할 수 있고 이것은 신학의 앞으로 나아가야할 방향이 되어질 것입니다.(각주1)



각주1) 엘렌슈프리드, 니체와 니체해석의 문제, 박규현 옮김, 푸른숲..

제가 한 여름동안 읽은 니체의 세권중 추천할 만한 책입니다. 물론 책의 내용을 모두 긍정한다는 것과 모든 내용을 추천한다는 것이 아니라 비판적으로 읽을 수 있으면서도 객관적인 사실이해와 인식의 도움을 위한 것으로 상당히 괜찮는 책이라는 생각을 합니다. 그런데 저자의 니체해석의 유럽에서의 동향이라고 하는 것을 읽을 수 있으면서도 몇가지 흥미로운 사실을 새롭게 말할 수 있을 것같아서 글을 올려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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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요일, 12월 28, 2005

에티엔느 질송(Etienne Gilson)은 틀렸다..- 전 토미즘의 사상비판

에띠엔느 질송의 사상적 입장은 가톨릭에서 실재사상을 다루고자 했다는 것에 대하여서 상당히 고무적이라고 말할 수도 있습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의 입장과 접근방식은 틀렸다는 것을 말해둡니다.

일반적으로 토미즘에 있어서는 실재를 말하지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에띠엔느 질송이 토미즘에서 실재를 말하고자 함에 있어서도 기독교철학의 실존을 말하기 위한 것으로 성경에서 하나님 자신을 나타내는 출애굽기 3:14절을 인용하고 있는데(각주1) 그것은 인용가능성만 생각하고 있지 그 정당함이 결여되어진 것으로써 여전히 그 실재론을 실제적으로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코넬리우스 반틸은 질송의 그러한 기독교철학의 성립과 실재를 말함에 있어서 잘못되게 되어지는 것이 삼위일체라고 함을 철학적 개념으로 왜곡되어진다는 것을 말하며 비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가 분명히 말하지 않았지만

저와 같은 입장에서 비판하였을 것입니다. 그것은 반틸이 '하나님의 사유를 따라서 사유해야만 함을 함의 한다'(각주2)

그것은 게할더스 보스(G. Vos)가 이야기 한 것과 같이 '메시야적 사유'(각주3)라는 것의 의미를 말하며 또한 그것은 가능성의 여러 언어가 있다고 하여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 예수로부터의 정당함을 얻는 것으로써의 실재라는 개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성경에서 단어적 인용이 가능하다는 것만으로써 그 언급하고자 하는 것의 실재와 또한 사실에 대한 것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사실의 정당함을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즉 질송의 기독교철학의 실재라는 개념 자체가 이미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입니다.

물론 토미즘의 특히 신 토미즘의 입장에서 말한다고 하지만 토미즘은 이미 신론적 정당함에서 실재를 찾는 중심이 없습니다. 그것은 신학대전 4권에서 읽을 수 있는 이방에 대한 변증에서는 '알미니안적 입장을 취하고 있는데 결국 이것은 질송의 사상으로 나타난다고 함과 일치'(각주4)되기 때문입니다.






각주1) 에띠엔느 질송, '토미스트 실재론과 인식비판' 이재용옮김 서광사 p12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0

이 모든 것은 우리에게 상당한 기대감을 가져다 준다. 마치 질송의 사상에서 기독교 철학과 기독교 신학을 구현해보려는 일관성이 있는 노력을 발견할 수 있으리라고 합리적으로 기대할 수 있음듯이 보인다. 하나님에게서는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는 진리를 참으로 본 사람은 모든 실재를 자충족적인 하나님의 전제의 빛에서 해석하려고 할 것이다. 그런데 질송은 그리하지 않는다.


필자의 해설 : 반틸이 존재와 본질이 동연적(coterminous)이라고 하는 것은 시간의 흐름에 따라 또는 시간의 흐름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되는 존재의 유출적 의미를 말하는 것이 옳지 않다는 것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즉 기독교 철학을 말한다면서 성경의 하나님의 존재를 임의적 존재자체로만 생각하고 철학적으로 비로소 접근할 수 있는 것으로 존재의 유출을 말하는 것은 철학적 입장으로 비로소 삼위를 말하려고 하는 것임의 잘못임을 지적하고 있다.

질송이 간과하는 것은 하나님을 존재 이외에 다른 것을 말하지 않는 것으로 임의적으로 한정함이 옳지 못한 것이다. 그리고 플라톤적 아리스토텔레스적 입장이 신학에 필요에 따라서 말하기 위해서 도입되었던 것을 필로(philo)는 말하고 있는데 그 필요에 따른 차용적 입장을 위해 성경의 증거 특히 하나님의 존재를 존재로 임의적으로 규정할 수 있다는 가능성만 따라 행하고 있는 것은 주객이 전도되어진 역사인식의 문제점을 나타내고 있다고 하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그러한 성경에서 인용할 수 있다는 개념만으로 그 가능성에서의 당위성을 찾을 수 있다는 것만으로 기독교 철학이라고 함의 정체성을 말함에 있어서는 그 실재적 정의가 성립되지 못한다. 왜냐면 그것은 인용가능성이라는 개연적 정당함에서 사실을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각주2) Van Til, 개혁주의 신학서론 이승구역 기독교문서선교회(An Introduction To Systematic Theology) p 362


각주3) 게할더스 보스 바울의 종말론 이승구 오광만 역, 도서출판 엠마오 pp. 117~119
"심판은 죄에 의해서 도덕적 비정상성에 빠진 세계의 진전 과정의 필연적인 총괄이다. 마찬가지로 부활도 황폐와 죽음에 사로잡혔던 것을회복시키는 구실을 한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이루어질 곳에서는 이 두 가지의 성취 자체(ipso facto)가 이 세대에서 무엇이 잚소되었는지를 하나 하나 보이며, 그것을 배제하는 역활을 한다. 그런데 부활과 관련해서는 새로운 부가적인 요소가 고려되어야만 한다."(lbid p.117.)

"그리고 그 전체의 색조와 의미가 여호와 하나님 현현 사상으로 부터 메시아적 사유로 급격히 변화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그 이후에는 대개 기다리는 큰 "오심"(the great and uniformly expected "Coming"이 메시아의 오심이다. 아마도 신약의 사상 구조에서 다시 나타난 구약의 개념 중에서 이보다도 더 급격하고 중요한 변화를 겪은 것은 없을 것이다. 물론 이런 변화는 예수께서 '쿠리오스(주)'-칭호를 돌려드린 것에 의해 촉진되었다는 것을 잊어서는 안된다 예수께서 '쿠리오스'칭호의 전용(轉用)은 주 여호와(Jehovah-Kurios)의 오심을 메시야의 강림과 거이ㅡ피할 수 없게 동일시하도록 만들었다."(lbid pp.118~119.)

필자의 해설 : 게할더스 보스는 신구약의 불연속성적인 현상적 입장에서도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 따른 그 연속성의 사실과 그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는데, 이에 따라서 구약적 용어와 그에 담겨진 사상들에 대한 메시아 안에서의 정당함의 시비를 거쳐서 사용되어지고 또 구별되어진다는 점에서 사상의 정체성을 말하고 있다.

즉 그리스도 예수님 안에서 율법의 모습들 중에 취한 바가 있고 버린바가 있다고 하는 말이 가능한 현상적인 표현이 있을 수 있는데 사실 그것이 아니라 완성적 의미로써 재 새롭게 하시는 가운데서의 구별적 언어와 그 담긴 사상으로 구별하였다는 것이 메시아적 사유이며 동시에 전형적 정당함을 입은 것으로 신약을 말하게 된다. 물론 메시아의 강림과 여호와 하나님의 강림과의 동일성을 말하게 되는 가운데서 그 앞선 신구약의 연속적 실재와 사실을 말하는 것을 전제로 하고 있는 것이다.




각주4) 알란 셀, '칼빈주의와 알미니안주의와 구원' 김경진 역 생명의말씀사(THE GREAT DEBATE Calvinism, Arminianism and Salvation by Alan P. F. Sell, Published in English by Baker Book House, Grand Rapids, MI., U.S.A.) p. 27

"신자가 이생에서 하나님을 완전하게 순종할 수 있는지 없는지의 여부에 대해서는 비록 어거스틴의 지지를 빌어 그 가능성을 부인하고 있지는 않지만, 하나님의 아들 신성(神性)에 대해서는 알미니우스는 아우토데오스(auto Theos)를 두 가지 의미로 정의하였다. (1) "참으로 하나님이신 분" 그리고 (2) "스스로 하나님이신 분." 알미니우스는 전자를 받아들이고 후자는 거부하였다."

Etienne Gilson, The Spirit of Mediaeval Philosophy, 1936, p. 51

"모든 하나님의 이름 이름 중에서 하나님에게 아주 적절한 이름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곧 "스스로 존재하는자"(qui est)란 말이다. 왜냐하면 이 말은 바로 존재 자체를 의미하기 때문이다; 존재 자체 외에는 다른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Non significat forman aliquam sed ipsum esse). 이 원칙에는 다할 수 없는 형이상학적 풍부함이 있다. 이제 제시된 모든 연구는 단지 그 결과들에 대한 연구일 것이다. 한 하나님이 계신데, 이 하나님은 존재(Being)이시다 그것이 기독교 철학의 모퉁이 돌이며, 이를 놓은 이는 플라톤이 아니라 아리스토텔레스가 아니라 모세인 것이다"

필자 해설 : 스스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그 증거는 자존의 절대자의 절대 정당함을 말씀하시는 자로서 자신을 계시하시는데 알미니우스는 그러한 합리성의 정당함을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찾고 있지 않다는 것과 에뜨엔느 질송도 그러한 것에 의미를 부여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기독교 철학의 실재를 존재론으로 보겠다는 합목적성만 생각하고 또 인용적 가능성을 위한 합리성만 취하고 있지 자존의 절대자에서 비로소 합리성의 정당함을 얻고자 하는 중심은 이미 없다.. 그리고 토미즘도 그것을 말하지 않는다 질송은 토미즘에 정통하면 할 수록 하나님과 상관이 없는 것임을 나타내는 자리에 서는 것이다.

종교개혁의 실재는 '가톨릭에서 말하고 있는 중세시대의 합리성을 이해할 머리가 없는 가운데서 무질서와 혼돈을 말하는 것'(요셉 피페, '중세 스콜라신학' 이재룡, 서광사. 서문의 마지막 부분) 에서 파생되어진 것이 아니라 이런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답변하지 못하는 중세의 가톨릭의 하나님에 대한 하나님의 실재적 증거를 위한 것으로 그 실존적 증거를 한 것이 종교개혁이다.

비록 그것에 대한 인식이 흐려져서 현대신학적 개념이 다시 스콜라신학적 연속성을 말하는 미련함이 있다고 하여도 실제는 중세의 연속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가톨릭의 사실을 말하지 못함에 대한 진정한 하나님을 말하고 증거하는 것이 종교개혁 이후의 기독교의 정체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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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 니체의 일기장에 대해

일기라는 것은 하루에 있었던 일들을 기록한 것이라고 단순하게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의미를 부여하기에 따라서는 그의 삶을 말할 수 있고 그의 철학과 같은 학문의 깊이를 나타낸 택스트를 말할 수도 있겠다고 봅니다. 저는 후자의 경우의 의미를 가지고 글을 쓰고 있습니다.


글을 씀에 있어서

니체에 대한 전기 작가들 중에 레지날드 J 홀링데일의 입장은 객관성을 가지고 니체를 보려고 하고 있고 그렇게 니체가 주목하지 못함에 대한 것을 지적하고 있는 서론적인 입장을 본 기억이 있습니다. 니체에 대한 바른 판단이라고 함의 부재라는 것을 의미한다는 것을 말하려고 하는 것 같습니다.

전기작가들의 의도라고 하는 것의 기본은 그 어떤 특정 대상의 인물의 사상을 논함에 있어서 그 영향력을 말할 수 있는 그의 생애를 이해함을 목적으로 하는 것입니다. 개인적으로 그러한 경향은 인정하면서 니체의 가장 큰 영향력이 무엇이며 그의 사상적 주추돌은 어디서 찾아야 할 것인가 하는 것에 대하여서 개인적으로 찾음이라고 함을 말할 수 있어서 글을 쓰게 됩니다.

그것은 그의 유년시절 쓰던 일기와 그것을 읽기 좋아하던 소년니체의 모습이라고 함을 말하겠습니다. 즉 일기에 대한 해석적 인식이라고 하겠습니다.


몇가지 주제적인 언급과 판단들에 대하여서

1. 아버지를 사랑한 소년 니체

니체는 목사님이신 자신의 아버지를 사랑하였는데 그의 아버지의 병환으로 일찍 죽음을 맞이하자 니체는 충격에 바졌고 아버지의 권위를 의식할 수 있도록 자신를 주장할 수 있는 원리가 요구되어짐을 인식하였던 것입니다(각주1) 스스로 강해져야 한다는 점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를 고찰하는 가운데 그것의 한 일환이 일기였습니다.(각주2)

2. 니체의 시간관과 사상의 형성

그러한 일기를 씀에서 그 일기라는 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이라고 하는 것으로 판단 받게 된다는 생각에서 그의 현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실재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없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각주3)

즉 미래에서 일기를 보고 자신을 판단한다면, 현재라는 것에서는 그 판단의 기준이 없고 다만 의지적으로 미래에서 판단받는다는 사실을 위해 자신을 상승시키는 그러한 노력이 필요하다는 생각을 하였던 것입니다.

과거 현재 미래 이 상관성에서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미래에 있으므로 현재에는 판단의 기준과 실재는 없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에 대하여서 이후에 니체를 해석함에 있어서는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단지 실재가 없는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으로 기호논리학을 말하게 되며 이것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이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이며 이것은 의지적 개념의 정당함을 입어서 의미를 부여할 수 있고 이것은 창조적 긍정을 말하는 것입니다. 니체의 생철학의 긍정은 관점의 거짓이라고 하는 것에 의미를 두기 보다는 삶을 상승시키기 위한 더 좋은 삶을 위한 것으로 그 거짓된 관점이라고 하는 것도 받아들일 수 있다는 것을 주장하는 것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더 나아가서 니체와 니체의 해석적 입장을 따르는 자들은 옳은 것과 잘된 것을 구분하여서 자신들의 실존적인 것을 위해 받아들일 것을 주장하는 그러한 '유희'를 말하고 있습니다.

3. 좀더 옳은 것과 잘된것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합니다. 옳은 것은 하나의 개체적 표현으로 굳어져서는 안되며 규정되어지지 않는 하나로서의 거짓된 관점의 하나로 실존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잘된 것 잘된 해석이라고 하는 것은 여러가지 관점이라고 하는 것을 가지고 판단하게 되는 가운데서 좀더 객관성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옳은 해석보다 잘된 해석을 주장하고 있는 것입니다.

4.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

기독교에 대한 회의의 일기(각주4)는 레지날드 홀링데일이 지적하고 있는데 '그의 가장 중심에 가장 엄격한 제단을 하나님께 바침과 그것이 주님이 다시 부르실 수 있기를 원함'이라고 함을 적은 글입니다. 이 글에 대하여서 주님께 의지하는 것으로 해석할 수도 있는데 전기 저자는 선조의 하나님을 버린 것에 대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고 이후에 니체의 저주라는 생활적 모습을 기록하고 있습니다.(각주5)


결론적으로

니체에 대한 해석에 대하여서 실증주의적 개념에서는 들어난 것에 대한 윤리적 비판은 가하고 있는데 그것은 그를 이해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수 있고 오늘날에는 니체에 대한 이해의 부족으로 그의 합리성을 달아보는 자들에게 있어서는 그의 뜻함이 옳은 것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오판이 가능하다고 하겠습니다.

그래서 그에 대한 이해를 함이 참 중요한데.. 그것은 그의 사상을 전반적으로 돌아보는 일기검사와 같은 모습이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더욱 주목되어지는 것은 그러한 사상의 정립이라고 하는 것이 그 어린 소년 니체의 일기에 대한 개인적인 판단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그 일기를 주목하면서 미래에 자신을 판단할 수 있다는 것에서 자신과 자신의 존재에 대한 탈존의 의미를 두고 그것이 진정한 사실과 실재일 것이라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이것은 시간이해에서 비롯되었다는 것입니다.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를 말하고 재해석하게 되는 일기..

니체는 그것에서 현재를 기록함에 있어서 그 판단의 기준과 사실은 미래에 있고 현재에는 없다는 것을 말할 때에 현재의 모든 관점이라고 하는 것은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임의적인 것이고 거짓이 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시간으로써 현재의 보편적인 사고와 삶에서의 실재를 말하지 못한다는 것, 그 표현되어진 기술적인 것들 즉 로고스 사상들이라고 하는 것들도 우리의 존재를 판단할 수 있는 것으로 자리매김되어질 수 없다는 것이며 이것은 성경의 역사성이라고 하는 것도 재해석되어야 한다는 점을 말하고 싶어한 것이며 그 실재라는 것은 과거의 미래였던 현재에서 판단하고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라는 것을 말하고 싶어했던 것입니다.

그러한 것을 마음에 두지 않고 성경이라고 함을 실재적인 것으로 말한다면 그가 말하는 소위'정신에 대한 죄'가 되어지며 '세계에 가장 뻔뻔한 일'이라는 표현을 하게 되는 것입니다.

기독교 사상사에서 주목해본다면, 더욱 니체의 당시 루터교에서는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말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할 수 있습니다.(각주6) 그리고 카돌릭에 있어서는 이미 실재론에 대한 것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 가운데서 윤리적 개념의 모습 도덕적 개념의 모습으로 나타나고 있는 가운데서 니체는 바로 '도덕의 계보학'이라는 필적할만한 글을 쓴 것으로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개혁신학에서도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가르침은 존재했지만 그것에 대하여서는 도르트 신조가 있었던 회의에서도 그냥 넘어가는 아쉬움이 있었던 것입니다.

한마디로 시간에 대한 분명한 견해를 니체는 가졌는데, 그 때 당시에서는 그것에 대한 분명한 답변이 없었던 것입니다. 이것은 오늘날도 교회가 생각해야 할 문제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세월을 아끼라고 말씀하셨는데 세월이 무엇인지 세월을 말하는 역사와 그것의 계기가 되어지는 시간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분명한 입장을 취함이 없이는 그 말씀하심에 순종하지 못하게 되며 그것은 니체의 반론에 답변하지 못하고 그와 함께한 영혼들을 세상에 내어 주어야 할 것입니다. 그러한 자들은 그들의 잘못으로 죄를 범하게 되는 것이며 교회는 그들로 인해 정죄받는 것은 아니지만 믿음으로 영혼들에게 증거해야 할 분명한 소리를 내지 못함에 있어서는 책망이 있을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시간을 과거와 현재와 미래라는 것으로 생각하고 상대적으로 판단의 기준을 미래에 두어야 하는 것의 당위성이 니체의 인식의 기본인데, 그것의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니체는 가지지 못했고 니체의 합리성을 추구하는 자들도 자존하나님 외에서는 찾지 못한다는 것을 우리 성도는 말해야 할 것입니다.

자존의 하나님으로부터 시간의 실존을 말하고 판단한다고 할 때에, 그들의 삶을 위한 실재없는 것이라도 의미를 인위적으로 부여하자는 삶의 긍정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이 부여되어진 것으로써 실재로 구별하여 받을 수 있다는 것이 비록 하나의 관점이라는 편협함을 말할 수 있어도 하나님의 자존적 절대 정당함으로부터의 그 실재의 사실임을 정당하게 말함이 옳은 것입니다.




각주1)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42.


각주2)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27-57. 2장 전체참고


각주3) 잔프란스키, 니체, 생애와 그의 사상(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pp.32-34.


각주4)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38과 p.48, 49

p.38에서는 시간에 대한 혼선이 있는 가운데서도 주님을 의지하는 모습이 여전했음에 대한 기도문이 기록되어진 것을 저자가 인용한 본문이 나타나고, p.48에서는 자신의 중심의 하나님에 대한 제단을 반납?하는 것과 같이 보이는 또는 전적인 의지라는 개념도 해석가능한 글을 인용하고 있습니다. p49에서는 그의 저주에 대한 글을 쓰고 있는 것과 전적인 그리스도에 대한 반한 입장을 후에 취하고 있다는 점에서 p.48은 신앙을 반납함의 표현하는 글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지적하고자 하는 것은 그러한 것이 진정한 사실을 현실에서도 말하게 되어지는 그리스도 안에서의 사유 즉 메시아적 사유라고 하는 것의 진정 사실임을 받지 못하는 순간의 메모라고 할 수 있겠습니다. 즉 그리스도 안에서 진정한 사실이라는 정당함을 찾지 못한다면 실증주의 사회에서는 미래적 판단에서 실제적인 판단의 기준이 있고 현재는 아무도 모른다는 불가지적인 입장을 따를 수 밖에 없다는 것을 니체의 이러한 작은 메모를 읽음에서 말할 수 있다고 하겠습니다.


각주5) 레지날드 J. 홀링데일, 니체, 그사람과 그의철학(Nietzsche, Der Man und seines Philosophen)(이제이북스 김기복외 역) p.49


각주6) 후스토 곤잘레스, 기독교 사상사 llI

후스토 곤잘레스는 루터교에 대한 신학적 입장을 그의 사상사에서 자세히 기술하고 있는데 특히 루터와 필립 멜랑톤의 후기적 차이라고 하는 것을 지적함에 있어서 그리고 멜랑톤이 '아우스부르크 신조'를 작성할 때에 필립의 의도와는 다르게 성찬에 있어서 '참된 실재적 임재'라는 문구를 삭제된 가운데서 글을 쓰게 하였다는 것을 기술하고 있습니다. 사상의 통일을 위해 실재론을 비켜간 것을 의미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을 말하는가 하는 것으로 종교개혁시대에 있어서 루터교에서는 하나님의 실재를 믿었다는 것은 사실이나 실재에 대한 견해에 분명한 증거와 가르침의 부재라는 비판을 받아야하며 그러한 전통에서의 루터교 목사님의 아들 니체도 그 실재에 대한 이해와 스트레스라는 것을 말할 수 있게 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의 전기저자 홀링데일의 글에서는 니체가 실재에 대한 상당히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는 젊은 때에 모습을 나타내는 글들을 많이 인용하고 있음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도움말

이명신 소년 니체는 자신이 쓰는 자신에 대한 글로써의 일기에서 시간이해를 하고 그것에 따른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생각해내는 현명함이 있었고 칸트이후에 철학의 인식계기요소로써 시간과 공간 중에 시간에 대한 재구성을 말함으로 새로운 철학의 탄생을 열었던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일기.. 2005/09/01

이명신 옳은 해석과 잘된 해석 중에서 잘된해석을 취하는 니체와 그 해석동의자들의 모습에 옳은 해석을 말해도 그들에게는 쇠귀에 경읽기 밖에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할 것입니다. 2005/09/01

이명신 비판은 그러한 판단을 내리는 인식의 계기 시간에 대한 인식의 정당함이 없음이 비판받아야 할 것입니다. 그것에 대하여서는 니체와 니체의 추종자들은 답변의 실제를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9/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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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8월 18, 2005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니케아 칼세톤신앙의 의미..

성도라면 주님의 눈물과 고통을 마음에 세겨야 할 것이고, 그러한 중심이 모습들을 가져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자숙의 자리에 서는것이 마땅하다는 것과 어떤 말보다 앞선 모습을 보여야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주님의 고통과 눈물이라고 하이 기만적으로 사용되어질 수 있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때에는 오히려 그러한 자세를 취한다는 것이 분별없는 바리새적인 모습이 되어질 것이라는 점에서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인권의 왕도님이 언급중에서 인용하면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답변으로써 이 합일이라는 개념이 전제하는 것은 두 양성 또는 두 위격을 말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그러한 것이 하나가 되었다는 개념으로 위격의 변화로써의 단일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습니다.

둘이 하나가 된다는 것이 시간이 되어 합쳐지거나 또는 이미 나누어진 존재라는 그러한 전제가 시간의 흐름에 따라서 변화를 겪었으며 이것이 하나님이 삼위일체라는 말을 쓰게 되었다는 것을 열어놓고 있는 시간의 과정에 따른 신론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전통적인 개념에서 삼위일체 하나님과 기독론의 양성에 대한 이야기를 할 때는 니케아 칼세톤신조를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에 대한 칼세톤 신조에서는 양성의 이중성에 대하여서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각주1) 표현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삼위의 위격에서도 동일한 입장(각주2)을 취하고 있습니다.


1. 니케아 칼세톤 신조에 대한 이해

니케아 칼세톤 신조는 라틴 신조로써 나중에 연합되어진 가운데서 서로 수용되어지는 경우를 볼 수 있습니다만 그 출발은 동방신학의 유출적 개념에서 단성론에 대한 입장과 달리하는 입장에서 말하게 되어지는 것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이 때는 전통적으로 영원이라는 것과 시간이라는 것이 대립되어지는 것으로 인식되어져 왔던 것입니다. 이것은 동방에서는 영원에서 시간의 발출을 말하는 것과 그 존재의 발출을 말하는 식으로 이해해왔고 라틴에서는 그 시간의 판단하에서 하나님을 생각하는 영지주의적 개념은 정죄하는 경우로 봅니다.

그런데 현대에서는 시간이라는 개념을 영원에 비교하여서 해석할 당위성이 없다는 점에서 주관적 인식의 당위성을 말하고 있고(각주3) 이미 신학적으로는 칼바르트를 비롯한 주관적 시간관을 말하고 있고 철학적으로는 프리드리히 니체의 입장에서 그 정오의 사상에서 시간을 주관적으로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였던 것입니다(각주4)

이러한 가운데서 니체를 비롯한 플라토닉 아포리스트들은 시간의 창조보다는 영원이라는 개념도 시간으로 판단되어야 한다는 점을 주장하였고 이것은 하나님의 속성으로서의 절대 영원을 해석할 수 있다는 당위성을 놓았던 것입니다.(각주5)

이러한 가운데서는 이제 니케아 칼세톤의 신앙고백으로서 삼위일체 하나님을 시간의 종속되어진 자로서 이해하고자 하고 메시아의 인식의 발달을 말하는 현대신학적 입장이 득세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의 삼위일체에 대한 위격적 양태론에 정당함을 말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잘못 생각하였던 것입니다.

그리고 맹목적으로 서방라틴신학적 안티로의 개념을 종교개혁의 실제로 잘못보는 가운데서 동방신학적 건전함을 말하는 경향도 이러한 길에 한몫을 했다고 함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2. 니케아 칼세톤 신조의 변경 요청들에 대하여서

현대철학과 신을 말하는 철학적 신론을 따르는 현대신학에서는 시간을 하나님이 창조물로 봄에 대한 것에대한 당위성을 임의적으로 인정하지 않고 주관적 입장에서의 당위성의 가능성이라고 함을 의지하여서 시간에 따른 그러한 시간에 따라 변형되어지는 하나님에 대한 이해를 추구하고 있고 시간으로 하나님을 인식하는 칸트의 인식론의계기로서의 시간을 적극적으로 활용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을 말할 때에 그것의 주관적 당위성을 놓은 자가 바로 니체가 되어지며 그러한 존재부정이라는 개념에서의 유출적 정당함을 찾게 되어지고 이것은 신플라톤적 해석의 정체성을 말할 수 있는 당위성으로써 플라톤적 신학의 당위성까지 읽을 수 있는 길을 열어놓았던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존재의 유출을 말함에 있어서 시간을 말하는 것은 시간을 인식하는 것은 존재의 이동이라는 개념에서 물질의 이동이라는 것에서 시간이라는 것을 인식한다는 것이기 때문에 유출설과 회귀사상은 시간론을 배제할 수 없고 그러한시간론은 존재로의 회귀와 존재의 도달을 말하는 가운데서 하나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이처럼 시간이라고 함이 흐름을 전제로 하여야만 하는 과정신학에서 말하는 존재의 합일이라는 개념을 성도에게는 성화 하나님을 말할 때에는 존재의 합쳐짐이라는 개념으로 말해야 하는 당위성이 있고 이것은 삼위일체에 대한 니케아 신앙의 기본적인 고백을 부인하고 시간의 종속물로서이 인조 하나님을 말할 수 있는 것으로 나타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아예 신이 없다 신이 죽었다는 사신신학도 이와 같은 맥락에서 주목할 수 있고 이러한 것은 사회구원적 개념으로 기독교의 당위성을 하나님께 두지 않고 사회에 비로소 두는 경향도 있는 것입니다.

시대의 사고의 변화라는 개념은 그 인식의 계기로서의 시간관이 중요합니다.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을 입은 시간창조를 믿던지 아니면 시간으로써 묘사되어지고 변형되어진 거짓된 신 또는 죽은 신으로 인한 인위적 발상의 인간들의 모임으로 전락하든지 그러한 기로에 서있는 것이 오늘날 신학과 신앙의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우리가 니케아 칼세톤 신앙을 따르고자 하는 것은 맹목적 가톨릭이라는 것과 그들의 가르침의 연관성을 따른다는 또는 그러한 잘못된스콜라적 신학의 연속성을 주장하는 것은 아닙니다.

자존의 하나님 안에서 정당함을 입은 우리 성도들 예수 이름으로 구원받은 자들이 그의 형상으로 새롭게 지음받았을 때에 믿음 안에서 사실을 구별하여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이 있는데 그것이 교회사에 나타난 하나님 앞에서 바른 신앙고백을 그 전통의 연속성이해의 강요에서 자유한 가운데서 취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역사 속에서 바르게 고백을 하게 하였던 것을 기억함은 니케아 칼세톤 신앙에서의 참으로 시간을 창조하신 하나님으로서 시간의종속적 해석적 실존을 말하는 인조하나님 죽은 신론적 입장의 비웃음과 해석적 당위성의 세상의 이유를 묻는 자들에 답변하게 하심을 믿음으로 순종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임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억지로 전통이기 때문에 또는 그 전통이 가톨릭의 신론적 부재에 대한 임의적 변명으로 일관하는 것에서 떠났다는 점에서 배척한다는 그러한 극단적인 개념이 아니라, 그 때에 고백되었던 삼위일체 하나님 니케아 칼세톤에서의 신조적 고백이 얼마나 하나님 앞에서 합당하고 귀한 것인가 하는 것을 기억할 때에 우리 성도들은 믿음 안에서 동일한 고백으로써의 니케아 칼세톤 신조를 고백하며 따르게 되는 것입니다.

그것이 과정신학이라는 개념에서 시간이 주관적 인식과 그러한 가운데서 성화라는 개념을 하나님의 존재에로의 흡수적 개념이나 병합적 개념으로 말하고 하나님의 존재마저도 위격적 하나 병합적 양태론적인 입장이라는 것에 동의할 수 없다는 것이며 그러한 하나님을 말하며 그러한 주님을 말함에 있어서 그 주님의 눈물이라는 것은 이미 정적인 호소력을 말할 수 있는 시효는 발효부터 되지 않았다는 것입니다.






각주1) 정통교리는 유티커스주의와 대항하여 성육신 이후에도 성의 구분을 인정하되 양성은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신적 의지는 여전히 신적 의지대로 남아 있고 인간적 의지는 여전히 인간적 의지 그대로 남아 있지만, 이 두 성품은 계속해서 하나의 동일한 생활을 하면서 삼위의 각 위들처럼 상호 교통을 하고 있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2) 성육신은 하나님이 사람으로 전환되거나 변형된 것이 아니요, 사람이 하나님으로 전환되어진 것도 아니며, 둘이 하나 속에 흡수되거나 혼돈되어진 것도 아니다, 그렇다고 어느 한쪽이 다른 쪽 속에 단순히 내주(內住)하거나 둘이 외견상으로만 일시적으로 연결된 것도 아니다. 성육신은 둘이 한 인격체 안에 실제적이고도 영속적으로 연합한 것이다.

(필립샤프, 신조학, 박일민 편역 기독교문서선교회 32 p)

각주3) 우리가 시간의 문제를 잘 이해하려면 시간의 창조(과거)와 지속(현재) 그리고 종말(미래)등을 종합적으로 사고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보다 더 중요하게 전제되고 수반되어야 할 사항은 시간을 영원과 관계에서 규정하는 것이다.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 독자에게 바라는 것은 이 책을 통해 시간에 대해 두려워하거나 어려워만 하지 말고 시가을 긍정하면서도 부정하는, 시간 속에 있으면서도 시간을 넘어서는 시간이 주는 풍요를 맛보기 바란다.

(정기철, 시간의 문제와 종말론- 시간철학과 시간의 신학, 한들출판사 p.6)

부언) 여기서 시간의 부정이라는 개념이 점진성을 말하기 보다는 영원을 기준으로 말한다는 것으로써의 유출적 개념으로서 시간의 일상적 흐름이라는 것에서 주관적 해석의 당위성을 말하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즉 단순한 영원을 위한 시간을 부정하거나 영원에서 시간이 비로소 말하게 된다거나 하는 것을 지적하는 것이지 변증법적인 개념에서의 상관성을 부정하는 것으로 언급하는 것은 아닌 것으로 보여집니다.

각주4) 소광희, 시간의 철학적 성찰 문예출판사 pp. 41-68. 에서는 원환적 시간 표상: 영겁회귀사상을 다루고 있는데 플라톤의 니체의 입장 즉 디오니소스적인 정신에서 발생한 것으로써의 시간관을 의미하는 회귀사상을 말하면서 니체의 '차랴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를 중심으로 말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정오사상에서 신은 죽었다는 말을 했음에 대한 지적이 나타나고 있는데(p. 59.) 이는 주관적 순환적 시간관에 따른 해석으로 신의 죽음이라고 하는 것을 말하는 것으로 현대의 주관적 시간관을 의미하는 것을 니체 그에게서 찾고 있는 중심을 나타내고 있다. 즉 소광희 교수는 시간이 일반론에서 니체의 사상을 다루었던 것입니다.

니체는 수학을 잘 못했지만 그의 포스타 학교에서 그의 심적인 입장은 플라톤의 아카데미적 입장을 취하게 되었고 그러한 입장에서 시간관을 존재 부정의 개념에서의 정오사상에서의 출발을 말하게 되었던 것이며 부정형의 철학을 말하게 되며 신플라톤적 개념의 회귀사상과 비교되어질 수 있는 회귀적 존재이해를 한 것으로 그것은 시간에 따른 존재이해로 나타났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은 위의 정기철 교수님이 마음에 두고 말씀하셨는지 알수 없지만 '우리가 꼭 영원을 시간의 부정이나 모상으로만 사고할 필요는 없다'라고 말했을 때에 신의 속성으로서의 영원의 부정을 전제로 말씀하신 것으로도 볼 수 있는 것입니다.

각주5) 플라톤만 이야기 할 때에 아리스토텔레스주의자들은 그러한 것에서 자유하다는 반론이 있을 수 있는데 이것은 옳지 않습니다.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함은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글쓴이 : 인권의 왕도
조회 : 27 스크랩 : 0 날짜 : 2005.07.12 09:28

주님의 대한 묵상 입니다.


- 주님의 고통과 눈물과 분노 -

만일 예수님이 하나님(야웨)이시다면 왜 그분은 아버지에게 기도했으며 어떻게 시험을 받고 자라나시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경험할수 있었을까? 라는 질문이 나오기 마련 입니다. 요한복음 11장에 나사로의 죽음에 대한 주위 반응에 따라서 주님은 “통분히 여기시고 민망히 여기시며 눈물을 흘리셨습니다.”

두 번째 주님은 성도의 본으로서 육신을 입고 인간들이 밟아갈 과정을 모두 밟으셨습니다. 그것은 성도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 기도해야 하는가? 순종해야 하는가를 몸소 보여주신 것으로서 주님이 행하신 것이다라고 생각할 수가 있습니다.

세 번째 주님의 그 인성은 기원과 본질이 여호와로서 동일하지만 유한계로 발출된 것을 말 합니다. 여호와로부터 나온 인성이라면 완전할 것이라 생각을 하겠지만 처음으로 나온 것이고 질서에 따라야 하기 때문에 불완전에서 완전으로 진전해 갈 필요성이 있었습니다. 이것을 주님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성취를 하였습니다.(부활체) 불완전한 상태이다라는 것은 곧 여호와와 분리된 상태하에 있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주님은 재세시에 분리와 합일이라는 곧 겸비와 영광화라는 두 상태를 오가셨습니다. 분리 곧 겸비 상태일때 주님은 시험을 받고 고통을 받고 죽음을 당했습니다. 영광화 상태일때 주님은 권능을 행하시며 부활하시고 승리를 하셨습니다.

이 주님의 인성의 영광화는 성도의 신화(Deification) 곧 중생의 본이자 성도의 이상이요 목표 입니다. 주님이 그렇게 영화되어 성부와 합일에 이르셨듯이 성도도 주님의 성령을 의지해서 두상태를 오가며 주님 곧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어야 한다는 것을 말 합니다.

부활하시기 전의 인성(human)은 유한하지만 부활하신 이후의 인성(Human)은 영화된 인성으로서(the glorified Human) 신성으로 충만하고 권능과 권세를 가지고 있는 것으로 다릅니다. 그 이유는 아버지와 완전하고도 영원하게 합일(union)을 하였기 때문 입니다.

요한복음 주석에서 암시하기를 그분이 비통해 하시거나 눈물을 흘리심과 같은 사실은 그분 속의 신성이 일하는데 대해 유한한 인성의 자연적인 반작용이었다고 말한다.(사랑이요 의분이나 절대적 사랑은 아니라는 것) 이는 마치 우리가 신성한 사랑과 지혜에 관해 아는 것을 삶에 이행해 보려 할때 그 노력은 우리의 보다 낮고 이기적인 바람의 차원을 더 비통해하거나 몸부림칠 수밖에 없게 되는 것과 같다.

주님이 세상에 계시는 동안 그분이 구해주려는 사람들이 보여 주는 방자함, 불성실함, 눈먼 행동(배신들)들 때문에 인간적으로 슬퍼하셨고 이 슬픔은 그분에게 있는 가장 심한 시험의 하나이기도 했다.

주님도 그분의 지혜가 인간에 이식해 놓은 자유의지를 가지고 방자해질 충동을 거절하시면서 그에 따른 모든 시험을 극복하셨다는 것을 우리가 알고 이해할 필요가 있다. 우리가 때로 누군가에게 자기 생각을 강제로 주입시키려 할때 위의 주님이 받으신 시험의 종류를 겪기도 한다. 주님은 그분의 투쟁을 보여 주시며 동시에 즉각 승리하셨음도 보여 주시고 아버지에게 감사 드림으로써 투쟁과 승리의 근원이 어디에 있는지도 보여 주었다.







토론글

이명신 현대신학의 인식에 앞서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인 시간에 대한 이해를 하지 못한다면 상당히 어려울 것입니다. 그리고 합리성의 나열들이 아주 정적으로 나타날 수도 있고 해서 당위성을 맹목적으로 말할 수 있어보이지만 그 인식의 계기인 주관적 시간이해라는것은 하나님 앞에서 옳은 것이 아닙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신학이라고 하는 것 과정철학이라고 하는 것은 신을 묘사함에 있어서 시간이라는 개념의 판단적 실재인식을 하도록 함에 당연성을 부여하고 있습니다. 그러한 것이 잘못임을 볼때 니케아 신앙과 신학적 고백이 얼마나 주의하였던 중심으로 그러한 위격과 양성에 대한 신앙고백을 했는가 하는 것을 귀하게 보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시간을 창조하신 세월을 창조하시고 주관하시는 하나님을 믿을 것인가 또는 시간에 따라 재해석된 존재부정의 신의 죽음을 거짓되게 믿을 것인가 하는 것은 이 니케아 칼세톤 신앙고백을 바르게 읽는가에 대한 관건으로도 표현되어질 수 있어서 글을 올립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불공정하고 불평등한 토론은 사양 합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는 아무말도 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억압되는 곳에는 주님의 역사도 없습니다. 주님의 대한 믿음과 회개와 성화와 신화라는 중생의 전 과정은 일어날수가 없습니다. 자유가 있는 곳에 주님도 있습니다. 자유가 없다면 정당한 토론은 이루어질수가 없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불평등하다.. 그것에 대한 이유를 분위기 탓으로 말씀하심은 옳지 않습니다. 2005/07/12


이명신 누가 자유를 억압했다고 말씀하시고 있는지요 님의 자유의식이 판단되었음에 대한 불안감이 그대로 표현되고 있다고 할 수 있뿐입니다. 님이 인용하는 과정철학의 기본적 인식이라고 하는 것이 시간관이라는 것을 알지 못하고 부당하다는 표현은 너무 생뚱맞은 소리라는 것쯤은 아실 수 있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신화라는 개념이 어떤 개념인지 과정철학에서 어떤 개념인지 알고 말씀하시는지요 그것에서 나타나고 있는 시간의 연속성이 일반시간론을 말하고 있는 것은 아니라는 것도 생각하심이 지혜로울 수 있을 것같습니다. 2005/07/12


이명신 이미 실재적인 기준없이 합리성의 가능성만을 가지고 말씀하시는 가운데 정당한 토론이라는 개념은 너무 임의적인 것으로만 보인다는 것은 상식적으로도 인정해야 할 문제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과정철학자이자 신비가라고 할 대에 주의 종이라는 말을 하기 전에 그가 시간의 인식의 판단에서 이미 주관적 개념의 사벨리우스적 개념을 단성론을 말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이단으로 정죄하지 않겠다 다수의 의지하지 않겠다. 권력에 의지하지 않겠다고 말은 하지만 과정철학이니 교회에 나가지 않는다느이 보리의 신학을 말한다느니 하면서 비판을 하고 있다는 것 입니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말을 할수가 없습니다만 왜곡되고 있으므로 말하게 된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님도 딱두하시구려.. 다수의 폭력이 아니라니깐 이렇게 나르시즘에 잡혀서 자기 연민으로 더 이상 말못하겠다고 하니 저의 본문을 제대로 읽고 말씀하시는가요.. 답답하군요.. 진짜루.. 2005/07/12


이명신 왜곡은 무슨 왜곡.. 기본적인 인식도 없으면서 불리하면 왜곡이레.. 그럼 왜곡되어진 부분을 보이시고 그런 말씀하세요.. 용어나 말을 함부로 적용하심은 여전하시군요 2005/07/12


동행자 ㅉㅉㅉ 인권님이 불평등한 토론이라 하신것은 인권님에게 하나님이 함께 하시지 않는다는 증거!! 하나님이 함께 하는자는 루터와 같은 담대함속에서 불리함을 마다 않음 2005/07/12


인권의 왕도 성부와 성자의 합일은 기독교 교리에서는 처음부터 완전한 합일 가운데 곧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변화나 혼돈없이 그리고 또 분리나 분할없이 구분됨으로써" 이를 저는 불상리 불상잡이라고 줄여서 말 합니다.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다. 혼합된 것도 아니다라는 의미 입니다. 처음부터가 아닌 점진적인 발달을 거쳐서 2005/07/12

이명신 그러게 점진적인 발달이라는 개념이 시간관에서 이야기 되어지는 것이며 이것은 과정철학에서는 일반시간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인데도 제대로 이해하시지 못하시는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버지와의 합일을 이루셨습니다. 무엇의 합일인가? 주님의 아들됨 곧 인성의 기원과 본질은 신성이기 때문에 이것은 아니고, 위격의 합일을 말 합니다. 인성이라는 위격이 신성이라는 위격에 합일되는 것을 말 합니다. 성부위격은 신성 그 자체이나 성자위격은 사복음서에 보듯이 유한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이 유한성을 초 2005/07/12

이명신 여보세요.. 누구는 사복음서 안보고 말씀하시는 것과 같이 말씀하시지 마시구요.. 그러한 표현이 가능하다고 실제적으로 그렇게 해석해야 하는 당위성을 말하는 실재적 근거를 님은 가지지 못하고 있다는 것에 답변해야 할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월하는 방편으로서 십자가 도 즉 자기부인과 죽음으로 인성을 신령화하였습니다. 그것이 성부위격의 신성과의 합일을 의미 합니다. 여기서 합일은 칼겐돈 신조에서와 같이 불상리 불상잡으로서 서로 분리된 것이 아니고 서로 혼합된 것도 아닌 상태로 두 본성의 정체성을 잃지 않는 가운데 하나된 것을 말 합니다. 영혼과 2005/07/12

인권의 왕도 육체와의 하나됨과 비교할수 있습니다만 엄밀히는 부족 합니다. 부부가 한몸이 된다 주님과 인간이 한영이 된다고 해도 각각의 성은 상실되지 않는 것과 같이 그렇게 하나되는 것을 말하지만 부부는 타자로서이고 주님과 인간은 조물주와 피조물로서이나 주님은 신성과 신령인성의 하나됨이기 때문에 다른 것보다 월등히 2005/07/12

인권의 왕도 점진적인 영화가 아니라면 성령은 왜 부활후에 교회에 발출이 되었는지요? 왜 성부와 성자 그리고 인자라는 세가지로 묘사를 했는지요? 부활후 주님은 계시록의 주님은 부활 이전의 주님과 어는 정도 다릅니까? 인성은 유아적이고 지성도 유아적인가요? 2005/07/12

이명신 발출을 위한 발출의 당위성 설명이라.. 쯧 발출적개념이 이미 인식의 계기로서 주관적 시간의 발상으로 부정되었다는데 그것에서 무슨 또 선한 것이 있는지 주머니를 뒤지고 있나요.. 먼지밖에 더 있겠습니까 답답하군요.. 2005/07/12

이명신 아직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하시는군요.. 니케아 칼세톤신조에서는 시간이 판단으로 점진적인 개념의 도입적 판단을 받는 것이 아니라는데도 합일의 경지라는 시간적 개념으로 자꾸 말하고 있네요.. 과정철학이라는 개념이 시간의 연속성에서 존재를 인식하는 당위성이 있다는 것에 대하여서 전혀 답변이 없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아니 절대적인 합일을 의미 합니다. 성부와 성자의 두위격이 하나되므로서 성령이라는 제3위격이 발출되게 되었습니다. 이렇게 하여 성부와 성자와 성령이라는 삼위일체 교리가 성립되게 된 것인데. 주님이 아버지의 유일한 형상이자 몸이기 때문에 주님이외의 기도나 예배의 대상은 없다는 것, 또 성령도 주님의 이름으로 2005/07/12

이명신 니케아신조와 칼케톤신조라는 것이 동방신학적 안티의 개념에서 생각되었다면 발출설적인 개념으로써의 비교되어질 수 있는 신플라톤적 개념의 합일은 이 두신조에서 말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기본적인 정황파악이되는데 전혀 생각없이 말씀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내말은 그러한 시간에 따른 존재의 유출적 개념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이미 배제되어야 한다는 경건의 중심을 나타내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런데 님은 시간에 따라 속성의 합일을 말하는 가운데서 일체를 말하는 것은 이것은 위격의 혼합을 말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일체라는 개념을 잘못 이야기하고 있고 니케아칼세톤신조를 말할 수 없는 자리에 서 있다는 것입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하나님이 사람이 되신 것은 사람들로 하여금 하나님되게 하는 법을 가르쳐 주기 위해서이다라는 것이 신화이고 아타나시우스와 그 당시 속사도들의 믿음이였습니다. 바울사도의 믿음 곧 주님과 같은 십자가 도를 행하므로서 피조물적인 영광에 이르려 하였던 것, 이것은 주님이 시험과 고난과 죽음이라는 과정을 거쳐서 열 2005/07/12

인권의 왕도 매로서 얻으신 부활체에 대한 소망이 강렬했기 때문 입니다. 그러한 과정을 거쳐서 주님이 부활하였듯이 성도도 단순히 입술만의 고백에서 삶전체로 주님을 닮아서 주님과같은 열매를 얻고자 하였다는 것 입니다. 주님의 본질은 신성으로서 불변이나 위격적으로는 과정을 거쳐서 신성화되었습니다. 이것은 구원의 핵심사항 2005/07/12

인권의 왕도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아타나시우스의 신앙적 개념이 무엇인지 모르시군요.. 그는 오리겐적인 신플라톤적 개념에서 말하고 있는 것이며 정도면에서 목회적 개념에서 말했을 뿐임은 곤잘레스가 말하고 있습니다. 즉 말하기 위한 것으로써의 오리겐적 입장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오리겐적인 개념과 다른 것이 니케아칼세톤적 개념이라고 말하는데도 우째 이렇게 생뚱맞게 말하고 있는 것인지 답답허이 말할줄 알았지 남이 무엇을 말하는지는 전혀 마음에 두지 않으니 참 답답하이~~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이 신성이 그렇게 나타나야 할 것이 아니라는 것은 이미 아기예수께부터 신성적 입장의 사역을 하셨음에 대한 것을 인정하셔야 하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교회에 내린다는 것, 본질과 위격의 구분됨은 실재적이나 현재 주님은 아버지의 몸과 같기 때문에 아버지의 의식으로 충만 합니다. 아버지는 볼수 없으나 아들은 볼수 있습니다. 그 아들의 형상하에서 아버지에게 예배하는 것이 지금의 신앙 입니다. 그분안에 신성의 충만함이 있다는 것을 시인하는 것이 기독교 믿음 입니 2005/07/12

인권의 왕도 다. 2005/07/12

이명신 전혀 개념이 없군요.. 과정신학의 인식의 개념이 시간이라는 것도 모르고 있고 유출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이해되어야 한다는 것도 알지 못하고 있고 합일이라는 개념이 시간으로 말할 때에는 합쳐놓은 혼합적 단일성을 말하는 시간의 종속물로서의 거짓신을 말한다는 것을 전혀 이해하지도 못하시군요..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동방신학과 서방신학의 차이점과 니케아칼세톤 신조의 고백적 전통에서 무엇을 조심하였는지 그것이 경건이며 님과 같이 시간의 판단받는 자들이 입장을 이미 배제한 것으로 말할 수 있는 자리에 서고 있다는 것이 역사적 고찰이거늘 전혀 딴 소리하시는군요.. 2005/07/12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입장을 인정하면서 그가 주의 종인지에 대한 여부를 남겨야 한다는 측면에서 말씀하신 것으로 알고 있는데 이러한 과정철학적 장난에서 거짓된 존재인식의 정황을 제대로 벗어나지 못하는 자들이라는 것을 전혀 알지 못하고 함부로 말하고 임의적으로 주의종이라고 말하니 답답합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구약의 여호와 신앙과 신약의 주님에 대한 신앙의 차이점을 전혀 인식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위격은 인성으로서 여느 인간들과 성육신 초기와 중기와 말기에는 같았으나 그 과정에서 신체가 성장하고 지혜가 성장하였듯이 그분의 위격도 성장을 하였습니다. 주님의 인성의 본질과 기원은 여호와이기 때문에 다른 인 2005/07/12

이명신 전혀 채널이 맞지 않군요.. 딴데 틀어서 말하고 있는 것봐요.. 앞에 글에 제대로 된 답변을 하고 의견을 말하고 있는지 보세요.. 동문서답하고 있군요.. 답답해요.. 자기 말하는 것은 죽어도 말해야 한다는 오기..거참 해병대출신이신 것같군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간들은 그 유한성이라는 한계를 영원의 시간이 흘러도 초월할수 없었지만 주님은 33/34년만에 십자가 도를 충실히 이행하므로서 달성했다는 것 입니다. 여호와의 신성은 절대성안에서만 충만하였는데 주님의 신령하게 된 인성으로 말미암아 2위격에 신성이 충만히 채워지게 되었다는 것을 말 합니다. 그러므로 인해서 보이 2005/07/12

이명신 그렇치 예수님이 모자라니깐 성숙을 필요로 신성이 혼합되어야 한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겠지요 주입되는 신성이라.. 이런 것이 바로 니케아칼세톤의 신조와 전혀 상관없는 자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에 대한 신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이 속성의 전달이라는 개념으로 중세적 개념으로 나타나고 있고 시간이라는 것의 흐름에 따라 그러힌 일이 일어나며 예수님이 시간에 따라 신성이 채워지는 것으로 말한다는 것은 예수님의 신성의 변화를 말하는 것인데 어찌 이단이라고 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예수님은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시며 그것은 신성에서도 마찬가지이거든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예수님은 성육신 전에 인성이 있었습니까? 없었습니까? 그 인성이 부활이전과 다릅니까? 같습니까? 기독교 교리도 과정을 말하고 있습니다. 2005/07/12

인권의 왕도 신성은 불변이나 인성은 가변적 입니다. 상식 아닙니까? 예수님의 인성은 처음부터 완전했습니까? 거룩했습니까? 성인이였습니까? 지혜가 완전했습니까? 부활하시므로 주님은 아버지 우편 곧 권능의 자리에 앉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인성이 신령화되어 신성이신 아버지와 하나가 되었기 때문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인권의 왕도 고 인간형으로 있는 신성화된 주님을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약과는 달리 아버지와 연결될수 있게 되었다는 것 입니다. 중보자, 중개자, 그만큼 인간이 아버지와 하나되는 것이 어렵고 멀어져 있어서 주님이 인성을 취하여 신령화해야 했다는 것 입니다. 그러므로 인성으로 계신 신성에 대한 시인을 통하지 않으면 어느 누구 2005/07/12

인권의 왕도 도 구원에 이를수 없다고 하는 것 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과정이라는 개념에서 위격적 개념이 판단되어서는 안된다는 것이 니케아칼세톤의 신앙고백입니다. 그런데 시간인식에 종속되어진 과정으로 신성을 논한다는 것이 그것과 상관이 없는 것과 거짓이라는 것을 말함이 합당하지 않겠습니까 2005/07/12

이명신 그만 피곤하게 꼬리말로 님이 대의를 꼬리말로 흐리게 하시지 마시고 답변글로 정식으로 글을 써주시기 바라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리고 쓸데없는 말 돌리지 마시고 답변글로 답변하세요.. 그렇지 않으면 님의 부질없으에 대한것으로 변명뿐 진정한 사실을 말씀하시지 못한 것으로 받겠습니다. 괜히 말만 만드지 마세요 님의 과정철학적 입장에서 시간을 어떻게 이해하고 있는지 답변글로 쓰세요 그것이 저의글의 답변이 될것입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만.. 읽는 사람들을 위해서 님도 당당하게 답변글로 쓰시지요.. 괜히 코멘트로 눈흐리게 하지 마시구요 2005/07/12

이명신 이번에 님의 위격의 과정과 신성의 시간적 변화라는 개념과 합일이라는 적어도 제가 오해한 것이라고 말씀하실 님의 존재의 혼합이라고 하는 것에 대하여서 님의 탁월한 답글을 기대하겠습니다. 조금뒤에 뵙겠습니다. 2005/07/12

김응남 (왕도님에게)이명신님과 토론(?)은 유익이 없습니다....유익을 위해서는 성경을 표준으로 성경본문에 대한 토론을 하시는 것이 좋을 것입니다...성경 본문에 대한 대화라면 저도 마다하지는 않겠습니다. 2005/07/12

이명신 그렇지요.. 성경구절인용대회에 수상경력이 있는 사람들이야 무슨 소리인지 모를것입니다. 그러면서 유익이 없는지 어떻게 임의적으로 말씀하십니까 없음에 대한 기본적인 것을 납득하게 말하고 난 다음에 그런 말씀을 하시는 것이 기본적인 예의이거늘 기본적인 예의도 없고 막된 인격들로서 자처하시나요 2005/07/12

김응남 (이명신님에게)는 할말이 없음. 2005/07/13

이명신 미안하다는 한마디 하는 것이 인지상정이 아닐까요.. 말을 아끼시는 것인지 회피하시는 것인지.. 애매한 분이시군요.. 애매한 인격으로 판단받지 않으시길 바라겠습니다. 좀 시원시원하세요.. 뭐 그렇게 긴장을 하시는지.. 사람이 틀릴수도 있고 한번 그렇나 할 수 있는 것이지.. 진리가 아닌 것에는 말입니다. 2005/07/13

이명신 스베덴보리의 신학의 입장이라면 저의 글에 답변하실 수 있을 것이라고 기대하겠습니다. 답변해보세요.. 그 답변에 글을 준비하겠습니다. 2005/07/13

김응남 (이명신님)왕도님에게 님과의 토론은 유익이 없다는 꼬리글이...님에게는 달리 생각할 수 있다는 것을 인정하고 님께 미안하게 생각합니다^^ 2005/07/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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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의 통일성에 대하여서..(분리와 분파에 대한 개념 정립을 위해..)

글을 씀에 있어서

화평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말씀안에서 그 사실을 말한다는 것을 기억할 때에는 이단들과의 모양세적인 측면의 화평은 사실을 말할 수 있는 것이 아닌것을 분명히 말해두겠습니다.

이 모든 것은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분명한 개념정리가 앞선다고 하겠습니다. 특히 가톨릭과 기독교의 교회 통일성이라고 하는 것의 차이는 그 실재론에서 부터 시작해서 사실에 이르기까지 말할 수 있어야 하는데 지면상 모두 언급한다는 것은 무리고 간단하게 인식되어질 필요성으로서의 기본적인 교회의 통일성을 기술하고자 합니다.

교회 분리주의자에 대한 인식에 대하여서

교회사적인 측면에서 도나투스 논쟁에 대한 것으로 회개와 그것의 상대적 완전성의 외부적 개념의 확실성에 대한 인식등이 오늘날에 있어서 비유적으로 이루어지고 판단하고 있음을 볼 수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아직 삼위하나님에 대한 인식의 결여에 따른 것으로 판단되어지는 것입니다

물론 오늘날에 있어서 그때의 신학적 사조의 범주를 벗어나지 못하는 불가지론적 개념의 부정의 신학에 있어서는 동일하게 회개의 사실확인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기 때문에 서로 인위적 분파가 있게 되어지는 것은 볼 수 있고 또한 그러한 자들을 분리주의자라는 임의적 판단을 하는 것에 봉착한다는 것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가톨릭과 기독교가 어떻게 다른가

가톨릭에서는 신론적 입장에서 유출적개념을 따르고 있기 때문에 존재라는 개념들 어떤 실체라는 개념의 연속성을 생각하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역사적 사실을 말하기 때문에 기독교의 정체성도 임의적으로 가톨릭에 있다고 말하는 당위성을 기만적으로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고 그러한 것이 그들의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며 그 전초적인 개념으로 교황을 중심으로 한 전체 지역적 통일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에 다르게 다르다는 개념뿐만 아니라 실제적으로 옳게 ..

기독교에서는 하나님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임을 믿는 자들은 그 믿음의 분량적 개념이 차이가 있다고 하여도 동일한 기독교임을 믿고 그 연합적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교파가 있고 형태적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주의 말씀하심의 사실 분별에서 믿음의 분량차이로 서로 선히 여기게 되는 것입니다.

물론 교파의 모습이 현실적으로 구분되어 있으나 주의 말씀하심이 진정한 사실이며 성경의 사실을 진정으로믿으며 예수님이 중보자이심 구주이심을 믿는 자들 오직 예수님만이 구원이라는 사실을 진실로 믿는 자들은 그 교파적 모습의 차이과 분리의 모습이 있다고 하여도 믿음의 분량으로 인정하게 되며 또한 하나님앞에서 실재적인 실제의 통일성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 통일성에 대한 비교적 개념과 작금의 논의를 생각하며

동산마술사님의 화해론이라는 것은 천주교의 외형적 고백이 진실하지 못함에 대한 사실을 말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외형적 개념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동일하게 기독교로 인정하자는 것은 그 통일성의 기준적 개념이 불분명하다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진정으로 믿는 것이 아니며 '하나님을 말하면서도 필로(Philo)의 플라토닉 신관을 따르는 가운데서 물론 아리스토텔레스의 신학을 말하지만 그 신론에 있어서는 혼동 내지 동일하게 사용하고 있음을 지적할 수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사실들이 철학적 신론을 따르고 있지 성경에서 말씀하시는 자존의 하나님의 절대 정당함을 따르는 그러한 신론을 따르지 않고 있다는 것입니다.

동산마술사님은 사람들 불교도 기독교도 화해하고 이러한 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적 입장에서의 화해의 사실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국가 통일을 말하는 사회복음적 개념의 현대사상까지 지적할 수 있는데 이러한 가운데서는 화평과 화해의 사실의 실존을 말할 수 없습니다. 말할 수 있다고 하여도 그것이 진정한 화해의 사실을 말할 수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동산마술사님이 예수님의 중보자이심에 대한 것을 바르게 인식하지 못하고 급기야 부인하는 가운데서의 신론적 입장이니 어떻게 그의 상대적인 포괄성이 정당함을 말할 수 있겠습니까..

참으로 동산마술사님의 말씀하시는 화해와 화평과 그입장에서의 분리라는 개념은 로마 가톨릭의 신학적노선과 달리하지 않습니다. 주의 말씀하심에 대하여서 눈을 감고 불교와도 연합을 말하고 있고 사회적인 개념이라고 하지만 그러한 개념에서 무슨 회개가 나옵니까.. 회개가 그럼 이단들과 거짓종교들과의 화평으로 말할 수 있다고 생각함은 지극히 기만적인 것입니다.



결론적으로

자신의 말에 대한 정당함을 자체적으로 말하지 못하고 '니만 옳다고 말하지 말라'라는 식의 입장에서 반론밖에 못하는 가운데서 화해를 말하고 누이좋고 매부좋은 타협을 화평으로 말하고 있고 하나님은 온대간대없이 이방종교와의 화해적 개념을 말하고 있다면 그것은 거짓입니다.

그리고 그것은 가톨릭의 에큐메니칼의 기본적인 입장에 지나지 않으며 하나님을 믿지 않는 자들의 세상의 불의한 청지기로서 인기성의 지역적 통합을 말하는 것입니다.

교회의 통일성은 지역적 통일성과 단일성을 말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에 메이지 않고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를 받을 수 있는 자들이라면 지역적 통일성이 비로소 판단 기준으로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즉 교파가 있을 수 있고 자신들의 서로의 믿음의 분량이 있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개인적인 믿음 안에서 판단이 있을 수 있으나 최종적인 판단은 주의 말씀하심과 하나님 안에 있음에 인정하게 되며 오래 참는 가운데서의 모습을 유지하고 그러한 하나님을 두려워하며 주의 말씀을 진실로 믿는다는 것의 통일성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하심 성경으로 돌아가며 주의 말씀하심의 재가 안에서 거짓 쓴뿌리가 나지 않도록 하고 하나님의 재가를 받지 못하는 자들은 교회의 통일성에 속한 자들이 아님에 대한 것을 분명히 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하나님 앞에서 분별의 은사로서 믿음의 선한 싸움을 행하는 자들에게 하나님나라를 위한 노력함의 방향성을 열어 놓으심에 기인하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주의 말씀 안에서 교회의 통일성을 말해야지 외형적 경건의 모양은 있으나 그 능력을 부인하는 자들로서의 지역적 통일성 단체적 통일성을 말하고 있는 상식은 판단받아야 하며 그것이 하나님을의지하지 않는 자들에게는 호소력이 있으며 가톨릭의 능력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와 같은 것은 주의 말씀하심 안에서 재가가 없는 것이기에 그 기만의 사실은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각주1) 버트란트 러셀은 그의 서양철학사에서 혼동하여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고 후스토곤잘레스의 사상사에서는 동일하게 사용하는 것과 그 기원적 입장을 밝히고 있습니다.





토론글

글쓴이 교회에서의 분파 분리라는 개념에 앞서는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글입니다. 물론 여기서 더 깊이 논의할 수 있는 것은 그 가톨릭의 신관과 기독교의 신관이라고 함이 종교개혁에서 어떻게 인식되었는가 하는 것과 현대신학에서는 그것에 대하여 어떻게 인식하였는가는 앞서 논해야 할 것입니다. 2005/06/30

글쓴이 먼저 언급해야 하지만 임시적으로 교회의 통일성에 대한 논의는 그것을 행할 수 있는 가톨릭계 사람이라면 한번 해볼 용의가 있습니다만 임의적 감정적인 논의를 하시는 분위기에서는 무리라는 생각이 듭니다. 물론 저도 포함되는 말이지만 기술적 의미에서 말하는 것입니다. 저의 부적절함은 그 때 판단해주시기 바랍니다. 2005/06/30

이한이 솔직히.. 교회의 분파가 무슨 의미가 있는지.. 자기들이 정통이라고 하면서 성경을 다르게 해석하고.. 하나님 예수님이 비유로 말씀하신 것을 그대로 받아들이고.. 그릇은 사람의 마음을 뜻하고.. 등대는 하나님 보좌앞의 일곱영을 뜻하는뎅..쩝..이 밖에 너무나 많은 것들을 문자 그대로 해석하더라구요..ㅠㅠ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구별(거룩)되게 사는 삶이 얼마나 어려운지요...이 세상에 평화가 있다고,화평이 있다고,화해가 있다고 부르짖는 것을 저는 믿지를 않습니다...있다면 예수안에서,하나님 안에서 있는 것이죠...그런데 세상은 그러한 것이 가능 하다고 오늘도 참소하고 있습니다..오늘날 카톨릭과 불교가 화해하고 손잡는것이 2005/07/01

정야베스 하나님 앞에서는 얼마나 가증스런 일인지 저들은 모릅니다..그야말로 저들은 우주적인 역사라고, 그야말로 하나님도 초월한, 종교를 초월한 아주 위대한 역사라고 안위 할것입니다...지금도 저들은 우리 개신교가 우물속에 빠져,더 넓은 세상으로 나오지 못한다고 얼마나 비웃는지요..저들은 참으로 성서안에 있는 2005/07/01

정야베스 그 글들이,그 사건들이,그 역사들이 하나님의 <말씀>임을 감지하지 못하고 그저 남들과 화해하고 화평하는 것이 하나님의 사랑으로 착각하고 있으니 ,우리가 보아도 안타까운데 하나님은 얼마나 답답 하겠습니까?..지금은 유혹과 미혹이 난무하는 시대입니다...이명신님의 글이 그야말로 <말씀>되게 2005/07/01

정야베스 하여 주실것을 믿습니다...스데반의 기도처럼 저들은 저들의 하는일을 알지못하오니 주님! 용서하여 주시옵소서! 하고 기도할수 밖에 없습니다..하나님께로 난자는 주님의 음성을 들을수 밖에 없음을 고백 합니다... 2005/07/01

니노 이명신님의 생각에 공감하며 동의하지만 개인적으로 아쉬운 감이 있다면 보다 이해를 용이하게 설명해 주시려는 노력보다 문체나 사용하시는 어휘가 지나치게 학문적이라는 것입니다. 복음은 우리 안에서 자라는 생명이며 그깊이를 말로 다 할 수 없겠으나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가 우선은 상대를 위한 바가 되어야 한다면 2005/07/01

니노 상대의 마음에 다가갈 수 있도록 배려하는 부분도 필요하지 않을런지요? 사실 정독을 하여도 문장의 독해가 그다지 용이하지 않습니다. 저는 님의 논지를 어느정도 아는 입장이기에 전하시고자 하는 바의 늬앙스로 일부만을 읽었습니다만 님의 생각과 다른 분들에게는 어려운 일이 될 듯 여겨지기에.. 복음이 어려운 것으로 2005/07/01

니노 오해되어진다면 사실 그다지 바람직하지는 않을 듯 여겨집니다. 더구나 님의 글의 주 대상이 신학자들이 아닌 복음을 잘 못 알고 있는 가톨릭 옹호자분들임을 고려한다면 말입니다. 물론 저도 노력하려는 바이기도 하지만 오랜동안 전형적인 신학적 사고와 글을 통해 이미 익숙해지신 것 같기에 쉽게 설명하는 것이 더 2005/07/01

니노 어려울 수도 있슴을 알지만 님의 소중한 생각들을 보다 많은 분들이 읽고 마음에 느낄 수 있기를 바라기 때문에 제 개인적인 생각을 말씀드리는 것입니다. 제가 괜한 소리를 한 것이라면 너그럽게 이해해 주십시오. 복음의 사역에 더욱 귀하게 쓰임받으실 것을 믿습니다. 2005/07/01

에벤에셀1 지성방에서 느끼는 것이지만 참으로 다양하신 분들이 많더군요..그건 많은 지식을 쌓았음에도 덕이 되지 못한 분도 계시고 또한 말씀이 풍부함속에 예수를 바로 알고 계시는 분도 많으시더군요 비록 말씀이 부족할찌라도 2005/07/01

에벤에셀1 그 뜻을 파악하며 주님의 뜻을 바라보는 분들도 많으시구요. 어찌 되었든 이명신님,정야베스님,니노님 뜻이 저에게는 합당하게 다가오기 때문입니다..진지한 말씀들 참으로 가슴깊게 다가옵니다..많이 배우고 있습니다..감사합니다..늘 수고 하시는 님들위에 주님의 크신 은총이 함께 하시길... 2005/07/01

정야베스 사실 저도 이명신님의 글의 뜻을 이해하기란 쉽지를 않더군요...보통 성도라기 보다는 신학생 아니면 사역자가 아닌가 싶습니다..신학과 신앙은 하나인데 우리는 어느 한편에 서려는 경향이 있습니다...개인적으로 생각 하기를 조금은 어렵더라도 그의 글을 자꾸만 이해하려는 노력이 필요하지 않나 싶구요.. 2005/07/01

정야베스 어쩌면 그것이 그분의 독특함 내지는 정체성이 아닐까 합니다..니노님의 남을 배려하려는 마음이 더욱 좋았습니다..저도 이번 가을학기에 공부좀 하려고 등록을 생각하고 있습니다..기존의 신앙관을 몽땅 버리지 않으면 새롭게 신학을 받아 들이기가 어렵다고 하더이다..그만큼 고정된 관념을 버리기가 어렵다는 얘기겠죠.. 2005/0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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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요일, 7월 15, 2005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회심(?)과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의 책들은 전집으로 도서에 필수적으로 진열되어있고 사람들이 많이 읽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의 긍정을 위한 부정의 입장을 대변하는 책도 서점에 새로나온 책으로서 비치되어있고 그런 가운데서 니체의 중심이해라는 것이 너무 결여되어 있는 것같다는 생각에 몇자 적어보고자 합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니체가 기독교로 회심하였다는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기독교인이었는데 신을 부정하게 되어지는 계기에 대하여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과 그것은 오늘날 현대신학이라고 함이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으로 나타남에 대하여서도 한번 재고할 필요가 있다는 점에서 이 글을 씁니다.

니체는 '그의 알지 못하는 영적 소리'를 들었던 것을 그의 일기에 적고 있음을 잔프란스키가 그의 생애에서 말하고 있습니다.(각주1) 이러한 것에 대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것은 다음과 같습니다.

니체에게 언급하는 어떤 귀신과 같은 존재의 언급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존재하지 않는 시간에 얽매인 바보들아..'

마치 시간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을 인식하게 하는 악령의(?)소리로 보아야 함이 객관적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부분(각주2)이며 이러한 주관적 시간관에 대하여서는 철학계에서도 니체의 입장을 고전적으로 받아들이고 있는 것입니다.(서울대 인문학장인 소광희씨의 철학적 시간의 성찰(문예출판사)에서 주관적 시간관에 있어서 니체의 정오사상을 말하고 있음을 주목할 수 있습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러한 것이 현대의 철학과 신학에서 시간을 하나님의 속성의 하나인 영원과 그것으로부터의 파생을 말하게 되는 것인가 하는 것에 회의적인 것입니다.(호남대 신학교수인 정기철씨는 '시간과 종말론' 한들출판사,에서 그러한 가운데서 시간론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니체의 영향력의 그늘을 분별없는 가운데서 추종하고 있기 때문에 사실은 니체가 신은 죽었다는 개념에 대하여서 답변을 못하게 되어 있습니다. 동일한 시간관이라는 개념은 시간과 인식에 있어서의 상대적 구별점을 말할 수 있는 실재 자체를 인정하지 않는 디오니소스적인 개념으로 일관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현대주의 신학자들의 부정의 신학에서는 이러한 디오니소스적인 실재관에서 니체가 그 자체마저도 인정하지 않는 규정적인 것을 혐오하였던 것도 말하게 되어지는데 그러한 규정적인 실재규정이 사실을 말하지 못하며 그 사실을 말하려는 것을 가둔다는 측면에서 자유함을 말하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의 안티적 개념에서 비롯되어지는 현대신학의 인식의 기본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시간인식의 주관성이라고 하는 것에서 그 역사를 말한다면 주관적 역사를 말하며 어차피 주관적 역사관을 말하는 가운데 예수님을 말한다면 그는 갇혀진 자로서 인식되어지고 있고 그것을 말한다는 것은 또한 시간에 따른 메시아 인식의 변화라는 개념을 가지고 예수님께서 어제나 오늘이나 영원토록 동일하심을 부인하는 자리에 서게 되는 것입니다.

그럼 이러한 열려진 주관적 시간관에 대한 성찰은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주님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긍정적으로 구별되어 사용되어질 수 있습니다. 즉 그렇게 행함이라고 하는 것이 어떻게 주님을 부인할 수 있는 것처럼 기만하게 되는게 하는 것에 대한 재고적 인식활동은 보다 넓은 연구의 합목적성의 당위성을 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그러한 합목적성에 대한 시비를 분별하지 못하고 합리성의 미학적 개념에 이끌리어서 그러한 것에서 주의 복음의 사실이 있는 것과 같이 기만적으로 나간다면 그것은 하나님 앞에서 정당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날 것입니다.

합리성이라는 개념의 개체를 모두 경험함 보다는 그 보편으로서의 합리성의 정체성과 범주가 정당한 것인가 시비를 가리는 것이 기본적으로 보편적인 인식에서도 인정해야 할 것으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것에 대한 분별력을 잃었습니다. 이것은 종교개혁이라고 함의 사실을 알지 못하는 가운데서 도덕적 개념으로만 생각하는 비평학의 노선에 의미와 실재를 임의적으로 두게되는 것의 잘못된 모습이 되어진다고 하겠습니다.

니체의 회심에 대하여서 생각하게 되어지는 것과 같이 그의 자유를 위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것에서 사실을 두려워하며 사실규정의 말하지 못함에 따른 하나님의 증거의 사실을 부끄러워하는 신학적 자리매김에 합리적 정당함이 있는 것과 같이 말하는 현대신학의 인식은 그 맥락을 같이 한다는 것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비극의 탄생>에 대하여..

니체가 비극의 탄생이라고 함을 쓰게 되는 것은 그가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자유라고 하는 것이 규정적인 것으로 나타날 수 없다는 것을 위한 자기 변명에서 이루어진 것으로 말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신학이라고 하는 것이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으로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에서 그 능력을 상실했음을 직감한 가운데 니체는 '언어라는 것은 존재를 맴돌기만 하는 것이다'라는 것으로서 자신의 삶의 중심을 울리게 되는 음악과 예술의 보편성이 더욱 매력적으로 생각하게 되었던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바그너의 <반지>와 같은 음악이 그러한 영향력을 가지게 하였던 것입니다.

철학과 음악의 보편성의 합리적 변증적 개념에서 보편을 니체는 찾았던 것입니다. 이러한 점에서 아주 넓은 보편을 찾은 것은 사실이나 그것이 하나님의 절대보편을 판단하기에는 적절하지 못하였던 것입니다. 이것은 그의 합리성전체가 절대의 재가가 있는 상대적이면서도 절대적인 성도의 가르침을 판단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니체가 구분한 보편이해라고 하는 것은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 개념과 아폴론의 규정적인 입장이라고 하는 것의 재조합으로 나타나고 있는데, 자신의 삶을 위해서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것은 자신의 삶의 상승을 위한 것으로 부적절하다는 점으로 디오니소스적인 부정적인개념과 헤라클레이토스와 같은 전쟁적 개념에서의 투쟁적 개념에서의 삶의 확인을 말하게 되는 자리에 서게되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규정적인 것을 부정하는 가운데서의 신화창조라는 개념이 우상적 개념의 당위성을 말하게 되어지는 자리에 서게된 것이며 니체가 말하는 비극의 탄생은 아폴론과 같이 규정적인 언어규정이라는 개념이 비극의 탄생임을 말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는 재대로 된 판단이 되지만 하나님의 로고스 사상에 있어서는 그러한 판단이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이 니체의 관찰에서 나오는 로고스 사상의 존재의 주변에 머문다는 판단을 받지 않으시는 것입니다.

물론 로고스 사상의 스콜라철학의 연속성으로서 종교개혁을 말하고 있는 현대신학에서는 이러한 니체의 입장에서 신비주의자들과 또한 철학자들과 연합할 수 밖에 없으며 또한 사회복음의 입장으로 나갈 수 밖에 없으며 투쟁의 신학으로 일관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가르침이라고 하는 것을 부끄러워하는 가운데서 상황적 사람들의 동의적 개념에서의 정체성을 찾는 것으로 일관하고자 하는 옳지 못한 모습이 되어지는 것입니다.


결론에 즈음해서

이글을 씀에 있어서는 현대신학이 하나님을 가둔다는 개념에서의 출발이라고 하는 것의 인식과 그것에 대한 니체의 인식의 동일성과 상관성에서 구별을 인위적으로 말할 때에 그것은 여전히 그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해두는 것입니다.

니체가 옳았던 것은 스콜라철학과 신학에서의 로고스 사상은 비극의 탄생이라는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스콜라철학의 로고스론이 아닌 하나님의 말씀은 자존의 절대 정당함에 따른 자기 계시로서 그러한 니체의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 니체의 분별력이 상실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니체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인식의 왜곡을 위한 시작점이었는가 하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중요하고 그러한 것을 그리스도 안에서 부정의 신학이라고 함을 분별하여서 재고할 수 있는 자리에 서는 것도 중요하다고 함을 말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비극의 탄생이라고 하는 것은 있을 수 있지만 그러나 주의 말씀이 존재를 창조하셨고 주장하신다는 점에서는 니체의 분별력의 실제가 부정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난다는 것과 그로 인한 그의 인위적인 보편인식으로 하나님을 부정하는 것은 그 사실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주의 말씀은 살았고 운동력이 있음을 기억할 때에 그 비극의탄생의 판단을 받지 않게 될 것입니다.





(각주1)니체(Nietzsche)의 생애 (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 56p

(각주2)잔프란스키가 인용하고 있는 니체의 일기라고 보여지는 것에서의 인용이 얼마나 신빙성이 있는가 그것을 비유적으로 말하고 있는 것인가 아니면 실제적인 개념의 현상적 사실로 말할 수 있는가 하는 것의 논란이 제기되어질 수 있음을 인정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하나님 앞에서는 현상적 사실이 아니라고 하더라도 그러한 생각이라고 하는 것이 주의 피조물로서의 시간이라는 개념을 부인하는 것으로써 잘못된 길을 열고 있다는 점에 대하여서는 동일한 판단이 사실로 나타날 수 있음을 기반으로 말씀드린 것입니다.






꼬리말

카란의 별 저도 니체에 대해서 그리 잘 아는 것은 아니지만,, 니체는 신을 잃어버린 세계가 도대체 무엇을 의미하는가에 대해서 조금은 안 사람이지요. 신이 없는 신학, 신이 없는 인간론, 신이 없는 윤리론을 정립할려고 했던 불쌍한 영혼이 아닐지... 2005/06/21

글쓴이 니체를 언급하게 되는 것은 그의 회심이라고 하는 것이 현대철학과 신학의 인식의 기초로서의 시간과 공간에서의 이해의 정초를 놓았던 것이며 이러한 주관적 해석으로 주님을 판단하며 가두는 듯한 모습이 현대신학의 주류를 이루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아래의 현대신학적 의미에서 예수님이 시간의 판단을 받는 가운데서 되어진 하나님이라는 식으로 말하며 시간에 가두어진 시간적 인식과 그에 따른 규정이라는 것에 매이는 듯한 중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이런 것이 시간의 주관성을 말한 니체의 입장에서의 현대신학적 인식임을 말했던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더욱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이 악의 영적인 개념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분별이 요구되어지는데 현대철학과 신학에서는 임의적으로 받아들이게 되고 그것은 하나님을 시간의 판단에서 가두어지는 것과 같은 입장을 취하고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예수님의 메시아인식에 대한 발전적 개념으로 이해하며 나타나는 것입니다. 거기에 불가지론자들의 입장으로 개연적 당위성에서 그러한 노력들의 당위성을 생각하는 경우가 있는 것으로 보여집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에서는 로고스 즉 언어라는 개념은 존재에 감동이나 직접적인 영향력을 주지 못한다는 것입니다. 존재의 주변을 맴돈다는 것입니다. 그렇기 때문에 규정하는 그러한 사실들을 말하는 아폴론식의 언어의 출현은 비극이라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규정되어지는 사실들자체가 삶의 상승이라는 것을 방해하는 것으로 인식되어지고 하나님의 절대의 속성도 헤겔의 잘못된 절대관이라는 개념으로 부인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신의 부정을 말함과 그것으로 인한 초월적 자신의 삶의 상승을 말하는 것으로 봅니다. 2005/06/23

글쓴이 비극의 탄생이라는 말은 무엇인가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사람들의 중심과 삶을 얽어매는 것으로 이해하는 것으로 나타나는 것이며 하나님의 말씀도 결국은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언어의 정체성밖에 없다는 것을 말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아폴론을 비롯한 스토아학파의 로고스사상의 유물론적 개념과 신플라톤적 개념에서의 유출적 개념을 말하는 스콜라신학에서는 니체의 판단이 옳을 수도 있다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그러나 종교개혁때에 하나님의 실재론에 대한 분명한 사실을 말함으로서의 기독교의 본성의 실제의 모습을 드러냄에 있어서는 그 말씀의 능력이라고 함이 자증적 권세를 가진다는 점에서 임의적으로 비극의 탄생이라는 니체의 말의 판단을 받지 않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즉 성경말씀은 살아있어서 그 골수를 쪼갠다고 하시는 말씀(히 4:12)은 니체가 판단한 존재의 주변을 맴도는 것으로서의 실재가 부정되어지는 그런 로고스가 아니라는 것입니다. 이것은 성경말씀의 자증적 성격이라고 함이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정당함을 얻는 가운데 주어지는 권세이기 때문입니다 2005/06/23

글쓴이 니체의 회심(?)이라는 것과 <비극의 탄생>은 그 인식에서 현대철학과 신학에서 신앙의 실제를 부인할 수 있는 것과 같이 오해되어지는 것으로 나타나며 하나님을 가두는 것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의 인식적 근거가 되는 것입니다. 2005/06/23

글쓴이 이러한 것들은 하나님의 복음의 사실을 말하지 못하도록함의 자의적 합리성으로 부인되어야 할 인식들인 것입니다. 2005/06/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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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요일, 7월 14, 2005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와 함께한 분들에게..

니체(Nietzsche)에 관한 책(Nietzsche,Biographie seines Denken by Rudiger safranski)(문예출판 오윤희씨 역)을 읽었습니다. 별로 신경이 가지 않아서, 신은 죽었다는 그러한 말을 남긴 것에 대하여서 별로 신통치 않다는 생각을 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읽어보니 참신하다는 생각을 하게 됩니다.

물론 보편에 대한 생각을 임의적으로 생각해서 자기만의 언어를 만들고 그 안에 독자들을 가두는 정도의 똑똑함을 보았습니다.

중세에 있어서 유명론의 충격이라고 하는 것이 중세 기독교 특히 구교의 큰 충격으로 나타나고 있고 그러한 것은 후스토L 곤잘레스는 그러한 것을 기독교사상사 II에서 표현하고 있는데, 오늘날에도 마찬가지로 나타난다고 하겠습니다.

곤잘레스의 견해를 따르면 유명론이라고 하는 것이 보편에 대한 인식이 있고 그러면서도 보편의 실재를 말하지 못하는 것이라고 동일저서에서 말하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기독교 사상사에서 필로의 경우를 따라서 플라토닉 삼위일체라는 개념의 철학적 신에 대한 언급을 하게 되어지는 기독교의 입장에서는 답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을 말씀드릴 수 있겠습니다.

오늘날에 있어서도 안티적 개념에서는 이런 플라토닉 삼위일체로서의 해석되어지는 '갑바도키아 교부들의 삼위일체에 대한 합리성'을 상대화시켜서 합리성을 전개하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유명론적인 입장을 따르는 가운데서 플라토닉적 개념을 말한다고 할 때에 이 니체의 경우도 그 한 예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니체도 스스로 행한다는 개념을 기독교의 스스로 행함이라고 하는 성육신의 메세지와 관련이 있다고 주장한다는 입장을 표현하고 있던데.. 이러한 것은 임의적인 것과 자존의 스스로의 개념을 혼동하고 있고 그것에 대한 실제적인 비판의 사실을 말할 수 있느냐는 개념과 그렇지 못한 가운데서의 기독교 비판을 따르고 있습니다.

즉 그러한 사실을 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신에게 전폭적으로 의지하는 것은 니체의 내재적초월이라고 함의 보편성에서는 아주 비겁한 것이라는 임의적 합리성을 내세우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와 그 계시의 정당성을 말하는 칼빈의 입장에서는 니체의 성육신의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개념을 자신을 극대화하도록 하는 의지로서의 자유라는 개념의 스스로의 개념과 상관성이 있다는 점에서 말하려고 하는 것에 기준적 실제를 기각시키고 있는 것입니다.

한마디로 중세에서 답변하지 못하였던 유명론적인 입장에서의 비판들이라고 하는 것에서는 보나벤투라를 기반으로 한 곤잘레스의 플라토닉 삼위에서는 답변을 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기에 그는 중세의 사상의 연속성을 현대에서 전혀 부인하지 못하고 있는 것입니다. 이러한 것은 스콜라신학의 연속성을 말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것은 여전히 임의적 실재론과 삼위론에서 비롯되고 있기 때문에 니체의 유명론적인 개념에서 이어지고 있는 성육신 기독론에 대한 유비적 개념에서의 해체적인 반론에는 답변을 못하게 되어있습니다.

종교개혁이라고 함이 루터의 개념에서 비롯되어서 칼빈에게서 완성되어지고 비로소 개혁의 사실과 말하게 되어지는 사실의 실재를 하나님으로부터의 정당함에서 말하게 되어진다고 할 때에는, 니체의 반문 성육신에 비교되어지는 인간의 스스로의 모습과 하나님의 형상으로서의 스스로의 모습의 유비적 개념의 상정이라고 하는 것의 주장과 그에 따른 기독론적인 비판이 성립되어진다는 것과 그에 따른 신은 죽었다고 하는 말이 기각되어진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니체는 어려서부터 현실적인 실제라는 개념의 사실말하지 못하는 가운데서 고민하였던 것인데 그에게는 그 실재론을 찾기 위한 노력으로 자신을 양분하였고 그러한 가운데서의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이라는 소우주라는 것을 주장하면서 그 범주의 상대적 무한성이라고 하는 것으로 내적 초월을 말하며 그러한 보편성으로 모든 개체들 즉 신의 존재까지도 상대적으로 개채화시키고 분석하고 해체하는 그러한 자리에 서고 있는데 사실 이러한 것은 임의적 당위성을 제대로 분별하지 못한 것입니다.

즉 소크라테스가 말한 '네 자신을 알라'라는 말에 충실하려고 했지만 그러한 것에 대한 사실을 제대로 받지 못한 고통이 있어 그의 학문은 실험에 끝나고 말았던 것입니다.



나누어진말들

글쓴이 니체의 신이 죽었다고 하는 그러한 말들은 내적 초월이라고 하는 자기를 위한 상승의 상대적 무한이라고 함의 보편성을 의지하지만 결국 주관적 보편성이라는 한정적 무한의 입장을 따르고 있습니다. 한마디로 니체 자신의 보편성이라는 개인적 보편성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니체는 아버지를 일찍 잃은 그 충격에서 자신을 통제하기 위한 노력이 있었지만 그러한 것이 그의 올무가 되었던 안타까운 사람입니다. 2005/05/23

글쓴이 모든 니체의 언어라고 하는 것은 상대적 무한 특히 자기를 알기 위한 자기를 타자화 하여서 들여다 보게 되는 가운데서 자기를 상승시키는 의지 그것의 자유라고 하는 그러한 언어는 상대적 보편에서 형성되어지는 독특성이 있습니다. 2005/05/23

글쓴이 이러한 것은 그의 모든 합리성의 전체성은 이미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으로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당위성을 그는 가지지 못했던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리고 그러한 자신만의 주관적 보편성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상대적 보편이라는 것의 한 개체적 보편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러한 상대적 보편은 그 개체로서의 보편은 절대를 판단할 수 있는 정당함을 스스로 취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절대적으로 말하지 못하는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그것이 그의 사상의 부인되어짐의 실재와 실제가 되어지는 것입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사상가의 지위는 그가 끼친 영향력으로 알 수 있습니다.저도 니체는 너무 암울해서 가까이하지 않습니다.그러나 철학수업에서 그의 인기는 압도적이었고 저도 그를 간략하게 조사해서 발표했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지금도 저는 니체를 잘모릅니다.그의 사상은 정신병력과 관계가 있는 것 만큼은 분명하고 병명은 뇌매독 일것입니다.치명적인 결함은 아니더라도 떳떳한 결과는 아니죠. 2005/05/23

코코시카 지난번 미가서 문제의 핵심은 주어의 해석입니다.님의 글을 자세하게 독해하지 못해서 미안하지만 결국 '7절은 8절을 위한 예비적 서술에 불과하며 이스라엘 전통에 인신제사는 없다'가 아니겠습니까? 2005/05/23

코코시카 님은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서 장문의 글을 인용했습니다.잘 생각해 보면 미가가 결론을 말하기 위한 포석으로서 인신제사를 언급했더라도 문제있습니다.많은 고상한 비유와 실례를 들 수 있었을턴데 가장 비인륜적인 경우를 열거했습니다. 2005/05/23

코코시카 신실한 선지자가 최악을 상상했다고 보기 어렵습니다.그래서 어떤 목사님은 제3의 해석을 지향하더군요.님에게 묻고 싶습니다.이스라엘에 인신제사는 본래부터 없었다고 생각하십니까? 만약 그렇게 대답한다면 님도 저의 글을 제대로 읽지 않은 것입니다. 2005/05/23

글쓴이 한 사람의 인식이라고 하는 것은 그가 그 합리성의 사실을 규정하는 실제로서의 기준의 실재입니다.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다면 그의 합리성의 충돌을 이해할 수 없다고 봅니다. 2005/05/26

글쓴이 하나님에 대하여서 별루 마음에 두고 싶지 않은 사람은 신은 죽었다고 말하는 그에 말에 전적으로 동의하고 싶은 의지적 발상이 니체의 창조적 입장과 동일시하고 싶을 것입니다. 저는 별로인데... 그들을 이해한다면 이해할 수도 있습니다. 옳은 것이 아니면서도 그들의 고뇌를.. 2005/05/26

글쓴이 전 니체가 상당히 똑똑하였다는 것과 그 당시에서는 그에게 답변할 독일 신학의 부재라고 함을 말할 수 있고 그와 같은 그의 고뇌와 그의 어머니 프란치스카의 걱정을 들어주고 싶은 것이 저의 행보의 한 방향이 되어지기를 기도하고 있습니다. 2005/05/26

글쓴이 물론 독일 신학의 실재에 대한 부재와 관념론의 사실규명이 유명론적인 입장에서 기독교를 비판할 수 있는 사실을 자의적으로 말하지만 결국 니체의 고민과 같이 믿는다는 것의 정당성 시비를 분별하지 못한 불운에서 비록됩니다. 제가 읽은 위 본문에서 소개한 책 63p에서 확인할 수 있습니다. 2005/05/26

목요일, 4월 28, 2005

신명(神名)에 대하여 - 자존의 하나님 야훼 하나님에 대한 성경해석



하나님의 이름(神名)에 대한 해석과 이해에 대하여

상당히 중요한 것을 어떤 분님이 언급하셔서 한번더 언급하고 넘어가야 할 것으로 본다. 그것은 말씀중에 '흠...그러니깐 가장 중요한 것은 창조주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사실을 믿느냐 믿지 아니하느냐의 문제이지요. 그 분이 존재하심이 확실,100%확실하다면 게임은 끝나는 것입니다.'라고 말씀하신 것을 기억한다. 그런데 이러한 언급함에 있어서 그 미묘한 차이라고 함을 나눔이 필요할 것같다는 중심에서 재고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느냐는 질문에 대하여서 그냥 믿는다는 개념에서 일관하며 합리성 자체가 전혀 없는 것으로 생각하는 것은 견해를 달리할 필요가 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핑계치 못할 복음이라고 하심을 기억할 때에 합리성으로 합당하게 말할 수 있음의 당위성을 말씀하심으로 받게 되는 때문이다.

성경에서는 초자연적인 하나님이 자기계시와 그에 따른 합리적 사상적 입장이 절묘하게 합당하게 나타나는 구성을 나타내고 있다. 즉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계시와 이성적 판단의 선별되어진 좀더 정확히 특별영감되어진 이성적 산물로써 나타나고 있다.

그래서 그 합리성에서도 핑계할 수 없는 합당한 합리성이 있음과 그것의 합당함과 선함도 같이 기억하는 것이 옳은 것이다. 물론 단순한 중세적 개념에서의 병행적 개념으로 언급되어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여호와 또는 야웨하나님의 실재론적 기반에서 하나님 자신의 계시의 정당함을 읽어내고 있는 학자는 게할더스보스(Geerhardus Vos) 이다.(각주1) 그는 성경신학에서 출 3:14절을 읽는 방법의 여러가지가 있음을 말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그는 그러한 가운데서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그 히브리어 문구는 히브리어 '독도'법에 따라서 달리 해석할 수 있음을 시시하며 여러 해석방법이 있는 가운데 자존의 하나님에 대한 해석적 입장을 따르고 있다.

여기서 하나 더 생각하게 된 것은 여러가지 해석이라고 함 즉 독도법에 따른 해석이 있다고 하여도 그중에서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이라는 해석은 다른 해석과 다른 점이 있다는 것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그것은 만약 스스로 존재하시는 하나님을 해석하는 방법은 그 해석에 대한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다는 것이다. 다른 해석들은 상대적 해석으로 동의적 차원을 말할 수 있는 경우라고 한다면 말이다(각주2).

이것이 과연 성경해석에서 마땅하게 취할 해석적 당위성을 의식하며 합당하게 선택한다고 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것이 자체적 해석과 용납의 당위성을 자체적으로 가진다는 점에서 상대적인 여지라는 개념의 불확실성을 넘어 용납의 사실을 말할 수 있다는 것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즉 상식적으로도 어느것이 옳은 해석인가 하는 것에 대한 당위성을 생각할 때에는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이, 해석적 당위성을 스스로 취하고 있는 점에서, 그 해석을 취함에 있어서 당연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누가 언급한 것과 같이 출 3:14절에 나타나는 신명(神名)은 해석하기 나름이기 때문에 그 하나님의 이름의 실재론적 기반을 말하는 것은 개연적인 사실을 말할뿐이라는 식의 언급은 기각되어진 것임을 말할 수 있는 것이다.

바로 신명에 대한 이해를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비평학의 기본이며 또한 현대신학에서의 불가지론을 넘지 못하는 원인이 되었던 것으로 볼 수 있음을 기억할 때에, 진정으로 정신을 차린 상식이 있는 사람이라면 신명의 해석에서 하나님의 자존적 자기계시의 정당한 사실을 실제적으로 받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핑계치 못한다는 주의 말씀하심의 증거적인 것임을 밝히 말하고자 한다.

야웨하나님이 정말로 존재하시느냐는 이성적으로 말할 수 없다는 것은 하나님의 이름에 대하여서 바른 해석을 하지 못하고 불가지론 속에서 개연적 당위성만 따르고 있는가운데서의 책망이 되어질 것이다.



결론적으로..

여호와 하나님, 자존의 하나님은 정말로 존재하시는 분이라는 점을, 해석과 그 취사선택에 있어서도 그차제적 정당함을 취하는 해석을 선택함에 있어서, 건전한 정신이 있는 사람은 핑계치 못한다는 것이다. 물론 이것은 하나님에 대한 증명이라고 함을 말하는 것은 아니다. 그렇게 말하는 것은 변론의 산물이 아니라 당연히 받아들임의 문제이고 그것이 너무나 합당함에 대한 변론일뿐이기 때문이다. 성부 하나님이신 자존의 하나님 야웨하나님, 하나님 자신이시며 하나님의 아들이신 예수님은 합당히 영광을 받으실 믿음의 주이심을 성령께서 거룩하게 믿게 하심을 증거한다.






성경의 자증과 보편성(출 3:14 해석과 성경의 보편성이해글)

그리고 참고로 속칭 '여호와증인'들은 하나님의 이름을 말하면서도 예수님을 부인하기 때문이단이다








각주1) 게할더스보스, 성경신학, 이승구 기독교문서선교회 pp. 145~151,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356p. 게할더스 보스, '구속사와 성경해석', 이길호 원광연 크리스찬다이제스트, -제8장 이사야 초기 예언의 교리상 특징들 357p.



각주2) 기억해야 할 것은 성경해석의 당위성이 자증에 따른 것임을 기억할 때에, 앞서 말한 어떤 특정 견해가 합리적인 측면의 백과사전적 동의적 당위성을 아무리 갖춘다고 하여도, 자증에 따른 해석 이것이 그 합리성의 자체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인하여 성경적이라고 하는 것은 기정사실인 것이다.

한가지 더 언급하면, 그 '스스로 존재하신다는 해석' 그 해석의 해석적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는 실존적 그 성격으로 인해서, 다른 어떤 비판적 입장이라고 하는 합리적인 견해들도 전자의 해석과는 달리, 스스로 그 정당함을 주장할 수 없는 해석과 납득 당위성에 따라서 전자의 해석에 대한 비판적 사실로서의 증거를 말할 수 없게 되는 것이다. 즉 여기서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함의 인식이 상대적 고립적 배타성의 판단을 받지 않으면서도 메타적 성도의 인식의 정당함을 말하게 되는 것이다.



예를 들어서, 어원적 분석에서 히브리어 자음과 모음이 같이 쓰여지지 않던 시대와 맛소라 학파의 노력에 따라 '야훼'라는 성경전승에 따른 언어의 변천과 임의성을 가진 것이라고 말한다고 하여도 그것은 상대적인 납득 당위성만을 가질 뿐 진정한 비판으로서의 정당함과 그것을 납득해야 할 당위성을 그 해석 자체에서 비롯되어지는 것이 아니라는 점에서 사람들의 인식적 동의라는 개념의 당위성을 비로소 따를 뿐이라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함이 상대적일 뿐이다. 절대의 재가를 받은 상대적인 측면을 상대적인 어원분석 주관적 어원분석이라는 개념으로 판단한다면 그 성격의 특성과 그에 따른 범주에 대하여서 전혀 재고가 없는 것으로 그 비판은 성립이 되지 않는 것이다.

(한마디로 자존의 하나님께서 자기의 자존의 절대 정당함으로 나타나는 신실하심을 상대적으로도 온전히 나타내신다고 함의 정당함을 스스로 취함을 말할 수 있는데, 그 임의적으로 보이는 것을 통해서도 절대적 합당함을 부여하실 수 있음을 기억해야 함이 정당한 인식으로 받게 되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말씀 스스로 자기 계시형식으로서 선택하신 것임을 또한 인정해야 하는 것이다.)

이처럼 모든 상대적 비판이라고 하는 것이 이와 같은 판단의 범주를 넘어설 수 없는 것이다, 이것은 정당성이 합리성 그 자체에서 본래성을 말할 수 없는 것이기 때문이며, 자존의 하나님으로 해석하는 출애굽기 3:14절 해석이라는 합리성 자체도 모순이라고 지적할 수 있지만 이미 그 모순이라고 까지 할 수 있는 판단까지도 성립되어지지 않는 것으로 나타나게 된다. 정당함은 합리성 그 자체적 실존에 본래적으로 두지 않기 때문이다. 한마디로 하나님께서 비합리성을 구별하여서 합리성의 실존을 부여하셨다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성도들의 메타인식이라고 하는 합리적으로 핑계할 수 없는 것임을 분명히 해둔다.




도움말

도움말1 믿음이라고 함을 좀 제한애서 용납한다는 말로 받을 수 있다면, 용납할 수 있는 것을 증명한다는 것은 이미 성립되어지지 않는다. 다만 개연적인 것이기 때문에 증명에서 파생되는 용납당위성을 말하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신앙은 증명이라는 개념으로 정의되어지지 않는다고 본다. [14:39]

도움말2 믿음은 본질적으로 증명의 사실과의 파생적 관계는 아니지만 그러면서도 변증하게 되어지는 것은 사실에 대한 증거자체를 변증하는 것이 아니라, 아니라고 함에 대한 부질없는 것에 대한 변명의 형태를 띤 증거로서의 사실이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고 하겠다. [14:44]

도움말3 자존의 하나님으로 출애굽기 본문의 신명(神名)을 이해하는 것이 그 해석적 자체적 정당함을 가지고 있도록 하심에서 자존의 하나님을 의지한 핑계할 수 없는 복음의 사실을 말한다는 것이 이 글의 핵심이다. [15:04]

도움말4 성경에서 셈의 장막에 야벳족속이 거한다는 말씀은 이처럼 이름을 기반으로 한 실제론적 입장의 사상적 방향성을 읽을 수 있는 예언의 말씀이 아닌가 하는 생각에서 신앙과 신학방향의 한 방향을 제시하고자 한다. [14:51]

도움말5 기독교의 하나님이 자존의 하나님이심에 따른 것은,니체의 메타인식의 증식과는 달리, 성도들의 메타인식의 사실이라는 표현을 사용할수 있다. 즉 비판되어질 수 있는 것이 아닌 합당한 사실이라는 것이다 그것은 자존의 절대자가 자신의 절대 정당함을 스스로 취하여서 상대적인 것으로도 절대적으로 말씀하신다는 것은 비판의 영역의 실제적 판단을 받지 않는 가운데서의 상대적 신앙의 사실을 말함과 그것의 정당함과 절대의 보편성을 재가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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